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All-Star (3)
‘홈런은 야구의 꽃’이라는 흔한 말.
이 말의 근거는 홈런이 야구장에서 가장 화려한 플레이이자, 외야석의 팬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을 줄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런 변수 없이 ‘무조건’ 점수를 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지금까지 딱히 홈런에 욕심을 내진 않았다.
일단 다저스 타선에는 이미 거포들이 즐비하다. 백업들조차도 선풍기들이 많아서, 오히려 교타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자주 기회가 돌아갈 정도로.
또 다른 이유는, 컴팩트한 스윙을 크게 바꾸는 것보다 커다란 스윙을 작게 교정하는 게 훨씬 어려울 것 같아서다.
그래서 장타에 욕심을 내지 말자는 말에도 수긍했던 거고.
“제가 홈런 타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까?”
하지만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홈런 타자가 되기 어렵다면, 그 이유를 찾아서 고치려는 노력이라도 해봐야지.
“뭔 소리야. 얘는 대가리는 잘 돌아가는 놈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
훌리안은 그렇게 면박을 주더니, 내 태블릿을 뺏어서 스윙 장면을 군데군데 찍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홈런을 만들기 위한 스윙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단순하긴 하지만, 그만큼 명료한 메시지.
“이때 스윙하는 걸 보면, 일단 망설임이 하나도 없다.”
“망설임이요? 평소에도 주저하는 편은 아닌데…….”
“그런 단순한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스타일의 차이를 말하는 거라고.”
아직 타자로서의 커리어는 길지 않지만, 굳이 스타일을 다지자면 OPS 히터에 가깝지.
내가 정해둔 존에 들어오면 스윙하는 편인데, 그때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는 편.
“정확한 컨택을 위한 대처는 어쩔 수 없이 힘을 분산시킨다. 너처럼 선구안 괜찮고, 공에 대응하는 순간적인 센스가 좋은 놈들은 특히 더 그래.”
선구안과 센스를 바탕으로, 예상치 못한 구종이라도 일단 존에 들어오면 치고 본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당연히 실패할 때도 있지.
사실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때는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기도 하고.
“이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쓰고, 그냥 네놈이 생각한 코스대로 삼진을 당하든 말든 풀파워로 돌리면 홈런이 될 확률이 올라가는 거다. 이제 이해가 좀 되냐?”
“알겠습니다!”
나쁜 습관이 들거나, 기술적으로 부족한 게 아니라.
홈런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스트라이크 하나를 감수하더라도 힘을 끝까지 실어 보내는 데만 집중하는 스윙이란 거지.
에인절스전에서의 두 번의 홈런도 그렇게 나왔던 거구나 싶다. 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휘둘렀으니까.
이걸 실전에서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지는 해 봐야 아는 거겠지만, 어쨌든 막연하게나마 길이 보인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마저 밥을 먹으려는데.
훌리안의 표정이 또 뭐라도 씹은 것마냥 일그러진다.
비싼 밥 잘 먹더니 갑자기 왜 저러신대.
“꼬맹이 놈한텐 이런 단순한 설명으로 안 끝났어.”
“예?”
“그놈은 기본적으로 파워가 특출난 놈은 아니었다. 물론 가진 피지컬에 비하면 뛰어나긴 했다만. 그래도 기술적으로 접근해야 홈런을 만들 수 있었지.”
[아니 왜 이래. 죽은 사람 얘기 꺼내서 갑분싸 만드는 거 영감님들 특징인가?]
밥맛 다 떨어졌다며 투덜대는 박도현.
사실 훌리안 말대로, 얘 피지컬은 KBO를 기준으로 놓고 봐도 뛰어난 편이라곤 할 수 없다.
그걸 전부 타고난 센스와 직감, 그리고 기술로 커버한 거지.
“코치님, Park 그놈은 이런 데 부른 적도 없었죠?”
“뭐…… 내가 이런 데 안 온다고 아쉬울 건 절대로 없는 사람이긴 한데. 없긴 하지.”
[뭐라는 거야 이 할배가. 2031년인가에 한 번 불렀구만.]
보나마나 한 번 찔러봤다가, 괜히 튕기니까 바로 오케이 하곤 다신 안 불렀겠지.
올스타 게임 초청장이 나오긴 하는데, 그건 얘네 가족들 몫이었을 테니까.
2030년 이후로는 박도현만 맡아 가르쳤으니까, 제자와 함께 올스타전에 오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겠지.
야구의 신이 축 처진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기라도 했던 걸까.
갑자기 시스템 창이 나타나 훌리안의 얼굴을 가렸다.
[돌발 미션 발생!]
[100세 시대가 열린 지 한참이 지났는데, 당신의 스승은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감상에 빠져 있네요. 이게 다 삶에 자극이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멋진 플레이로 보답합시다!
미션: 올스타 게임에서 홈런 기록
보상: 훌리안 로페즈의 전폭적 신뢰
실패 시: 훌리안 로페즈가 계약자를 부르는 호칭이 ‘등신’으로 바뀜]
여전히 싸가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션 설명은 둘째치고.
지금까지는 보상으로 포인트를 줬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좀 뜬구름 잡는 보상을 제시했다.
[어? 이런 보상은 또 처음 보는데…….]
본인이 담당하는 시스템인 주제에 당황하는 박도현.
박도현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돌발 미션은 내 야구 인생의 어떤 기로가 될 수 있는 상황에 등장한다고 했었지.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표현도 하나 있다.
‘곧 죽을 사람이라…….’
아무리 예순을 훌쩍 넘겼다고 해도 그간 해온 운동이 있는데, 배팅볼 좀 몇 분 던졌다고 숨을 몰아쉬는 것도 그렇고.
메이저리그 시즌 중에는 야구 보러 다니거나 휴양지에서 놀기만 하는데도 뱃살이 쏙 들어간 것도 그렇고.
잠시 고민해본 뒤,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다.
“코치님. 저랑 내기 하나 안 하시겠습니까?”
* * *
올스타전의 지시봉은 지난해 월드시리즈 진출팀 감독이 잡는다.
그리고 지난해 내셔널리그를 대표해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던 팀은 다름아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내셔널리그를 대표해 와준 모든 선수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오늘 같이 잘해봅시다.”
평소엔 경기 분위기도 좀 살벌한 편이어서인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거나 항의하는 모습이 익숙한데.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냥 좀 무뚝뚝한 아저씨 같다고 해야 하나.
“타순은 사전에 전해드렸으니 알고 있을 테고. 경기 흐름에 따라 2~3타석 정도 소화한 뒤 교체할 예정입니다. 따로 궁금하신 점은 없으시죠?”
설령 있어도 감독보다는 다른 선수들에게 물어보고 싶을 거다.
올스타전에 단골 출전하는 스타 플레이어들과 한자리에 있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걸 알아서인지 코칭스태프들은 형식적인 절차만 마치고는 자리를 비워줬다.
[여긴 언제 와도 떠들썩하네.]
경기 전 출전 선수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시간.
딱히 포지션별로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다저스 선수들이 한데 모여 있길래 나도 그쪽으로 합류했다.
올해 다저스 선수 중 NL 올스타 유니폼을 입은 건 4명으로, 가장 많은 올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한 팀 중 하나다.
“처음 와본 건 Koo밖에 없나?”
“그렇죠. 저는 두 번째니까요.”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올스타전에 오게 된 제리가 가슴을 펴고 으스댄다.
선발 우익수로 선정된 R.H.와 교체 내야수로 이름을 올린 클레망. 그리고 나까지.
R.H.와 클레망은 워낙 여기 여러 번 와본 사람들이라 사람들이 만나러 오고. 또 만나러 가거나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랑 제리만 뻘쭘하게 앉아 있게 됐다.
“야, 너 두 번째라며. 친분 쌓아둔 선수 없냐?”
“작년엔 나 나름대로 올스타 게임을 즐기느라 바빴거든.”
“뭘 즐겼는데? 무한리필 음료수?”
“달아오른 분위기. 스타 플레이어의 에너지.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긍정적인 영향력. 얼마나 많은데. 너도 경기 시작 전에 많이 즐겨둬.”
결국 경기 시작할 때까지 찐따마냥 찌그러져 있었다는 거 아냐.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가 이 속 좁은 놈이 상처받아서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이 중단되기라도 하면 큰일이겠지.
“Koo, 아직 여기 있었구나?”
그때, 크리스토퍼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아까부터 말 걸고 싶었는데, 옆에 다저스 선수들이 너무 많더라고.”
“어, 그래.”
“오늘 이렇게 같은 유니폼 입고 있으니까 좋네. 2년 후에는 항상 같은 옷을 입고 다닐 수도 있지 않겠어? 사람 일 모르는 거잖아. 그치?”
전에 방송 인터뷰에서 템퍼링 발언으로 경고까지 처먹어놓고 또다시 치근덕대는 크리스토퍼.
슬쩍 제리를 쳐다보니, 동료가 이적하니 어쩌니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도 쭈구리마냥 눈치만 보고 있다.
저 찐따를 어떡하냐 진짜.
“안녕, 크리스. 그리고…… Koo.”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한 남자.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주변을 스캔하며 퇴로를 찾았는데, 그럴 틈도 없이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눌러 앉혔다.
“오랜만이에요, A.D. 불펜 안 가 있어도 괜찮겠어요?”
“어차피 1이닝 던질 건데 뭐. 경기 시작 두 시간쯤 전부터 가볍게 몸만 풀 거야.”
시카고 컵스의 에이스 A.D. 존슨.
이번 시즌 컵스와의 맞대결에서 나랑은 인연이 좀 있는 선수지.
9회에서 위닝 샷을 공략해 퍼펙트를 깨트리는 내야 안타를 만들어냈고.
서로 인정하는 훈훈한 분위기를 틈타 도루까지 했으니까.
[올해 리글리 필드 원정 일정은 끝났다더니, 올스타전에서 만날 거란 생각은 안 했나 보다?]
‘에이, 그래도 한 팀의 에이스인데. 도루 좀 한 거 가지고 아직도 꽁해있겠어?’
“크리스. 잠깐 다른 친구랑 얘기하고 올래? 이 새…… 아니 Koo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그러죠, 뭐.”
꽁해있나 보다.
똑같은 웃는 얼굴이라도, 크리스토퍼를 볼 때랑 나를 볼 때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게 착각이길 바랐는데.
“난 음료수 좀 더 가져올게!”
눈치만 보던 제리도 이때다 하고 탈주하면서, 순식간에 단둘이 남았다.
“어, 음. 오랜만이에요, 존슨 씨. 선발 등판 축하해요.”
“고마워.”
전반기 17경기 113이닝 19실점 ERA 1.51에 삼진 144개를 얻어내는 미친 활약을 선보인 제리였지만.
4월부터 6월까지 이달의 투수와는 단 한 차례도 연이 없었다.
이 양반이 이닝이건 ERA건 탈삼진이건, 모든 지표에서 한 발짝 앞서 있었으니까.
심지어 제리와 똑같이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을 진행 중이다 보니.
언론에서는 이번 시즌 사이 영 상 후보가 사실상 둘로 좁혀졌다고 확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네 덕분일 수도 있어, Koo.”
“아, 그런가요……?”
“응. 내 생각이 안일하고 썩어빠졌다는 걸 깨달았거든. 타자와 싸우는 게 아니라 도축한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이 사람이 말하니까 농담으로 안 들린다.
진짜 사람 한둘은 담가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니까.
농담…… 맞겠지?
“그럼요. 저도 투수 해봤으니까 알죠. 하하하…….”
“그치? 그래서 나도 꼭 보답해주고 싶었거든. 우리 후반기에 LA로 원정 가는 거 알지? 거기서 꼭 만났으면 좋겠다.”
“아, 너무 좋죠. 오면 같이 식사라도 할까요? 코리안 바비큐 기가 막히게 하는 집 아는데.”
“그럼, 나야 대환영이지. 잘근잘근 씹어먹기에 고기만 한 게 없으니까.”
연차 앞세워서 찍어누르는 꼰대질이나 하는 사람은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강한 투수가 벼르고 있다니 솔직히 압박은 느낀다.
근데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오늘은 올스타전이라는 축제를 즐겨야 하는 날.
슬슬 자리를 피하려는데, 존슨이 대뜸 악수를 청해 온다.
“사실은 오늘 같이 뛰는 것도 기대 많이 했다. 상대로 만나면 짜증 나도 같이 뛰면 든든할 것 같은 놈들이 꼭 있거든.”
솔직히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좋은 타격, 좋은 투구, 좋은 수비가 마구 터져 나오는 것도 올스타전의 묘미.
후반기 컵스와의 홈 경기에서 저 양반을 다시 만날 거 생각하면 깝깝하긴 한데, 오늘은 같은 팀이니까.
“그러니까, 뭐. 네가 2년 후에 컵스로 온다면, 솔직히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고. 다른 놈들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쫄기 바빠서.”
“로버트랑 똑같은 말 하시네요.”
“그 인간한테도 이런다고? 크크크크큭. 너도 진짜 어지간히 낯짝 두껍다.”
같은 에이스이자, 투심을 주 무기로 삼고, 성질도 더럽다는 공통점 때문에 친분이 있다는 로버트와 존슨.
뭔가 계속 대화를 나누며 익숙해지다 보니, 로버트를 대할 때랑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근데 말이야.”
존슨이 표정을 바꾸자마자 유쾌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가라앉는다.
“컵스에 올 생각이 없으면…… 내셔널리그 중부지구로 오는 건 어때? 사실 그게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FA로 팀을 옮기더라도 내셔널리그 중부지구로는 눈길도 안 줘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