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84화 (84/200)

84. All-Star (4)

나는 투수 시절 올스타전과는 인연이 없었다.

꾸준하게 이닝을 먹고, 꾸준하게 괜찮은 피칭을 이어가는 선발 투수였지만.

스타 플레이어의 조건으로 꼽히는 임팩트가 부족했던 게 이유가 아닐까 싶다.

구속도 빠른 편이 아니고. 삼진을 많이 잡는 것도 아니고. 투구 수도 칼같이 끊었지.

완봉승은커녕 완투를 한 경기조차 없었으니까.

올스타 브레이크 때면 박도현 없는 박도현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늘어지라 쉬는 게 일상이었다.

팀으로 복귀한 박도현이 물어보지도 않은 올스타전 썰을 풀어주긴 했는데.

그걸 듣고서도 딱히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유명한 선수들 만나고, 이런저런 행사도 나가고, 딱 그 정도의 인식이 전부였고.

[6번 타자, 등번호 44번, 유격수, 로스엔젤레스 다저스 소속, Hyun! Ki! Koo!!!]

그런데 막상 올스타전에서 내 이름이 불리고, 내셔널리그 팬들의 환호를 한몸에 받게 되니까.

좀 짜증 나게도 뭔가 울컥하게 된다.

평소 경기와는 달리 한 명 한 명 이름이 불릴 때마다 입장하는 방식이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Koo, 우는 거 아니지?”

“처음 오는 애들 중에 우는 놈도 가끔 나오던데. 너도 혹시……?”

올스타전 단골 선수들의 장난기 어린 질문.

내가 무슨 제리인 줄 아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긴 했는데.

만약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를 가득 채운 관중들의 Koo 콜이 없었다면 좀 아슬아슬했을지도 모른다.

“Koo!!! Koo!!! Koo!!! Koo!!!”

저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다저스 팬일 리는 없다.

어쩌면 평소에 나만 보면 으르렁대는 자이언츠나 파드리스 팬일 수도 있고.

이곳 신시내티를 비롯해 나랑은 별 인연이 없었던 팀들의 팬일지도 모르지.

근데 당신들도 막상 불러보니까 좋잖아.

외우기도 쉽고 부르기도 쉽지. 뭔가 한 건 해줄 것 같은 기대감도 막 생기고.

오늘만큼은 다저스를 응원해주는 팬이 아닌, 내 개인 팬을 욕심내도 괜찮지 않을까.

[니가 언제부터 팀을 그렇게 생각했다고…….]

‘조용해.’

그나마 남아 있던 털끝만큼의 감동도 날려버리는 박도현의 지적이었다.

* * *

“플레이 볼!”

올해 올스타전이 열리는 구장은 내셔널리그 소속 신시내티 레즈의 홈구장.

경기는 자연스럽게 아메리칸리그 올스타 팀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불펜 문이 열리고 내셔널리그의 선발 투수 A.D. 존슨이 등장하자마자, 관중들은 미친 듯이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악!!!”

“A.D.!!! Kill them All!!!”

“Ace & Dominant!!! Ace & Dominant!!!”

좀 전에 내가 입장할 때의 Koo 콜은 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의, 광기에 가까운 반응.

신시내티가 시카고와 같은 중부지구에 있고, 거리도 그나마 가까운 편이다 보니.

강성으로 유명한 컵스 팬들이 잔뜩 몰려온 모양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원래부터 언터쳐블에 가까운 투수인데, 고작 1이닝만 던질 예정이니 페이스 조절 따위 엿 바꿔먹은 존슨.

첫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내며 팬들의 기대에 제대로 보답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2번 타자는 파울을 만들어내는 등 조금 더 대응하는 모습은 보여줬지만, 1―2의 카운트에서 5구째에 헛스윙 삼진.

‘이거 그거네.’

포크볼에 가깝긴 한데 궤적을 종잡을 수가 없는, 간신히 내야 안타를 만들어냈던 그 어처구니없는 공.

그 공을 처음 접해보는 아메리칸리그 타자로서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겠지.

“K―K―K!!! K―K―K!!!”

세 타자 연속 삼진을 기원하는 관중들의 목소리.

물론 작정하고 삼진을 잡아주면 야수들 입장에서야 편하긴 하지.

그러나 이런 식으로 대놓고 삼진을 바라는 분위기에는, 타자를 어떻게든 삼진만큼은 피하려는 배드볼 히터로 변신시키는 힘이 있다.

어차피 삼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런 경기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따아악―!

살짝 밀려 들어간 패스트볼을 통타한 아메리칸리그의 3번 타자.

가만히 뒀더라면 충분히 내야를 꿰뚫었을 빠른 타구가 나왔지만.

오늘 지휘봉을 잡은 자이언츠 감독의 시프트가 적중해, 타구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내 글러브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Ace & Dominant!!! Ace & Dominant!!!”

“Koo!!! Koo!!! Koo!!! Koo!!!”

가벼운 수비에도 허슬 플레이급 리액션이 터져 나오는 것 또한 올스타전의 묘미.

오늘만큼은 동료가 된 다른 팀 야수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가 글러브로 내 엉덩이를 후려친다.

누군가 해서 돌아보니, 오늘의 역할을 마친 투수 A.D. 존슨.

“잘하더라, Koo. 괜히 뽑힌 게 아니었어. 혹시 실책이라도 했으면 아주 혼쭐을 내줬을 텐데.”

“하하하하하. 설마요. 농담도 잘하시네.”

“농담 같아 보여?”

“원래 실천에 옮기기 전까진 무슨 말을 해도 농담이라고 저희 아버지가 그러셨거든요.”

존슨과의 훈훈한 대화에, 덕아웃에 있던 컵스 선수들이 진저리친다.

“쟤 A.D.한테 말대꾸하는 거 봐…….”

“목숨을 어따 맡겨놓고 왔나?”

솔직히 압박을 못 느낀다고 하면 거짓말인데, 어차피 자주 볼 사이도 아니고.

주먹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은 원래 사석에서 사람 패고 그러지 않는다.

만약 컵스와 벤치 클리어링이라도 일어나면 모르겠는데, 나도 ‘벤치 클리어링의 황제’가 있으니 맞고만 있진 않을 거고.

[그걸로 커버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안 해?]

에이, 설마.

S등급 재능인데. 파드리스와의 개싸움에서 이미 효과도 확인했고.

아무리 저 양반이 인자강이라고 해도, 재능의 도움을 받으면 어느 정도 커버할 순 있겠지.

“왜 그래, Koo? 나한테 더 할 말 있나?”

“어…… 아뇨.”

커버할 수 있는 거…… 맞겠지?

* * *

“코치님. 저랑 내기 하나 안 하시겠습니까?”

전날, 호텔 레스토랑에서 훌리안에게 제안한 내기의 정체는.

“제가 내일 경기에서 홈런을 치면 코치님이 제 소원 하나 들어주시고, 못 치면 반대로 제가 소원을 들어주는 거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훌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X랄한다. 너 내일 홈런 못 쳤는데 내가 포르쉐 한 대 뽑아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어, 음. 금전적인 소원은 어느 정도 제한을 두는 게 올스타 정신에 어울리지 않을까요?”

결국 잠깐의 협상 끝에, 금전적으로는 1,000달러의 제한을 두는 것으로 내기가 성립됐다.

사실 내 입장에선 불리한 내기인 건 사실이지.

많아야 3개, 경기가 투수전으로 진행된다면 2개의 타석을 소화하고 교체될 게 분명하니까.

그러나 이미 시스템의 돌발 미션을 수락한 시점에서, 홈런은 쳐야만 하는 상황이 됐고.

유인구를 섞어가며 까다로운 승부를 가져가기보다는 정면승부를 들어올 거라 믿고, 과감하게 배팅했다.

투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각 팀을 대표해서 온 만큼 삼진을 잡아내고 싶을 테니까.

“아웃!”

그런 생각을 가지고 들어선 첫 타석의 결과는 좌익수 뜬공.

2―1로 유리한 카운트에서 바깥쪽 패스트볼을 밀어쳤는데, 워닝 트랙에서 잡히고 말았다.

‘컨택이 되든 말든 풀파워로 돌리니까 밀어쳐도 타구가 저기까지 가네.’

원하는 결과는 못 냈지만, 훌리안의 말대로 타석에서의 접근법에 따라 홈런이 나올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고.

다음 타석은 잠시 접어둔 채 유격수로서의 플레이에 집중했다.

[3루수가 놓친 타구를 잡아낸 Koo! 1루로 송구! 아웃! 타자의 발이 조금만 빨랐다면 내야 안타가 됐겠지만 끝까지 집중력을 놓지 않은 Koo의 수비도 훌륭했어요!]

내셔널리그 팀의 3번째 투수로 등판한 제리가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치도록 돕는 호수비를 선보이거나.

[1루 주자! 뛰었습니다! 포수 바로 공을 빼서 커버를 들어온 유격수 Koo에게! 2루에서! 아웃! 도루 실패로 두 번째 아웃카운트가 올라갑니다! 포수와 유격수,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 팀워크가 아주 괜찮았어요!]

연습은커녕 사인도 대충 맞춰뒀던 포수와의 합작 플레이로 도루를 시도하던 주자를 잡아내기도 하면서.

“Koo!!! Koo!!! Koo!!! Koo!!!”

전에 없을 정도로 혜자스러운 리액션을 쏟아부어 주는 관중들에게서 매 이닝 Koo 콜을 얻어낸 끝에.

4회 말,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두 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마운드 위의 투수는 시범경기에서 한 차례 상대해본 적이 있는, 지난해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을 받은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의 에이스.

시범경기 내내 맹타를 휘두르며 타격감이 절정에 달했던 그때도 벅찬 상대였는데.

“스트라이크!”

초구를 흘려보내면서 알아챘다.

날씨도 다 풀리고, 투수들이 컨디션도 올라올 대로 올라오는 7월이 되니, 그때보다 훨씬 빡세다는 걸.

그래도.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던 작년에 비해 올해 성적은 오히려 약간 퇴보한 투수와는 달리.

타자 전향 첫해부터 3할을 훌쩍 넘기며 올스타 직행 티켓까지 따낸 내가, 저쪽으로서도 부담스럽지 않을 리는 없다.

따아아아악―!

2구는 바깥쪽 패스트볼.

좌익수가 타구를 쫓아갔지만, 3루 파울라인 옆 관중석에 떨어졌다.

첫 타석에서 뜬공으로 아웃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헛스윙이 되든 말든 힘을 잔뜩 실은 스윙.

‘이제 뒤가 없네.’

0―2로 몰린 카운트.

그러나 투수 입장에서는, 이때야말로 확실하게 타자를 압도할 수 있는 공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쐐애애액!

홈런을 때리지 못한다고 해도, 시스템이 주는 페널티는 훌리안이 날 부르는 호칭이 ‘작은 꼬맹이’에서 ‘등신’으로 바뀌는 것뿐.

훌리안과의 내기에서 져 봤자 고작 천 달러쯤 잃는 게 전부인데.

소극적인 스윙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으로 말해요’의 특성인, 몸쪽 공에 대한 직감이 발동됐으니까.

따아아아아아아악―!

오랜만에 들어온 몸쪽 승부를 피해갈 순 없는 노릇이었고.

몸쪽 패스트볼을 제대로 공략해 만들어낸 높은 타구가,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의 외야석 2층에 떨어졌다.

돌발 미션을 달성하는 동시에, 훌리안과의 내기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역전 투런포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 * *

올스타전의 결과는 4대 2로 아메리칸리그 팀이 승리를 가져갔다.

내 홈런으로 만들어낸 한 점의 리드를 7회까지 잘 지켜냈지만, 8회 말에 역전 쓰리런을 허용하고 말았으니까.

만약 이 점수를 끝까지 지켜냈더라면.

조금은 이른 타이밍인 6회 초 대수비로 교체되긴 했지만, 어쨌든 결승 홈런을 때려냈으니 MVP도 노려볼 만했을 텐데.

어차피 야구에 만약은 없으니, 그냥 예상이나 해보는 거지.

“제대로 예측하고 돌린 거면 상관없는데, 손맛 보겠답시고 투 스트라이크에서 무지성으로 그랬다간 삼진당하기 딱 좋다. 알지?”

다저스 구단이 준비해준 공항행 리무진 앞에서, 훌리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

“우리 내기했던 거 안 잊었죠, 코치님?”

그리고 나는 어젯밤 훌리안과 내기를 걸었다는 걸 잊지 않았지.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이었는지 훌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연봉 500만 달러나 받아먹는 놈이 그깟 천 달러가 아까워서 그러냐? 그래, 계좌로 보내주면 되겠냐?”

만약 내가 졌으면 현금으로 요구할 생각이었나 보네.

그러나 나는 훌리안에게 내기의 대가를 돈으로 받을 생각이 없었다.

“병원 가요, 훌리안.”

훌리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건강검진 좀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예약해놓을 테니까, 시간 비는 날 알려줘요.”

지난겨울 훌리안과 만나 훈련을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1년 넘게 놀기만 한 탓인지 턱이 사라질 정도로 살이 쪄 있었는데.

시즌 개막 후 고작 3개월 만에 그 살이 다 사라져버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웠다.

가끔 연락해올 때도 어디 놀러가서 뭐 먹었네, 이런 자랑질이나 했지 운동을 하는 기미도 안 보였고.

“내 몸 멀쩡한데 병원을 왜 가냐? 얘가 헛소리하고 있어.”

인종차별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대체로 중남미 아저씨들이 병원을 찾는 걸 굉장히 꺼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건 세이버메트릭스를 비롯해 온갖 첨단 스포츠 기술을 섭렵하고 있는 훌리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이성이 아니라 감성.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저희 아버지랑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는데……. 몸에 종양 있는 걸 초기에 발견했다고 하더라고요.”

[어?! 진짜?!]

당연히 뻥이지.

아버지랑 연락한 것부터가 뻥이다. 시즌 끝나기 전엔 굳이 연락할 계획도 없고.

근데 아버지랑 훌리안이 앞으로 평생 만날 일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 내 얼굴도 안 보는 양반인데.

“미리미리 발견해서 진짜 다행이다 싶었는데, 코치님도 나이가 있으시니까 걱정이 돼서…….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스승인 자신을 걱정해주는 제자.

요즘 메이저리그에서 보기 드문 올드스쿨 스타일 트레이너인 훌리안의 어깨가 올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본인 돈도 아니고 내 돈으로 해주겠다는데.

“뭐…… 어차피 조만간 LA 갈 일도 있고. 내 돈 쓰는 것도 아니니까…….”

일정을 조율한 다음, 리무진을 타고 떠나는 훌리안을 배웅했다.

타자로서 많은 걸 이루긴 했지만, 훌리안만큼 나를 잘 파악하고 가이드라인을 잘 짜주는 트레이너를 다시 찾긴 힘들 거다.

비록 약속했던 1,000달러보다 비용은 더 들어가겠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을 막을 수만 있다면 싼 거지.

[근데, 너 홈런 못 쳤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딱 보니까 돈으로 요구했을 것 같은데.]

박도현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것도 이미 다 생각해둔 게 있지.

‘지금은 핸드폰 안 가져왔으니까 나중에 보내준다고 한 다음에, 건강검진 이용권 보내주면서 이걸로 퉁 치자고 하려고 했지.’

[너어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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