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88화 (88/200)

88. 변화의 바람 (4)

야구라는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많다.

모든 타석, 모든 수비 상황이 불확실한 확률 속에 몸을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니.

그 스트레스를 고함을 지르거나 애꿎은 기물을 때려 부수는 걸로 해소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은데, 솔직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

그래도 그걸 지적하는 대신 못 본 척 자리를 피해 주는 건, 좋든 싫든 동료니까 그런 거다.

“뭐…… 뭐?”

“내가 X밥으로 보이냐고. 지가 병X같이 아웃당해놓고 나한테 화풀이하니까 기분 좀 풀리냐?”

그런데 심판한테 쓸데없는 항의나 하고 오더니 남들 다 나갈 시간에 방망이질이나 해 대는 놈이.

그나마 동료랍시고 위로해주러 다가간 선수한테 화풀이나 한다?

메이저리그에서 성인군자로 손꼽히는 클레망마저도 극대노할 일인데, 쟤는 오죽하겠어.

“그리고, 너 Koo한테는 아무 말도 못 하더니 나한테만 X 같이 구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쟤는 무섭고 나는 만만해? 그따위로 살지 마, X밥 새끼야.”

정곡을 찔렸는지 제프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파드리스와의 난투극이 벌어진 날, 온갖 스포츠 채널에 내 활약상이 박제됐으니. 내 앞에서는 눈을 깔 수밖에 없었을 거고.

평소 좀 소심한데다 인터뷰에서도 종종 즙을 짜는 채드윅은 그나마 만만해 보였겠지.

“이 새끼가 진짜……!”

“야! 야!”

“쟤네 둘 빨리 떨어트려 놔!”

결국 제프리는 감정에 못 이겨 최악의 선택을 했다.

사과는커녕 채드윅의 멱살을 잡아버린 것.

이런 걸 보면 가오라는 게 참 무서운 거구나 싶다.

만약 못 이기는 척 무시하면서 수비하러 나갔다면 쌍방과실의 여지라도 있으니, 그나마 경기는 계속 뛸 수 있었을 텐데.

“팀 꼬라지 아주 잘 돌아가네!!!”

“리빌딩 팀한테 스윕당하기 직전이라 정신 나갔냐?! 왜 니들끼리 멱살 잡고 싸우는데!!!”

“거기! 지금 안 나오고 뭐 합니까!! 경기 안 할 거요?!”

개판이 된 덕아웃에서 겨우 소란이 가라앉은 뒤.

다저스는 경기 지연 행위로 경고를 받고, 남의 멱살을 잡은 제프리가 덕아웃에서 쫓겨나면서.

내가 3루로 이동하고 채드윅이 유격수 자리에 투입되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됐다.

“미안하다, Koo.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

“괜찮아. 집중하자.”

언뜻 보니까 로버트 꼭지 돌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얘가 선수 안 쳤으면 진짜 대참사가 벌어졌을 테니까.

선수들이 단합은커녕 내분이나 일으키는 걸 본 홈팬들의 분노와 야유가 쏟아졌지만.

그건 괜찮다. 9연패 중이니 하루 이틀 욕먹는 것도 아니고.

진짜 마음이 아픈 건, 우리한테 실망하고 경기장에서 빠져나가는 몇몇 팬들의 모습.

‘잘해야지. 그만큼.’

남아준 팬들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집중 못 하고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바뀐 투수는 마리오 로드리고.

불펜 전환 이후 구위로 누르는 투구를 주로 해 왔지만, 오늘처럼 멀티 이닝을 소화해야 하는 경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힘을 빼야 하고.

따아악―!

자연스레 야수들이 처리해야 할 타구도 늘어나기 마련이지.

3―유간 코스지만 내 쪽으로 살짝 치우친 까다로운 타구.

방향을 파악하고 코스를 예측하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한 내 몸은, 어느새 타구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고.

“아웃!”

클레망이 자세를 낮춰 내 송구를 안정적으로 잡아내며 원 아웃.

최근 수비에서 내내 버벅거렸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의 깔끔하고 정석적인 플레이.

슬쩍 덕아웃을 보니, 수비 코치가 거의 기적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입을 틀어막고 있다.

그럴 만도 하지. 이런 식으로 경기 도중 수비 위치가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수비 범위가 들쭉날쭉하던 나였으니까.

“Koo!”

웃으며 공을 던져주는 채드윅을 향해 마주 웃어줬다.

만약 카메라에 잡혔다면 덕아웃에서 싸움이나 벌인 주제에 잘하는 짓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더는 교체 자원도 없고, 질 수도 없는 상황에 몰리고 나니 오히려 상쾌해졌다고 해야 하나.

“우리 페이스대로 하자! 서두르지 말고!”

바로 작년까지 나는 투수였고, 채드윅은 이 팀 저 팀 돌아다니던 땜빵 내야수.

수비 범위가 넓은 켄의 도움 없이는, 모든 안타를 지워낼 각오로 뛰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받아들였더니.

신기하게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던 부담감이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다.

“아웃!”

까다로운 타구를 몇 걸음 움직여 가볍게 처리하는 채드윅.

만약 쟤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이제 다저스 팬들이 수비 시간만 되면 가슴을 졸일 필요도 없어지겠지.

* * *

마리오가 한 번의 삼자범퇴를 곁들여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7회 말 공격이 진행 중인 지금.

스코어는 아직까지도 1대 1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득점권 찬스에서 번번이 틀어막혔다는 건 똑같지만, 팀의 기조와 연봉 규모를 생각하면 다저스가 자존심 상해야 할 상황이지.

[애초에 이런 팀한테 스윕 직전까지 몰린 것부터가 자존심이고 뭐고 엿 바꿔 먹…….]

‘조용하라고.’

‘투수들의 무덤’이라는 극도의 타자 친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탓에, 수준급의 투수 자원 수급이 어려운 로키스.

게다가 전날 경기를 가져오기 위해 필승조 투수들에게 연투까지 시켰기에, 오늘 올라오는 불펜들은 그보다 약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선발 투수가 6이닝 1실점으로 막아주고 내려가긴 했는데.

로키스의 두 번째 투수는, 덕아웃 내 싸움으로 인해 가라앉은 분위기를 떨쳐내기 시작한 다저스 타선을 버텨내지 못했고.

“Koo!!! Koo!!! Koo!!! Koo!!!”

“너만 믿는다! 너 이럴 때 한 건 해주는 타자잖아!!!”

“다 필요없고 땅볼만 안 나오면 돼! 그 정돈 할 수 있잖아!”

오늘 경기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서는 지금, 1사 1, 3루의 밥상이 차려졌다.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하고, 내야수들까지 소집해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긴 했는데.

결국 로키스 덕아웃은 투수 교체 없이 밀고 나가는 걸 택했다.

[저걸 믿는다고? 니 득점권 타율 어떤지 알 텐데.]

아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저 투수가 내려가고 나면, 이번 시리즈에 등판 기록이 없던 불펜 자원은 ERA 7, 8, 9점대 트리오뿐인데다.

좌타자인 나를 어떻게든 막아낸다면 그 뒤로는 우타자 세 명이 줄지어 나오니까. 우투수로서는 그나마 수월한 상황.

그러나.

‘마운드 올라가서 우쭈쭈해준다고 이미 박살난 멘탈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타격 루틴을 가져가며 투수를 쏘아보는데, 먼저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걸 보고 이미 승부의 결과를 직감했다.

뒤에 나오는 타자가 우투수라고 해서 딱히 자신감이 생기는 건 아니지. 내 뒤로 세 명 합치면 60홈런이니까.

나한테 볼넷 주면 만루인데, 어지간한 강심장 아니고서야 그건 감당 못 할 거다.

지금 올라온 투수가 구사하는 구종은 포심,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터까지 4개니까 어지간하면 까다로울 법도 한데.

그걸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으면 진작 선발 로테이션을 돌고 있었을 거다.

말이 좋아 팔색조 투수지, 경우의 수만 많을 뿐. 위력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뜻.

쐐애애액!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더더욱 좁아지기 마련.

오늘 내가 아웃당한 지난 두 번의 타석 모두 땅볼을 때려냈다는 걸 포수도 알 테니, 커터 타이밍을 머릿속에 새기며.

헛스윙이 돼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허리를 비틀며 단 하나의 점을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따아아아아악―!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1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8540]

갖다 맞히는 순간 결과를 직감할 수밖에 없는 강렬한 손맛.

평소 홈런 치고 나서 셀레브레이션을 삼가는 편이지만, 오늘은 사정이 다르지.

“넘어가나?! 넘어가나?! 넘어갔다아아악!!!”

“오 마이 갓! 히 플립 더 배트!!!”

급식 시절부터 밥 먹고 빠따만 던져온 박도현에게 직접 사사받은 K―빠던을 선보인 다음.

주루 코치들과는 거의 따귀라도 날릴 듯한 기세로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베이스를 돌았고.

“으아아아아아!!!”

홈플레이트를 밟자마자 고함부터 지르고, 기다리고 있던 주자들의 엉덩이를 후려치면서 막춤에 가까운 세레머니를 선보였다.

아무리 포수가 대인배라도 쌍욕 한마디 정도는 먹어도 싼 짓거리지만, 한 번 흘겨보더니 묵묵히 심판에게 공을 받을 뿐.

그 이유는 관중들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20!!! 20―20!!! 20―20!!!”

평소라면 Koo 콜을 보냈을 다저스 팬들이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니까.

메이저리그의 경우, 20―20은 솔직히 달성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따로 기록 관리를 안 하기는 한다. 그래서 업적 보상 같은 것도 없는 모양이고.

그래도 해당 선수가 훌륭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증거이니 축하받지 않을 이유가 없지.

더 중요한 건, 두 자릿수 연패가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성큼 달아나는 점수를 냈다는 것.

그래서 일부러 평소에 안 하던 오버액션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양심이 있으면 오늘은 이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속마음을 가득 담아서.

“야! 쟤네 투수 안 바꾼다!”

“완전 수건 던졌네! 이런 날 못 이기면 야구 때려치워야지!”

효과는 있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기세가 오른 우리 팀 타자들과, 어제보다 한결 만만해진 상대 투수들.

결국 투수라도 아껴보려고 교체를 주저하던 로키스는 ERA 789 트리오를 전부 소모해야 했고.

[Colorado Rockies 1 : 8 LA Dodgers]

이날 다저스는 9연패를 끊어내는 달콤한 승리를 맛보았다.

* * *

[LA 다저스, 기나긴 연패 탈출! 10연패 기로에서 안도의 한숨 쉬어]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 4회 말 직후 ‘덕아웃 내분’에 대해 입 열다! “전부 감독인 내가 부족해 생긴 일.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다저스, 경기 직후 내야수 제프리 로렌 지명할당 조치… 내분 당시 덕아웃 영상 유출 때문인가?]

[다저스 내야수 유망주 랭킹 1위 조나단 라틀리프, 빅리그 콜업! 이번에는 주전 3루수의 공백 메울 수 있을까?]

[Koo, 20홈런―20도루 달성! 타자 전향 1년 차, 그가 걷고 있는 길이 바로 ‘미라클 로드’]

경기 종료 직후.

제프리는 지명할당 조치를 당했는데, 인사할 시간조차 없이 FA를 선언하고 도망치듯 팀을 떠나버렸다.

카일이 시범경기 때 아웃당해놓고 나한테 화풀이했다가 징계 처맞았을 때가 떠오르네.

그때 카일은 주전 유격수를 맡아줘야 했고, 연봉도 적지 않았기에 어쨌든 팀에서 붙잡긴 했는데.

마이너 계약으로 합류한 AAAA리거한테는 더 가혹할 수밖에 없지.

“안녕하십니까!!! 조나단 라틀라프입니다!!!”

빠져나간 자리는 다시 채워야 하는 법.

다저스 프런트가 아끼고 아꼈던 최후의 선택지.

이제 고작 마이너 2년 차, 초특급 3루 유망주 조나단이 원정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접 합류했다.

“어, 그래. 어서 와라.”

“애가 씩씩하네. 기죽어 있는 것보단 낫지.”

전임자가 팀을 안 좋게 떠나다 보니, 솔직히 쌍수 들고 반겨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Koo, 제가 오늘 새벽 비행기로 오느라 숙소에 안 들렀거든요!!! 혹시 제 방 어딘지는 누구한테 물어보면 될까요?!”

“랜디!! 그거 안 드실 거면 제가 먹어도 돼요?!”

“안녕하세요!!! 네?! 목소리 줄이라고요?! 알겠습니다!! 지금도 줄인 거지만 더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애가 워낙에 싹싹하고 붙임성 있다 보니, 이미 스프링캠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선수들도 좀 있었고.

아직 경기는 뛰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팀에 적응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플레이 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원정 경기.

최근 유격수와 3루수 사이에서 땜빵 로테이션을 돌며 휴식 없이 달려온 나는 오랜만에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됐고.

유격수 채드윅―3루수 조나단 조합의 메이저리그 첫 경기를 가장 가까이서 직관할 영광을 얻었는데.

따아아악―!

[이 타구는 오라클 파크의 좌측 담장을! 담장을! 넘어갑니다!!! 조나단 라틀리프! 메이저리그 첫 타석에서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그동안 콜업을 미뤘던 다저스 프런트에게 바치는 통렬한 한 방이네요!!!]

쐐애애액!

퍼엉!

“아웃!”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무슨 캐치볼 하듯 건져낸 3루수 조나단 라틀리프! 1루 주자는 귀루하지 못하고 더블 플레이!]

[저 선수는 긴장이란 걸 안 하나요?! 혹시 오늘이 자신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이라는 걸 까먹은 건 아니겠죠?!]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무엇 하나 꿀릴 것 없이 척척 해내는 조나단.

지름길을 내버려 두고 애먼 길에서 헤매던 다저스 프런트를 떠올리니, 헛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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