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75화 (75/200)

75. 타이틀 홀더 (5)

어떤 매치업은 팀보다 선수 개인 간의 대결에 더 큰 이목이 쏠리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얼마 전 블루제이스와의 인터리그 시리즈에서 연타석 안타 기록을 두고 경쟁했던 나와 유진 리빙스턴의 경우가 있겠지.

팬들 입장에서야 이 또한 야구를 즐기는 방식이니까 상관없지만, 선수가 이런 매치업에 과몰입하는 것만큼이나 미련한 짓이 없다.

당장이야 주목이 쏟아질지 몰라도, 이런 구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지니까.

‘유진이 13연타석 안타 쳤을 때 저런 선수를 내보냈다고 들썩이더니, 요즘 다시 3할 밑으로 내려가니까 바로 잠잠해진 거 봐.’

[난 그때 단장님 또 바뀌는 줄 알았어.]

물론 시즌 후반쯤 돼서 MVP나 골드 글러브 등 굵직한 타이틀의 후보가 추려진 상황에서 만난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런 젯밥에 관심이 쏠려 있는 선수는 애초에 그 위치까지 올라가지도 못한다.

[미리 보는 올스타 선발 유격수 결정전, 현재 스코어 1대 1?]

아직 한 달도 넘게 남은 올스타전 선발 여부를 놓고 벌써 왈가왈부하는 게 좀 웃기긴 한데.

아무튼 전날 경기에서 내가 4타수 1안타에 실책 하나를 적립하는 동안,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1회에 이어 8회 말에도 안타를 추가해 기어이 멀티 히트 게임을 기록했고.

올스타 출장이 유력한 두 유격수의 맞대결은 3차전에서 결판이 나겠다는 게 기자의 분석이었다.

물론 이건 기자들의 관점이고.

나로서는 그냥 평소처럼 내가 할 일에 집중하면 그만이지만, 지금 내 솔직한 심정은 좀 다르다.

‘나 대신 쟤가 나가도 되니까 그냥 안 엮였으면 좋겠다.’

[너 그냥 부상 핑계 대고 올스타전 빠지는 건 어때?]

눈치도 없어서 남의 악의도 흘려넘기기 일쑤고, 어지간한 선수랑은 연락처를 교환할 정도로 발이 넓은 박도현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심각한 거지.

나쁜 놈이 아니란 건 나도 안다.

클레망처럼 팀에 대한 애정이 많으면 모를까, 아무 조건 없이 자기 수비 노하우를 알려주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는 빡통대가리에다 아드리안 못지않은 변태지만, 만약 같은 팀이었다면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젠 즐거웠어, Koo.”

“……응.”

그러나 지나가던 길에 눈이 마주친 순간 윙크를 하는 저놈을 보면 주먹이 쥐어지는 걸 참기는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 데려가는 건 쌉에바였다.]

‘그럼 어떡하냐. 시범을 보여야 한다는데 우리 구장에 데려갈 순 없잖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감격에 찬 얼굴로 핸드폰 카메라로 폭풍 연사를 날리는 걸 보니 쫓아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 후로 두 시간가량 내 수비 자세를 꼼꼼하게 봐주면서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교정한 자세가 생각보다 내 몸에 잘 맞아서 좀 놀라기도 했고.

[(사진) Koo랑 크리스토퍼 엘리엇 생각보다 사이좋은가 본데?]

└ 둘이 접점이 있었나? 아니 그보다 저놈 웃긴 놈일세? 다저스 그렇게 싫어하는 놈이 우리 Koo는 왜 만나?

└ 게다가 Koo가 투수였을 때 크리스토퍼한테 만날 때마다 털리지 않았나?

└ 그러게. 저 새끼 예전에 Koo한테 3타수 3안타 뽑아낸 다음에 입 엄청 털었던 걸로 기억하거든?

└ (링크) 여기 그때 영상 찾았다. ‘좌완 유망주 트로이카가 어쩌고 하더니, 별거 아니더라’ 이러고 있네.

내가 크리스토퍼와 단둘이 식당에 들어가는 모습이나 원정 숙소에 데려다주는 모습이 다저스 팬 포럼에 퍼지지만 않았더라도 괜찮은 하루였을 텐데.

하필이면 메인에 걸리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댓글까지 정독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만약 내가 박도현이라는 오해가 없었으면 나한텐 눈길도 안 줬을 거 아냐. 새삼 열받네.

“잘들 주무셨습니까.”

라커룸으로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건수 하나 잡았다는 표정으로 우르르 다가온다.

“Koo. 너 저놈이랑 저렇게 친했었어?”

“우린 어제 먼저 간 너를 떠올리며 쓸쓸하게 코리안 바비큐를 먹었는데!”

“너 설마 FA 되면 필라델피아로 가려고……!”

“배신자다! 배신자를 처단하라!”

잽싸게 주변을 둘러싸더니 바로 제압하려고 드는데, 어림도 없지.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사자후를 시전했다.

“나보다 타율이 높은 타자만 나한테 돌을 던져라!”

내 유니폼 자락을 틀어잡은 손들이 우뚝 멈춘다.

블루제이스와의 15연타석 안타로 치솟았던 타율 덕분에 페이스가 한풀 꺾인 지금에 와서도 4할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시즌 141타수 57안타, 타율 0.404.

팀 타선을 멱살 잡고 끌어올리는 타자에게 이딴 대우를 하면 안 되지.

“비겁하게 팩트를 가져오다니…….”

“타율 말고 홈런으로 승부하자! 홈런으로!”

“쟤 우리 팀에서 R.H.랑 홈런 공동 1등이야.”

“아 그래?”

6월 초인 지금 내가 기록한 홈런은 13개.

시즌 초반 투수들이 무모한 몸쪽 승부를 들어와 주면서 많이 쌓아둔 거긴 하지만, 어쨌든 누적 스텟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동료들의 마수에서 빠져나가려던 순간.

“그럼 투수는 상관없는 거 아닌가?”

한 발짝 옆에서 물러나 있던 벤 리히터가 한마디 툭 던지자,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네? 벤, 혹시 아이비리그 나왔어요?”

“고졸이야.”

“됐고! 야! 거기 루키 투수들! 얼른 뛰어와! Koo를 조질 수 있는 니들 인생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뭐라고요?! 그건 못 참지!”

“이 자식 딱 대! 너 이번 시즌 평균자책점 몇이야!”

“마운드에 서본 적이 없는데 평균자책점을 어떻게……! 악!야! 거긴 건들지 말랬지!”

결국 투수 놈들에게 가혹한 고초를 겪은 끝에 풀려날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 엘리엇, 네놈 때문에……!’

[니가 빡대가리라 그런 건 아니고?]

선수 대 선수의 매치업은 신경 쓸 필요 없다고는 하지만.

오늘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늘었다.

* * *

메이저리그에는 팀마다 이슈 메이커가 적어도 한 명씩은 꼭 존재한다.

다저스에서 언론과 가장 많이 마주치는 선수는 내야수 전향 첫 시즌부터 무보살 삼중살이나 사이클링 히트, 15연타석 안타 같은 대기록을 작성중인 나지만.

그에 못지않게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선수가 한 명 더 있으니, 바로 오늘 선발 등판 예정인 제리 헤이즈택이다.

시즌 11경기 등판해 9승 무패, 평균자책점 1.08.

노디시전 2경기를 제외한 연승기록과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이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리는 중이다 보니.

야수에 비해 출전 기회가 적은 투수라고는 해도, 등판하는 경기마다 기자들을 몰고 다니곤 한다.

이렇듯 이슈 메이커는 물론 사실상 팀의 에이스 취급을 받는 투수가 등판하는 날에는 만전의 라인업을 내보내는 편이고, 새로운 시도도 어지간하면 꺼리는 편이지만.

오늘 나는 등판을 앞둔 제리에게 변화를 예고해야 했다.

“수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게, 어찌 보면 투수한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잖아. 아예 아무한테도 말 안 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나만 알고 제리는 모르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클레망의 말대로였다.

야수가 말없이 글러브 등의 장비나 수비 동작에 변화를 가져갔다고 해서 그걸 탓할 수는 없지만, 그걸 원인으로 수비 불안을 노출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야수들의 컨디션에 영향을 많이 받는 로버트 같은 투수라면 아예 말도 안 꺼냈겠지만, 제리는 그런 투수는 아니니까.

“그래서, 오늘 경기부터는 그런 식으로 수비에 변화를 좀 주려고 해.”

내 설명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던 제리는, 예상외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등판일만 아니었어도 진작 한 대 패줬을 만한 특유의 재수 없는 미소와 함께.

“Koo.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건 아니지?”

“제리잖아.”

“아니!!!”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더니, 자기 유니폼을 쭉 잡아당겨 그 위에 새겨진 팀 로고를 가리킨다.

“다저스의 차기 에이스로서 현 에이스의 인정을 받은 남자, 제리 헤이즈택이다.”

“죽어 그냥.”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어. 어떻게든 팀에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 애쓰는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하니까.”

나도 모르게 진심이 나와버렸는데, 본인이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괜찮겠지.

그렇게 선발 투수의 적극적인(?) 응원 아래, 새로 장착한 수비 기술을 선보일 첫 무대가 시작되었고.

따아악!

“내가 갈게!”

하이 패스트볼의 밑둥을 때린 타구가 좌익수와 유격수 사이쯤 떨어지는 플라이볼이 되었고.

콜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잡아내면서 이닝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만들었다.

경기가 잘 풀리는 날에 늘상 그렇듯, 재수 없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제리를 보며 합리적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새끼 이 악물고 땅볼 억제하는 거 맞지?’

[그러게. 평소랑 레퍼토리가 너무 다른데…….]

3회 초를 마친 지금, 내 쪽으로 오는 땅볼 타구는 단 하나뿐.

벌써 삼진 다섯 개를 잡아내는 등, 평소와는 달리 탈삼진 위주의 피칭을 선보이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포수와 캐치볼을 하는 제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대기 타석으로 나갔지만.

“아웃!”

조지의 날카로운 타구를 유격수 자리의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아주 자연스럽게 건져내면서 3회 말 공격은 그대로 끝났다.

‘왕관의 무게’의 스킬 효과가 사라지진 않았을 테니, 그럼 정상보다 약간 모자란 컨디션으로 저런 수비를 하고 있다는 건데.

‘골드 글러브 아무나 타는 거 아니긴 하네.’

[너 내가 그거 타고 나서 자랑했을 땐 코웃음이나 치더니…….]

투수한테 홈런 배트나 자랑했던 놈이 뭘 잘했다고 입술 삐쭉 내밀고 있어. 콱 그냥.

투덜대는 박도현의 말은 묵살하면서 공수교대를 위해 그라운드로 나갔다.

‘오늘 상대 선발도 에이스라 그런가, 어째 다들 기합이 빡세게 들어갔네.’

양 팀 모두 3회가 끝난 지금까지 각각 안타 1개와 2개씩만을 허용하면서 투수전으로 진행되는 경기.

물론 이건 주심의 존이 바깥쪽으로는 약간 후한 덕분이기도 하다.

나도 첫 타석에서는 살짝 빠져나간 것 아닌가 싶은 포심에 루킹 삼진 판정을 받으며 물러났다.

“베이스 온 볼스!”

그렇다고는 해도 저렇게 대놓고 빼버리면 판정의 이점을 얻기 힘들지.

필리스의 선두 타자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유인구성 커터를 연달아 골라내면서 볼넷으로 출루하게 됐다.

[저 새끼 이쪽 쳐다보면서 웃는데?]

‘관심 안 주는 게 답이다. 조용히 경기나 해야지.’

어지간하면 상대 타자가 1루에 나가면 인사 정도는 건네는 클레망이 입을 꾹 다무는 데다, 홈팬들의 쏟아지는 야유까지.

저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여유로운 걸 보면 보통 멘탈이 아니란 건 알겠다.

‘집중, 집중.’

볼넷을 내준 다음의 제리는 배럴 타구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도 그걸 아는 데다 필리스의 4번 타자가 만만한 선수도 아니니, 장타의 위험이 있는 하이 패스트볼보다는 커터 위주의 승부구가 나올 확률이 높다.

자세를 낮추는 대신 발을 적당한 각도로 벌리면서, 어느 방향으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마쳤고.

따아악!

“2루! 2루!”

타격음과 거의 동시에 들려온, 주자가 도루를 시도했다는 콜.

그러나 이 정도 속도의 타구는 조금이라도 한눈파는 순간 놓치기 십상이다.

주자는 무시하면서, 막 바운드를 일으킨 타구가 내가 머릿속으로 설정한 위치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려 자연스럽게 건져낸 다음.

주자를 잡아내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확인한 다음, 글러브에서 재빨리 공을 꺼내 1루를 향해 던졌고.

“아웃!”

타자 주자가 아웃되면서 1사 주자 2루.

글러브를 주물럭거리면서 조금 전 수비를 복기했다.

‘템포를 의도적으로 높인 게 아닌데,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어.’

허리와 무릎을 펴면서 낮아진 무게중심을 되돌리는 과정이 생략되니, 그만큼 던져야 할 곳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유리해졌고.

결과적으로 송구 동작이 더 간결해지면서 자세를 억지로 낮출 때보다 더 안정적인 수비가 가능해졌다.

‘같은 상황이 또 나오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복기를 마치고 다음 상황에 대비해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리려던 찰나.

“Hey, Koo.”

2루 베이스 쪽에서 산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상 이상인걸? 어제 한 이야기를 이렇게 빨리 실천할 줄은 몰랐는데.”

“어, 그래.”

“아, 혹시 내가 좀 곤란한 얘기를 한 건가?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있어?”

너요, 너. 니가 문제라고요.

다저스만 보면 이를 가는 놈이 나한테 싱글벙글대니, 다른 야수들도 저 새끼 뭐 잘못 먹었나 하고 쳐다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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