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육아일기 (3)
조나단, 브레이든, 조쉬.
시즌 도중 빅리그로 콜업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드래프트 1라운더 출신이라는 것.
드래프트 순위가 선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명예의 전당에는 전체 62라운드에 네 자릿수 순위로 지명된 선수까지 있지만.
어쨌든 높은 순번에 지명됐다는 건, 그 선수가 가진 잠재력이 그만큼 크다는 걸 뜻한다.
세 사람이 메이저리그에 비교적 빨리 올라왔음에도 자기 몫을 어느 정도 해주는 것도 그래서다.
특히 말린스전에서의 활약 이후 조나단과 브레이든은 자신감이 부쩍 올라온 게 눈에 보였고.
아직 계산이 확실하게 서는 선수가 되려면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몇 번 더 부침을 겪으며 온탕과 냉탕을 오갈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성공하는 유망주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는 중이지.
그런데, 사실 가진 재능만 따지면 이 둘보다 조쉬가 좀 더 쓸만하다고 볼 수 있다.
큰 키에서 꽂히는 볼끝이 더러운 공. 좌완에 준수한 제구력까지.
농담 좀 보태서, 투수 시절 내 포심의 위력이 저랬으면 내가 에이스 해먹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걸 마운드에서 못 던지면 도로아미타불이긴 하지만.
* * *
[시카고 컵스 A.D. 존슨의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 23경기에서 종료!]
제리의 시즌 23번째 등판을 앞둔 어느 늦은 밤.
4월부터 7월까지의 이달의 투수를 독식한, 컵스의 이 정신 나간 에이스의 소식이 모든 스포츠 언론을 뒤흔들었다.
시즌 24번째 등판에서 7과 3분의 1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길고 길었던 기록의 마침표를 찍었던 것.
“와, 미친…… 23경기 연속? 이 양반 이번 시즌 미친 건 알았는데 메이저리그 기록까지 세웠네.”
“세계 기록이랑은 타이라잖아. 근데 난 저런 양반을 두고도 컵스가 지구 1위가 아니라는 게 더 소름이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냐?”
때마침 지나가던 제리가 대화를 들었는지 발길을 돌려 다가온다.
“내 승리와 기록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친구들. 다만 우리가 아직도 자이언츠를 앞지르지 못하고 있다는 건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뭐라는 거야.”
“넌 제발 아무 때나 좀 끼어들지 마.”
“보통 에이스한테 승리 못 챙겨주면 미안해야 하는데 쟤한텐 왜 이렇게 당당해질까?”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쿨하게 사라지는 제리.
진짜 오늘이 등판일만 아니었어도 엉덩이 한 대 걷어찼을 텐데.
* * *
팀 안에서는 괜히 남들 얘기하는 데 끼어들었다가 쿠사리나 먹는 제리지만.
밖에서는 다저스의 에이스이자, 현 내셔널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스트라이크 아웃!”
뉴욕 양키스와의 인터리그 원정.
전국구로 팬들이 포진한 빅마켓 팀끼리의 대결답게, 양키 스타디움의 관중석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제리가 삼진을 잡아내며 이닝을 끝내자마자 거센 야유가 쏟아졌다.
“Boooooooo!!!”
“네놈 기록도 오늘 여기서 끝날 줄 알아라!!!”
넓은 미국 땅의 정반대에 위치한 만큼 원정팬들의 수도 그만큼 적었고.
지난 두 경기에서 연달아 다저스가 승리를 챙기며 양키스 팬들이건 선수들이건 독기가 잔뜩 오른데다.
팀 타격 지표의 수많은 항목이 아메리칸리그에서 선두를 다툴 만큼 짜임새 있는 양키스 타선까지.
투수에게는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LAD 5 : 2 NYY]
오늘 양키스가 비교적 만만한 대체 선발 두 명을 기용하는 텐덤 전략을 사용하면서.
6회 말 수비를 막 마친 지금, 경기의 리드는 다저스가 쥐고 있었다.
“제리. 혹시 오늘은 여기까지…….”
“계속 가겠습니다.”
“어, 그치? 그냥 물어본 거야.”
투수 코치가 머쓱하게 돌아섰다.
현재까지 6이닝 2실점. 이대로 등판을 마치면 연속 퀄리티스타트 기록을 23경기로 늘리며 A.D.와 타이를 이룰 수 있다.
바로 어제, A.D.는 7이닝 3실점으로 잘 던진 뒤 8회까지 올라갔다가 승계 주자를 남겨둔 채 강판됐고.
후속 투수가 홈런을 얻어맞으며 기록은 허무하게 끝났다.
심지어 경기도 컵스의 패배로 끝나면서 강성 컵스 팬덤은 어젯밤 그야말로 활활 불타올랐다.
괜히 또 올려서 경기도 말아먹고 기록도 끊겼다며, 감독과 홈런 맞은 투수를 향한 살인 예고까지 쏟아졌으니.
‘저 정도 투수를 마음대로 올리고 내릴 수 있겠냐고.’
아마 컵스 감독도 지금 우리 투수 코치랑 똑같은 심정 아니었을까.
팀의 에이스. 6회까지 투구 수는 85개. 팀은 지난 두 경기를 가져오기 위해 필승조를 죄다 갈아 넣은 상황.
승리도 승리지만, 에이스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본인의 의사를 따를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속이 타겠어.
따아아아아악―!
물론, 그런 자존심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보니!!! 다 필요없어!!! 네가 최고야!!!”
타자는 배트를 던졌고, 양키 스타디움은 광기에 잠겼다.
투수를 하면서 홈런은 언제든 얻어맞을 수 있는 거라지만.
팀 타선의 핵심을 차지하는 선수에게 맞는 홈런과, 좌타자라는 이유만으로 투입된 2할 초반대의 대타에게 맞는 홈런의 데미지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아웃!”
“세이프!”
다음 타자를 힘겨운 승부 끝에 내야 플라이로 잡아냈지만, 곧바로 안타를 허용하면서 1사 주자 1루.
이미 한계 투구 수를 훌쩍 뛰어넘은 상황.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 코치에게 소리를 지르며 거부해봤지만, 공을 빼앗기는 걸 피할 순 없었다.
덕아웃에 들어가자마자 글러브를 패대기치는 제리가 언뜻 보였지만.
그래도 경기는 계속되어야 했다.
“믿는다, 조쉬.”
“……예.”
오늘 경기 두 번째 투수, 조쉬 먼로가 공을 넘겨받았다.
이번 시리즈에서 등판이 없었던 투수 중에서는 가장 좋은 공을 던지는 선수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주자가 나간 상황에선 급속도로 흔들리는 데다, 그 주자가 홈에 들어오면 시즌 내내 이어진 에이스의 대기록이 중단되는 가혹한 상황에서.
조쉬는 감독님의 기대를 배신하고 말았다.
“힛 바이 피치!”
초구가 포수 미트를 멀찍이 벗어나 타자의 허벅지를 강타하자마자, 감독님은 벌떡 일어나 불펜을 호출했다.
전광판은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이나 등판한 고든과 앤서니가 몸을 푸는 모습을 비췄고.
투수 코치는 마운드에서 내려온 지 5분도 안 돼서 다시 한번 방문해야 했다.
“포수가 던지라는 대로만 던져. 맞아도 돼. 우리 팀 내야수들한테 1년에 얼마 쓰는지 알지? 안타 못 막으면 얘네 책임이야.”
“맞아, 조쉬! 우린 운명공동체야! 목이 매달려도 우리가 먼저니까 신경 쓰지 마!”
“우리 감독님 맷집 센 거 알지? 네 몫까지 기꺼이 얻어맞아 주실걸?”
신인 투수가 위기에 처할 때면 투수 코치가 늘상 하는 말.
내야수들도 맞장구치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큰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고.
“베이스 온 볼스!”
결과는 스트레이트 볼넷.
남은 아웃카운트는 두 개. 3루 주자가 진루하면 대기록은 끝난다.
거기에 양키 스타디움을 꽉꽉 채운 홈팬들의 살벌한 조롱까지.
한 투수가 등판하면 최소 3명의 타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룰 때문에 교체하지도 못하는 지금.
투수한테 목소리 높이는 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야! 안타 처맞는 게 나으니까 포수가 미트 갖다 대는 데로 꽂아! 너 어차피 볼넷이나 사구 나와도 X 되는 건 똑같아!”
내야수들이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쳐다봤지만.
되도 않는 위로나 격려 따위보다는 현실을 머리에 때려박아주는 게,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훨씬 도움이 됐다.
‘제발 타자가 건드릴 수 있게라도 던져라.’
이랬다가 조쉬가 홈런을 처맞거나, 내가 실책이라도 하면 그야말로 대역죄인이 되겠지만.
이대로 가면 밀어내기 볼넷으로 A.D.보다 허무하게 기록이 끝날 게 불 보듯 뻔한데. 별다른 도리가 있나.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내 팩폭 덕분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조쉬는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타자가 초구를 지켜보고, 2구는 살짝 빠진 듯했는데 심판 판정의 도움을 받았지.
당연히 타자는 펄쩍 뛰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는다.
오늘 처음으로 유리한 볼카운트를 잡은 조쉬.
어깨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는 게 내 위치에서도 보였고.
따아악―!
오히려 찬스가 무산될 위기에 몰린 타자는 조쉬의 3구를 건드리고 말았다.
간신히 갖다 맞춘 것치고는 속도도 빠르고, 코스도 까다로운 타구였지만.
타자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내 수비 위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쪽으로 타구를 보내고 말았다.
“아웃!” “아웃!”
잔루 만루. 실점 없이 끝난 7회 말.
양키스 선수단을 향한 홈팬들의 비명에 가까운 야유 속에서 조쉬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한쪽 무릎을 꿇었다.
6과 3분의 1이닝 3실점.
제리의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이 23경기로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 * *
절호의 찬스에서 점수를 내는 데 실패하면서 양키스 선수들의 집중력은 와르르 무너졌고.
이날 경기마저 승리하며 스윕을 거둠과 동시에 자이언츠와의 승차는 3경기로 줄었다.
“구라 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모르냐?”
“아니 그렇다고 투수 손목을 아작내겠다는 거야 지금?!”
뉴욕에서 LA까지 가는 긴 비행이지만 선수단은 활기가 넘쳤다.
경기도 이기고. 제리의 대기록도 지키고. LA로 돌아가면 휴식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번 판 끝나면 저희도 껴도 돼요?”
한창 떠들던 와중, 조나단과 브레이든이 카드 판을 기웃거렸다.
항상 같이 다니는 데다 자리도 붙어 있는 조쉬는 안 보이길래 비행기 뒤쪽 자리를 살폈더니.
조쉬가 자리에 누워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야, 당분간 웬만하면 뒤쪽으로 가지 마.”
“화장실도 앞으로 가고. 애들한테도 전달해.”
경기 끝나고 눈물을 보이는 선수들이 아주 가끔 있다.
마음먹은 대로 공이 던져지질 않는 짜증이나, 중요한 경기를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죄책감 등등.
보통은 숙소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참는데. 오늘처럼 긴 비행이 예정된 날은 어쩔 수 없지.
“왜 그러냐, 제리? 무슨 문제 있어?”
“……어, 아냐.”
“그럼 니 차례니까 얼른 카드 내. 너도 손모가지 날아가고 싶어?”
루키 시절 똑같이 경기를 말아먹었다가 원정기 안에서 담요 뒤집어쓰고 울었던 제리는 못내 신경이 쓰이는 듯 힐끔거리다가.
조쉬가 담요에서 나와 비행기 뒤편 화장실로 향하는 통로로 나가자마자, 누가 봐도 어색한 태도로 카드 판에서 빠졌다.
“어, 나는 이제 그만 하려고. 이제 현금도 없네. 또 빌리긴 그렇잖아.”
은근슬쩍 통로 뒤편으로 향하는 제리였지만,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보통 저런 애들 달래주는 건 에이스가 해야 할 일이 맞으니까.
맨 앞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제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로버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뭐. 할 말 있냐?”
“아닙니다.”
혀를 한 번 차더니, 아예 헤드셋을 끼고 누워버리는 로버트.
이런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버트였지만.
지금은 제리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어주려는 모양이다.
[괜히 달래주려다 쟤도 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 곤란하지.
쪽팔려서 다저스에 FA 잔류할 생각이나 들겠어?
[가서 뭐라 그러나 보고 올게. 솔직히 너도 궁금하잖아?]
뽈뽈뽈 날아가더니 한참 지나고서야 돌아온 박도현.
근데 어째 표정이 묘하다.
[니 뒷담화하고 있던데?]
‘진짜냐?’
[응. 내 동생 박도아 걸고. 진짜야.]
내가 형제자매가 없어서 잘 모르긴 하는데, 원래 오빠한테 동생쯤은 언제든 팔아넘길 수 있는 존재 아닌가?
아무튼.
진짜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조쉬를 털어 보든가 하면 답이 나올 테니 두고 보자고.
너나 제리 둘 중 한 놈은 민트초코 피자 한 판을 통째로 먹게 될 테니.
* * *
“모레…… 가 아니고 내일이군. 내일 다시 다저 스타디움에서 만나자고.”
“알겠습니다!!!”
원정 시리즈를 마치고 돌아온 늦은 밤의 다저 스타디움.
도대체 어떻게 뒷담화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운을 차린 조쉬를 비롯해, 다저스 선수단은 내일을 기약하며 구장을 떠났다.
[뭐 하냐? 출발 안 해?]
차에 올라타서 시동 걸 생각은 않고 핸드폰만 만지고 있으니, 박도현이 의아하다는 듯 쳐다본다.
얘는 진짜 남의 일에 관심이란 게 없나. 그것도 지 스승 일인데.
“오늘 훌리안 건강검진 받기로 한 날이잖아.”
[아, 그랬지……?]
훌리안이 시간이 된다던 이날이 공교롭게도 내가 원정 시리즈를 치를 때였는지라.
에이전시에게 부탁해 매니저를 한 명 붙여서 병원으로 데려갔다.
종합 검진이라도 어지간하면 하루 안에 결과가 나오니, 특이사항이 있으면 나한테 문자라도 남겼을 텐데. 그런 게 없었으니 내심 마음은 놓고 있었다.
“밤이라 통화 어려우시면 내일 결과 알려달라고 문자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시동을 걸기가 무섭게 훌리안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는 걸 보며, 안도감은 조금씩 불안으로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코치님. 이 시간엔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네놈 문자 알림에 깼다. 이 매너 없는 꼬맹이 놈아.]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에서 잠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훌리안.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한 태도에서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지던 그 순간.
[나 암이란다.]
말에 이것저것 갖다 붙이기를 싫어하는 훌리안답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폭탄 선언을 전해 듣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