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80화 (80/200)

80. 프리웨이 시리즈 (4)

메이저리그에서 감독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꾸준히 등장하는 떡밥이다.

선수단을 어떻게 구성하는가가 성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다 보니, 자연스레 단장을 비롯한 프런트의 권한이 막강해졌고.

감독은 경기 중 전략이나 타순 등을 구상하는 역할에 그치거나, 그것마저도 프런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구단도 있다.

다저스의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역시 그 추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선수 멘탈 케어나 작전 지시, 심판 항의 등등 정해진 상황이 아니면 앞으로 나서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팀을 위해서라면.

경기 도중 선수단을 전원 소집해 다그쳐야만 하는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 저 꽉꽉 들어찬 사람들 중 다저스 팬이 거의 반인 거 안 보여?! 내가 부끄러워서 덕아웃 밖에 나가질 못하겠어!”

동료의 아들이 생일을 맞아 경기를 보러 왔는데, 그 동료가 부상으로 이송됐다.

평정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건 그 역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정도라는 게 있다.

4대 7.

4회 초 다저스의 공격이 진행 중인 현재 스코어다.

1회를 무실점으로 막은 선발 아드리안 빌라가 2이닝 동안 7실점을 했는데, 자책점은 고작 1점뿐이다.

2회와 3회를 통틀어 실책이 총 4개가 나왔으니까.

2회 초, 경기 재개 이후 1사 만루 상황에서 리드오프의 병살로 이닝이 끝난 건 문제삼지 않았지만.

수비는 이야기가 다르다.

공격이 안 되면 점수가 안 나올 뿐이지만, 수비가 안 되면 아예 게임을 치를 수가 없다.

“게임 플랜? 다 집어치워! 기본 중의 기본도 못 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

콰직!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찰 정도로 격분하고 있지만, 감정에만 휩쓸려 막말을 내뱉는 건 아니었다.

선수 한 명 한 명을 지목하며, 그들이 어떻게 경기를 개판으로 만들었는지 세세하게 지적했으니까.

평소 사인 타령을 입에 달고 살던 2루수 조지는 덕아웃에서 보낸 사인을 잊고 관성대로 플레이했고.

넓은 수비 범위가 장점인 3루수 켄은 유격수가 몸을 날리는데도 백업을 들어가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만 봤으며.

1루수 랜디는 송구를 받아 베이스를 찍는 게 유리한 상황인데도 늘 하던 대로 베이스까지 가서 받으려다 포구 미스를 저질러 추가 진루까지 허용하는 등.

외야진도 집중력이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페이롤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내야진이 이 모양이니 속이 안 터질 수 없었다.

‘어떻게 Koo보다도 못할 수 있지?’

오늘 다저스 내야진에서 실책이 없는 건, 내야수로 전향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구현기뿐.

그 사실이 오브라이언 감독의 화를 부채질했다.

“이 한 경기 이기고 지는 거? 그건 상관없어. 그런데 최소한 프로 선수라면 팬들 보기 부끄러운 경기는 하지 말아야지! 기본적인 플레이도 버벅대는데 도대체 어떤 팬이 오늘 경기를 보고 우리에게 응원을…….”

따아아아아악!

오브라이언 감독의 말을 끊은 것은, 에인절 스타디움의 외야까지 울려 퍼지는 커다란 타격음이었다.

소리만 듣고도 타구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정도.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앞선 두 명의 주자들을 뒤쫓아 달리는 타자 주자는, 다름 아닌 구현기였다.

스코어 7대 7.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쓰리런.

“Koo!!! ……oops.”

오늘의 선발 투수 아드리안이 환호성을 지르다 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눈치를 살폈다.

저 선수를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오늘 등 뒤에서 실책이 4번이나 일어난 선수인데.

“경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집중하는 게 좋을 거다. 알겠나?”

“예!!!”

어쨌든 동점을 만들며 팬들에게 최소한의 면목은 섰으니, 여기서 더 난리를 쳐 봐야 사기만 떨어진다.

때마침 덕아웃으로 돌아온 세 명의 주자들.

오브라이언 감독은 구현기가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모여 선 선수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지켜봤다.

‘이틀 연속 홈런이면 들뜰 법도 한데…….’

부상당한 동료 때문인지, 자신이 선수들을 훈계하던 중이라서인지, 혹은 둘 다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팀을 위해 자기 감정을 절제할 줄 안다는 것은 저 나이대 선수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덕목이었다.

‘우리 팀에서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선수가 누구냐고 물었었지.’

여러 주전 선수가 앞으로 1~2년 안에 계약이 만료되거나 FA 자격을 얻는 지금.

오브라이언 감독은 평소 자신을 신임하던 마이크 올리버 단장이 종종 던지는 질문을 새삼 떠올렸다.

* * *

3회 초 선두 타자로 나갔을 때는 자동 고의사구로 1루를 밟았고, 도루와 득점도 각각 하나씩 기록했다.

그리고 5회 초 세 번째 타석에서는 동점 쓰리런.

누가 봐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중이었지만.

‘돌겠네 진짜.’

홈런을 쳤는데도 기분이 구리다.

아니, 벤이 아들 앞에서 앰뷸런스에 실려 갔는데 기분이 좋아지기가 힘든 건 당연한데. 그런 차원이 아니다.

방금 내가 홈런을 어떻게 쳤는지를 도저히 모르겠다.

[뭔가 노림수가 있었다던가, 어떻게 대처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고 타석에 들어갔을 거 아냐.]

‘그게 없었다니까?’

[하나도?]

‘하나도.’

굳이 생각이라고 하면 포심 타이밍에 휘두르자, 딱 하나뿐.

근데 이것만으로 어떻게 홈런을 쳐.

만약 이게 됐으면 훌리안을 포함한 모든 타격 인스트럭터가 실직자가 될 텐데.

‘너는 내 자세 봤을 거 아냐. 혹시 나 뭐 이상한 거 있었어?’

[꼼꼼하게 안 보긴 했는데, 문제는 없었는데? 애초에 자세가 흐트러졌으면 홈런을 못 치지.]

1차전에서 때려낸 홈런은 거의 치라고 주는 실투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 공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고.

운 좋게 잘 맞았네, 하고 넘기기엔 너무나 강렬한 경험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경기 아직 안 끝났다.]

박도현의 일침에 정신을 차렸다.

플레이를 복기하는 건 더 좋은 플레이를 위해서인데, 정작 복기하느라 플레이에 집중을 못 하면 헛심 쓰는 거지.

나중에 경기 영상을 돌려 보든가 하기로 하며, 일단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수비에 집중했지만.

“아웃!”

중견수 루카스가 한참을 기다리며 4회 말 수비는 끝.

“수고했어, 아드리안. 오늘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선발 투수 아드리안의 역할도 끝났다.

4이닝 7실점인데 자책점이 1점뿐.

야수들이 죄다 눈치를 보고, 군기반장인 로버트마저도 말없이 등을 두드려줄 정도로 참혹한 경기였다.

‘그래도 아까 감독님이 한따까리 해서 그런지, 야수들이 정신을 차리긴 했어.’

[진작 차렸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텐데…….]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인 2회 말과 3회 말에 비해, 다들 움직임이 빠릿빠릿해지긴 했다.

그러나 야구는 수비 집중력이 아무리 높아진들, 투수가 계속 얻어맞으면 점수를 내줄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다저스의 두 번째 투수는 라이언 웨이드.

내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긴 했지만, 강팀과의 홈 6연전이 예정되어 있는지라 5회부터 필승조를 올리긴 애매했고.

당장 올릴 수 있는 불펜 중 멀티 이닝 소화가 가능한 유일한 자원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따아악―!

따아아악―!

내야수들이 움직일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마구 터지는 장타.

볼넷보다는 안타를 내주는 게 낫다는 오랜 격언이 있긴 한데, 저럴 거면 차라리 고의사구로 병살이나 노리는 게 낫겠네.

“야! 제발 저 새끼 좀 내려줘!”

“감독 개자식아!!! 고든이랑 앤서니는 뒀다 국 끓여 먹을 거냐!!!”

당연히 홈팬들과 구분되지 않는 규모의 원정팬들은 분노를 쏟아냈지만.

당장 마땅한 투수가 없는 데다, 내릴까 말까 고민할라치면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버리는데. 나라도 고민이 됐겠다.

아무튼 백투백투백 홈런보다 보기 드물다는 백투백투백 2루타를 포함해, 라이언이 2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내는 동안 다저스가 추가한 점수는 고작 1점뿐이었고.

“타자 1루로!”

스코어 8대 10에서 맞이한 4번째 타석.

오늘 경기 두 번째 자동 고의사구를 얻어내며, 배터 박스를 밟아보기도 전에 1루로 향했다.

“야! 그만 좀 걸러! 홈런 처맞는 게 무섭냐?!”

“저 새끼는 또 왜 거르는데?! 타순이 3―4―5로 이어지는데 제정신이야?!”

홈팬과 원정팬이 하나가 되어 야유를 퍼붓는 에인절스 덕아웃의 선택.

그러나 나로서는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내보내준 게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촤아악!

“세이프!”

3회 초 똑같은 상황에서 도루를 허용했으면, 그에 맞춰 레퍼토리를 짜든 어쩌든 대비를 했어야지.

여유롭게 2루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투수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내가 덕아웃에 보내는 사인을 보더니 박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3루까지 가게? 번트 대달라 하려고?]

‘아니, 단독 도루.’

지금 에인절스의 투수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있는데.

무엇보다 3루수가 고작 풀타임 2년 차의 어린 선수인 게 가장 큰 근거지.

자기 눈앞에서 남이 머리에 공 맞고 실려가는 걸 보고도 금방 자기 페이스를 되찾을 줄 아는 선수는 거의 없다.

이미 5회에 실책을 저지르며 흔들리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까지 했으니.

도루 허용 이후 긴장이 풀리기 전 1~2구 안에 속전속결로 해치우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세이프!”

도루 가능성을 짐작조차 못 했는지 멍하니 서 있던 에인절스 3루수의 표정을 본 순간, 커리어 첫 3루 도루 성공을 확신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도루를 기록했습니다.]

[5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업적 ‘3루 도루’를 기록했습니다.]

[3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2840]

3루심에게 타임을 요청하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팀에게 무사 3루의 기회를 선물한 것도 기뻤지만, 그보다는 3루 도루 타이밍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대충 감이 잡힌다는 게 컸다.

이 타이밍에 뛰었다면, 만약 3루수가 흔들리지 않았더라도 성공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웬일이야? 너 평소에 이렇게 무모한 플레이 잘 안 하잖아.]

평소보다 조금 과감해진 건, 이번 시리즈 내내 기분이 이상했던 탓도 있을 거다.

사람들이 다 나를 비웃는 것 같고, 괜히 피해의식 같은 게 생기고, 근데 또 플레이에 문제는 없어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는 찝찝한 기분.

이 거지 같은 기분을 참아내며 내가 할 건 다 했는데 실패 좀 하면 어떻냐는 무대뽀 심보도 있긴 한데.

‘그래도 나 할 땐 하지 않았나? 홈스틸도 두 번 했고.’

물론 두 번의 홈스틸에는 명확한 근거가 있었다.

투수의 멘탈이 터진 게 눈에 보였고, 홈스틸에 대처하기가 까다로운 좌완이었으며, 내야수들도 타자에게 신경이 쏠려 있는 등등.

게다가 3타자를 상대해야 하는 규칙 때문에 투수 교체도 불가능하다는 것까지 똑같다.

‘홈스틸 한 번 더……?’

사실 사인을 보내면서도 허락해줄 거란 기대는 별로 없었다.

무사 3루인데. 이 기회가 날아가면 타격이 너무 크지.

나한테 도루 타이밍을 느끼게 해주는 ‘Run Devil Run’이 있다는 걸 감독님이 알 리도 없으니 더더욱.

[와, 이걸 허락한다고?]

표본은 적지만 90%를 넘기는 도루 성공률과 앞서 성공한 두 번의 홈스틸 덕분인지,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이건 사실상 주루상의 그린라이트를 준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이 허를 찌르는 타이밍이기도 하고, 투수와 내야진의 멘탈이 온전치 않다는 전제가 없었다면 어려웠겠지만.

팍! 팍! 팍!

타이밍을 재다가, 포수의 손에서 공이 출발한 순간 스타트를 끊었고.

포수는 패닉에 빠진 투수가 아무렇게나 던진 공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세이프!”

서서 홈플레이트를 밟으며 점수 차를 한 점으로 좁히는 순간.

[히든 업적 달성!]

[야구에는 세 종류의 도루가 있습니다. 2루 도루, 3루 도루, 그리고 홈스틸. 이걸 한 이닝 안에 전부 성공하며 홈으로 들어온 당신, 이제 상대 선수들은 당신이 달리는 척만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겠군요!]

[3,000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현재 포인트: 5840]

갑자기 무슨 업적 달성인가 싶어 멍하니 전광판을 쳐다보니, ‘Steal for the Cycle’이라는 문구가 번쩍이는 게 보인다.

2루 도루, 3루 도루, 홈스틸을 전부 성공하는 사이클링 도루.

평소 도루 욕심을 크게 내는 편이 아니라, 이게 기록이라는 건 의식조차 못 했다.

따아아악―!

따아아아악―!

주자의 도움 없는 단독 홈스틸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에인절스 선수들의 집중력을 와르르 무너트렸고.

상대 마운드가 7회에만 세 번 바뀌며 점수 차가 벌어지자, 감독님은 아예 7회 말에 나를 대수비로 교체해버렸다.

4타석 1타수 1안타 3볼넷 1홈런.

전날과 마찬가지로 안타는 하나인데 출루는 네 번이라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성적으로 경기를 마쳤지만.

언론이 주목한 건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Koo, 에인절스 상대로 슬래시라인 1.000/1.000/4.000 달성! 홈런 두 방으로 에인절 스타디움을 지배하다!]

고의사구를 포함한 볼넷이 무려 6개라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전 타석 출루에 모든 안타가 홈런이다 보니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스탯이 나오고 만 것.

이날 경기는 내게 ‘114’라는 어처구니없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수확이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2037 NL All―Star Starting Line―up]

Shortstop: Hyun―Ki Koo(LAD)

어처구니없는 송구 실책으로 인한 부상, 한 경기 양 팀 합산 두 자릿수 실책, 사이클링 도루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쏟아진 기묘한 경기.

이 경기의 양 팀 선발 내야수 중 유일하게 실책이 없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해줬는지, 올스타 결선 투표에서 크리스토퍼를 누르고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게 됐고.

“아…… 개피곤해…….”

다음날 아침.

컨디션은 최상이지만 기분은 구린 기묘한 몸 상태는, 에인절 스타디움을 떠나자마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컨디션도 기분도 별로라는 게 함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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