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93화 (93/200)

93. 우리집 (2)

“집을…… 팔라는 말이냐? 이 집을?”

“예.”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고 비싼 집이라는 건 나도 안다.

박도현이야 초대형 장기계약을 맺었으니 어느 집이든 부담이 될 일은 없었지만, 나는 그런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내가 내년을 마지막으로 LA를 떠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왜 그래. 우리가 너한테 이제 와서 월세 받기라도 하겠니? 집 관리도 네 돈 들여서 하고 있잖아.”

박도현의 아버지 말대로, 아마 나한테 월세를 청구할 일은 없을 거다.

이성적으로만 따지면 FA 때까지 살다가, LA를 떠나게 되면 비워드리고 남게 된다면 그때 가서 매입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지.

그러나 모든 선택을 이성적으로만 할 수는 없다.

“여기 월세 안 내고 살게 해주시는 거 저도 너무너무 감사한데, 저도 마음이 불편해요.”

박도현한테는 절대 말 안 할 거지만, 나는 이 집이 좋다.

함께 살던 누군가가 떠났을 때, 그 빈자리를 못 견디고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곳에 계속 머무르며 계속 추억을 되새기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아무래도 후자 쪽 같더라고.

물론 지금도 옆에서 둥둥 떠다니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추억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지.

그런 의미 있는 공간을 남의 선의에 기대서 계속 쓴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모를까, 그러고 싶진 않다.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도 하나 있는데…… 도아 때문이기도 해요.”

“나? 나 왜?”

옆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던 박도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도아가 LA에서 유학한다는 소식이 금방 퍼질 거거든요. 근데 학교까지 차로 다닐 만한 거리에 집이 있는데도 기숙사에 살고, 그 집에 제가 계속 산다는 게 알려지면…….”

“오빠가 좀 난처해지겠네.”

아무리 서로 합의했다고는 해도, 결코 흔한 상황은 아니지.

이걸 악의적으로 해석해 퍼트리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올 거다.

집을 무단 점거하고 있다느니, 동거를 강요해서 도망쳤다느니, 뭐 이런 것들.

월세를 내지 않는다는 정황이 있으니 쓸데없이 설득력이 올라갈 테고.

[야, 근데 잠깐만.]

아버지가 고민하는 사이 끼어드는 박도현.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면서, 그럼 왜 진작 안 샀는데?]

음.

솔직히 자존심 상해서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은데.

‘돈이 부족해서…….’

[아…….]

작년과 올해의 연봉을 합치면 1,000만 불.

그러나 이게 고스란히 들어오는 게 아니고, 세금과 에이전트 수수료, 기타 비용 등을 제하면 손에 잡히는 돈은 절반 좀 안 되고.

남은 돈도 여기저기 투자한 게 좀 있는 데다, 훌리안을 고용하면서 목돈도 빠져나갔지.

광고 촬영료나 스폰서 계약금이 들어오면서 요즘에야 다시 통장에 돈이 쌓였다.

“그런 사정이 있다면야…… 일단 알겠어. 도현이 엄마랑 얘기는 해볼 건데, 문제는 없을 거다.”

“네네. 한국 돌아가시기 전까지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회사 끼고 하는 거라.”

“근데 말야. 조건이라기는 좀 그렇고. 아저씨가 부탁하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어.”

박도현의 아버지가 손가락 두 개를 펼친다.

“일단 현기가 사정상 여기를 떠나게 될 수도 있잖아? 그래서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다른 데 말고 꼭 아저씨한테 먼저 연락해줬으면 좋겠다.”

“그럼요. 그래야죠.”

LA를 떠나더라도 정말 어지간히 금전적으로 쪼들리지 않는다면 계속 보유할 생각이지만.

반대로 박도현의 가족들에게 이 집이 필요해진다면 바로 팔고 다른 집을 알아봐야지.

적어도 나보다는 이 집을 소중히 여겨줄 사람들이니.

“그리고 또 하나는…… 현기가 지금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잖아? 그걸 다시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거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탁이었다.

급식 먹던 시절에는 반쯤 장난삼아 나를 큰아들, 박도현을 작은아들이라고 불러주셨으니까.

생일도 내가 더 빠른데 왜 작은아들이냐고 발악하던 박도현을 덩치로 찍어 누르던 추억도 있고.

“우리를 진짜 가족처럼 생각해주는 건 너무 고맙지. 근데 현기한테도 아버지가 계시잖아? 너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주시고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신 분은 내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잖니.”

맞는 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살면서도 얼굴 보기 힘들고, 미국 오고 나서는 거의 만나지도 못했지만.

아버지의 지원 없이는 야구를 시작할 수도, 이렇게 메이저리거가 될 수도 없었겠지.

“알겠어요, 아저씨. 제가 생각이 좀 짧았네요.”

“그래. 아저씨가 선 그으려고 이러는 거 아니다. 알지?”

“그럼요.”

집 매매에 필요한 세부 절차에 대해 간단하게 대화를 마치고.

시차 때문인지 일찍 자야겠다는 두 사람을 손님방으로 올려보낸 뒤.

낡은 명함 하나를 쥐고 생각에 잠겼다.

[뭐냐 그거? 명함?]

‘그런 게 있다.’

아버지의 개인 연락처가 적힌 명함.

마지막 통화는 사고 이후 재활하던 시절이었다.

할 말을 쥐어 짜내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은 채 통화 버튼을 눌렀고.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에라이.”

핸드폰을 소파 구석에 집어던졌다.

감사는 무슨. 괜히 안 하던 짓 했다가 흑역사나 만들 뻔했다.

털끝만큼 남아 있던 정나미도 다 떨어지겠네.

* * *

매일 아침 10km 러닝.

투수 시절부터 꾸준히 지켜온 루틴이다.

간소한 기구 몇 개와 러닝머신을 놓아둔 방에서 숨이 차도록 뛰고 나서, 땀범벅이 되어 샤워실로 향했다.

[야, 지금 말고 좀 이따 오는 게…….]

‘뭐라는 거야.’

박도현의 지적을 흘려들으며 손잡이를 돌리는데, 문이 잠겨 있다.

“오빠, 잠깐만! 나 금방 나갈게!”

“어, 아냐. 미안하다.”

잠깐 문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자니 문이 열린다.

더운 공기와 함께 훅 끼쳐오는 샴푸향.

막 씻고 나와 화장기는 없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오빠. 혹시 드라이어 이거밖에 없어?”

“어. 왜? 고장 났냐?”

“좋은 것 좀 써. 바람도 무슨 2단밖에 없고. 세일 스티커도 제대로 안 뗐네.”

“밖에 나가서 헤드뱅잉하면서 자연풍으로 말리던가.”

대꾸 없이 도로 닫히는 문. 이내 드라이어 소리가 새어나온다.

‘쟤는 다 컸는데 말하는 건 진짜 예전 그대로네.’

[난 니네 둘이 편 먹고 나 갈굴 때가 제일 서러웠어.]

잠시 후, 머리를 대충 말린 박도아가 상쾌한 표정으로 나왔다.

교체하듯 안으로 들어가는데, 박도아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날아와 박힌다.

“씻고 나와. 아침밥 해줄게.”

익숙한 집 냄새를 뚫고 나오는 낯선 샴푸 향 때문일까.

별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그 자리에 덜컥 멈춰 서고 말았다.

[스턴 걸렸냐? 그대로라면서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아니다.’

설렘과 현타가 동시에 찾아오는 묘한 기분.

미국 오고 나서 여자한테 씻고 나오란 말을 처음 들어보긴 했는데. 그게 동생이나 다름없는 쟤한테서라니.

땀과 함께 복잡미묘한 감정까지 깔끔하게 씻어내고 주방으로 향하니 박도아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전에 왔을 때랑 똑같이 하면 되지? 오빠랑 박도현이 맨날 먹던 대로.”

“어, 잠깐만. 같이 하자.”

홈 경기에서 출근 전 먹는 식사는 소박하다.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는 선수들은 재료부터 배치까지 겁나 까탈스럽게 굴기도 한다는데. 그러지는 않고.

계란과 각종 채소, 베이컨이 기본에. 냉장고에 있는 재료 아무거나 꺼내서 곁들인다.

아침은 박도아와 둘이서 먹는다.

아저씨는 지금 깨우러 올라가 봤자 출발 30분 전에 깨우라는 소리나 듣는다.

밖에서 보면 남녀가 단둘이 아침을 먹는다는 흐뭇한 상황일 텐데.

박도아의 뒤에 서서 반투명한 계란 프라이를 입에 질질 흘리며 먹는 박도현이 보이는 나한테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

“어제 오빠 때문에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

다 먹어갈 때쯤 박도아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다음 학기엔 오빠를 쫓아내고 내가 이 집을 차지하려고 했는데.”

농담인지 아닌지 좀 의심스럽다.

박도현 인성이랑 똑같이 자랐다면 진담일 텐데.

그럼 일단 진담으로 대답하지 뭐.

“열쇠 줄게. 오고 싶을 때 와.”

“……어?”

“나 어차피 여기 있는 시간 얼마 안 되잖아. 하우스키퍼랑 시설 관리하는 분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원정 가 있을 땐 마음대로 자고 가.”

잠깐 굳어 있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그릇을 챙기는 박도아.

설거짓거리를 개수대에 넣어두고 오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맞은편에 앉는다.

“그럼 대학에서 새로 생긴 친구들 데려와서 자도 돼?”

“응. 내가 쓰는 방만 안 들어가면 돼. 어차피 잠가놓지만.”

“그럼 남자애들 데리고 와도?”

그 말을 듣고서야.

얘가 이제 박도현네 집에서 함께 뒹굴면서 TV 보던 그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느낀 것 같다.

박도아랑 사귀려면 나 상대로 홈런 치고, 박도현 상대로 삼진 잡아야 한다는 농담이 더는 통하지 않는.

“그건 솔직히 싫을 거 같아.”

얘가 대학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좋은 감정이 싹트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건 나도 안다.

근데 이 집에서 만나는 건 집주인이 싫다는데 어쩌겠어.

아직 집주인은 아니지만. 얘가 입학할 때쯤이면 그렇게 될 거니까.

“나도.”

박도아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연다.

“오빠가 나 모르게 여기에 여자 데려오면 싫을 것 같아.”

밤샌 것도 아니고, 푹 자고 운동까지 끝냈는데.

왜 이런 말이 뇌를 안 거치고 튀어나올까.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치. 니가 언제 올지 모르잖아. 근데 니 오빠는 나랑 같이 살 때도 내 허락 없이 여자 데려오고 그랬어.”

“나도 알아. 걔는 원래 쓰레기야.”

[아니 이 화살이 나한테 돌아온다고?!]

* * *

메이저리그 시즌은 요일마다 쉰다거나 하는 명시된 휴일이 없고, 어쩌다 드물게 쉬는 날이 주어지는 식이며.

평일이건 주말이건 경기가 있다 보니, 박도현의 가족들과 함께 어딜 다니거나 그럴 순 없다.

홈 저녁 경기 때는 가족이나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고 출근하는 선수도 많은데, 내 루틴은 경기장에 일찍 출근하는 거라서.

“오랜만입니다, Koo. 실제로 만나는 건 올스타전 이후 처음이죠?”

출근 전, 일정을 위해 먼저 집을 나서는 아저씨와 박도아.

두 사람을 데리러 온 사람은 다름아닌 에이전트 데릭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바쁘실 텐데.”

“Park은 제 에이전트 인생 최고의 고객 중 하나였으니까요. 길게 시간 못 내는 게 오히려 죄송하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만큼 대표가 할 일도 산더미지만, LA를 방문한 김에 잠시 시간을 냈다나.

두 사람이 먼저 차로 내려가고, 데릭은 잠시 할 얘기가 있다며 남았다.

“오늘 오후부터 귀국 전까지는 저 대신 한국에서 온 UCLA 유학생이 함께 안내할 겁니다.”

“아, 네. 그분은 그럼…….”

“차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여학생으로 고용했으니, 동생분의 학교생활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겠죠.”

“그래요?”

그러자 데릭이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Koo. 주제넘은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지만…… 당신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는 걸 오늘 처음으로 봤네요.”

[뭔 소리야? 무슨 포커페이스?]

‘걍 닥쳐…….’

아까 박도아랑 그런 얘기만 안 했어도 괜히 의식하고 그러진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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