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90화 (90/200)

90. 육아일기 (2)

“체력 관리, 멘탈 관리, 그리고 운. 이게 다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원론적인 대답.

새파란 루키들인지라 대놓고 실망하지는 못해도, 잔뜩 올라간 기대감이 폭삭 주저앉는 게 한눈에 보인다.

“Koo,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요!!! 설마 삼진 좀 먹었다고 제 멘탈에 금이라도 갔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네놈 멘탈 걱정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니까 조용히 좀 해봐.”

나름 팀 내에서 중고참급 커리어를 가진 나한테 대놓고 저러는 것만 봐도 조나단의 멘탈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지.

정작 옆에서 지켜보는 동기들의 멘탈은 깎여나가고 있는데.

“지금은 당연히 그러겠지. 무리 좀 해도 하루 푹 자면 쌩쌩하고. 삼진 먹고 실책하면서 야유 좀 들어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고. 근데 그거 다 차곡차곡 쌓이는 거야.”

어떤 운동을 해도 타자로서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정해주는 ‘체력은 근력’의 도움을 받고 있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솔직히 좀 찔리긴 한데.

이건 내가 투수 시절부터 가슴에 새기고 있던 것들이니까.

“지금은 너희 다 메이저리그가 처음이잖아. 그럼 뭐든 신기하고, 이거저거 다 해보고 싶고, 의욕도 넘치고. 그치?”

“맞습니다.”

“근데, 그 상태가 생각보다 오래 안 가거든.”

팀 사정에 따라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기도 하고. 백업 생활을 오래 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 과정에서 처음 올라왔을 때의 의욕을 죄다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여러 명 지켜봐 왔다.

그들 중 메이저리그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저기, Koo. 평소에도 관리를 해야 한다는 건 잘 알겠어요. 그런데, 그. 멘탈은 어떻게 관리하는 건지…….”

이 세 사람 중 누구보다 멘탈 관리가 절실해 보이는 조쉬의 질문.

“야구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은 스포츠잖아. 그래서 매 순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중요하거든.”

타자 입장에서 보면, 투수가 오늘 특정 구종의 제구가 잘 안 된다던가, 특정 코스를 자신 있어 한다던가, 이런 것들이 매 경기마다 전부 달라지지.

코칭스태프와 앞선 타자들이 추려낸 이런 정보들을 참고해서 자기만의 판단을 내려야 하고.

“근데 마음이 급해지고, 궁지에 몰리다 보면 자기한테 가장 익숙한 대로 몸이 움직여.”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좋은 결과를 냈던 플레이를 주구장창 반복하는 것.

상대 입장에서 이보다 더 공략하기 쉬운 선수는 없다.

“자기 플레이를 복기하는 건 좋은데, 적어도 그날 안에 끊어야 해. 똑같은 상황이 그대로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브레이든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운은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잖습니까.”

“운? 그건 너네도 이미 충분히 갖고 있어.”

당장 부진하더라도 팀에서 함부로 내릴 수 없는 상황은 흔치 않다.

주전 선수가 부상당하거나, 포지션 경쟁자가 트레이드되는 등등.

조금 잔인한 소리긴 한데, 이런 상황이야말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지.

“그래도…….”

“어?”

“사실은 지금 타격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 제가 어떤 걸 보완하면 좋을지 막막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한탄하면서 한숨을 푹 쉬는 브레이든.

무슨 느낌인지 이해는 간다.

나도 박도현과 훌리안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타자 전환을 시도했다면 똑같이 막막했을 테니.

“근데 그건 솔직히 나보다는 니들이 더 잘 알걸?”

“……예?”

“아니 그렇잖아. 내가 니들을 보면 얼마나 봤냐? 니들 스카우트 리포트를 읽어본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스프링캠프 때 포지션 경쟁자라고 봤던 조나단 건 읽어봤지만.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지.

“제대로 맞았는데도 안 넘어가면 파워가 부족한 거고. 터무니없는 볼에 배트가 나가면 선구안이랑 심리 싸움이 부족한 거고. 반대로 타석에서 지나치게 신중하게 되면 타격 존을 넓혀야 하고.”

“아…….”

“그런 식으로 자기한테 뭐가 부족한지 찾아낸 다음 코치한테든 전담 트레이너한테든 물어볼 생각을 해야지.”

셋 다 내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 지금.

바로 지금이 자리를 뜰 타이밍이다.

접시에 남은 음식을 싹 쓸어 담아 삼킨 뒤 일어섰다.

“밥 먹다 말고 괜한 꼰대짓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랬다면 너무 맘에 담아두지 말고. 맛있게 먹고, 훈련 잘하고 들어와.”

“꼬, 꼰대짓이라뇨. 아닙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Koo가 저희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는 줄 몰랐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하는 루키 삼인방에게 손인사를 건넨 뒤, 식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내 지켜만 보던 박도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본다.

[너는 야구를 안 했으면 사기꾼이 됐겠다.]

‘또 뭐.’

[남들 다 아는 원론적인 이야기랑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얘기밖에 안 했잖아.]

그럼 내가 거기서 타격에 관해 일장 연설이라도 하길 바랐나.

기술적인 부분은 오히려 나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타자를 해온 루키들이 더 뛰어날 거다.

투수는 그보다는 좀 오래 했다만, 솔직히 로버트 같은 베테랑 투수들 앞에선 콧방귀도 함부로 못 뀌는 수준이고.

‘원래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듣기에는 다르다 이 말이야.’

[그런 걸 보고 자기개발서 화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자기개발서 무시함? 그거 읽고 성공한 사람 없을 거 같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잠깐 입 좀 턴 것 가지고 큰 효과가 있을 거란 기대는 아예 없었다.

물론 없는 소리를 지어낸 건 절대 아닌데, 사람이 원래 남의 말을 꾸준히 기억하고 실천하는 게 어려운 법이니까.

그러나 이 세상엔 자기개발서를 달달 외우는 이상한 사람들이 꼭 한둘씩 존재한다는 걸, 이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 * *

“저기, 코치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식당에서 루키들을 만난 바로 다음날.

타격 코치를 붙잡고 귀찮게 구는 조나단과 브레이든을 발견했다.

“크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훈련장 가서 구체적으로 얘기해볼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침 지금은 좀 한가했거든.”

아무리 코칭스태프들의 역할이 축소된 시대라고는 해도, 컨텐더 팀의 타격 코치가 한가할 리는 없겠지만.

선수들의 수준이 하늘을 찌르는 메이저리그에서 뭔가를 가르치고 조언해줄 기회는 별로 없으니, 만사 제쳐놓고 봐주려는 모양.

[설마 너한테 했던 질문 그대로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쟤네 역량도 거기까지다.

어제 내가 했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니까.

‘타율이 너무 낮은데 어떻게 하면 올라갈까요?’

이딴 어처구니없는 질문은 아무리 유능한 타격 코치라도, 아니 야구의 신을 데려와도 답이 없다.

‘불리한 카운트에서 떨어지는 공에 자꾸 속아넘어가는데 어떡하죠?’

이런 식으로 범위를 좁혀야 이야기를 좀 나눠볼 수 있지.

선수가 어디에 취약한지, 반대로 어디에 강한지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알아내는 것이 코치의 역할이니까.

설령 자기 약점을 인정하고 직시하면서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그게 곧바로 효과를 보기란 어렵다.

[내야 유망주 1위, 성급한 콜업이 부른 성장통… 조나단 라틀리프, 올해보다는 내년을 바라봐야]

[‘뜻밖의 콜업’ 브레이든 돌턴, 올해는 수비에 눈도장… 타격 시험대는 내년부터?]

그날 이후 5경기.

꾸준히 선발 3루수나 대타로 기회를 받은 조나단과, 경기 후반 대수비로 자주 기용된 브레이든이었지만.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은 선보이지 못했다.

올해는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올렸거나, 어차피 기대치 자체가 백업 역할이었으니 내년을 기대해보자는 논조의 기사가 쏟아질 정도로.

“요즘 루키 타자들 괜찮던데?”

그러나 내부 평가는 달랐다.

당장의 결과는 별로 좋지 않지만, 분명히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는 평가.

“맞아요. 타석에서 좀 더 차분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런가? 내가 보기엔 오히려 더 과감해진 것 같은데…….”

둘 다 맞는 말이지.

선풍기질을 일삼던 조나단은 볼넷을 얻어내는 타석이 늘었고, 스윙의 군더더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며.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루킹 삼진을 자주 당하던 브레이든은 공이 조금이라도 몰린다 싶으면 가차 없이 방망이를 돌렸으니까.

서로 중간 지점을 찾는다면 훨씬 나았을 두 사람이 점점 서로의 스타일을 닮아 가기 시작했고.

두터운 정체의 벽을 거의 끝까지 파내면서 약간의 계기만 있어도 금방 확 좋아질 수 있는 상태까지 도달한 두 사람은.

각각 포수와 3루수로 선발 출장하게 된 경기에서 그 계기를 맞이했다.

따아아아악―!

[1―1에서 3구! 7번 타자 조나단 라틀리프, 자세를 살짝 무너뜨리며 스윙! 저렇게 휘두르는데도 넘어가나요?! 넘어가나요?! 네! 넘어갔습니다!!! 스코어 6대 3!!! 말린스와의 기나긴 동점 상황을 무너뜨리는 조나단 라틀리프의 쓰리런!!!]

[저 선수가 마이너리그를 폭격했던 이유가 바로 저겁니다! 배트를 짧게 잡고 컴팩트한 스윙을 하면서도 타구에 힘을 제대로 실어낼 줄 알거든요!! 이제야 그때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는 것 같네요!!]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홈 경기.

양 팀 선발이 3실점씩 하면서 길게 이어지던 균형이, 조나단의 홈런 한 방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게다가 지난 타석에선 아슬아슬한 유인구를 참아내면서 연달아 볼넷을 골라내, 총 2타수 1안타 2볼넷을 기록.

“요새 팬들한테 욕 좀 먹는다고 시위하는 거야?!”

“5월에 일찌감치 올라왔으면 신인상도 받았겠네!”

선배들이 헬멧 위에 쏟아내는 손바닥 세례를 맞으며 덕아웃을 일주한 조나단은.

예전처럼 흥에 겨워 춤사위를 선보이는 대신, 클레망이 마련해준 지정석에 앉았고.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안타 하나, 그냥 안타 하나, 그냥 안타 하나…….”

멘탈 관리의 일환으로서 만든 새로운 루틴으로 보인다.

계속 흥분해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스윙이 커지는 걸 방지하려는 모양이다.

하는 짓이 남들 보기에 무슨 주술사처럼 보여서 문제지.

따악―!

“와아아아아아!!!”

팬들의 함성에 밖을 내다보니, 8번 포수로 출장한 브레이든이 1루에 자리잡고 있었다.

[심판 판정은! 세이프! 세이프! 2회 말에 이어 멀티 히트를 기록하는 브레이든 돌턴! 오늘 두 번의 안타가 모두 내야 안타로군요! 포수치고는 조금 피지컬이 부족하지만, 그만큼 빠른 발을 오늘 제대로 살려냅니다!]

[홈런을 맞았는데도 교체될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해볼 만한 타자라는 투수의 심리를 제대로 읽어냈습니다!]

“으아아아아아!!!”

3점 차 리드에서 안타 하나 날린 주제에 끝내기 홈런을 날린 것마냥 소리를 질러대는 브레이든.

조나단과는 반대로, 타석에서의 소극적 태도를 떨쳐내기 위해 과장된 리액션을 선보이는 모양인데.

표정은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이라 오히려 좀 괴기스럽다.

투수도 빡쳐서 1루 쪽 돌아보자마자 눈 깔았잖아.

[Miami Marlins 3 : 7 LA Dodgers]

경기 종료 후 MVP 인터뷰.

결승 홈런을 날린 조나단이 생애 처음으로 단독 샷을 받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조나단, 최근 몇 경기에서 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플레이를 하지는 못했는데요. 혹시 오늘 경기 이전에 팀 내부적으로 어떤 피드백이 오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살짝 선을 넘을락 말락한 질문이었지만, 조나단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네!!! Koo의 조언이 많은 힘이 됐습니다!!!”

인터뷰를 지켜보다 말고 사레가 들릴 뻔했다.

채드윅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왜 이 팀 내야수 놈들은 첫 MVP 인터뷰 때마다 나를 팔아먹나.

“그것 참 놀랍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구체적인 내용을 살짝 공개해주시겠어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리포터의 표정이 초조함으로 물들 때까지 시간을 끌던 조나단은.

“이것저것 꼼꼼하게 알려주긴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동료 몇 명과 함께 스포츠 음료 통을 들고 난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한국 네티즌 한정으로 ‘자기개발서’라는 별명이 생기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두부멘탈 조쉬 문제. 기대도 가장 많이 받음. 제리 승리 날림. 시즌 22경기째. 메이저리그 신기록은 컵스 A.D.가 경신.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담요 뒤집어쓰고 우는 게 보임. 동료들 멀리 떨어짐. 제리 쫓아감. 로버트와 몰래 지켜봄. 구현기 얘기. 로버트 형언할 수 없는 표정.

LA 도착. 부재중 전화 없어 괜찮은 줄 알고 전화. 암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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