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변화의 바람 (1)
메이저리그의 트레이드 마감일은 7월 31일이다.
올스타전 직후 우수수 쏟아지고, 한동안 잠잠해졌다가 마감일 직전에 다시 쏟아지는 양상으로 흘러간다.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한자리에 모이는 단장들이 각 팀의 방향성에 따라 트레이드를 단행하는 것.
전반기 지구 2위를 사수하면서 윈나우를 달리고 있는 다저스도 예외는 아니었고.
올스타전을 치른 직후 장거리 비행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풀기도 전에 동료의 트레이드 소식을 접했다.
[LA 다저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 3대 1 트레이드 합의!]
휴스턴 애스트로스 Get: 제롬 클라우스(C, 23), 피트 넬슨(1B, 21), 조슈아 어윈(RP, 19)
LA 다저스 Get: 아이작 란드리(LP, 26)
출근길에 흘러나온 뉴스에 박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백업 포수 제롬과 유망주 둘을 보내고,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선발이자 올해 FA를 맞는 좌완 선발을 데려오는 트레이드.
[이게 맞나? 백업치고 제롬만큼 해주는 포수도 별로 없을 텐데…….]
‘올해는 우승만 보고 달린다 이거지.’
애스트로스도 아슬아슬하게 지구 1위를 달리며 우승을 노리고 있는 팀.
보통은 윈나우 팀과 리빌딩 팀끼리 트레이드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 주전 포수를 부상자 명단에 올린 애스트로스와, 최근 후반기에 부진했던 로버트와 경험이 부족한 하위 선발들을 생각하면 계산이 서는 선발 투수가 필요했던 다저스이기에.
서로 필요한 부분을 보강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재계약으로 붙잡을 생각으로 데려온 건가?’
아무리 에이스급 투수라고는 해도, 선수 하나를 몇 개월 쓰는 것치곤 너무 비싸다는 생각은 지우기 어렵지.
백업 포수 제롬, 토론토에서 앤서니와 함께 받아온 더블 A의 1루 유망주, 싱글 A 투수까지 3명을 보내야 했으니.
물론 그거야 프런트가 생각할 일이고.
선수가 할 일은 경기에 나가 승리를 가져오는 것뿐.
“잘들 쉬셨습니까.”
점심 먹고 훈련하면서, 박도현이 그랬던 것처럼 올스타전 썰도 좀 풀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라커룸에 들어가자마자 제롬을 둘러싸고 있는 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왜들 그래? 나 거기 가면 주전 포수잖아. 이놈의 투수 친화 구장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속이 다 시원…….”
마지막 인사를 하러 다저 스타디움에 얼굴을 비춘 제롬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아무리 메이저리그가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이제 막 풀타임 3년 차의 젊은 선수한테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겠지.
“오클랜드에서 합류한다고 했지? 그쪽 홈 경기였으면 얼굴도 못 보고 떠날 뻔했네.”
“거기 배터리 코치 유명하잖아. 제대로 배워서 FA 때 한몫 제대로 땡겨야지.”
“맞아. 너도 외야수로 나가는 거 스트레스 많이 받았잖아.”
“그리고 작년 기준으로 투수 친화 구장 순위는 미닛 메이드 파크가 여기보다 훨씬 높았어.”
공교롭게도 애스트로스에서 다저스로 트레이드됐던 헨리가 막판에 초를 치긴 했지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짐을 싸서 떠난 제롬.
후반기 첫 경기도 그렇게 훈훈하게 흘러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 *
기나긴 시즌 속 오아시스 같은 휴식인 만큼, 올스타 브레이크를 손꼽아 기다리는 선수들이 많지만.
의외로 적지 않은 선수들이 올스타 브레이크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3일이라는 휴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늘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루틴도 무너지고 몸도 무거워진다나.
불행히도 오늘 경기의 선발 투수도 그런 타입인 모양이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홈 3연전으로 시작되는 후반기 일정.
다저스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로버트! 또 왜 그래!!! 너 원래 이런 놈 아니잖아!!!”
등판을 마친 로버트는, 지정석에 가만히 앉은 채 한 팬의 절규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오늘 성적은 4와 3분의 1이닝 3실점.
그냥 평범하게 망한 경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본인이 싸고 내려온 1사 만루의 똥을 후속 투수가 병살을 유도해 막아줬으니. 보이는 성적에 비해 팬들이 느끼는 실망감도 크겠지.
당연히 덕아웃 분위기도 개판이었지만.
타자들이 영 힘을 못 쓰는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 타이밍 진짜 안 맞네.”
“애리조나에서 봤을 때보다 더 빡세진 거 같은데?”
오늘 디백스의 선발은 호세 리카르도.
나랑은 인터뷰를 통해 살짝 불이 붙으려다 만 수준의 가벼운 설전이 있었던 선수.
“스트라이크 아웃!”
스탯도 괜찮았고, 9이닝 1실점 도미넌트 스타트 패전 등 임팩트 있는 경기를 여럿 남겼음에도 올스타에 초청받지 못한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제대로 떨어지는 고속 슬라이더를 섞어가며 다저스 타자들에게서 차곡차곡 삼진을 빼앗았다.
‘저건 노린다고 칠 수 있는 게 아니겠더라.’
구질 자체가 위협적인 경우 차라리 손을 안 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어차피 건드려 봤자 파울 아니면 땅볼이니까.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리면 거리낌 없이 고속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으니, 애초에 거기까지 승부를 안 가져가는 게 현명하다는 뜻.
“스트라이크 아웃!”
다저스의 6회 말 공격.
기어이 두 자릿수 탈삼진을 얻어낸 호세 리카르도를 상대하기 위해 타석으로 향했다.
‘쟤가 도미넌트 스타트 하고도 졌던 그 경기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였던가?’
[그때 이후로 이닝 소화에 집착하게 됐다는 소문이 있어.]
첫 타석은 볼넷으로 나가서 도루도 성공했지만, 득점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두 번째 타석은 0―2로 몰렸다가 고속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
“스윙! 스트라이크!”
“볼!”
카운트의 균형을 맞춘 상태에서 투수와 눈을 마주쳤다.
투 스트라이크로 몰리면 지금보다 훨씬 까다로워지는 투수.
게스 히팅을 시도해볼 마지막 기회.
‘이닝 소화에 집착한다 이거지.’
6회 첫 타자까지 잡은 상태에서 투구 수 80개. 최소 7회까지는 막을 수 있는 상황.
나와의 대결에서 몸쪽 승부를 걸었다가 홈런을 얻어맞은 투수가 한둘이 아닌데다, 장타의 위험성이 높은 몸쪽 코스는 머릿속에서 지우고.
첫 타석에서 바깥쪽 공을 여러 번 커트해낸 끝에 볼넷을 얻어냈으니, 눈에 익었을 거란 생각에 쉽게 손이 가지 않을 테니.
결국 머릿속에 남겨둔 선택지는 하이 패스트볼이었고.
따아아아아아악―!
과감하게 띄우지 못한 하이 패스트볼은 장타의 먹잇감이 되기 마련.
살짝 빗겨맞았지만, 있는 힘 없는 힘 죄다 끌어모은 스윙은 가운데 담장을 살짝 넘기는 타구를 만들어냈다.
“Koo!!! Koo!!! Koo!!! Koo!!!”
“홈런 더비 나가면 죽 쑨다고 누가 그랬어?!”
“전반기 15개, 홈런 더비에서도 15개! 후반기에도 딱 15개만 더 날리자!!!”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베이스를 돌고, 덕아웃으로 돌아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괜히 기분 안 좋은 로버트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었다가 걷어차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방금 타석을 복기하기 바빴다.
‘스윙 속도를 높이면, 이 정도 빗맞은 타구도 넘어간다 이거지.’
이번 시즌은 장타에 대한 욕심을 버리자고 약속했지만, 찾아낸 실마리를 굳이 방치할 필요는 없지.
흡족해진 기분으로 두 점 차이로 좁혀진 경기에 다시 몰입하기 시작했고.
[좌중간을 꿰뚫는 타구! 2루 주자 Koo는 홈으로 쇄도! 홈에서! 홈에서! 세이프! 스코어 5대 3! 선발 호세 리카르도가 내려간 직후 역전을 허용하더니, 이제는 거리를 더 내주고 있는 디백스입니다!]
[아, 투수 코치 마운드를 방문합니다. 선발 투수가 8회 말 2사까지 막아주고 내려간 이후, 벌써 두 번째 투수 교체예요. 아웃카운트 하나 잡기가 원래 이렇게 어려웠나요?]
호세 리카르도의 뒤를 이어 등판한 투수들이 마운드에서 불장난을 하며 기어이 8회 말 역전승을 가져온 다저스.
막강한 선발진을 구축한 디백스가 아직까지도 지구 3위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보여주는 경기였다.
* * *
경기 종료 직후, 투수조에서 불펜 한 명이 소리소문없이 트리플 A로 강등됐다.
듣기로는 평소처럼 불펜에서 대기하다가 소식을 듣고 인사할 시간도 없이 바로 내려갔다고 하던데.
나도 데뷔 시즌 로스터에 자리가 없어 똑같은 방식으로 마이너에 내려갔던 적이 있기에 그 심정이 어떨지 공감은 되지만, 원래 메이저리그가 이렇게 정 없이 돌아가는 동네다.
로스터에 자리를 만든 것은, 그 자리를 누군가로 채워야 하기 때문.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라커룸에서 그중 한 사람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브레이든 돌턴입니다. 포지션은 포수입니다.”
듬직하고 차분한 인상의 선수 하나가 비어 있던 제롬의 자리에 짐을 풀고 있었다.
전날 연락을 받고 트리플 A 구단이 있는 오클라호마에서 올라왔다는, 다저스의 새로운 백업 포수.
이 친구와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지.
“반갑다. 나는 Koo라고 불러주면 되고. 우리 B 게임에서 같이 뛴 적 있지?”
“어, 아, 네. 저기, 기억하고 계셨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요…….”
그 개막장 경기를 도대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3루수, 2루수, 투수 순으로 실책을 저지르며 안타 하나 없이 무사 만루가 됐던 경기.
그 경기에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잡아 삼중살까지 만들어냈으니 더더욱 기억에 남고.
“그때 투수한테 이랬던가? 한 번만 더 사인 무시하면 방출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불X을 잡아 뜯어버리겠다고…….”
“어, 그게. 그 친구랑은 원래 알던 사이라. 여기서 그런 건방진 말은 안 할 겁니다. 절대로요.”
“그래. 근데 혹시 아드리안이 속 썩이면 그런 말 해도 돼. 실천에 옮겨도 되고. 내 권한으로 허락한다.”
“예?! 어, 저기…….”
그렇게 제롬의 빈자리를 채울 유망주 포수의 뒤를 이어.
그 제롬을 휴스턴에 보내고 대신 받아 온 선발 투수가 느지막이 도착해 동료들 앞에 섰다.
“반가워. 트레이드는 처음인데,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돼서 기쁘네. 열심히 할게!”
휴스턴의 2선발로 활약하던 아이작.
연봉조정으로 제법 큰 돈을 벌었고, 내년엔 FA로 더 큰 돈을 벌 것이 확실시되는 투수답게 얼굴에 귀티가 나고 여유로운 태도였는데.
우리 팀과는 뜻밖의 인연이 있었다.
“다니엘, 다저스로 갔다고 소식은 들었는데! 이게 진짜 얼마 만이야!”
“나도 반가워. 같이 뛰었던 건 한…… 8년 전인가?”
가성비 FA로 영입했음에도 3선발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다니엘 슈미트가, 마이너 시절 아이작과 함께 뛰었던 적이 있었던 것.
그렇게 아이작을 클럽하우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새로운 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다니엘이었지만.
“근데 다니엘 너 분위기가 좀 변했다.”
“어? 무슨 분위기?”
“뭔가 좀…… 되게 편안해 보이는? 욕심을 내려놓은 것 같은? 혹시 종교라도 믿게 된 거야?”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다니엘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아이작의 어깨를 부여잡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것도 믿지 마, 아이작.”
“어? 뭐라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야. 다른 사람을 믿고, 기대감을 가지지 마. 결국 상처받는 건 나일 테니까.”
그 자리에서는 ‘애가 좀 이상해졌네’ 정도로 가볍게 넘어갔던 아이작이었지만.
바로 그날 이어진 경기에서, 다니엘이 7이닝 1실점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로 패전을 떠안는 걸 보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시즌 4승 10패째. 평균자책점은 3.47로 하락했다.
“거봐, 내가 만약 믿음을 계속 갖고 있었다면 실망했겠지? 상처받았겠지? 여기서 뛰려면 많은 걸 내려놓아야 해.”
“어, 응…….”
그…… 저기요.
저희가 항상 이따위 경기를 하는 팀은 아니거든요?
[4타수 무안타에 실책도 하나 해놓고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려고.]
진짜 아픈 곳만 골라서 패는 박도현이었지만, 오늘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