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All-Star (1)
메이저리그의 부상자 명단(IL) 제도에는 ‘뇌진탕 IL’이라는 항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과거 IL의 최소 등재 일자가 15일이었을 무렵, 증세가 가볍다면 금방 복귀할 수 있는 뇌진탕에 15일이나 기용하지 못한다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생긴 제도인데.
최소 등재 일자가 10일로 줄어들고 나서, 뇌진탕 IL역시 2020년대 후반 덩달아 5일로 단축되었다.
“나 왔어.”
그리고 프리웨이 시리즈 2차전에서 송구에 머리를 맞고 뇌진탕 IL에 등재되었던 벤은 5일 후 무사히 팀에 복귀했다.
“벤! 어서 와요!”
“진짜 그만하길 다행이다. 가족들 엄청 걱정했겠네.”
“근데 후유증 없는 거 맞아요?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넌 저 얼굴이 구분이 되냐?”
이제 한두 달 지내다 보니, 슬슬 벤의 표정을 읽어내는 선수들이 생긴다.
평소랑 똑같은 무표정인데, 묘하게 창백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살이 좀 빠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들이…… 이젠 야구는 쳐다도 안 볼 거라고…….”
“아…….”
아빠가 자기 생일날 경기 중 다쳤는데, 저런 반응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애아빠들의 얼굴이 덩달아 씁쓸해졌다.
[근데 니 표정은 왜 그러냐? 무슨 죽은 사람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진짜 죽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아무튼 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든 이유가 있다.
‘그날 내 플레이 영상 분석하면서 경기 전체를 꼼꼼히 다시 봤거든.’
2회 초, 벤이 머리에 송구를 맞았던 상황.
타구를 확인하자마자 달려 나가던 벤은, 2루 베이스 근처에서 슬라이딩을 준비했는데.
좌익수가 수비하는 걸 보고 다시 몸을 일으켜 3루를 향해 뛰었고, 그 과정에서 헬멧이 벗겨질 뻔한 걸 다시 손으로 눌러 썼다.
‘너 이런 상황에서 헬멧 벗겨지는 거 신경 쓰면서 달리냐?’
[안…… 쓰지?]
주루 도중 헬멧이 벗겨지는 게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별의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장기부상을 당했던 벤 같은 선수가 아니라면 헬멧이 벗겨지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거고.
전부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이날 7번 타자로 선발 출장한 게 벤이 아니었고.
똑같이 주루 도중 헬멧이 벗겨졌다면…….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지는 니가 7번 타자…….]
‘쉿.’
사람 일이라는 게 원래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지만.
어쨌든 지금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지 않았나.
악의는 없었다지만, 어쨌든 에인절스 좌익수도 자기 플레이에 대한 책임을 졌지. 지명할당으로 마이너에 내려갔으니까.
[원래 입지가 그리 세 보이진 않았는데, 사고까지 쳤으니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플래툰이던데, 그냥 시기가 좀 앞당겨진 것 같던데.’
언론에서는 메이저리거의 화려한 모습을 주목하지만, 결국 실력이 없으면 언제든 헌신짝처럼 버려질 수 있는 존재다.
고액의 장기계약이라도 맺었다면 성적이 개판이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쓸 수밖에 없는데.
그게 아니라면 언제 자리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
그건 다저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 * *
에인절스와의 인터리그 2연전에서 스윕을 거둔 이후.
다저스는 12경기에서 5승 7패를 거두며 지구 선두 자리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빼앗겼다.
[LA 다저스, 중부지구 최하위 파이리츠에게 충격의 루징 시리즈!]
[파드리스전 2승 1패로 숨 고르던 다저스, ‘리빌딩’ 로키스에게 스윕패 일격!]
기세가 잔뜩 올라온 팀을 상대하거나, 극도의 타자 친화 구장에서 사정상 대체 선발만 두 명을 세우거나, 아쉬운 주루사로 역전이 무산되며 기세를 뺏기는 등등, 핑계를 대려면 못 댈 것도 없긴 하지만.
라이벌 팀에게 선두를 빼앗기고, 심지어 그 팀이 연승가도를 달리며 3경기 차이로 도망치는 상황에서 팬들 귀에 그게 들어올 리가 없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팀 구성에 대해 프런트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덕아웃 분위기가 좋고 선수들끼리 끈끈하더라도, 실력이 부족하다면 계속 함께 있을 순 없다.
단장님의 인터뷰가 TV를 탔을 때, 아마 많은 선수들이 누군가가 떠나겠구나 직감했을 거다.
그리고 그 직감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LA 다저스 불펜투수 라이언 웨이드, 시즌 도중 지명할당 조치… 사실상 방출 수순]
올 시즌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합류했던 라이언이 6월 내내 부진하면서 결국 팀을 떠나게 됐다.
다른 팀에 가서도 잘해라, 연락하고 지내자 등등. 서로가 공염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인사를 나눴고.
누군가가 떠나간 자리는 마이너에서 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다른 누군가에게 돌아갔다.
[더블 A 털사 스틸러스 조쉬 먼로, 메이저리그로 전격 콜업!]
지난 4월 파드리스에 카일을 넘기고 받아온 3명의 선수 중 한 명, 조쉬 먼로가 다저스의 부름을 받았다.
“안녕하심미까!!! 열심히 하게씀미다!!!”
“잘해보자, 조쉬.”
요 몇 년 새 다저스에 처음 콜업된 신인들과 마찬가지로, 발음까지 뭉개질 정도로 벌벌 떠는 조쉬.
대졸이라 나랑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메이저리그도 스포츠 업계이다 보니 선후배 관계는 확실히 해야지.
“어, 그래. 반갑다. 너무 겁먹을 거 없어. 우리 팀에서는 3명만 조심하면 돼.”
“새겨듣겠슴미다!”
오지랖 넓은 랜디가 막 라커룸에 짐을 푼 조쉬를 끼고 클럽하우스를 거닐며 헛소리를 했다.
“일단 로버트.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래도 로버트는 자기 할 것만 똑바로 하고 나대지만 않으면 안 건드려.”
“네, 넵!”
[팀에서 제일 나대는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놈은 진짜 투수였으면 로버트 눈도 못 쳐다봤을걸.’
“그리고 제리. 사실 평소엔 좀 만만하긴 한데. 모쏠이라고 놀리면 눈깔 뒤집어진다. 그리고 등판일에는 좀 예민해지니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제리 성격은 랜디 저놈이 다 버린 것 같아.]
‘가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속 긁는 소리 하는 거 백프로 쟤일걸?’
“마지막으로 Koo. 성격도 더럽고 싸움도 잘하니까 절대 깝치지 마. 얘한테 밉보였다간 메이저리그에서 퇴출된다는 소문도 있어.”
이 새끼가 가만히 있으니 사람이 만만해 보이나.
바로 달려가서 목덜미를 붙잡아 제압했다.
“점심에 농약 처먹었냐? 어디 한 군데 박살나서 메이저리그 영영 떠나게 해줘?”
“봤지? Koo가 이런 놈이야! 너라도 도망쳐, 조쉬!”
“예, 옙!”
그렇게 첫날부터 짖궂은 선배들에게 휘둘리며 허당이라는 낙인이 찍힌 조쉬였지만.
트레이드로 우리 팀에 왔을 때 파드리스 팬들이 괜히 피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는 걸 경기에서 보여줬다.
[스트라이크 아웃! 전날 털사에서 올라온 조쉬 먼로,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동안 허용한 안타는 단 하나뿐입니다!]
[메이저리그 첫 경기인데도 전혀 긴장한 티가 나지 않아요! 아마 같은 지구 파드리스는 속이 많이 탈 것 같습니다! 이런 선수를 거의 공짜로 넘겨준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라커룸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벌벌 떨던 조쉬.
그러나 마운드에 올라가자마자 다른 사람이 되어, 큰 키를 활용한 내리꽂는 포심과 준수한 제구의 변화구로 상대 타자들을 무참히 썰어댔다.
선발 뎁스가 얇은 파드리스에서는 선발 수업을 꾸준히 받았지만, 다저스의 선발 유망주는 사실상 포화 상태.
경쟁에서 밀려나 불펜으로 가게 됐지만, 처음부터 불펜이 맞는 옷이었는지 보직 전환 이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나.
[오늘 경기 선발 투수는 모리츠 슈타인마이어. 시즌 4번째 선발 등판으로, 선발로 뛰었을 때 ERA 2.40으로 준수하게 활약하면서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땅볼 유도형 투수로, 내야진의 기량에 영향을 많이 받죠. 현재 내셔널리그에서 수비의 안정성으로는 손에 꼽을 정도인 다저스이기에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보입니다.]
프리웨이 시리즈 1차전에서 4이닝 1실점으로 눈도장을 찍었던 모리츠.
기존 4선발 마리오가 로테이션을 한 번 거르고 나서도 부진이 계속되자, 다시 한번 선발 등판 기회를 받은 끝에.
5이닝 무실점으로 커리어 첫 선발승을 따내면서 기어이 선발 로테이션에 이름을 올렸다.
[유격수 Koo, 2루수 조지에게 토스! 아웃! 공은 1루로! 아웃! 마리오 로드리고, 더블 플레이로 이닝을 끝냅니다!]
[선발 로테이션에서 가장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던 투수가, 1이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셋업맨이 되었습니다. 조쉬에 이어 마리오까지 필승조에 합류하면서 다저스의 뒷문이 더욱 단단해졌군요!]
불펜 강등을 기뻐하는 투수는 없지만,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잡지 못했다면 그건 본인의 역량 문제다.
그걸 인정하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힘든 거고.
마리오는 울분을 풀어내듯 셋업맨 자리에서 역투를 펼치며 자신이 능력을 증명했다.
투수진의 개편을 통해 수비력을 한층 강화한 다저스.
전반기 마지막 경기까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앞지르지는 못했지만, 1경기 차이까지 좁히는 데는 성공했다.
* * *
에인절스와의 원정 2연전이 끝나고, 홈으로 복귀하자마자 제 컨디션으로 돌아온 이후.
시즌 타율은 3할 5푼까지 떨어졌지만, 당연하게도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나 스스로 약간 신경이 쓰이는 점이 한 가지 있었지.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야…….”
요즘 여유가 생길 때면 에인절 스타디움에서의 홈런 장면을 돌려보고 있다.
지금까지 날린 홈런 중 가장 손맛이 좋고, 비거리도 컸던 홈런.
어떻게 해야 그걸 다시 재현할 수 있을지 연구해보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다.
[고집 그만 부리고 영감님한테 물어보지 그래?]
‘엄연히 계약 기간이라는 게 있으니까…….’
훌리안이 은근히 또 이런 비즈니스적인 면에는 빡빡하단 말이지.
지난번처럼 먼저 연락해서 뭐라 조언해준다면 몰라. 이번에는 연락도 없고.
아무튼 전반기의 남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내 홈런 숫자는 15개에 멈춰 있었고.
욕심부리지 말고 곧 다가올 올스타전과 개인 스케줄에 전념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찰나.
“어…… 홈런 더비요?”
에이전트 데릭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들어왔다.
[맞습니다. 올해 내셔널리그 팀 주장 앤드류 매닝이 Koo를 지목했어요.]
홈런 더비, 메이저리그에서는 홈런 레이스라고 부르는 이 행사는, 제한 시간 안에 누가 더 많은 홈런을 만들어내는지 겨루는 이벤트.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각 팀의 주장 한 명이 선정되고, 그 주장이 나머지 3명을 지목하는 방식.
보통 올스타전이 열리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팀의 선수 한 명을 꼭 끼워 넣고, 나머지는 홈런 타자들을 찔러보는 경우가 많은데.
내 홈런은 15개. 솔직히 적지는 않지만, 거포라고 부르기엔 애매하지.
[홈런 순위 1위부터 4위까지가 전부 거절했으니까요. 줄세우기는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죠.]
“임팩트로 뽑혔다 이거네요.”
홈런 더비가 스윙 메커니즘에 악영향을 준다며 피하는 선수들도 있는데, 솔직히 말로만 들었지 직접 겪어보질 않아서 판단하긴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게 더 신경 쓰인다.
“저는 솔직히 나가도 그만, 안 나가도 그만인데……. 스케줄은 어때요?”
솔직히 올스타전 나가는 것만으로도 영광은 전부 누리는 거고. 홈런 더비는 어디까지나 플러스 알파.
올스타 브레이크를 위해 계약해둔 스케줄을 전부 소화하는 게 더 중요하다.
[스케줄은 상관없습니다. 이미 휴식일마다 처리해뒀기 때문에 여유는 있어요.]
“음…… 언제까지 대답해야 하나요?”
[가능하면 내일까지 대답을 바라는 것 같더군요.]
결국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홈런 더비가 스윙에 영향을 미친다는 소문에 대해 박도현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그거? 난 매년 참가했는데도 아무 문제 없던데?]
데뷔 시즌부터 40―40을 갈겨대는 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였지.
그냥 전에 참여해본 적이 있는 클레망이나 R.H.에게 물어보려고 핸드폰을 든 순간.
[Christopher Elliot @RealChris]
내 친구 Koo가 홈런 더비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어. 마침 나도 제안을 받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Koo가 나가지 않는다면 나도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아. 긍정적인 답변 기다릴게♥
반강제로 SNS 팔로우를 맺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
도대체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대놓고 저격글을 올린 걸 보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데릭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했다.
“나갈게요, 홈런 레이스.”
밸런스고 나발이고 일단 너는 후드려 패야 직성이 풀리겠다.
하트는 왜 붙여. 이거 진짜 미친놈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