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76화 (76/200)

76. 타이틀 홀더 (6)

야구에서 선취점이라는 것은 세이버메트릭스로 설명할 수 없는 효과를 발휘한다.

데이터상으로는 똑같은 1점이라도, 경기의 판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꿔버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먼저 점수를 내고도 역전당하는 경기가 많은 팀이나, 아슬아슬한 리드를 악착같이 지켜내곤 하는 팀 등등. 아예 팀마다 다른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지.

개인적으로는 선취점이라는 요소가 움직이는 가장 큰 변수는 투수의 멘탈이 아닐까 싶다.

최근 팀이나 개인 성적이 별로 안 좋거나 하는 시기에 선취점을 허용하면, 실투를 양산하면서 그날 경기를 아예 말아먹는 투수들이 종종 있으니.

데뷔 초의 제리가 그랬고. 지금 아드리안이 그렇지.

아무튼.

지난 두 경기와 마찬가지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3차전에서 선취점을 허용한 것은 다저스였다.

따아악―!

2루에서 질척대던 크리스토퍼는 다음 타자의 안타에 홈을 밟았다.

컨디션이 최상인 날 제리의 커터는 거의 언터처블이지만, 그렇지 못한 날엔 포심의 비중이 늘어나니 연속 안타도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다.

“아웃!”

“아웃!”

그러나 소위 말하는 ‘에이스 뽕’에 심취해 있는 데다 최근 극강의 성적을 내고 있는 제리는 선취점을 허용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았고.

우익수 플라이와 투수 앞 땅볼로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했다.

“괜찮아! 잘 막았다!”

“고작 한 점이야! 금방금방 쫓아가자고!”

필리스와의 지난 두 경기가 모두 역전승이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듯, 다저스 타선은 선취점을 빼앗긴다고 해서 초조해하진 않는다.

타선의 짜임새도 상당하지만, 6월 초인 지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 중인 타자가 벌써 4명.

누구든 경기를 뒤집는 한 방을 날릴 수 있다는 믿음은,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웅 스윙을 남발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우리 상대로 1점?! X도 아니지!”

“감자는 봄에 맛있고 야구는 다저스가 재밌단다! 느그 팀엔 1점대 에이스랑 4할 타자 없지?!”

“Koo!!! Koo!!! Koo!!! Koo!!!”

비록 최근 홈런 페이스가 주춤하긴 했어도, 4할의 타율과 5할의 출루율을 기록하면서 나도 그 핵심 자원으로 꼽히는 만큼.

배트를 뽑아 들고 선두 타자로 나서자마자 홈팬들의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고.

따아아악―!

나는 그 환호에 어울리는 타격을 했다.

구체적으로는, 좀처럼 승부에 들어오지 못하던 투수가 2―0의 카운트에서 소심하게 찔러 넣은 몸쪽 포심을 받아쳐 외야로 향하는 빠른 타구를 만들어냈다.

“주루! 멈춰!”

한 베이스 더 가려고 왼쪽으로 돌아 나서던 순간 들려온 1루 코치의 콜.

슬쩍 외야를 보니, 당연히 장타 코스라고 생각했던 타구를 우익수가 용케도 처리했는지 막 1루로 뿌리고 있었다.

촤아악!

“세이프!”

슬라이딩으로 1루 베이스를 터치하며 얻어낸 세이프 판정.

유니폼에 묻은 흙을 털어내면서 한숨 돌렸다.

‘역시 만만한 팀은 아니야.’

극악의 암흑기를 지나오면서 프로 스포츠 역사상 첫 10,000패 달성의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등, 약팀 이미지를 뒤집어쓰던 필리스였지만.

2020년대 후반 이후 투자에 걸맞은 성적을 내기 시작하면서 강팀 반열에 오른 걸 증명하듯, 집중력 있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근데 이렇게 1루에 묶어봤자 2루까지 뛰면 그만이잖아?’

덕아웃에 도루 의사를 전달했고. 곧바로 돌아온 OK 사인.

연타석 안타 기록이 깨졌던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 처음 단독 도루를 성공한 이후, 도루 사인을 거절당한 적은 없다.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다가, 타이밍을 완전히 읽었다 싶을 때 2루를 향해 뛰었고.

“세이프!”

때마침 구종도 떨어지는 커브라, 포수가 송구를 포기하면서 안전하게 2루를 밟았다.

무사 2루의 찬스에 열광하는 팬들과 덕아웃에 화답하는데, 누가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온다.

“수고했어.”

아 제발.

좀 전에 지가 2루 도착해서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크리스토퍼가 얼쩡거린다.

일부러 관심 안 주려고 입 다물고 투수한테만 시선을 고정했다.

어지간하면 민망해서라도 물러날 텐데. 오히려 거리를 좁히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건다.

“숨기기 힘들다는 건 이해하지만, 좀 여유롭게 해. 너무 튀는 재능은 의심을 사거든.”

너는 제발 그 똥촉이나 어떻게 좀 해봐.

어지간하면 눈치도 좀 기르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러니까 우리 팬들뿐 아니라 너네 동료들까지 힐끔힐끔 쳐다보잖아.

만약 거액의 장기계약을 맺은 선수가 아니었다면, 팀이 스윕 위기에 몰려 있는데 상대 주자한테 태평하게 말이나 거는 이런 행동은 상상도 못 했겠지.

“좀 전에 수비하는 모습도 아주 멋졌어. 내가 알려준 걸 제대로 보여주던데. 우리 같은 빅사이즈 내야수의 생명은 뭐라고 했지?”

대답 안 해주면 평생 여기 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바운드를 읽는 것.”

“Magnificent(훌륭해).”

짝!

옆에서 소리가 나길래 돌아보니, 필리스 2루수가 이마를 감싸고 있었다.

니네 팀원이니까 어떻게 해보라는 듯 눈짓했더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다저스 선수들한테야 찬바람이 쌩쌩 불어서 몰랐을 뿐, 다른 팀 선수들에게 이런 식으로 찝적대는 게 한두 번이 아닌 걸까.

따악―!

스트라이크 하나가 추가되어 1―2의 불리한 카운트에 몰려 있던 켄이 스핀을 잔뜩 먹은 땅볼을 때려냈고.

투수가 세트 포지션에 들어간 순간부터 눈빛이 싹 바뀐 크리스토퍼는, 마구 튀어 오르는 타구를 건져내더니 곧장 1루로 뿌렸다.

“아웃!”

그사이 3루로 이동하면서 드디어 크리스토퍼 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베이스를 밟고 옆을 힐끔 보니, 내야로 공을 돌리던 크리스토퍼가 이쪽을 보며 또 짜증 나는 웃음을 짓는다.

‘경험의 차이란 게 분명 있긴 해.’

지금이야 좀 나아진 편이라지만, 여전히 나는 투수가 던지는 공 하나하나마다 집중해서 지켜보기 바쁜데.

저놈은 주자한테 실실대며 말이나 걸다가도 타구만 날아오면 돌변해서 단단한 수비력을 보여주는 걸 보니.

그래도.

이기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든다.

부족한 경험을 재능으로 커버할 순 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가져온 내 솔직한 생각이다.

* * *

R.H.의 희생플라이에 홈을 밟았지만, 추가 득점 없이 4회 말 공격이 끝났다.

스코어 1대 1 동점.

게다가 5회 초 필리스의 공격은 하위 타순인 7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잠시 숨을 고르기 딱 좋은 시점.

보통 이럴 때 경험 많은 투수들은 구위로 짓누르기보다는 허를 찌르는 피칭을 통해 힘을 비축하곤 한다.

빅리그 5년 차에 접어들며 포텐을 터뜨리고 있는 제리도 당연히 비슷한 생각을 하며 승부에 임했을 거고.

“베이스 온 볼스!”

그러나 제리가 간과한 게 있다면.

커터의 구위가 기가 막히긴 해도, 오프 스피드 볼의 제구력은 그보다 한참 못 미친다는 거였고.

“힛 바이 피치!”

힘을 빼고 던지다가 갑자기 힘이 들어가면 안 그래도 흔들리던 제구가 제멋대로 날뛰곤 하는 데다.

“세이프!”

연달아 나간 주자들 때문에 마음이 급했는지, 제리가 그만 공을 떨어트리는 실책을 범하면서.

안타는 하나도 없이 무사 만루의 위기 상황이 찾아왔다.

“제리, 좀 괜찮나?”

“……예.”

아무리 실질적 에이스라고는 해도, 이런 상황에서 한 템포 끊지 않고 바로 투구에 들어가는 건 무리다.

투수 코치가 내야수를 마운드로 불러 모은 뒤 뭐라 말을 걸었지만,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단답만을 반복하는 제리.

평소라면 코치님도 할 말이 궁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너 이미 무사 만루에서 무실점으로 내려온 적 있잖아.”

그러자 제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 제리는 똑같이 무사 만루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내가 무보살 삼중살에 성공하면서 아무도 홈을 밟지 못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빛이 차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플레이 볼!”

저렇게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여도, 막상 타자를 상대하면 터무니없는 실투를 던지는 투수는 마이너에서 수도 없이 봤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똑같은 상황을 겪어본 제리이기에, 충분히 자기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점수도 그렇고, 경험도 그렇고.

0과 1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니까.

따악!

바로 직전 이닝의 첫 아웃카운트를 잡았을 때와 비슷한 코스와 속도로 날아오는 타구.

스핀이며 바운드며, 돌글러브 소리를 듣는 내야수라면 튕겨내기 딱 좋은 까다로운 타구였지만.

‘빅사이즈 내야수의 생명은 바운드 맞추기.’

크리스토퍼가 강조한 수비의 핵심은, 바운드된 타구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운드되어 올라오는 타구를 건져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타구가 글러브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주자의 상황을 체크하고, 2루에 커버를 들어간 조지를 향해 송구했다.

4회 초 수비에서 처음 의식하고 했을 때보다 더 깔끔하고, 더 빠르게.

“아웃!” “아웃!”

비록 3루 주자가 홈인하면서 다시 리드를 빼앗기긴 했지만.

무사 만루를 2사 3루로 바꿔버리는 더블 플레이에 다저 스타디움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운드를 슬쩍 보니, 제리가 또 그놈의 ‘고고한 에이스’다운 태도로 가볍게 글러브 박수를 보내고 있다.

베이스 꽉 채우고서 벌벌 떨 땐 언제고, 저놈의 컨셉충 새끼 진짜.

[야, 저 새끼 또…….]

박도현의 질린 듯한 말이 들리자마자 곧바로 필리스 덕아웃부터 살폈다.

배트를 챙겨 대기 타석으로 나가는 크리스토퍼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고개를 살짝 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마치 X나 여유로운 컨셉의 중간 보스가 주인공의 강함을 칭찬하는 것마냥.

X킹 아메리칸 제스처 같으니라고.

* * *

무사 만루 상황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내면서 제리는 언제 흔들렸냐는 듯 페이스를 되찾았지만, 이날 경기는 다저스의 패배였다.

[PHI 5 : 2 LAD]

제리는 7회 초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은 뒤, 다음 타자에게 볼넷을 주고 등판을 마쳤는데.

최근 페이스가 좋았던 루키 투수가 마운드를 이어받자마자 투런포를 허용하면서 경기가 기울고 말았다.

6과 3분의 1이닝 3실점, 퀄리티 스타트에 성공했음에도 시즌 첫 패전을 당하며 연승기록이 끊겼다.

“제리, 탄산수 마실래? 얼음 잔도 있어.”

“고마워.”

첫 패전으로 멘탈에 금이 간 건 아닌가 전전긍긍하던 코칭스태프들은, 원정기 옆자리에 앉은 내게 슬쩍 떠봐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이번 시즌 나보다 패전이 많아졌는데, 기분이 어때?”

물론 이놈한테 다정하고 배려심 있는 질문 따위 사치다.

대놓고 정곡을 찔러버리는 말에 근처 자리에서 누가 사례라도 들렀는지 컥컥댄다.

틀린 말도 아닌데 왜 그러시나. 나 이번 시즌 0패인데. 승리도 없지만.

“좀 X 같긴 한데, 나쁘지 않아.”

고고한 에이스니 뭐니, 컨셉질을 쫙 뺀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표정을 보니 안심이 좀 된다.

이번 시즌 내내 대기록이라는 무거운 짐을 두 개나 짊어진 채로 쉴 틈 없이 달려온 제리였는데.

그중 연승기록이라는 짐 하나를 덜어냈으니, 이젠 좀 가벼워진 어깨로 공을 던질 수 있겠지.

마음도 편해졌겠다, 도착할 때까지 잠이나 자려고 담요를 꺼내려던 그 순간.

“X발, 뭐야 이거?”

“올스타전 나가는 놈들, 얘 보자마자 주둥이를 꿰매 버려.”

“나는 AL 올스타 투수들 매수해놓을게. 헤드샷 좀 날리라고. 올스타전이면 징계도 안 먹을 거 아냐.”

“이거 Koo도 좀 봐야겠는데?”

왜 저러나 싶어 기웃대는데, 비행기 통로에서 태블릿 하나가 불쑥 넘어온다.

오늘 경기 4타수 2안타 1타점 2득점을 기록하며 MVP를 차지한 크리스토퍼 엘리엇의 인터뷰 영상.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또 이 난리가 난 건지 불안해하며 영상을 재생했다.

* * *

“승부의 결과를 확신한 상태에서 경기를 뛰는 건 재미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 남과 저를 비교하는 데 관대한 편이긴 해도, 오늘 다저스 유격수와 저를 비교하는 건 굉장히 불쾌할 것 같네요.”

“저는 다저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약자를 비하하는 건 옳지 않기에 짧게 줄이겠습니다.”

전부 작년 한 해 동안 한 선수가 내뱉은 말들이다.

그것도 죄다 다저스전에서 투수들을 마음껏 농락한 다음에.

사정이 이렇다 보니, LA 기자들은 짜증과 긴장이 어린 표정으로 인터뷰를 지켜봤지만.

“오늘 경기는 이번 시즌 치른 모든 경기 중 최고였습니다.”

평소 다저스전이 끝나고 났을 때 절대 보여주지 않는 상쾌한 표정으로 나타난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시작부터 기자들을 당황시켰다.

“가장 아쉬운 장면은 역시 무사 만루에서 1득점에 그치며 타석에 들어가지 못했던 5회 초 공격이었는데…….”

기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정상적인 인터뷰를 한다!

기회만 있으면 다저스를 까기 바빴던 그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이어진 인터뷰는, 후반부에서 절정에 달했다.

“다들 그렇겠지만, 저 또한 Park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던 선수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자리를 아쉬워할 필요는 없게 됐군요.”

팀의 젊은 레전드를 추모하는 한편, 그 후계자를 인정하기까지 하는 다정한 발언에 LA 기자들은 감동마저 느꼈다.

아마 본인은 전혀 다른 뜻으로 말하는 중일 테지만.

마이너 시절 트레이드된 이후, 항상 다저스와 대립각을 세워온 크리스토퍼 엘리엇과의 관계가 드디어 봄날의 온기처럼 녹아내리는가 싶었던 그 순간.

“무엇보다 기쁜 건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겁니다. 만약 2년 후 그 친구와 같은 유니폼을 입게 된다면, 유격수 포지션을 양보할 의향도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띄워준, FA가 얼마 남지 않은 그 선수를 대놓고 탐내는 발언에 LA 기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크리스토퍼 엘리엇과 다저스와의 관계에 다시금 빙하기가 불어닥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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