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79화 (79/200)

79. 프리웨이 시리즈 (3)

한 시즌에 수많은 경기를 치르는 야구에서는 ‘○○ 대첩’이라 불리는 명경기들이 매년 한두 개씩 나오곤 한다.

양 팀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하며 투수진이 박살나거나, 실책을 남발하거나, 팽팽하던 승부가 어처구니없는 본헤드 플레이로 끝나거나, 하여튼 ‘느그가 프로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런 경기.

보통 그 원인이 선수들의 실력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선수단 분위기라던가, 석연찮은 판정이라던가, 뭐 그런 외부 요인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본헤드 플레이가 나오고, 그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도 많으니.

그러니까 당연히.

전날 경기까지 77경기 44승 33패라는 외우기 쉬운 전적으로 샌프란시스코와의 지구 선두 다툼에서 1경기 차이로 앞서 있던 다저스와.

79경기 37승 42패로 당장은 지구 3위지만, 후반기에 반등한다면 충분히 지구 우승도 노려볼 만한 에인절스 사이에서.

‘2037 프리웨이 대첩’이 나와도 이상할 일은 없다는 거다.

* * *

프리웨이 시리즈 2차전을 위한 아침 출근길.

저녁 경기를 마치고 이튿날 낮 경기를 치르는, 원래대로라면 다들 짜증과 피로에 절어 있어야 할 일정이지만.

셔틀버스 안 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루카스. 오늘 경기 끝나고 뭐 할 거예요?”

“딸내미한테 서비스 좀 해야지. 오늘도 집 가자마자 드러누우면 아내가 게임기 다 갖다 버린다고 협박하더라.”

“아! 내일 휴식일이면 진짜 최곤데!”

지역 라이벌전 특성상, 바로 또 원정길에 오르는 게 아니라면 자유롭게 퇴근할 수 있도록 구단이 배려해주니까.

자녀 교육 등의 이유로 오렌지 카운티 등 에인절 스타디움 인근에 거주하는 선수들이 많기도 하고.

물론 모든 선수들의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너 진짜 왜 그래? 어제 경기도 잘 끝냈잖아.]

‘글쎄. 솔직히 어제 경기 어떻게 끝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몸 상태는 멀쩡한데, 기분만 별로다.

심지어 전날 밤까지 경기를 뛰고 일어난 직후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쌩쌩한 컨디션.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크리스토퍼 그놈은 또 어제 왜 펄펄 날아다녀가지고…….’

어젯밤부터 시작된 올스타전 결선 투표가 오늘 자정 즈음 끝나는데.

크리스토퍼는 5타수 3안타 멀티 홈런에다 만화 같은 호수비까지 해내며 팬들의 이목을 제대로 끌었다.

후보가 사실상 2파전으로 좁혀진 경우, 어느 쪽이 더 인지도와 스타성이 높은지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필라델피아의 강성 팬덤과 미국 동부의 화력을 등에 업는다면, 1차 투표에서 내가 앞섰다고 해서 확신할 순 없다.

[최소한 메츠 팬들은 너를 찍어주지 않을까?]

‘대신 자이언츠 팬들 표가 크리스토퍼한테 몰리겠지.]

오늘 경기에서 임팩트 있는 플레이를 보여준다면 투표에 유리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이런 생각으로 경기에 임해봤자 몸에 힘 잔뜩 들어갈뿐더러, 애초에 오늘 그렇게 활약할 수 있을지 확신도 없다.

“벤, 오늘 바로 갈 거예요? 가족들 LA에 산다면서요.”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근처 자리에서 오지랖 넓은 랜디가 벤에게 말을 거는 게 들려왔다.

“응. 갈 거야.”

“어? 우리 홈구장에 주차해두지 않았어요? 가족분들이 데리러 온대요?”

“오늘 경기 보러 온대.”

그러자 선수들이 벤의 자리를 향해 우르르 몰려든다.

“뭐야, 벤. 오늘 아내가 경기 직관하러 온다고?”

“와, 그분 진짜로 그 사진대로 웃는지 궁금했는데. 클럽하우스엔 안 들르신대요?”

“오늘 우리 원정이잖아, 등신아.”

“그럼 혹시 아들도 같이 보러 오나요? 전에 아들이 야구 안 좋아하고 아이스하키만 본다고 듣긴 했는데.”

쏟아지는 질문에 눈동자가 팽글팽글 돌던 벤은, 마지막 질문에만 겨우 대답했다.

“올 거야. 오늘이 아들 생일이라.”

안 그래도 사람 많은 버스 안이 엄청나게 떠들썩해진다.

만약 로버트가 같이 타고 있었으면 정색했겠네.

“뭐야, 그걸 왜 지금 얘기해요?”

“맞아! 미리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안 물어봤잖아.”

진짜 저 인간 결혼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네.

[오늘 선발로 나갈 거라고 언질을 미리 받았나? 평소엔 주로 대타로 나가잖아.]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본인이 혹시 오늘 선발로 내보내 줄 수 있냐고 감독님께 부탁했을 수도 있지.’

좌투수 상대 대타 요원 겸, 일주일에 1, 2경기 정도 코너 외야수로 선발 출전 중인 벤 리히터.

장기 부상 이력 때문에 주전으로 나오지 못할 뿐, 실력이 모자라서 백업으로 밀린 건 아닌데다.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는, 딱 감독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선수이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조심해야 할 텐데.’

이렇게 분위기가 들뜬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다가 간혹 누구 하나 다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어제도 양 팀 모두 공식 실책 2개씩을 포함한 실책성 플레이를 여럿 선보이는 등 묘하게 정신이 좀 빠져 있는 것 같았고.

[아니, 애도 아니고. 무슨 이런 걸 가지고 걱정을 다 하냐?]

‘덕아웃으로 날아온 배트에 맞고 시즌아웃됐던 사람인데 걱정이 안 되겠냐?’

[아.]

가뜩이나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양반인데.

이런 중요한 날에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일 테니, 본인이 알아서 조심하긴 할 거다.

물론 본인이 조심한다고 해서 모든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 * *

양 팀의 선발 투수가 1이닝 만에 교체되는 경기가 과연 있을까?

물론 있다. 극히 드문 확률이긴 하지만, 1회부터 양 팀 투수 모두 연속 사사구나 장타를 허용한다면 내리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양 팀의 선발 좌익수가 1이닝 만에 교체되는 경기는 어떨까?

적어도 나는 본 적 없다. 아니, 없었다.

1회 초까지는 경기가 순탄하게 흘러갔다.

“베이스 온 볼스!”

리드오프 조지를 2구 만에 잡아내며 투수의 기세가 등등해졌는지, 1―2의 카운트에 몰리며 불리하게 시작한 첫 타석이었지만.

스트라이크 존에 가깝게 붙는 공은 커트하다 보니, 8구 만에 볼넷을 골라내며 지난 경기까지 합쳐 5타석 연속으로 출루하게 됐고.

“세이프!”

덕아웃에서 날아온 런 앤 히트 사인을 받아, 유격수 앞 땅볼이 나왔음에도 무사히 2루에 들어갔으며.

따아악―!

이번 시즌 득점권에서 가장 강한 타자 중 한 명인 R.H.의 적시타가 터지면서, 1회 초를 1대 0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어지는 1회 말.

오늘의 선발 투수 아드리안이 볼넷 하나를 제외하면 깔끔하게 막아내면서, 1회부터 선취 홈런이 나왔던 어제 경기처럼 초반 흐름을 좋게 가져갔다.

그래, 좋았지. 혹여나 엉덩이에 깔려 구겨질까, 덕아웃에서 코팅된 내 사진을 소중히 손에 쥐고 있는 모습에 다들 익숙해졌는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던 것만 빼면.

“아웃!”

2회 초 공격.

전날 하루 휴식 후 선발 라인업에 복귀한 루카스가 범타로 물러난 이후.

대기 타석에서 걸어 나오는 7번 타자 벤을 향해, 적과 아군 할 것 없이 따뜻한 박수와 응원이 쏟아졌고.

전광판에는 차가운 인상의 미인과 벤을 꼭 빼닮은 남자아이의 모습이 송출됐다.

“생일 축하한다, 에릭!”

“오늘은 너의 날이야! 경기는 우리가 이길 거지만!”

경기 시작 전 홈팀 구장 아나운서가 오늘이 벤의 아들 에릭의 생일이라는 것을 미리 알린 덕분이었다.

아무리 프리웨이 시리즈가 살벌한 라이벌리라고는 해도, 선수의 어린 자녀의 특별한 날이니만큼 응원을 보내주는 훈훈한 모습.

“와, 진짜 저렇게 웃네.”

“저거 웃는 거였어?!”

벤의 가족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선수들.

홈팀 에인절스의 캡틴이 흔쾌히 허락해주면서(심지어 클러비를 통해 생일 케이크까지 보냈다!), 벤의 아내와 아들이 잠시 원정팀 클럽하우스에 방문했는데.

예전에 보여준 가족사진에서의 모습 그대로, 어지간한 관찰력이 아니고서야 알아챌 수 없는 수준의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정말로 야구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벤의 아들에게 강제로 단체 사인 유니폼을 떠넘기기도 했지.

따악―!

아들에게 최고의 생일을 만들어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덕이었을까.

벤은 가족이 보는 앞에서 오늘 경기의 첫 타석을 안타로 장식했다.

“우우우! 망해라!”

“확 견제사나 당해라!”

상대 선수에게 응원을 보내던 훈훈한 무드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나마 어린 아들을 생각해서인지 오늘은 좀 순한맛이네.

촤아악!

“세이프!”

예전에 비해 덩치도 불린데다 주루 도중 장기 부상을 당한 적이 있는 벤은 평소 도루 시도를 아예 하지 않는데.

오늘은 의욕이 좀 넘쳐서인지, 적극적으로 1루와 거리를 벌리며 견제구를 유도했고.

따아악―!

수차례 견제구를 던지며 주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투수가 타자를 향해 던진 공은 애매한 패스트볼.

1루 백업과 외야를 오가며 메이저리그에 붙박이로 남아 있는 타자인 랜디가 공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런! 런! 러어언!”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보통 발이 느린 주자의 경우 2루에서 멈춰 서는 경우가 많지만, 3루 코치는 적극적으로 팔을 돌렸다.

애초에 1루와 거리도 꽤 벌렸고. 스타트도 좀 빠른 것 같았고. 벤의 주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보다는 3루 코치가 더 잘 알 테니 알아서 판단한 거겠지만.

퍼어억!

결과적으로는 최악의 판단이 되고 말았다.

“벤! 왜 그래요!”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다저스 덕아웃에서 선수들이 몸을 내밀어 3루 베이스 근처에 쓰러진 벤을 쳐다봤다.

3루심이 볼데드 선언을 하고 나서야 감독님과 몇몇 베테랑, 그리고 의료진들이 벤을 향해 뛰어갔고.

전광판에는 방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초지종이 흘러나왔다.

랜디의 타구는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가 됐고, 좌익수는 그 타구를 주워 들었다.

여기서 좌익수는 중계 플레이를 위한 위치 선정을 마친 야수에게 송구하는 게 기본이다.

1루 주자가 3루까지 가는 타이밍이 늦든 빠르든, 그게 당연한 거다. 만약 늦었으면 1루 주자를 런다운으로 몰 수 있고. 빨랐으면 타자 주자라도 1루로 묶어둘 수 있으니.

그런데 언제 마이너에서 올라온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껏 메이저리그에서 이름을 본 적이 없었던 이 좌익수가 뜬금없이 3루 쪽으로 송구를 한 거다.

이유야 나도 모르지. 경험 부족으로 패닉이 왔던 건지,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욕이 과했던 건지, 아니면 벤의 덩치를 보고 발이 느릴 거라 지레짐작했는지.

아무튼 제대로 된 준비 동작도 없이 쏘아낸 송구는.

미처 포구 준비도 못 한 3루수의 글러브 대신, 죽어라 달리던 벤의 헬멧을 강타한 뒤 관중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라운드 룰 더블!”

결과적으로는 송구가 관중석으로 들어갔으니 인정 2루타가 됐지만, 다저스 선수들과 팬들 중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괜찮아요? 내 말 알아듣겠으면 눈 깜빡여봐요!”

“말할 수 있겠어요? 제 손에 힘 좀 줘봐요!”

벤은 의식이 남아 있었고,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시도해봤지만 금방 다시 쓰러졌다.

오늘 경기에서 계속 뛰는 건 당연히 불가능.

경기장으로 앰뷸런스가 들어와 들것에 실은 벤을 태웠다.

[어떡하냐 진짜……. 하필이면 오늘…….]

덕아웃 밖으로 나와 쳐다보니, 관계자석에 앉아 있던 벤의 가족들이 에인절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급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케이크에 초도 불고, 용돈도 받고, 아빠가 안타까지 치면서 최고의 생일이 될 수도 있었는데.

외야수 하나의 생각 없는 플레이 때문에 모든 걸 망쳤다.

‘저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긴 하겠지만…….’

외야수의 송구는 제구에 신경 안 써도 되는 만큼 그 위력이 막강한데, 아무리 원한 관계라고 해도 그걸 남의 머리에 대놓고 던지는 미친놈은 없다.

실제로 악송구를 날린 장본인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었고.

“선수 교체하겠습니다.”

결국 실려 나간 벤을 대신해 3루에 말릭이 들어갔고, 상대 좌익수도 대수비로 교체되고 말았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다시 시작된 경기.

덕아웃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큰일인데 이거.]

가뜩이나 분노와 걱정에 사로잡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심지어 오늘은 벤의 가족이 찾아온 날이니 동요가 더 심하겠지.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고.

‘그나마 저쪽도 멀쩡하진 않아.’

홈팀 덕아웃도 침울해져 있는 게 멀리서도 눈에 들어온다.

플레이 중 다치는 건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죄책감도 그만큼 심할 테고.

불안 요소를 가득 안은 채로 진행되던 경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는 예상대로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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