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82화 (82/200)

82. All-Star (2)

모든 야구인들에게 있어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소수의 선수에게만 허락되는 별들의 잔치, 올스타전.

2037시즌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이 열리는 신시내티 레즈의 홈구장,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

그곳은 미국 전역에서, 혹은 해외에서 발걸음을 옮긴 야구팬들로 가득했다.

“여기 좀 봐주세요!!! 제발!!!”

“내일 이겨야 월드시리즈에서도 이기는 거 알죠?!”

그중에서도 취재진과 팬들의 이목이 가장 쏠리는 것은 레드카펫 행사였다.

30개 구단의 마스코트가 재롱을 부리며 한껏 띄운 분위기는, 올스타전 출전 선수가 하나둘 등장하면서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평소 익숙한 유니폼 대신 각자 개성이 넘치는 캐주얼 슈트로 차려입은 선수들이, 이름을 불리는 대로 하나하나 레드카펫을 밟았고.

[모두가 No라고 말할 때, 그는 Shut up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에 당당하게 돌아왔죠! 여러분께 기적의 사나이를 소개합니다! 로스엔젤레스 다저스 소속 내야수, Hyun!!! Ki!!! Koo!!!]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다른 어떤 선수들보다도 커다란 반응이 뒤따랐다.

투수에서 내야수 전향이라는 놀라운 선택에, 메이저리그에서의 정신 나간 활약이 더해져 라이트팬의 눈길을 제대로 끌어왔기 때문.

여성들의 반응이 특히 격렬한 건, 거의 모든 선수들이 가족들과 함께한 것과 달리 그는 동반자 없이 혼자 참석했다는 게 한몫했을지 모른다.

“1―1―4!!! 1―1―4!!!”

내셔널리그를 응원하는 팬들이 구현기의 새로운 별명을 외쳐댔다.

아메리칸리그 소속 LA 에인절스와의 인터리그에서 비율 스탯 1.000/1.000/4.000을 기록하며 붙은 별명.

고작 2경기지만, 아메리칸리그를 놀려먹는 데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찰칵! 찰칵! 찰칵!

촤라라라락!

커리어 첫 올스타 참전인데도 카메라 앞에서 여유롭게 포즈를 잡으며, 팬들을 향해 밝은 미소를 보여주는 구현기.

‘아, 집 가고 싶다.’

[내가 진짜 너만큼 겉과 속이 다른 놈은 다신 못 볼 거다.]

그가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옆에서 한심한 듯 쳐다보며 둥둥 떠다니는 그의 친구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 * *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은 보통 3일간의 일정으로 치러진다.

첫날은 각 팀의 특급 유망주들이 ‘미국 팀’과 ‘월드 팀’으로 나뉘어 일전을 치르는 올스타 퓨처스 게임.

둘째 날은 홈런 레이스, 그리고 셋째 날 대망의 올스타 게임.

홈런 레이스에 참가하기로 하면서, 내게 남은 올스타 브레이크는 첫날 하루뿐.

덕분에 어제는 스폰서십과 광고 계약을 맺은 기업과의 촬영에 온종일 불려 다니다가, 밤 비행기를 타고 신시내티에 도착했다.

“안녕, Koo. 이렇게 만나서 인사하는 건 처음이네.”

홈런 레이스가 펼쳐지기 전 연습 시간.

내셔널리그 올스타 팀 주장이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외야수, 앤드류 매닝이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크리스토퍼 일은 미안하다. 누구한테 제안했냐고 물어보길래 별생각 없이 알려줬는데, 그렇게 대놓고 SNS에 올릴 줄은 꿈에도 몰랐어.”

메이저리그에서는 보기 드물게 점잖고 따뜻한 인성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답다.

남이 벌인 일에 본인이 나서서 사과하는 걸 보니.

정작 본인은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실실 쪼개고 있는데.

“안녕, Koo. 오랜만이야. 요즘은 먼저 연락 안 해줘서 약간 섭섭할 뻔…….”

“너 일로 와. 딱 대.”

섭섭 같은 소리 하네.

서브미션을 처먹어야 정신 차리지.

“하하하하하.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그래?”

“닥쳐 이 새끼야. 뒤에 하트는 도대체 왜 처붙인 거야?”

바로 덮쳐서 관절기를 걸었는데, 근력도 근력이지만 관절이 무슨 연체동물 수준이라 얄밉게 쏙쏙 빠져나온다.

누가 보면 얘가 투수 출신인 줄 알겠네.

“대진표 봤지, Koo? 우리는 결승까지 가야 맞붙게 되더라. 사무국도 우리의 만남을 메인 이벤트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똥 싸고 있네.”

“우리가 같은 내셔널리그라 월드시리즈에서 만날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우리에게 어울리는 무대라고 보는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사람이 말을 하면 제발 처 듣고 대답을 해.”

그리고 누구 맘대로 결승에서 만나. 그렇게 니 뜻대로 흘러갈 줄 알고.

말과 말이 도통 맞물리지 않는 이 기묘한 대화를, 박도현과 앤드류 매닝, 그리고 관례에 따라 선발된 신시내티 소속의 선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자, 그만들 하고. 배팅볼은 다들 누구한테 던져달라고 부탁했어?”

보다 못한 앤드류가 중재에 나섰다.

홈런 레이스는 출전하는 선수가 원하는 배팅볼 투수를 초대할 수 있는데.

팀 동료나 코칭스태프가 무난한 선택이지만, 딱히 제한이 없다 보니 야구랑 아무 관련 없는 일반인도 종종 등장한다.

“저는 동료가 던져줄 겁니다. 이렇게라도 올스타전에 꼭 나가보고 싶다나요.”

“저도요.”

“나는 더블 A 투수 코치님께 부탁드렸는데. Koo 넌?”

“아, 저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이번 홈런 레이스를 위해 섭외한 배팅볼 투수가 뒤에서 갑자기 내 등짝을 후려갈겼다.

“오프 시즌에 개고생 시켰으면 됐지, 이런 데서까지 부려먹어야겠냐?”

생전 박도현의 타격 인스트럭터이자, 지난 오프 시즌 동안 내가 타자로 변신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훌리안 로페즈를 섭외했다.

평소 명예욕 같은 거 별로 없는 척해도, 은근히 이런 거 좋아한다니까.

[그런 것치곤 니가 억지로 끌고 온 것 같던데…….]

‘억지로라니. 대화와 설득으로 데려왔구만.’

처음에야 좀 귀찮아하는 것 같았는데. 설득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홈런 레이스? 나보고 공을 던지라고? 제정신이냐?]

‘제 은사시잖아요. 당연히 모셔야죠.’

[웃기고 있네. 느그 아버지한테나 부탁해라.]

‘사실 제가 미국 오고 나서 아버지랑 1년에 한두 번밖에 연락을 못 해서…….’

[앗, 아아…….]

미국에서도 통하는 탈룰라의 위력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옆에 있던 선수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허업……!”

“후, 훌리안 로페즈 코치……!”

덩치 산만한 남자들이 무슨 락스타를 만난 꼬맹이 같은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훌리안이 한껏 으스댄다.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감이 잡히냐? 나를 무슨 동네 할아버지 마실 나오듯 오라가라하는 건 네놈밖에 없어.”

이 영감님, 박도현을 키우기 전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코치라고 했지.

거기다 박도현과 나라는 연타석 홈런을 날리면서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는데, 정작 본인은 유유자적 놀고만 있으니.

이 양반이 얼마나 악랄한지 모르는 선수 입장에선 눈이 뒤집힐 만도 하지.

“드디어 뵙는군요.”

근데 훌리안도 이런 리액션을 기대하진 않았을 거다.

자기 앞에서 무슨 기사 서임이라도 받는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크리스토퍼를 보며 뭐 씹은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너 뭐 하냐?”

“야구의 신을 키워내신 분께 바치는 보잘것없는 경의입니다.”

염병하네 진짜.

연습 시간은 비공개라 망정이지, 기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필리스 단장 뒷목 붙잡고 쓰러졌겠네.

“야, 네놈은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이딴 또라이랑 엮여?”

아니…….

나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왜 훈련하면서 들었던 온갖 쌍욕보다도 마음이 아픈 걸까?

* * *

홈런 레이스 8강전.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선수가 서로 맞붙게 되는데, 내 상대는 양키스 프랜차이즈 거포 외야수.

누가 상대든 결국 개수로 따지는 거니까 상관없긴 한데, 순서는 좀 신경 쓰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의 첫 타자의 등장입니다!]

하필이면 8명의 타자 중 내가 처음이었으니까.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나와 훌리안이 경기장으로 나오자,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를 소개했는데.

선수보다도 배팅볼러가 더 많은 관심과 환호를 받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뛰던 3년간, 홈런이 단 하나도 없던 Koo를 15홈런 타자로 키웠습니다.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자상하게 이끌어온 이 시대의 스승, 훌리안 로페즈!]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관중석을 향해 슬쩍 손을 흔들며 쏟아지는 관심을 즐기는 훌리안.

저놈의 소개 문구는 누가 쓰는 건지 궁금하네.

상명하복은 기본에 좀만 요령 피워도 쌍욕이 날아오는데.

“잘해봐요, 코치님. 무리하지 말고요.”

“너 속으로 내 욕했지?”

하여간 이놈의 영감님, 눈치는 겁나 빨라 가지고.

[Koo, 그리고 로페즈. 양쪽 모두 오케이 사인이 나왔습니다. 제한 시간 4분! 비거리 440피트 이상의 홈런이 나오면 30초 추가! 오늘의 첫 레이스가 지금! 시작합니다!]

배팅 그물 뒤편에서 미리 연습했던 대로 공을 던져주는 훌리안.

따아아악―!

“와아아아아아!!!”

따아아악―!

“아아아아아……!”

타구가 담장을 넘어갈 때면 환호를.

아쉽게 외야에 떨어질 때면 탄식을 보내는 관중들.

처음 1분 동안 다섯 개를 때려내면서 나름 기대하게 만든 모양인데, 아쉽게도 그 페이스는 오래가지 않았다.

치기 좋게 날아온 공을 풀스윙으로 갈겨도 홈런을 장담할 수 없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배팅볼의 코스가 어긋나기 시작했으니.

[비거리 444피트! 본인의 등번호 44번에 딱 맞는 비거리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30초 추가입니다!]

뭐 그래도.

추가 시간을 주는 대형 홈런도 하나 날리며, 화려하게 번쩍이는 전광판도 구경시켜 줬고.

타자 친화 구장이란 점을 고려하면 승리와는 연이 멀어진 15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나서, 사제 간의 훈훈한 포옹도 보여줬으니.

이쯤이면 내셔널리그 팬들, 더 나아가 신시내티까지 찾아와준 다저스 팬들에게 도리는 다한 거 아닐까.

어차피 축제잖아.

솔직히 맘먹고 우승하고 싶었으면, 곧 70이 되는 노인네 말고 다른 사람을 데려왔겠지.

마이너리그에서 투수 유망주로 뛰고 있는 친척 동생을 데려온 8강전 상대처럼.

[이 타구는 다시! 2층 관중석에 떨어집니다! 앞서 Koo가 기록한 15개의 홈런을 뛰어넘으면서! 제한 시간을 1분 이상 남겨둔 지금, 4강전 진출을 확정 짓습니다!!]

타석으로 다가가 4강에 진출하게 된 양키스 선수를 축하해주는 것으로 인생 첫 홈런 레이스를 마쳤다.

승리한 선수가 자신과 악수하며 몸 둘 바를 모르는 걸 보며, 훌리안도 만족한 것 같고.

[크리스토퍼 엘리엇, 14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탈락이 확정됐습니다!]

[펜스 바로 앞에 떨어지는 타구가 너무 많았어요. 전반기에 20홈런을 넘긴 타자인 만큼 파워가 모자란 건 아닐 테고, 집중력이 부족했던 걸까요?]

결승에서 만나느니 뭐라느니, 만나자마자 헛소리를 해 댔던 크리스토퍼는 내가 꼴찌를 면하게 해주며 일찌감치 탈락했다.

[저 새끼 얼굴에 심통이 잔뜩 났던데, 설마 너 떨어졌다고 삐져서 대충한 건 아니겠지?]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은 미뤄둔 채, 이어지는 4강과 결승을 지켜봤고.

연장전까지 가는 치열한 혈투 끝에 올해의 우승자가 결정됐다.

[2037 올스타 홈런 레이스의 우승자가 지금 막 탄생했습니다! 내셔널리그 6월의 선수이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캡틴, 앤드류 매닝! 올해의 챔피언을 향해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올해의 우승 트로피는, 내일 있을 경기에서 주장을 맡아줄 앤드류 매닝의 차지가 되었다.

진심을 가득 담아 박수를 보냈다.

솔직히 별거 아닌데, 아메리칸리그 선수가 가져갔으면 뭔가 기분 나빴을 것 같거든.

[일찌감치 탈락해놓고 대기실에서 놀기만 하던 놈이 무슨…….]

‘조용해.’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냐.

더 중요한 이벤트가 남아 있는데, 이런 데서 미리 힘 빼서 좋을 게 뭐가 있어.

* * *

더 중요한 이벤트라는 건, 물론 올스타 본 게임을 말하는 거지만.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용무가 하나 더 있지.

사무국에서 올스타전 출전 선수와 그 일행에게 제공해주는 특급 호텔.

그곳의 메인 레스토랑에 딸린 프라이빗 룸에서 훌리안과 저녁을 먹었다.

“요즘도 야구 챙겨 보죠, 훌리안?”

넌지시 운을 띄웠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한다.

“니 속셈 다 아니까 말 돌리지 마라. 물어볼 거 있어서 부른 거잖아.”

“흐흐흐. 그래도 공짜는 아니잖아요.”

“네놈이 돈 냈냐? 사무국이 냈지.”

특급 호텔에서의 숙박과 식사.

아무리 몸값 비싼 인스트럭터라고 해도, 잠깐 조언을 듣는 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거 에인절스전 때 홈런 때렸던 장면인데요…….”

불안과 긴장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휘둘렀는데, 올 시즌 최대 비거리의 홈런을 수확했던 바로 그 장면.

이때의 스윙을 재현할 수만 있다면, 홈런 타자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닐 거란 욕심이 들기도 했지만.

괜히 장타 의식했다가 밸런스가 흐트러지면 끝장이라는 박도현의 잔소리 덕분에, 재현해보려는 훈련은 따로 하지 않았다.

“발사각 높이겠다고 개짓거리 안 하는 건 잘하고 있는 거다.”

좀처럼 해주질 않는 칭찬에 웬일인가 싶었는데.

곧이어 덧붙인 한마디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홈런 타자가 되겠다는 생각 따위는 버리는 게 좋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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