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89화 (89/200)

89. 육아일기 (1)

원정 저녁 경기를 치르고 나면 보통은 내내 호텔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체력에 여유가 좀 있는 날이면 동료들을 몇 명 모아 방에서 작은 술자리를 가지거나.

마사지 룸을 좀 늦게까지 하는 숙소라면 가서 좀 쉬기도 하고.

그중 거의 모든 선수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건, 자기 전 가족과 짧게라도 통화하는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거의 모든 선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혼 후 연락 끊겼고, 아버지와의 통화는 연례행사 수준이었으니.

그나마 박도현의 가족과는 통화를 하긴 해도, 시차도 있고 그쪽도 일이 바쁘니 어쩌다 한 번에 그쳤는데.

“이제 일주일쯤 남은 건가?”

박도현의 동생 박도아가 LA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전보다 훨씬 자주 통화하게 됐다.

[응. 짐도 짐인데, 서류가 너무 많아서 챙기는 데만 한세월이다.]

“그래도 미리 최대한 준비해놔. 여기서 이것저것 떼려면 속 터질 테니까.”

무슨 대단한 얘기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치안이나 교통 문제 등등, LA랑 미국 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것들.

그리고 야구 얘기도 당연히 하지.

다저스가 9연패 중일 때는 박도현네 가족들한테 차마 얼굴을 못 들겠더라.

“아버지랑 같이 다저 스타디움 오기로 한 거 있잖아. 티켓 환불했지?”

[어, 응……. 근데 미안해서.]

“그런 거 갖고 마음 쓰지 말자고 약속했잖아. 좋은 자리로 준비하라고 할게.”

선수 가족에게 경기 티켓을 제공하는 복지는, 원칙적으로는 선수가 팀에 소속되어 있을 때만 해당된다.

그래서 말만 이렇게 하고 티켓은 내가 결제하려고 했는데.

박도현이랑 함께 뛰었던 선수들이랑 인사라도 시켜줄 수 있을까 해서 프런트에 문의하자마자 곧바로 특별석 티켓 두 장이 내려왔다.

“아버지는 입학식 끝나고 바로 한국 가신다고 했나?”

[응. 가게 오래 비워두시면 불안하시다네.]

“입학식이 오전이었으면 나도 갔을 텐데, 아쉽네.”

[아냐, 태워다 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우리 오빠였으면 시간 괜찮았어도 지가 거길 왜 가느냐고 그랬을걸?]

“응. 나도 솔직히 그럴 것 같긴 해.”

출근 전 박도아를 데려다주기로 했다니까 니가 거길 왜 가느냐고,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대꾸했으니.

[오빠 내일 낮 경기지? 이제 자야 하는 거 아냐?]

“어, 자야지. 부모님은 지금 가게 바쁘시겠다. 보고 싶네.”

[나는?]

“어?”

[나는 안 보고 싶어?]

“어?! 저기 그…….”

[장난이야. 잘 자, 오빠.]

“여보세요. 도아야? 도아야?”

잠깐 얼타는 사이 끊어져 버린 전화.

지 할 말 다 하면 전화 끊어버리는 못된 버릇은 오빠를 쏙 빼닮았다.

TV를 보며 낄낄거리던 박도현이 이쪽을 보더니 흠칫 놀란다.

[뭐야. 너 표정 왜 그래?]

“닥쳐…….”

이게 다 연애를 너무 오래 안 해서 그런 거다.

안 그럼 동생 같은 애가 장난 한번 친 거 가지고 이러진 않았을 텐데.

[잘하는 짓이다. 잠깐 통화하는 사이 손주 재롱까지 보고 왔나 본데?]

저딴 소리는 다 모함이다, 모함.

얼굴에 찬물 묻히고 잠이나 자야지.

* * *

메이저리그는 드래프트와 국제 유망주 계약을 통해 매년 수백 명의 선수를 수급하고, 그들 대부분은 마이너리거 생활을 하다가 자의 혹은 타의로 팀을 떠난다.

마이너리그에서 버티고 버텨 빅리그를 한 번이라도 밟아보는 선수들은 그중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빅리그에 올라와서도 적지 않은 선수들이 AAAA리거나 저니맨 신세를 면치 못하며.

액티브 로스터의 견고한 벽을 뚫고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기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벽은, 수백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는 초특급 유망주에게도 똑같이 찾아온다.

“스트라이크 아웃!”

[조나단 라틀리프, 오늘 경기 세 번째 삼진입니다! 초반 몇 경기에서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선보이며 다저스 포럼이 프런트를 성토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는데, 요새는 그런 말이 쏙 들어갔다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당장은 대체자가 없어요. 3루 수비는 완벽에 가깝고, 콜업 후 7경기 만에 홈런이 벌써 4개거든요. 걸리면 넘어가는 타자인데 걸리질 않는 게 문제입니다.]

다저스 최고의 내야 유망주로 꼽혔던 조나단.

콜업 후 주전 3루수 켄의 공백을 공수 양면으로 제대로 메워줬지만, 지금은 타석에서 선풍기질이나 하고 있다.

“하…… 진짜…….”

평소 밝고 활동적인 선수들이 대개 그렇듯, 조나단 역시 승부욕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편이었고.

아직 신인이다 보니 대놓고 기물을 때려 부수며 난동을 부리진 않았지만,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투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괜찮아, 조나단! 지금도 너무 잘해주고 있어!”

“하던 대로만 하자! 더 잘하려고 하지 말고!”

2사 2, 3루의 절호의 찬스가 날아갔으니 아쉬울 법도 하지만.

어차피 아직 메이저리그에서 제 몫을 해주길 바라고 올린 게 아니다 보니, 괜히 자신감 잃어버리지 않도록 케어해주는 분위기.

클레망은 아예 자기 옆자리에 지정석까지 만들어줄 정도다.

따악―!

게다가 수비에서는 지적할 부분이 아예 없다.

타구를 빠르게 마중 나가 파울 라인 근처에서 백핸드 캐치로 잡아내더니, 1루로 다이렉트 송구를 보내는 조나단.

다저스 입단 후에야 3루수로 전향했는데도 어지간한 팀의 주전 못지않은 수비 범위를 자랑한다.

“스윙! 아웃!”

수비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신인은 조나단 말고도 한 명 더 있지.

홈플레이트 앞에서 바운드를 일으키는 공을 무난하게 블로킹하더니, 낫아웃 상태의 타자에게 태그하는 포수.

오늘 경기에선 선발로 출장한 백업 포수 브레이든 돌턴.

시즌 후반쯤 되면, 주전 포수의 체력 관리를 위해 출전 시간을 조절해주는 팀이 많은데.

포수는 공격보다는 수비가 중요하다는 감독님의 지론에 들어맞는 선수이다 보니, 자주 출전 기회를 얻고 있다.

문제는 그 지론을 아주 철저히, 필요 이상으로 따르고 있다는 거지.

“스트라이크! 아웃!”

공수교대 이후, 이닝의 첫 타자로 나간 브레이든은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다.

기껏 3―1의 카운트까지 잘 끌고 갔다가 연달아 공 두 개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끝나는, 팬들 속을 펑펑 터뜨리는 플레이.

“야! 우리 모르는 사이에 투명인간이 주자로 나가기라도 했냐!!!”

“방망이 한 번 휘두르는 게 그리 어렵냐?!”

이쪽은 아무래도 즉전감을 기대하고 콜업한 거다 보니, 팬들 반응도 좀 거센 편인데.

조나단이랑은 정반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포수 장비를 챙기는 브레이든.

삼진 좀 먹는다고 내려갈 위치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득점 없이 끝난 7회 말 공격.

오늘 경기 내내 득점권 찬스가 무산되거나, 뜬금없는 타이밍에 안타를 허용하는 등등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어쨌든 4대 3으로 아슬아슬하게 앞서 있는 상황에서 올라온 다저스의 네 번째 투수는, 조나단과 브레이든의 메이저리그 동기 조쉬 먼로.

콜업 초기엔 한 달 내내 0점대 ERA를 유지하는 등, 좌완 파이어볼러의 위력을 톡톡히 선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하위 타선에서 시작되는 공격인 만큼 아웃카운트 두 개까지는 손쉽게 잡아낸 조쉬였지만.

따악―!

8번 포수에게 뜬금없는 안타를 허용하자마자 좀 전과는 전혀 다른 투수가 되고 말았다.

“세이프!”

견제구만 연달아 세 번.

심지어 마지막 견제구는 전혀 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던지는 바람에, 오히려 주자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볼 정도였다.

조쉬가 최근 드러내고 있는, 필승조 불펜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동점 주자나 역전 주자가 나간 상황에서 도무지 타자에 집중을 못 한다는 것.

결국 참다 못한 브레이든이 마운드를 방문했다.

“한 번만 더 되도 않는 견제구 던지면 네 X알을 뜯어서 다음 투수한테 건네줄 줄 알아.”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는 않았는지, 주자 대신 타자만 쳐다보고 공을 던진 조쉬였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분산된 신경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따아악―!

외야 깊숙한 곳을 향해 날아간 끝에 펜스를 맞고 떨어지는 타구.

1루 주자가 홈에 도착하자마자 감독님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감쌌다.

20홈런짜리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내는가 하면, 플래툰 외야수한테 장타를 처맞기도 하는 저 투수를, 도대체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나로서는 감도 안 잡힌다.

‘은퇴하면 절대 감독은 하지 말아야겠다.’

[내가 니 성격을 아는데, 너 그랬다간 제 명에 못 죽어.]

그럼 지는 제 명대로 살아서 서른도 전에 비명횡사했나.

어디서 쓰잘데기없이 참견하고 있어.

* * *

[LA Dodgers 6 : 4 Milwaukee Brewers]

8회에 동점을 허용하는 맥 빠지는 경기였지만, 어쨌든 승리는 다저스가 챙겼다.

상대도 필승조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신인을 올렸던 게 화근이었지.

바로 이어진 공격에서 선두 타자로 나가 볼넷으로 출루한 다음, 안 뛸 것처럼 굴다가 도루에 성공하자마자 투수의 멘탈이 가루가 됐으니까.

‘자이언츠 이놈들은 또 이겼네?’

[전에 잠깐 죽 쑤더니, 어느새 5연승까지 했네.]

오늘 두 팀 다 승리를 거두면서, 지구 1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승차는 5게임을 유지하게 됐다.

솔직히 자이언츠의 선전은 주전 야수들이 큰 부상 없이 뛰고 있는 게 크지.

우리는 주전 3루수가 이탈한 상황에서 후반기를 치르는 중이니까.

‘배때지도 비었는데 헛헛한 생각은 해서 뭐 하냐. 배나 채우자.’

[밀워키에 왔으면 맥주지!]

‘선수 식당에 맥주가 어딨냐?’

원정팀 클럽하우스에서는 밀 머니를 걷어 간 돈으로 간단한 뷔페식 식사를 제공한다.

낮 경기를 끝내고 나면 외부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선수들도 많지만, 오늘은 딱히 약속도 없고 해서 먹고 가려고 했는데.

“푸하하하하! 진짜?! 브레이든이 그랬다고?”

100미터 밖에서 들어도 조나단이란 걸 알 것 같은 쩌렁쩌렁한 목소리.

슬쩍 들여다보니 시즌 도중 콜업된 루키 3인방이 떠들고 있었다.

“조쉬가 농담해준 덕분에 긴장이 좀 풀렸어. 아무리 그래도 불X을 뜯어버리겠다는 건 좀 살벌하긴 했지만.”

“농담으로 들렸나 보네?”

“어?! 그럼…….”

다른 선수들은 안 먹고 간 건지, 먼저 먹고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식당에 남아 있는 선수는 저 3명뿐.

들어가면서 낸 기척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다.

“나 신경 쓰지 마. 마저들 먹어.”

대충 이것저것 가져와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빅리그 동기들끼리 밥 먹는 자리에 눈치 없이 끼어드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혼밥하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잖아.

“원래 밥 먹고 가는 편인가?”

“네! 먹고 운동 좀 하다 가는 편이에요!”

“오늘 경기 복기하면서 배팅 훈련 좀 하고 가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은 등판한 날이라서, 방 가서 스트레칭만 좀 하려고요…….”

가끔 메이저에서 단기적인 성적에 고민하면서 일과 외의 훈련에 매진하는 선수들이 있다.

대부분 효과는 그저 그런 경우가 많지. 마이너리그에서 고된 일정으로 알게 모르게 체력을 많이 썼을 텐데, 긴장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고 훈련까지 더하면 몸이 못 버티니까.

물론 본인들 선택이고, 책임도 본인들이 질 문제니까 참견할 생각은 없지만.

“저기, Koo.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조용히 밥을 쑤셔 넣고 있는데, 뜬금없이 평소 가장 말수가 적은 브레이든이 입을 열었다.

입에 든 음식을 빠르게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빅리그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다른 두 명도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번 시즌 내 행보가, 신인들한테는 꿈만 같은 엘리트 코스나 다름없지.

대타 요원에서 백업 야수로, 그리고 주전 유격수까지.

몇 달 안 되는 시간 동안 팀 내 입지가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뀌었으니까.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

야구의 신과 계약해서 재능을 뽑아먹으라는 소리는 당연히 해줄 수 없지만.

언제든 마이너로 내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남기도록 도와준 것들은 그거 말고도 분명 있었지.

“세 가지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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