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변화의 바람 (3)
“반갑습니다. 제프리라고 합니다. 제프라고 불러주세요.”
한순간에 주전 선수가 이탈하더라도, 예정된 경기가 미뤄지지는 않는다.
로스터의 빈자리가 생기면 어떻게든 채우는 것이 프런트의 역할.
켄이 병원으로 이송된 바로 다음날, 트리플 A에서 올라온 3루수가 다음 원정지인 세인트루이스로 급히 합류했다.
“우리 X 된 것 같은데.”
새로 합류한 선수가 선수단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올스타 외야수이자, 이번 시즌 다저스에서 유일하게 20홈런을 넘긴 R.H.가 내 옆에 서더니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둘이 예전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싶어 물어봤더니, 그건 또 아니라길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가적인 3루수 보강 없이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지나고 나서 R.H.는 나한테 한 번 더 속삭였다.
“우리 진짜로 X 된 것 같은데.”
이때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제프리는 콜업 이후 나와 번갈아 3루수로 선발 출장하는 중이었고.
16타수 2안타로 공격력은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무난한 3루 수비를 보여주며 켄의 공백을 어느 정도 채워주고 있었으니까.
“윈나우를 노린다면서, 이 시기에 주전 내야수를 보강 안 하는 건 미친 짓이지.”
R.H.의 말뜻이 정확히 어떤 의미였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빠른 타구가 자주 가면서 핫코너라고 불리는 3루수와, 내야 수비의 총사령관이라 불리는 유격수.
이 자리를 AAAA리거와 경험이 일천한 선수들로만 채운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도.
* * *
[COL 4 : 3 LAD]
9회 말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잡히며 경기가 끝나는 순간.
숨죽인 채 경기를 지켜보던 다저 스타디움의 홈팬들은 선수들을 향해 절규했다.
“야!!!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어떻게 만루에서 한 놈도 못 들어올 수가 있어!!!”
“내가 이딴 경기나 보려고 휴가 쓰고 온 줄 알아?!”
끝까지 아슬아슬한 점수 차를 유지했음에도 팬들의 반응은 거셌다.
내가 팬들 입장이었어도 그랬겠지.
야금야금 패배를 쌓아간 끝에 오늘로써 9연패를 당했으니까.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찬스는 9회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고, 그 기회를 놓친 건 선수들인데 무슨 변명을 하겠나.
침울한 표정의 선수들이 하나둘 덕아웃 안쪽으로 퇴장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배트 케이지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오늘 경기에서 3루수로 선발 출장해, 4타수 무안타 2삼진에 병살 두 개를 때리며 공격의 맥을 죄다 끊어놓은 제프리.
다들 신경 안 쓰고 지나치는 와중에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 저기……. 들어가자.”
최근 출전 기회가 늘었지만, 오늘은 벤치를 지켰던 채드윅이었다.
아마 본인도 시즌 초반 부담감에 삽질했던 기억이 있는 만큼,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러는 모양인데.
“…….”
“어, 가려고……? 그래, 내일 보자!”
제프리는 그 손을 밀어내더니 말없이 덕아웃 출구로 향했다.
어차피 4주짜리 목숨이라고 자포자기라도 하는 걸까.
아무리 동료들 보기 미안하고 쪽팔려도 저러면 어쩌자는 건지.
집에 돌아가자마자 씻고 누워서 다저스 포럼에 접속해보니, 오늘 경기가 그새 기사로 올라와 있었는데.
별로 읽어보기 싫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가득하다.
[LA 다저스, 충격의 9연패…… 와일드카드 레이스도 아슬아슬]
[10경기 13실책! 단단하던 다저스 내야진의 붕괴, 원흉은 누구인가?]
[트레이드 데드라인 앞두고도 3루수 보강에 미온적이던 다저스 프런트! 오판인가, 태만인가?]
[Koo, 시즌 25도루―19홈런 달성! 타자 전향 첫 시즌만에 20―20 눈앞에 두다!]
그나마 마지막 기사는 긍정적인 소식을 담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홈런과 도루를 하나씩 추가하면서, 호타준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20―20이 머지않았으니까.
[실책도 하나 추가했잖아. 그건 왜 쏙 빼놓냐?]
“안 싸물어 진짜?”
후반기에만 홈런 네 개를 추가하고, 타율도 3할 3푼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공격에서는 제몫을 해내고 있지만.
문제는 수비다.
주전 3루수 켄의 공백으로 유격수와 3루수를 자주 오가고 나서부터, 점차 실책이 늘었고.
예전처럼 타구를 적극적으로 쫓아가 처리하는 게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이긴 해.]
박도현도 그렇고, 오프 시즌에 수비 훈련을 도와준 인스트럭터도 그렇고. 다들 입을 모아 하는 소리긴 하지.
유격수를 보다 가끔 3루수를 보는 것과, 3루수를 보다 가끔 유격수를 볼 때의 체감상 난이도가 확연히 다른데.
그건 본인만의 수비 템포가 몸에 완전히 쌓이고 나면 해결된다나.
문제는 다저스가 윈나우를 달리는 팀이라는 것.
시간을 더 달라고 요구하기엔 이미 자이언츠와의 게임 차도 많이 벌어졌다.
[솔직히 이건 제프리 책임도 크지. 걔가 2할대만 쳐줬어도 꾸준히 3루에 박아놨을걸?]
이건 시즌 초, 채드윅이 어쩔 수 없이 유격수 자리를 채워야 했던 비슷한 상황에서 감독님이 요구한 구체적인 수치다.
그런데 지금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출전하고 있는 제프리의 타율은 1할대가 붕괴되기 직전.
수비 안정성을 생각하면 안 쓸 수는 없는데, 타격 생산성이 아예 없으니. 감독님도 속이 타들어 갈 거다.
[조나단 걔도 3루수잖아. 트리플 A 올라가서도 잘하는 모양이던데?]
기존에 트리플 A 구단의 주전 3루수로 뛰던 제프리가 빅리그의 부름을 받으면서, 더블 A로 올라간 지 얼마 안 된 조나단이 초고속 승격과 함께 그 자리를 채웠는데.
거기서도 장타를 뻥뻥 터뜨리는 바람에, 차라리 얘를 올려서 쓰라는 팬들의 아우성이 거세다.
마이너 1년 차 박도현도 빅리그에 올린 전례가 있으니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일도 지면 아마 단장님도 결단을 내리든가 하겠지.”
고작 1패 차이라도, 9연패와 10연패는 팬들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무게가 다르니까.
그러나 다음날, 경기가 끝나기도 전.
승패와 무관한 뜻밖의 사건으로, 조나단의 빅리그 콜업이 빠르게 결정되었다.
* * *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홈 3연전 마지막 경기이자, 10연패의 기로에 선 경기.
경기 시작 전 발표된 타순은 9번 투수를 제외하면 전날과 완전히 똑같았다.
이 사실에 코칭스태프들이 머리를 안 굴린다며 복장을 터뜨리는 게 덕아웃까지 들려왔지만, 어제 경기가 그나마 최근 경기 중 가장 승리에 가까웠다는 걸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오늘의 선발 투수는, 아이작의 영입 이후 선발 로테이션에서 탈락했지만 대체 선발로 종종 기용되는 모리츠.
로버트가 컨디션 저하로 로테이션을 한 번 더 거르기로 하면서 기회를 얻었고.
따아악―!
“Let’s Go! Dodgers!!!”
“으아아아!!! 젠장!!! 믿고 있었다고!!!”
따아악―!
“야!!! 니가 그러고도 여기서 뛸 자격이 있냐?!”
“하여튼 믿을 놈 하나 없다니까!!!”
연패 중인 팀이 그렇듯, 안타가 터질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팬들.
첫 타석에서 좌익수 앞 안타를 뽑아냈을 땐 간이고 쓸개고 다 뽑아줄 것처럼 굴더니, 두 번째 타석에서 병살을 때리니 순식간에 역적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경기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름 순탄하게 이어진 편이었고.
4회 초 수비를 삼자범퇴로 끝낸 시점에서, 양 팀의 점수는 1대 1 동점.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5번 타자와 6번 타자가 연달아 아웃되고, 7번 3루수로 선발 출장한 제프리의 차례.
첫 타석에서 출루에 실패하며 기어코 1할 타율이 무너졌기에, 다들 아무런 기대감 없이 슬슬 공수교대를 준비하던 그 순간.
따아악―!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넉넉한 타구에, 1루 베이스를 밟고 포효하는 제프리.
그라운드를 멍하니 쳐다보던 코치들이 황급히 회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 뭐야!”
“이러면 우리 대타 쓸 수 있지 않나?!”
어차피 3일 휴식 후 등판이라 3~4이닝 정도만 던질 예정이었던 모리츠인지라, 불펜에서는 마리오가 몸을 풀어놓은 상황.
만약 8번 타자가 출루에 성공한다면 투수 타석에 대타를 내서 기회를 이어갈 수 있으니, 덕아웃 분위기도 모처럼 달아올랐다.
“대타 쓰겠습니다!”
짧은 회의 결과, 코치들은 타격면에서 큰 기대를 하기 주전 포수를 빼고 대타를 투입하는 결단을 내렸고.
자연스레 대타 성공률이 가장 높은 벤이 배트를 들고 덕아웃 밖으로 뛰어나갔다.
[솔직히 이른 타이밍이긴 한데, 괜찮겠지?]
‘벤이라면 괜찮을 거야.’
벤은 파드리스에 있던 시절부터, 대타 자원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경기 중반쯤 되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두곤 하는 선수다.
그런 벤을 보며 젊은 백업 선수들이 같은 습관을 들일 정도니까.
따아악―!
초반부터 카운트 싸움을 유리하게 끌고 가던 벤은, 3구에 벼락같은 스윙으로 중견수 앞 안타를 만들어냈다.
“우와아아아…… 아아아아악!!!”
관중석과 덕아웃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환호는, 채 끝나기도 전에 비명으로 바뀌었다.
1루에 있던 제프리가 2루를 돌아 3루까지 달리다가, 3루수의 태그에 걸리고 만 것.
“아웃!”
3루심의 판정이 떨어지자마자 제프리는 펄쩍 뛰며 챌린지 사인을 보냈지만, 바로 옆에서 본 3루 코치부터가 고개를 처었다.
이 거리에서 보기에도 아웃 타이밍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으니 오죽하겠어.
“뭐야? 쟤 지금 항의하나?”
“적당히 하고 좀 들어오지, 참…….”
3루 코치가 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날뛰는 제프리를 잡아끌고 있었다.
[솔직히 억울하긴 할 텐데, 어쩌겠어. 상대가 잘했는데.]
주루 플레이라는 게 발이 빠를수록 유리한 건 맞지만, 기본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센스가 가장 중요하다.
중견수가 타구를 담아낸 위치가 제법 깊숙했으니,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3루로 뛴 거겠지. 나라도 그럴 거고.
그런데 상대 야수가 저런 식으로 빠르고 정확한 송구를 3루수 글러브에 꽂아버리면 답이 없다.
센스가 아니라 피지컬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리니까.
“Fxxk!!! Fxxk!!! Fxxk!!!”
콰앙! 콰직!
제프리는 덕아웃에 돌아가자마자 입구 근처의 배트를 집어 들더니, 애꿎은 배트 케이지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사실 딱히 문제가 되는 행동은 아니다.
경기 중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그걸 해소하고 플레이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면 암묵적으로 허용되고 있으니까.
다만 저놈처럼 평소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면 실력도 없는 게 화만 많다며 뒷말을 듣기 쉽고.
지금처럼 공수교대 타이밍이라면 본인이 알아서 적당히 끊어야 할 뿐.
“야! 그만하고 나갈 준비해. 상황 파악 안 되냐?”
본인이 조절을 못 하겠다면 남이 멈춰줄 필요가 있다.
글러브를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더니, 잠깐 내 쪽을 쳐다보다 눈을 깔고는 얌전히 배트를 집어넣는다.
분노 조절 잘하는 친구였네.
“고생했어. 괜찮아. 물 한 모금 마시고 갈래?”
채드윅이 냉장고에서 막 꺼낸 생수병 하나를 건네주며 제프리를 위로했다.
실력도 특출나지 않고 팀에 녹아들려는 노력도 소홀하다 보니, 이제 제프리를 나서서 챙겨주려는 건 클레망이나 채드윅 정도밖에 안 남았다.
그랬는데.
“X발, 지금 놀리냐? 너나 처마셔.”
팍!
제프리가 쳐낸 생수병이 바닥을 뒹굴었다.
뚜껑을 열어둔 병에서 물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다.
대부분의 주전 야수들이 이미 밖으로 나간 뒤라 소란스러워지지는 않았지만, 덕아웃 안에서 그걸 못 본 사람은 없을 거다.
로테이션을 건너뛴 게 미안해서인지 평소보다 얌전히 있었던 로버트도 당연히 그걸 봤을 거고.
로버트가 이쪽을 쳐다보며 지정석에서 몸을 일으키던 바로 그 순간.
“야.”
채드윅의 눈빛이 변했다.
“내가 웃으면서 좋게 말해주니까 개 X밥으로 보이냐?”
백업 3루수 안타. 3루 노리다 태그아웃. 비디오 판독 거절.
코치와 갈등. 로버트와 충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