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우리집 (1)
전반기에는 어쩌다 LA에서 보내는 휴식일이 생기면 각종 행사나 촬영 현장에 불려 나가기 바빴다.
올스타전에 나가게 될 줄 모르고 꽉꽉 채워둔 스케줄을 분배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지. 대신 계좌가 두둑해지기도 했고.
후반기에는 그럴 일도 없으니 오늘이야말로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거릴 생각이었지만.
나는 오전부터 LA 교외의 한 대형병원을 찾아야 했다.
“뭘 봐. 암환자 처음 보냐?”
퉁명스럽게 구는 훌리안을 보니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전날 밤 통화에서도 확인하긴 했지만, 적어도 상태가 심각해 보이진 않아서.
[전에 올스타전에서 봤던 것보다 살이 더 빠졌네.]
안타까운 듯 목소리를 까는 박도현.
마지막으로 만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도 얼굴이 조금 수척해진 게 눈에 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검사 끝내고 결과 들으러 가니까 정밀 검사 필요하다고 끌고 가더라. 애꿎은 호텔비만 날렸네.”
그렇게 나온 진단은 대장암 2기.
근처 장기와 멀지 않은 곳에 병변이 있어, 해를 넘겼더라면 위험했을 거라나.
“모레에 바로 수술 들어가도 된다더라. 만약 어제가 네놈이 원정 출발하는 날이었으면 LA 돌아왔을 땐 벌써 퇴원했을걸?”
2030년대 이후, 초기 암의 수술 요법이 발달하면서 수술부터 퇴원까지 일주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게 됐다.
물론 그 후에 관리가 더 중요하지만.
자녀분들도 있고 데릭도 신경 많이 쓸 테니, 본인이 관리하기 싫어도 강제로 할 수밖에 없겠지.
“다행이에요.”
“다행이지 그럼. 데릭 그놈이 하도 닦달해서 의료보험 들어놓고 다달이 돈 내길 잘했어. 네놈한테 받았던 돈 고스란히 병원에 갖다 바칠 뻔했네.”
하여튼 저 영감님.
고마운 건 고맙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을 모른다.
저래놓고 데릭한테는 내 덕분에 목숨 건졌다고 하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감사의 표시는 다른 방식으로 받으면 되니까.
“올해 말쯤엔 회복까지 얼추 끝나시겠죠? 저 홈런 타자 만들어주시기로 했잖아요.”
“참 나. 홈런 타자는 기술적으로 접근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얘기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타석에서의 대응법이 중요하다고 말은 했지만.
한 시즌 내내 홈런을 꾸준히 때려내려면 그에 적합한 몸을 만드는 게 필수적이다.
이미 내 오프 시즌 일정을 데릭한테 물어봤다고 하니, 훌리안도 미리 준비하려는 모양.
최근 치렀던 경기, 팀 분위기, 최근 괜찮다는 투자처(가장 흥미를 보였다) 등등.
한참 얘기를 나눈 지 한 시간쯤 됐을까.
“슬슬 손주들 올 시간이니 그만 들어가 봐라.”
“알겠습니다. Park네 가족들 좀 있으면 LA 온다고 전에 말씀드렸죠? 다음엔 같이 올게요.”
“오든가 말든가.”
[뭔가 저러고서 막상 안 오면 삐질 것 같은데…….]
그걸 이제 알았냐.
아마 너 살아 있을 때 훌리안이 너 때문에 수십 번은 더 삐졌다가, 원래 저렇게 생겨 먹은 놈이구나 싶어 포기했을걸.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려던 그때.
훌리안이 뭔가 좀 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들어가라. 앞으로 수고 좀 하고.”
뭔가를 꾸미는 것 같긴 한데, 좀 있으면 수술 들어가는 양반이 무슨 짓을 하려고.
[방금 훌리안 꼭 너 같은 표정 짓고 있던데?]
‘그러냐? 딱히 선량한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너는 양심이 없는 거냐, 개념이 없는 거냐?]
* * *
[Park과 Koo를 키워낸 타격 코치 훌리안 로페즈, 대장암 2기 판정!]
[훌리안 로페즈란? 2037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서 Koo의 배팅볼을 던져준 개인 인스트럭터]
[훌리안 로페즈의 최측근, “병세는 심하지 않으며, 빠르게 수술 일정을 잡은 상태.”]
훌리안의 투병 소식은 바로 다음날부터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몸값이 높고, 거의 모든 팀이 모셔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코치가 암에 걸렸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몇몇 기사를 필두로 사람들의 시선이 묘한 곳으로 쏠렸다는 거다.
[훌리안 로페즈, “Koo가 비용까지 내주면서 건강 검진을 받으라고 잔소리를 해 댔다.”]
[스승을 생각하는 제자의 마음씨, 암을 조기에 발견토록 하다!]
[투수에서 타자로 복귀, 메이저리그 신기록, 그리고 이제는 미래 예지까지! ‘미라클 Koo’의 기적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는 그렇다 치자.
근데 평소 나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를 종종 써주던 언론에서 내보낸 세 번째 기사는 명백한 뇌절이었다.
[저기, Koo. 지나친 참견일지 모르지만, 너의 특수한 상황을 너무 자주 이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 물론 이번 일은 반드시 필요했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내가 죽은 박도현이랑 영혼이 뒤바뀌었느니 뭐니, 이딴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는 빡대가리 크리스토퍼의 반응이었다.
나랑 친분(?)이 있는 이 자식마저도 이 모양인데, 일면식도 없는 음모론자들은 어땠겠나.
항의하려고 연락해봤는데 훌리안은 아예 내 전화는 받지도 않고.
[어차피 언론이 귀찮게 굴 거, 화살을 너한테 돌리려고 그랬구만?]
그것도 그건데.
시범경기 때 인터뷰에서 과도한 관심을 피하겠답시고 훌리안의 이름을 팔아먹은 걸 복수하려는 의도도 있을 거다.
물론 저러는 것도 며칠이면 잠잠해질 테지만.
“미라클 Koo다! 다저 스타디움에 기적을 행사하러 찾아오셨다!”
“미라클 Koo! 파워볼 번호 좀 알려주세요!”
“자이언츠 놈들이 10연패 하게 해주세요!”
라커룸에 들어가자마자 놀려대는 이 양반들의 장난기도 그 안에 잠잠해질지는 모르겠지만.
“맙소사! 미라클 Koo가 얼굴을 찌푸렸어!”
“우린 전부 저주받을 거야!!”
동료를 향한 분노를 동료에게 직접 푸는 건 삼류라고 했던가.
몸풀기 훈련에 팬서비스까지 차질 없이 진행한 나는, 홈으로 찾아온 파드리스의 투수들을 겨냥했고.
따아아아아아악―!
[이 타구는! 다저 스타디움의 중앙 외야석을 향해! See! You! LAter!!! 시즌 22호 홈런! Hyun! Ki! Koo!!! 스코어는 2대 4로 단숨에 역전!! 1회 말에 이어 멀티 홈런 경기를 치르고 있습니다!!]
[파드리스의 선발 투수,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표정입니다. 콜업 후 첫 선발 등판임에도 1회 말 솔로 홈런을 제외하면 4이닝을 잘 막아주고 있었는데, 결국 이 한 방에 무너지네요!]
[이건 파드리스 덕아웃 책임입니다. 투아웃에서 괜히 정직한 승부를 택할 필요는 없었어요. 1회 때도 그렇고, 스승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Koo의 멘탈이 흔들려 있을 거라고 착각하기라도 했나요? 하지만 어림도 없지!]
5이닝 2실점으로 등판을 마치고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다니엘이었지만.
두 명의 주자와 함께 베이스를 돌아 덕아웃으로 돌아오니 울먹이면서 나를 맞이했다.
“나를 기대하게 만들지 마, Koo. 희망은 나를 괴롭게 만든단 말이야…….”
다니엘의 계약 기간은 2+1년.
이 성적을 유지하면 구단이 무조건 옵션을 행사할 테니, 최소 2년은 여기서 더 뛰어야 한다는 것.
네가 선택한 계약이다, 다니엘.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San Diego Padres 2 : 5 LA Dodgers]
하루 쉬고 올라온 필승조가 연달아 안타를 맞으며 간담을 서늘케 했지만.
다저스는 결국 승리를 지켜냈고, MVP 인터뷰는 역전 쓰리런을 날린 내 차지가 되었다.
“훌리안이 암에 무너질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저를 홈런 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테니까요.”
스승께서 나를 향해 사람들의 시선을 돌려주셨으니, 그걸 기꺼이 써먹어야지.
내년에도 날 봐줄 테니 허튼생각하지 말라며 침이라도 발라둬야 속이 시원하겠다.
* * *
다음날.
다저 스타디움에서 2연전을 마치고 중부로 떠나야 하는 파드리스의 일정상, 평일 낮 경기를 치렀고.
밥값을 대신 내주는 기적을 발휘해달라며 엉겨 붙는 동료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퇴근길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집.
집안 관리는 베테랑 하우스키퍼에게 맡겨두는지라 언제나처럼 청결했지만, 괜히 이곳저곳 쏘다니면서 지저분한 곳은 없는지 체크했더니.
박도현이 정신 사납게 굴지 말라며 짜증을 낸다.
[너 왜 그러냐? 설마 긴장하냐?]
‘긴장은 무슨.’
긴장이라기보다는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은 좀 되지.
전화로 연락은 자주 했지만, 실제로 만나본 건 거의 2년 가까이 지났으니까.
남자였으면 군대도 다녀올 시간인데.
띵동.
“예! 나갑니다!”
문을 열자, 양복을 입은 운전기사 뒤편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커다란 캐리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박도현의 아버지, 그리고 동생 박도아.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좋은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 고마워요. 팁이라도…….”
“괜찮습니다. 이미 추가 수당을 넉넉하게 받았으니까요.”
운전기사가 사라지고 세 사람만 남게 되자.
박도현의 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캐리어를 내밀었다.
“야, 현기야. 나는 처음에 저분 경호원인 줄 알았다. 등빨이 아주…….”
아버지는 2년 만에 만났는데도 다행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아들 친구가 어색해할까 봐 먼저 가벼운 잡담을 던지는 마음씨까지도.
그렇다고 변한 게 아예 없지는 않지만.
[아, 아빠…… 머리가…….]
박도현이 입을 틀어막았다.
정수리가 아닌, 이마 쪽에서 늘어나고 있는 살색의 면적.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탈모가 상당히 심해졌다.
저건 스트레스가 아니라 남성형 탈모라 고칠 방법도 없을 텐데.
“오랜만이다, 오빠.”
반대로 박도아는 전에 봤을 때랑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사실 처음 마주쳤을 땐 누구인지 알고도 잠깐 헷갈렸을 정도.
물론 얘랑 마지막으로 봤을 땐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달라져 있는 게 당연하긴 하지만.
“너 지금 키가 몇이지?”
“178인데.”
사고 이후 SNS 계정도 삭제하고, 사진이라곤 카톡 프로필 정도밖에 없었으니 알 도리가 없었는데.
거의 박도현과 키가 비슷할 정도로 무럭무럭 자란 박도아.
제대로 재보면 모르겠는데.
‘야, 너 쟤 옆에 서봐.’
[내가 왜?]
질색하면서 피하는 박도현.
구석에 찌그러지더니 원래 남자는 군대 가서도 키가 크느니 어쩌느니 꿍얼거리기 시작했고.
그냥 무시하면서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밖에 더웠지? 얼른 들어와. 에어컨 틀어놨다.”
“아 뭐야 오빠. 완전 엄마 같애.”
내용물은 하나도 안 변했구나.
박도현네 거실 바닥에서 셋이 함께 뒹굴대며 나이 한참 차이나는 오빠들한테 깐족대던 그때랑 똑같아.
추억에 잠긴 날 내버려두고는 손님용 슬리퍼로 갈아신은 박도아가 주방으로 향했다.
“내가 말한 거 준비 다 해놨지? 감자탕 먹고 싶다며.”
“어, 응. 고기 핏물도 다 빼놨다.”
사실은 하우스키퍼가 해둔 거지만.
박도아가 요리하는 동안 아버지와 함께 손님방에 짐을 풀고.
세 사람(그리고 유령 하나)이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저녁을 먹었다.
“와, 어머니가 해준 맛 그대로다. 내가 재료 사다 해봐도 이 맛이 안 나더라고.”
“그거 조미료 안 넣어서 그랬을걸?”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도 알게 됐지만.
남이 해준 집밥을 먹는, 미국에 오고 나서는 박도현네 어머니가 가끔 찾아올 때만 누릴 수 있던 행복.
여기에 그동안 쌓아둔 이야기보따리가 더해지니.
[털사 식당 감자 샐러드보다는 먹어줄 만하네.]
‘넌 니 동생 밥을 그딴 거에 비교하고 싶냐?’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평화로운 시간.
그러나 아버지와 박도아에게는 이 시간이 어딘가 허전하고 쓸쓸하게 다가올지도 모르지.
이 둘한테는 밥 먹자마자 드러누워 배를 긁는 박도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아버지.”
“응?”
허락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전부터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다.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
“이 집, 혹시 저한테 안 파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