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77화 (77/200)

77. 프리웨이 시리즈 (1)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선발 야수는 팬 투표로 결정된다.

대략 20일간의 1차 투표로 포지션별 3명의 후보를 추리고, 28시간 동안의 결선 투표로 최종 1명을 뽑는 방식.

다들 활약이 비슷비슷해서 누굴 고르기 어려운 투표가 있는가 하면, 너무나 쟁쟁해서 고르기가 힘든 투표도 있다.

작년에 커리어 첫 올스타 선발 출장을 이뤘으며, 올해도 공수 양면으로 활약 중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

그리고 내야수 전향 첫 시즌부터 무보살 삼중살이나 15연타석 안타 등 여러 기록을 세운, LA 다저스의 유격수 겸 3루수 구현기.

내셔널리그 팀의 선발 유격수 최종 후보 3인 중 2명은 사실상 이 두 사람으로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온갖 비교란 비교는 다 당하게 될 세 번째 선수가 누구일지에 더 관심이 쏠렸을 정도다.

그렇게 20여 일간 진행된 1차 투표의 결과가 발표됐다.

[내셔널리그 올스타 팀 유격수 최종 후보(득표율순)]

1. 구현기(약 45%)

2. 크리스토퍼 엘리엇(약 41%)

3. 맷 히메네스(약 4%)

0.284/0.378/0.392에 10홈런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며 3위에 오른 카디널스 주전 유격수 맷 히메네스.

그는 SNS에 굳이 3명의 후보를 추려내서 자신을 박제시킨 결선투표제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지만, 딱히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주목한 건, 남은 두 후보의 득표율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Koo가 45%인데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41%? 좀 의왼데? 나는 솔직히 Koo 쪽으로 표가 확 쏠릴 줄 알았거든.]

└ 그러게. 성적이건, 임팩트건, 드라마건. 크리스토퍼한테 꿀리는 게 없잖아?

└ 없긴 뭐가 없어? 출장정지다 휴식이다 해서 출전 시간이 크리스토퍼한테 한참 밀리는데.

└ 그래? 내야수 첫 시즌에 역대급 대기록을 두 개나 세우고 4할까지 찍어본 선수를 고작 출전 시간 때문에 안 뽑았다 이거지?

└ 그놈의 4할 붕괴된 지가 언젠데. 그리고 Koo는 최근 3루수 출장이 늘고 있잖아. 유격수 포지션을 지키려다가 트레이드까지 당한 크리스토퍼를 생각하면 나는 투표 못 하겠다.

└ 그 유격수 포지션 지가 지 입으로 Koo한테 양보할 수 있다고 했던 건 기억 안 나냐?

└ 그러려면 Koo가 내후년에 우리 팀으로 와야 하는데? FA 영입 기원 너무 고맙고~

언제나 그렇듯, 진지한 논의가 서로 물어뜯는 난장판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편,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올스타 1차 투표 결과는 야구에 열광하는 수많은 국가에도 퍼져 나갔고.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 경기 결과에 따라 월요일 아침 출근길 표정이 달라지는 대한민국에서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할 리 없었다.

[님들 올스타 1차 투표 나온건 알고 갤질함?]

(사진)

조만간 거품 꺼질거라 이 악물고 까던 구현기 유격수 부문 1등했쥬? 구까 아재들 이빨 꽉 깨물다 못해 틀니 깨졌쥬?

응~ 님들이 부들대던 말던 구현기는 실력으로 증명해~

└ 애초에 시범경기에서 7홈런 갈기는 거 보고도 메이저에서 안 통할 거라고 예측한 놈들이 등신임 ㅋㅋㅋ

└ ㄹㅇㅋㅋ 근데 난 사실 수비에서 발목 잡힐 줄 알았음. 근데 구까들은 무보살 삼중살 나오고 나서도 X망 운빨겜이라며 열폭하더라?

└ 슬슬 약드립 치는 새끼들 나올 타이밍 아닌가? 이번 시즌 구현기 반도핑 기구 검사만 3번을 받았는데, 그 검사 개발하는 데 노벨상 수상자도 갈아넣은 거 모르는 흑우 없제?

2037년 현재까지 메이저리그는 수많은 코리안리거가 거쳐 왔고, 지금도 구현기를 포함해 총 세 명의 한국인이 메이저리그 혹은 트리플 A에서 뛰고 있지만.

구현기는 그 모든 선수를 통틀어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선수였다.

국가대표 차출에 대한 질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하거나, 예능 출연을 무조건 거절하는 등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한국 대중들이 유명인에게 요구하는 겸손한 태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이너리거 시절부터 생방송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에게 대놓고 까칠하게 굴었던 걸 보고 누군가는 사이다라고, 또 누군가는 예의가 없다고 봤던 게 대표적인 예다.

[느그현키 개념글에 안 올라오게 좀 해라;;]

아니 여기가 메이저리그 갤러리지 느그현키 갤러리임? 뭔 념글에 순 저새끼 얼굴밖에 없음?

그리고 믈브 투수들 원래 여름 되고서야 폼 올라오는 거 모름? 지금도 타율 점점 떨어지는 거 봐. 애초에 저 X랄로 몸 막 굴리면서 수비하면 연골 가루 될 텐데 ㅉㅉ

└ ㄹㅇ 이새끼 국대 얘기 스루패스하는 거 보면 영주권 따서 런각 재는 거 같거든? 만 27세에 FA 되는데 10년 이상 장기계약 맺으면 무조건 병역면탈임~

└ 얘는 일단 인성부터가 자격 미달임. 크보 대선배가 지한테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신경 좀 써야 한다고 충고하는데 ‘기부 많이, 충분히 했습니다’ 이 X랄로 대답하는 게 맞음?

└ 그리고 애초에 공개 테스트도 아닌데 결과를 어떻게 믿음? 응 난 구혐기 카메라 앞에서 XX 까고 서서쏴 할때까지 테스트 결과 믿을 생각 없어~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구현기는 극성 팬덤과 극성 안티를 동시에 몰고 다니는 선수로 유명하다.

선수 본인이 선을 넘은 욕설이나 악성 루머를 제외하면 법적 대응을 잘 안 하는 편이고.

메이저리그 복귀 이후로는 아예 그쪽 소식이 없다 보니 최근엔 안티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지만.

[현느님 인성 건드리는 빠가사리들은 제발 대가리 리셋좀;;]

최근 들어 인터넷 여론의 기류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사진) 현느님이 팬서비스 쓰레기라고? 응 너 그거 허위사실 유포야. 어디 투수하실 때 선발 등판 날 사인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거겠지. 예전에도 진짜 바쁜 거 아니면 사인 요청 다 해줬고 요새도 경기 시작 전 무조건 사인해주거든?]

└ 헐 ㄷㄷ 이거 받은 지 한 달도 안 됐네. 미국 사심?

└ (글쓴이) 여행 간 겁니다. 배팅케이지 근처 좌석이 비싸긴 한데 후회는 안 되네요^^

원래는 빠와 까가 티격태격하며 선수 이미지를 갉아먹는 경우가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구현기를 찬양하는 글이 대량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

[(사진) 니들이 현느님보다 야구 잘해? 니들이 현느님보다 상냥해? 니들이 현느님보다 소중해?]

└ 님 진정좀;;

└ 아직 식중독 걸릴 철은 아닌데 왜저러지

[(사진) 님들 그거 앎? 잘생긴 야구선수를 보면 단기 기억상실증 걸린다는 겈ㅋㅋ 아니 누가 사람 얼굴 보고 그렇게됨 ㅋㅋㅋ

근데 님들 그거 앎? 잘생긴 야구선수를 보면 단기 기억상실증 걸린다는 겈ㅋㅋ 아니 누가 사람 얼굴 보고 그렇게됨 ㅋㅋㅋ

근데 님들 그거 앎? 잘생긴 야구선수를 보면 단기 기억상실증 걸린다는 겈ㅋㅋ 아니 누가 사람 얼굴 보고 그렇게됨 ㅋㅋㅋ]

└ 아니 님;; 저도 구빠긴 한데 얼굴 클로즈업 사진은 선 넘었죠;;

└ 근데 이래도 굴욕샷 안나오는 거 보면 얼굴론 절대 못 깜 ㅋㅋㅋ

[(영상) 울 현느님 무보살 삼중살 심장 녹을까봐 냉동실에서 보는중 ㄷㄷ]

└ 염병하네

└ 그냥 거기서 살면 안됨?

“흐흐흐흐흐.”

자신의 글에 달리는 댓글을 보며, 한 남자가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수많은 커뮤니티에 가입해 구현기를 찬양하는 글을 복사 붙여넣기하는 것이 요즘 그의 일과였다.

“여론은 벌써 많이 돌아섰어.”

그의 이름은 박정훈.

오랜 다저스 팬이자 박도현의 개인 팬이었던 그는, 박도현의 부고 소식 이후 한동안 야구팬 활동을 접었지만.

함께 사고가 났던 구현기의 메이저리그 복귀 소식에 겨우 시간을 내 미국 여행 겸 다저 스타디움 직관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최애를 만났다.

솔직히 구현기를 다저스의 일원으로서 좋아했지만, 박도현만큼의 관심은 없었던 그였지만.

사인 요청을 친절하게 받아주며, 심지어 다저스 공식 사인회에 한 차례 참석한 게 전부인 자신의 이름을 외워준 것도 모자라.

15연타석 안타를 기록한 경기를 직관하기까지 하면서, 이건 운명이구나 싶었다.

“내 최애가 욕먹는 꼴은 못 참지.”

박정훈이 무지성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각종 주접글로 어그로를 잔뜩 끌어놓은 뒤, 다른 아이디로 로그인해 그 사이사이에 구현기의 훈훈한 에피소드나 객관적인 활약상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박도현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호감을 얻는 선수라 이런 뒷공작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구현기는 기본적인 여론이 조금 안 좋아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흐흐흐흐흐.”

불타오르는 팬심과 함께, 그는 오늘도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며 밤을 지새웠다.

* * *

“으으으으으.”

갑자기 소름이 돋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요새 자주 이런다. 처음엔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그것보다는 누가 질척질척한 눈으로 바라보는 느낌.

“왜 그래, Koo. 컨디션 안 좋아?”

“아니, 괜찮아.”

제리가 드물게도 내 걱정을 다 해준다. 평소에도 이러면…… 그건 그거대로 기분 나쁠 것 같다.

근데 제리만 그러는 게 아니다. 복도 여기저기서 얼굴들이 쏙쏙 튀어나와 한마디씩 던진다.

“뭐야, Koo 어디 안 좋대?”

“그래? 그럼 다음 원정은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아예 구장에 안 나오고 호텔에서 푹 쉬다 오는 건 어때?”

이 인간들, 걱정해주는 게 아니고 놀리고 있다.

그럴 만도 하지. 지금 향하는 원정지에서 내가 좋은 기억이 하나도, 정말 아예 없었으니까.

[거기서 레전드 경기 많이 찍었었지.]

‘안 닥쳐?’

심지어 박도현마저도 실실댄다.

요새 지는 살 찔 걱정 없다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다니던데. 원정 끝나면 민트초코 피자로 기강 한 번 잡아줘야겠어.

“Hey, Koo. 도대체 상태가 어떻길래 다들 널 걱정하는 거야?”

이번 시즌 팀에 합류해 아무것도 모르는 앤서니 아우젤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놀려먹을 생각이 가득해 보이는 동료들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저희가 지금부터 가는 데가 어딘진 아시죠?”

“당연하지.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

다음 시리즈는, 매년 찾아오는 인터리그의 지역 라이벌전이자 같은 LA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구단, LA 에인절스와의 원정 2연전.

프리웨이 시리즈라고도 불리는 이 매치업은 거리가 가까운 만큼 버스를 타거나 아예 이동을 자율에 맡기기도 하지만.

지금은 막 콜로라도에서 경기를 마쳤기에 원정기를 타고 이동 중이다.

“제가 거기서 등판할 때마다 성적이 최악이었거든요.”

메이저리그에서는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단 매년 2경기, 많아 봐야 3경기쯤 되는 프리웨이 시리즈의 원정 경기에서 내가 3년 연속으로 선발 등판을 하는, 확률상으로 극히 희박한 일이라거나.

또 그 경기에서 내가 하나도 빠짐없이 3회를 채우지 못하고 강판당하는 일이라거나.

심지어 그전 등판까지 아무 문제 없이 순항하고 있었는데도.

“최악이라고? 도대체 어땠길래 그래?”

“제 통산 에인절스 원정 등판 ERA가 21.38이에요.”

“와우…….”

정말 신기한 건 그렇게 경기를 말아먹고 나서도, 바로 다음 등판에서는 또 멀쩡해진다는 거다.

하도 이상해서 사인 훔치기까지 의심했는데, 나 말고 다른 투수가 올라간 날에는 또 타선이 맥을 못 추는 거다. 진짜 열받게.

“그 정도면 감독님이 로테이션 조정을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하지 않나?”

“제 말이 그 말이에요.”

3연속 벙커링도 아니고.

에인절스 홈구장에서만 아주 탈탈 털리는 나를 지켜보던 감독님이 다음 시즌부터는 일정을 조정해서 피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듬해 나는 교통사고 때문에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도 못했고. 지금은 이렇게 투수를 때려치웠지.

“괜찮아, Koo! 너 아직도 타율 3할 7푼이잖아!”

“혹시 몰라? 투수 때 많이 털린 만큼 타자로서는 홈런 뻥뻥 날릴지!”

동료들의 장난기 섞인 야유에 입을 꾹 다물자, 앤서니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리를 떴다.

[어쩌냐. 하필 타이밍이 이래서 감독님께 빼달라고 하기도 그렇네.]

‘애초에 빼달라고 빼주실 분도 아니긴 해.’

특정 구장에서의 성적이 끔찍한 경우, 아무리 주전이라도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이번 시리즈의 첫 경기가 끝난 시간부터 정확히 26시간.

총 3명으로 추려진 후보 중, 내셔널리그 올스타전 선발 유격수를 뽑는 결선 투표가 진행된다.

‘크리스토퍼 그 자식이 꽁으로 올라가는 꼴은 못 보지.’

가뜩이나 최근 크리스토퍼가 시즌 20호 홈런을 쏘아올리며 거포 유격수의 면모를 자랑하는 와중에.

자신이 약점을 보이는 팀이라고 해서 피하는 건 이미지에 아주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악물고 뛰기로 다짐하며 동료들의 웃음소리를 피해 담요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메이저리그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는 것을, 이때의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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