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변화의 바람 (2)
“감사합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이따 보자고.”
홀로 남은 면담실 안에서, LA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은 기지개를 켰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선수들을 떠올리는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 신인들은 정말로 잘 크고 있어.’
신인을 비롯해 멘탈 케어가 필요한 선수들과 면담을 가지는 건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 시즌 도중 콜업된 신인들은 머지않아 그의 케어가 불필요해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콜업 후 한 달도 안 되어 다저스 필승조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 조쉬는 조금 소심한 게 흠이지만, 고참 투수들의 도움을 받아 팀에 잘 녹아드는 중이고.
백업 포수 자리를 채우러 한발 늦게 콜업된 브레이든은 전날 처음으로 선발 출장해서 흠잡을 데 없는 수비를 보여줬다.
‘그러고 보니 둘 다 Koo를 잘 따른다고 했던가?’
가장 잘해주는 선배가 누구냐는, 살짝 짓궂은 질문에 두 선수 모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구현기를 골랐다.
조쉬는 구현기가 투수조 선배들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했고.
브레이든은 잠깐 같이 뛰었던 연습 경기까지 기억하고 먼저 아는 척해준 게 감동적이었다나.
‘Koo랑 수시로 면담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무리 구현기에게 메이저리그 경력이 있더라도 야수로서는 신인이었다.
구현기가 메이저리그에서 유격수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미 검사로 증명한 약물 의혹을 비롯해 온갖 음모론이 쏟아졌지만, 이젠 그런 것도 사라졌다.
본인이 실력으로 증명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더 얹겠나.
시즌 개막 직전 주전 유격수가 부상으로 이탈하고, 주전 1루수도 부상자 명단을 오르내렸지만.
그래도 이번 시즌은 그의 메이저리그 코칭스태프 경력을 통틀어 가장 평화로운 시즌에 속했다.
만약 구현기가 내야진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시즌 초부터 온갖 난항을 겪었겠지.
“오늘도 어제처럼만 흘러가길.”
그가 매일같이 외우는 주문이었다.
신인들은 제자리를 잡아가고, 장기 부상자가 나오지 않으며, 주전과 백업을 적절히 교체하며 체력 안배도 잘 되어가는 요즘.
이대로 좋은 흐름을 이어간다면 지구 우승도 노려볼 만하니까.
그러나 야구의 신은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간다 싶을 때 꼭 한 번씩 어깃장을 놓곤 한다는 것을.
오브라이언 감독은 모르고 있었다.
* * *
슬슬 체력 저하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후반기지만, 다저스는 나름 괜찮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반환점은 이미 돌았고, 100경기에 육박하는 지금 54승 44패.
자이언츠와의 맞대결에서 뼈아픈 루징 시리즈를 당하며 지구 선두에선 한 발짝 멀어졌지만, 남은 일정을 생각하면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게임 차.
파드리스와의 원정 3연전에서 위닝 시리즈를 확정 짓고, 낮 경기로 배정된 3차전을 치르러 펫코 파크에 출근했는데.
“Koo. 혹시 다음 주에 바빠?”
오늘 불펜 피칭이 예정된 제리가 라커룸에서 내 주변을 기웃거렸다.
“전에 너랑 조쉬랑 셋이 갔던 가게 말이야, 조쉬가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라고. 원정 끝나면 거기서 저녁 먹고 헤어지는 거 어때?”
“마음에 들어 했다고? 걔가?”
둘이 뭔가 대화는 나누고 싶은데 서로 눈치만 보길래, 보다 못해 끼어들어 만들어줬던 자리였는데.
손 벌벌 떨면서 깨작거리던 게 마음에 들어 하는 걸로 보였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귀찮아. 그냥 둘이 가.”
“그래? 밥값도 내가 내려고 했는데, 이거 참 아쉽게 됐네. 같이 밥 먹는 김에 조쉬한테 네 실체를 전부 까발려야겠어. 문제 없지?”
“할 수 있으면 해봐. 나 화장실 갔다 오는 동안 둘이 고개 처박고 핸드폰만 봤으면서.”
“그, 그건 그냥…….”
“에이스 될 거란 놈이 낯을 그렇게 가려서 어쩌려고 그러냐. 너 FA 때 트레이드 거부권 꼭 넣어라. 가서 적응하는 데 한 1년 걸릴 텐데 먹튀도 그런 먹튀가 없을 거 아냐.”
팩트로 두들겨 맞은 제리가 울먹이면서 자리를 떴다.
[너무 심한 거 아냐? 쟤 기록 끊기고 너 때문에 멘탈 나가서 그랬다고 인터뷰라도 하면 너 다저 스타디움에 생매장당할 거 같은데.]
‘이따 다음 원정지 가서 룸서비스로 피자 한 판 보내주면 다 풀린다.’
[불쌍한 제리, 이딴 것도 친구라고…….]
* * *
파드리스와 대판 싸우고 나서 다저스 선수들은 샌디에이고 원정을 반기지 않았지만.
지난 원정 때 파드리스의 연패기록을 20연패로 늘리고 나서부터는 그것도 옛말이 됐다.
일단 관중이 들어차 있어야 야유를 보내든 오물을 투척하든 할 텐데, 한눈에 보기에도 군데군데 휑하니 비어 있었으니까.
[그래도 요새 얘네 연승도 하고, 정신 좀 차리는 것 같던데. 왜 이렇게 관중이 없냐?]
‘우리 상대로 상대 전적이 개판이니까 그렇지.’
이번 시즌 첫 시리즈에서 기록한 1패를 제외하면, 다저스는 파드리스 상대로 홈과 원정 할 것 없이 모두 승리를 가져다 보니.
어째 파드리스 팬보다 다저스 팬이 더 자주 눈에 띄는 오늘 경기.
“플레이 볼!”
오늘의 선발 투수는 아이작 란드리.
이적 후 첫 경기는 6이닝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승리를 챙기면서 홈팬들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1회와 2회를 모두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지난 등판과 다름없는 좋은 컨디션을 증명했다.
바로 전날 똑같이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고도 다른 투수에게 승리를 넘겨줘야 했던 다니엘의 허망한 눈빛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던 경기.
따아악―!
“와아아아아아!!!”
타자들도 아이작의 호투에 힘입어, 1회와 2회 각각 한 점씩을 내며 일찌감치 2대 0으로 앞서나갔다.
초반에 점수를 내고 선발 투수가 호투하는, 이번 시즌 다저스의 승리 공식과도 같은 경기.
“아웃!”
3회 초 첫 타자를 초구에 잡아낼 때까지만 해도, 오늘 경기 역시 지난 두 경기처럼 순조롭게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따악―!
이번 이닝 두 번째 타자이자, 파드리스의 8번 타자는 3루 쪽으로 먹힌 타구를 뽑아냈고.
커버를 들어가면서도 사실 이 정도 타구는 켄이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글러브에 잘 가둬놓은 공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켄.
펫코 파크를 찾은 다저스 팬들과 투수 아이작, 내야수들, 심지어 1루를 밟은 상대 타자까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 난 거 같은데.’
경험 부족한 선수가 저런 플레이를 하면 긴장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건데.
켄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내야수가 저러는 건, 어디 한 군데 이상이 생기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른쪽 옆구리를 붙잡은 채 인상을 찌푸리는 켄.
재빨리 뛰쳐나온 팀 닥터와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채드윅과 교체되어 그라운드를 벗어났다.
“Koo, 3루로 이동해줘야겠다.”
“아, 예.”
유격수에서 3루수로 수비 위치를 이동한 후.
켄이 사라진 덕아웃으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경기장 안으로 되돌렸다.
“아웃!” “아웃!”
상대 투수가 어설픈 희생번트를 시도했다가 병살을 만들어준 덕분에 실점 없이 끝난 3회 초.
숨 돌릴 틈도 없이 3회 말의 선두 타자로 타석에 나갔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아무리 약팀의 5선발이라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타자도 공략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4구 만에 어정쩡한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덕아웃에 복귀했다.
의무실에 갔는지 병원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덕아웃에서 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괜찮아, Koo. 어디 한 군데 다치는 거 우리한테는 늘 있는 일이잖아.”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게 티가 났는지 클레망이 옆에 앉아 위로해줬는데.
물론 그거야 나도 당연히 알지만. 내가 유독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내 탓도 있는 건가……?’
수비 시프트가 성행하게 되면서, 서로 인접한 모든 내야수 간의 조율이 중요해졌는데.
수비 범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과도하게 넓은 범위를 떠맡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당장 내가 유격수로서 괜찮은 수비를 할 수 있는 것도, 3루수 켄이 넓은 범위를 책임져주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한몫했는데.
만약 그 부담이 쌓이고 쌓이다 터진 거라면…….
따악―!
머릿속이 복잡해서인지, 타구에 대한 반응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떨어졌고.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잡아냈을 타구를 글러브로 튕겨내고 말았다.
후반기 들어 두 번째 실책이자, 3루수로서는 첫 실책.
결국 이 실책이 빌미가 되어, 다저스 이적 이후 이어오던 아이작의 무실점 행진이 끝났고.
[LA Dodgers 4 : 2 San Diego Padres]
경기는 다저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이번 시즌 파드리스 상대로 극강의 상대 전적을 유지하게 됐지만.
켄은 다음 원정지로 향하는 전용기에 올라타지 못했다.
* * *
[마이크, 3루수 필요하지?]
“본론부터 바로 말하는 건 마음에 드네. 누굴 줄 건데?”
[앨런. 수비가 기깔나는 거 자네도 알잖아.]
“대가는?”
[팀 내 유망주 랭킹 30위 in 1명, out 1명. 이렇게 둘만 받을게.]
LA 다저스 마이크 올리버 단장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타율 1할대에 0홈런짜리 수비형 백업 3루수를 30위권 유망주와 바꾸자는, 들을 가치조차 없는 제안.
문제는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제안이 지금껏 그에게 들어온 제안 중 그나마 양심적인 편에 속한다는 것.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올리버 단장은 이를 악물었지만, 겨우겨우 감정을 억눌렀다.
만약 혼자 있었다면 서류철이라도 집어던졌겠지만, 지금은 프런트 중역들이 총집합한 상태.
그는 몸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놓인 문제는 간단합니다.”
올리버 단장은 초췌해진 사람들 앞에서, 화이트보드에 한 문장을 적었다.
최소 4주에서 최대 6주.
옆구리 부상으로 팀에서 이탈한 주전 3루수 켄이 복귀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지금 전력으로 이 기간을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게 다예요.”
임시방편으로 트리플 A에서 3루수 한 명을 콜업했지만, 그 선수에게 많은 걸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수혈하자니, 윈나우를 달리는 다저스로서는 최소한 준척급 3루수는 데려와야 할 텐데.
딱히 눈에 띄는 선수도 없을뿐더러, 그나마 눈을 낮춰도 다저스가 급한 걸 아는 상대편에서 터무니없는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팀의 명운은 구현기가 주전 3루수의 빈자리를 메꿔줄 수 있느냐는 것.
“Koo가 3루수 경험이 아예 없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5월부터 3루수 출장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3루 수비에서 문제는 없었습니까?”
“켄이 부상당한 경기에서 한 차례 실책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없습니다.”
올리버 단장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과 그에 따른 가상의 결과가 스쳐 지나갔고.
결국 한참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대로 갑시다.”
이번 시즌 다저스에서 내야수로서의 성공적 안착, 연속 타석 안타 기록, 무보살 삼중살 등등, 이미 수많은 기적을 보여줬던 구현기.
올리버 단장은 그 기적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만약 이번 시즌 여러 차례의 트레이드를 성공으로 이끌어온 자신의 판단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구현기가 이번 시즌이 빅리그 내야수로서의 첫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야구의 신은 이미 내린 선택을 되돌릴 기회를 주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