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78화 (78/200)

78. 프리웨이 시리즈 (2)

기나긴 메이저리그의 시즌을 뛰다 보면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전날 경기에서 별일 없었고. 훈련도 똑같이 하고. 밤에 뭐 특별한 걸 먹고 잠들지도 않았는데.

꿈도 안 꾸고 푹 자고 알람 울리기도 전에 상쾌하게 눈을 뜨는 날.

보통 이런 날은 오늘 뭔가 되겠구나 싶어서, 여유롭게 나가서 몸도 일찍 풀고 기분 좋게 하루를 준비하곤 하는데.

오늘은 영 기분이 들뜨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예전에도 이랬어.’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선발 등판했던 3경기.

뭘 던져도 뻥뻥 맞아 나가던 그 악몽 같은 경기에서도 당일 아침 컨디션은 최상이었으니까.

아침밥은 패스하고 침대에서 뒹굴다가 점심시간 즈음 구장으로 출근했더니.

“Koo, 기분은 좀 어때?”

원정팀 클럽하우스 복도에서 감독님과 마주치자마자 걱정 어린 인사를 받았다.

“나쁘지 않습니다. 잠도 잘 잤고요.”

“그래. 사실 어지간하면 오늘 3루수나 1루수로 출전시키고 싶었는데…… 자네도 알지?”

“그럼요.”

오늘부터 내일까지가 올스타전 결선 투표의 데드라인.

가뜩이나 내가 풀타임 유격수가 아니라서 표를 못 주겠다는 양반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

‘근데 솔직히 지명타자로 나가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긴 했어.’

[우리 지명타자는 고정이니까.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인터리그 원정에서나 가끔 나오는 다저스의 지명타자 자리는, 나이와 부상 이력 때문에 관리가 필요한 클레망의 몫.

심지어 그 박도현마저도 지명타자 출전 경험이 없을 정도다.

물론 당시 다저스에서 박도현이 유격수를 맡지 않으면 손해가 막심해서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에인절스에서 온 스파이가 나타났다!”

“오늘은 Koo가 아니라 ‘Ook’인가?”

“괜찮아! 지금 당장 여기로 이적하지 않는 이상 이번 시즌 3할 타율이 깨질 일은 없을 테니까!”

“대신 마운드 올라가면 ERA가 무한리필이겠지만!”

라커룸으로 들어가자마자, 놀려먹을 생각으로 가득한 동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러게요.”

어지간하면 받아줄 텐데. 기분이 영 별로니까 대답도 성의 없게 나온다.

그런데 오히려 다른 선수들이 슬슬 내 눈치를 보며 물러난다.

“어…… 우리가 좀 심했나?”

“야, 오늘은 Koo 건들지 마. 애들한테도 눈치 챙기라고 전해. 알겠어?”

괜히 기분 안 좋을 때 건드렸다가 좋은 페이스가 무너질까 걱정해주는 걸까.

[아니면 너 올스타 투표 때문에 예민한 줄 알고 배려해주는 걸지도 모르지.]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이유야 어쨌든. 오늘은 건드리는 사람 없이 혼자 조용히 경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Koo! 이쪽 좀 와주세요! 여기요!”

그렇다고 해서 팬서비스까지 거를 수는 없다.

같은 지역 더비이다 보니 다저스 팬들도 평소보다 훨씬 많았고, 훈련 후 잠시 생긴 틈을 타 관중석을 찾아갔다.

“괜찮아요!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이름만 LA 가져다 쓰는 놈들 말 따위 신경 쓰지 말아요!”

“여기가 터가 안 좋아서 그래요!”

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나.

평소 믿음을 팍팍 주던 팬들에게마저 걱정을 사고 있다.

“Hey! Koo! 올해도 잘 부탁해!”

“투수로선 3이닝도 못 버텼으니, 야수로선 실책 3개쯤 쌓는 거 아니냐?”

“너무 서운해하지 마! 어차피 너 FA 돼도 여긴 안 올 거잖아!”

홈팬들의 야유 때문에 기죽지 말라고 더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짜증 나네.’

메이저리그에 정착하는 투수들의 기본적인 조건은, 상대 팀 팬들 야유에 크게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애초에 내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흔들릴 일 자체가 없지. 이 사람들이 나 대신 야구하는 거 아니니까.

‘비겁하게 팩트를 갖다 꽂다니.’

아무리 그때는 투수였고, 지금은 타자라지만.

3년간의 악몽이라는 게 그리 쉽게 가시지는 않는 모양이다.

컨디션은 괜찮은데 기분이 더러운 기묘한 상태로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덧 경기 시간이 다가왔다.

1. 조지 라모스(2B)

2. 구현기(SS)

3. 켄 워싱턴(3B)

4. R.H. 데이(RF)

5. 클레망 파로(DH)

6. 랜디 콘트라레스(1B)

7. 메이슨 그레이엄(LF)

8. 말릭 케이타(CF)

9. 헨리 데이비슨(C)

SP: 모리츠 슈타인마이어

전광판에 떠오른 오늘 경기 선발 라인업.

클레망이 지명타자로 나왔고, 최근 부진했던 루카스가 한 경기 쉬어가면서 메이슨이 오랜만에 선발 출전한 걸 제외하면 큰 변화는 없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오늘의 선발 투수.

[어째 마리오가 요새 초조해 보인다 했어.]

‘본인이 감당해야지 어쩌겠어.’

원래 로테이션대로라면 4선발 마리오 로드리고가 등판할 차례인데, 최근 3경기에서 연속으로 부진하며 한 번 쉬게 됐다.

팀에서 오래 헌신하거나, 비싼 연봉을 받는 선수라면 한 경기 건너뛰는 게 큰 타격은 아니지만.

연봉조정 시기도 안 된 신인, 특히 다저스처럼 선발 유망주들이 득실대는 팀의 신인이라면 언제 자리가 바뀔지 모른다.

‘그보다 중요한 건 오늘 선발이지.’

모리츠 슈타인마이어.

클레망이 부상당했을 때 트리플 A에서 올라와, 선발과 롱릴리프를 오가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선수인데.

결정구로 횡 슬라이더를 즐겨 쓰는, 전형적인 땅볼 유도형 투수다.

즉, 내야수가 처리해야 할 타구가 늘어난다는 거지.

‘오늘 느낌이 그닥인데, 하필이면…….’

3일 휴식 후의 등판이니 길어 봐야 4이닝 정도 맡길 텐데.

남아 있는 다른 롱릴리프도 비슷한 유형의 투수이다 보니, 오늘 경기 내내 수비가 빡셀지도 모른다.

“스트라이크 아웃!”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선두 타자 조지가 물러났다.

8구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긴 했는데, 슬라이더라고 생각했는지 구석에 틀어박힌 포심을 흘려보냈다.

“슬라이더를 아끼는 것 같더라. 포심을 노려봐.”

조지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타석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에인절스 선발은 다저스 선발과 스타일과 주력 구종이 비슷하다.

구속은 이쪽 투수가 좀 더 빠르다고 하니 그만큼 까다로울 순 있겠지만.

“Hey, Koo! 컨디션도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여기 올라와! 같이 야구나 보자! 나쵸는 내가 쏠게!”

“오늘 경기 후반에 투수로 깜짝 등판할 생각 없어?! ERA 21은 너무 어중간하잖아! 30은 채워야지!”

타석에 들어서니 더욱 거세지는 조롱과 야유.

찔리는 게 있다 보니 괜히 짜증이 치민다.

아니, 굳이 저것뿐만이 아니라, 그냥 오늘따라 불편충이 된 기분이다.

무뚝뚝한 주심도, 뭐라 주절대며 시비를 거는 포수도, 3할 7푼짜리 타자를 상대하는데도 조금 전 선두 타자 때보다 여유로워 보이는 투수의 표정까지도.

‘3루수와 2루수가 경험이 부족한 편이니까 가능하면 타구를 그쪽으로…….’

잡념을 떨쳐내려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뭘 해도 안 풀릴 것 같은 날 괜히 머리 굴렸다간 내 판단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냥 본능대로. 눈에 들어오는 대로 임하지 뭐.

눈앞의 투수가 와인드업을 시작하자, 그나마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순해진다.

배트의 궤적과 공의 궤적이 하나의 점을 이루니 뭐니, 타격 이론 따위는 지워버린 채.

대기 타석에서 봤던 포심 타이밍에 맞춰, 그냥 정확하게 컨택만 해보자는 생각으로 가볍게 배트를 휘둘렀고.

따아아아아악―!

소리는 엄청 큰데, 손에 느껴지는 진동은 거의 없는 기묘한 감각.

그 감각에 사로잡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으르렁대는 포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X발 지금 뭐 하냐?”

홈런을 알리는 문구가 번쩍대는 전광판을 보고서야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챘다.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1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2420]

곧고 정직하게 날아오는 패스트볼이 배트 중앙에 정확하게 맞았을 때 나오는,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시즌 14호 홈런.

그것까진 좋은데, 1루 쪽으로 걸음도 안 옮기고 멍하니 서서 보고 있었으니. 얘가 한번 해보자는 건가 싶었겠지.

“Booooooo!!!”

“빨랑 베이스 처 돌기나 해! 대가리에 98마일짜리 포심 처맞고 싶어?!”

격한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입 다물고 고개 숙인 채 빠르게 베이스를 돌아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나이스! 나이스!”

“오늘 엄살이란 엄살은 다 피우더니, 오랜만에 손맛 볼 생각에 잠이라도 설쳤냐?!”

“그치! 그렇게 홈런을 맞았는데 이젠 돌려받을 때도 됐지!”

평소처럼 주르륵 늘어선 동료들 사이를 지나가며 헬멧과 엉덩이를 두들겨 맞았는데.

신나게 목소리를 높이던 동료들이 내 얼굴을 보더니 다시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딴청을 피우며 돌아선다.

“아니, 홈런 쳐놓고 표정이 왜 저래…….”

“다신 그렇게 웃지 마. 꿈에 나올 것 같아.”

“진짜 개인적인 문제 없는 거 맞지?”

분위기를 읽고 좀 웃어보려고 노력은 했는데, 씨알도 안 먹힌 모양이네.

[사실 홈런 못 치면 놀림 받을 만한 공이긴 했어.]

대놓고 가운데로 몰린데다, 구속만 빠를 뿐 정직하기 짝이 없는 작대기 직구.

오히려 초구를 지켜보려고 했으면 오늘 경기 내내 머릿속에서 아른거릴 뻔했다.

거의 한 달 만에 맛보는 홈런인데도, 기쁨보다는 타석에서 더 집중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앞선다.

‘오늘 진짜 왜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들지?’

오늘하고 내일만 무사히 넘기면, 에인절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만나지 않는 이상 올해 여기 올 일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진짜 굿판을 벌이든가 해야지.

* * *

R.H.가 안타 하나를 추가하긴 했지만,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채 1회 초 공격이 끝났고.

공수교대를 위해 그라운드로 나가 유격수 위치에 가서 섰다.

오늘 다저스의 선발 모리츠는 에인절스의 선발과 플레이 스타일 자체는 비슷하지만, 팀 내의 입지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보니.

오랜만에 선발 기회를 얻은 모리츠는 선두 타자에게 초구를 던지기에 앞서 한참이나 심호흡을 하며 뜸을 들였다.

“아웃!”

에인절스 리드오프의 타구를 옆으로 두 걸음쯤 이동해 라인드라이브로 잡아내며 원 아웃.

‘그나마 몸이 무겁고 그러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아웃!”

2번 타자의 느린 땅볼을 마중 나가 1루수 랜디에게 러닝 스로로 송구하며 투 아웃.

‘경기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뜨끈한 욕조에 몸 담그고 쉬고 싶네.’

“아웃!”

오랜만의 선발 출장이어서인지 스타트가 늦었던 좌익수 메이슨을 대신해 뒤로 물러나 짧은 외야 플라이를 잡아내며 쓰리 아웃.

‘그나마 1회 수비는 일찍 끝났네. 얼른 들어가야지.’

잡아낸 타구를 야수들에게 토스한 뒤 덕아웃으로 돌아가는데, 여기저기서 따가운 시선이 날아와 박힌다.

원정 경기에선 늘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려는데, 덕아웃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사라지질 않는다.

“Koo, 도대체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니, 컨디션 안 좋은가 싶더니. 공격이건 수비건 혼자 다 해먹네.”

굳이 따지자면 그냥 기분도 좀 별로고. 이 동네랑 잘 안 맞는 것 같긴 한데, 그걸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있으니.

한참 머리를 굴린 끝에 내놓은 대답은 이거였다.

“오늘 경기가 잘 안 풀리네요.”

그러자 덕아웃 여기저기서 코웃음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아니 왜. 진짜 머릿속을 뒤집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 * *

LA 에인절스와의 프리웨이 시리즈 1차전은 5대 3의 스코어로 다저스가 승리를 가져왔지만.

내가 제대로 된 타격을 소화할 기회는 1회 초의 홈런이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 타석에서는 몸쪽 위협구가 손에서 풀렸는지 배 쪽을 스치고 지나가며 몸에 맞는 공 판정을 얻었고.

세 번째 타석과 네 번째 타석에서는 각각 볼넷과 고의사구를 얻어냈고, 네 번째 타석을 소화한 뒤 대주자 채드윅과 교체됐으니까.

오늘 성적 1타수 1안타 1사구 2볼넷 1홈런.

안타는 하나뿐인데 출루가 네 번이라는 기묘한 경기를 치렀다.

경기 종료 후 28시간 동안의 올스타전 결선 투표가 시작됐지만, 거기에 관심도 못 가지고 일찍 잠들 만큼 피곤했던 하루.

이때 잠을 푹 자둔 건 신의 한 수였다.

다음날 경기는 오늘 내 성적이나, 에인절 스타디움만 오면 기분이 폭삭 주저앉는 기현상만큼이나 해괴망측한 전개로 흘러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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