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에이스 VS 에이스 (1)
LA 교외의 대형 병원.
그 최상층에 자리한 1인실에서 한 노인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네가 그 꼬맹이 놈의 동생이라고? 정말이냐? 이 집 유전자는 자식들한테 키를 몰빵하기라도 한 거야?”
암 수술을 받은 지 이틀밖에 안 지난 노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정정한 훌리안.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저희 가게 오셨을 때 제가 상차림도 다 했는데.”
스페인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마구 떠들어대는 훌리안과 용케도 수월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박도아.
“어, 웰, 하우짓 고잉……?”
기초 회화 정도만 할 줄 아는 아저씨는 굳어버렸고.
좀 이따 중요한 경기도 있겠다, 괜히 나서서 떠들며 에너지 낭비하기 싫었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레 훌리안과 박도아만 죽이 척척 맞아 떠드는 모양새.
“이따 제리 놈이 등판한다며? 병원에 묶인 몸만 아니었으면 나도 보러 갔을 텐데 말이야.”
“맞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중요한 경기마다 말아먹고, 가을 되면 또 말아먹고 그래서 에이스 역할은 기대도 안 했는데. 올해는 다르더라고요.”
“에이스는 개뿔. 그놈 오프 시즌에 훈련하면서 저기 저놈한테 홈런 처맞은 거 아냐? 아마 그날 집 가면서 질질 짰을 거다.”
“어머, 진짜요?”
한참을 떠들다 가야 할 시간이 되자, 훌리안이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척 보기에도 그리 얇아 보이지 않는 봉투.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아버지가 용돈 쥐여주는 건 똑같네.
“이번에 대학생 된다면서. 여기저기 들어갈 데가 많을 테니 아무 말 말고 받아. 많이는 못 담았다. ”
“네?!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결국엔 받을 거면서 한사코 밀어내는 것도 똑같고.
이 세상에서 가장 생산성 없는 밀당을 지켜보다가, 빨리 돌아가기 위해 끼어들었다.
“도아는 필요 없다잖아요. 저나 주세요.”
봉투 쪽으로 슬쩍 손을 뻗자, 링겔 꽂은 손으로 내 손등을 후려치는 훌리안.
박도아의 손에 봉투를 쥐여주며 나를 노려본다.
“저놈한테는 특히 한 푼도 쓰지 마라. 데이트할 때도 저놈보고 다 내라 그래.”
그 말을 듣자마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박도아.
하필 이럴 때 눈이 마주치고 난리야.
함께 아침을 먹었던 첫날의 그 묘한 분위기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데이트…… 라고요?”
아무리 대화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더라도, 데이트라는 단어는 알아들었던 건지.
아저씨가 표정으로 딱딱하게 굳히며 끼어들었지만.
훌리안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데이트 정도야 친구끼리라도 다 하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Park 이놈은 아무 여자랑 좋다고 싸돌아다니드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유롭게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멱살 붙잡고 싸움이라도 하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연신 박도아를 힐끔거리는 아저씨.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박도아가 끼어들었다.
“Park이 원래 그랬어요. 오는 여자 안 말리고 가는 여자 안 잡는다나?”
“가끔은 안 간다는 여자도 내보내고 그랬어.”
[아니 니들 왜 계속 나만 갖고 그러는데?!]
원래 팩트로 맞는 게 제일 아픈 법이란다, 친구야.
“됐으니까 얼른 그 봉투 받아 챙겨, 도아야. 나 슬슬 가 봐야겠다.”
“아, 내 정신 좀 봐. 저기, 정말 감사해요. 잘 쓸게요.”
“오냐. 공부 열심히 하고. 그리고 너. 작은 꼬맹이.”
나가려던 나를 부르더니, 눈을 부릅뜨며 강조한다.
“오늘 같은 경기야말로 더 정신 바짝 차리란 말이야. 알아들어?”
“그럼요. 누가 키운 선수인데.”
“참 나. 말이나 못 하면…….”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씰룩대는 건 숨기지 못하는 훌리안.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현기야. 아저씨가 자세히는 모르는데, 오늘 경기가 혹시 중요한 거였니?”
그러자 박도아가 경악에 찬 눈으로 쳐다본다.
하긴 이걸 모르고 가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겠지.
조금만 더 늦게 문의했다면 선수 가족 전용 티켓을 얻기도 힘들었을 텐데.
“오늘 에이스들끼리 자존심 싸움하는 날이거든요.”
오늘 경기 상대는 시카고 컵스.
시리즈 스코어 1승 1패로 동률.
각 팀의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과 A.D. 존슨이 맞대결을 펼친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임해야 하는 경기인 만큼.
신경 쓰이는 건 미리 깔끔하게 해결하고 가는 게 좋겠지.
“근데 그거 진짜 얼마 들었냐?”
“안 알려줄 거야. 데이트도 안 할 거야.”
[이걸 차이네.]
박도현이 코웃음을 치고. 옆에서 걸어가던 아저씨의 콧구멍이 아주 살짝 벌름거렸지만.
“오늘 홈런 때리면 생각은 해볼게.”
자기가 한 말에 다들 덜컥 굳어버리는 가운데 혼자 저벅저벅 걸어가는 박도아.
아저씨가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자기도 모르게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어서 생략한 거겠지?
* * *
24경기 161이닝 132탈삼진 ERA 1.17.
4월부터 7월까지, 내셔널리그 이달의 투수 수상.
토미 존 서저리로 작년 시즌을 재활로 날렸다가 올해 복귀한 시카고 컵스의 에이스, A.D. 존슨의 기록이다.
“Koo의 도루요?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분이 계실 줄 몰랐습니다. 그건 정당한 플레이였고, 우리는 올스타전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경기 전 인터뷰에서, 존슨은 퍼펙트를 무산시킨 뒤 도루를 감행했던 리글리 필드에서의 사건에 대한 질문에 웃어넘겼다.
빵빵한 팔 근육의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악력기를 움켜쥐면서.
[보란 듯이 근육 자랑하는 거 보소. 아주 대놓고 벼르고 있는데?]
└ 아니 지가 빡칠 일이 뭐가 있어? 둘이 뭐 트래시 토크라도 한 것도 아니고.
└ 왜 빡치는지 모르겠다고? 퍼펙트가 보통 안타도 아니고 쌥쌥이 내야안타로 깨졌는데? 게다가 그거 깨지자마자 도루까지 내주고 완봉승도 날아갔는데?
└ 그러니까. 그걸 왜 Koo한테 화풀이하냐고. 보니까 Koo가 발도 빨랐고 컵스가 수비도 개떡같이 했더만.
└ XXX 너 어디 사냐? 나 주짓수 체육관 관장인데, 내 앞에서도 한번 똑같이 말할 수 있나 궁금한데?
└ 나? 변호사다 X신아. 이번 경기 직관하러 오냐? 어디 나 발견하면 쳐 보던가. 체육관 문 닫게 해줄게.
팬덤 규모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다저스와 컵스의 팬들은 온라인에서 서로 멱살을 부여잡았고.
경기를 마치자마자 LA를 떠나야 하는 컵스의 일정상 평일 퇴근 시간 전에 시작되는 경기인데도,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Go Cubs Go!!!”
“오늘 뒤졌다고 복창해라! X킹 퍼랭이 놈들아!!!”
훈련을 마치고 원정팀 선수들을 위해 그라운드를 비워주는데, 벌써부터 귀가 따갑다.
컵스 선수들도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고.
“저 새끼들 눈깔 예쁘게 안 뜨네? 어제 이겼다고 지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냅둬. 지들 에이스 나온다고 아주 기합 빡 들어갔나 보지 뭐.”
“근데 사실 저게 정상 아닌가?”
이럴 때 괜히 한마디 더 보태서 욕을 얻어먹곤 하는 랜디가 이번에도 초를 쳤다.
쏟아지는 꿀밤과 갈굼을 피하며 랜디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한다.
“아니 맞잖아. 에이스 나오는 경기엔 원래 더 열정도 불태우고, 응? 그러는 맛이 있는 건데.”
“열정 같은 소리 하네. 넌 대체 뭐가 문제야?”
“우리는 좀 전까지 제리 뒷담화나 하고 있었잖아.”
양심에 찔리는지 갑자기 딴청을 피우는 선수들.
“아니, 뭐…….”
“근데 그딴 고백 편지를 평가해달라고 가져오는 건 솔직히 선 넘은 거 아니냐?”
“대학 다닐 때 쓴 거라잖아. 그리고 니 대답도 선 넘긴 했어.”
“쟤가 뭐랬는데?”
“어지간하면 영어권 여자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에이스라.
보통 에이스 하면 투수진을 통솔하면서, 오늘 경기는 반드시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절대적 믿음을 주는, 캡틴과 더불어 팀의 근든한 기둥이란 이미지가 강한데.
제리는 그냥 동네북이니까.
“뭐 어떠냐? 좀 찐따에다 싸가지 없고 낯도 심하게 가리고 온 행동에 겉멋이 배어 있지만, 제리가 상대 팀 놈들한테 다구리 처맞을 것 같을 때 두고 볼 놈 있어?”
이미 말로 후드려 패고는 있긴 한데.
어쨌든 루카스의 물음에 망설이는 선수는 없었다.
“그건 아니죠. 걔 허우대만 멀쩡하지 싸대기만 맞아도 입원할 놈인데.”
“패도 우리가 패야지. 어디서 감히!”
오늘 상대할 A.D.나, 반쯤 공식적으로 에이스 자리를 넘겨준 우리 팀의 로버트처럼 카리스마로 팀을 통솔하는 에이스가 있는가 하면.
제리처럼 평소엔 서로 디스하며 투닥거리면서도 경기만 시작됐다 하면 다 함께 진지해지는 그런 에이스도 있는 법이겠지.
어쨌든 오늘처럼 중요한 경기에 선발로 내세우더라도 불안하지 않다는 건 똑같으니.
“그럼 이제 경기 준비나 하자고. 우리 에이스님이 승리를 가져와 주실 테니까.”
양 팀 에이스 간의 맞대결 말고도 여러 가지가 걸려 있는 오늘 경기.
시즌 24번째 등판인 오늘 퀄리티스타트를 달성하면, 메이저리그 기록이자 세계 기록인 연속 23경기를 넘어서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승차가 1경기로 좁혀진 지금, 오늘 우리가 이기고 자이언츠가 지면 게임 수가 더 많은 우리가 단독 선두로 올라선다.
“그래, 가서 준비들 하자!”
“하던 대로만 하자! 괜히 잘하려고 오버하지 말고!”
“우리도 1등 한번 해보자고!”
지금쯤 불펜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을, 평소엔 등신 같지만 마운드 위에선 누구보다도 든든한 에이스를 믿고.
각자의 루틴대로 경기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 * *
양 팀의 선발 투수야 존슨 쪽이 지표상 아주 살짝 앞설 뿐, 비교가 사실상 무의미할 정도로 살벌하지만.
타격 지표로만 보면 우리가 살짝 앞서는 편이지.
다만 부상으로 잠시 팀을 떠난 주전 3루수 켄의 복귀가 하필이면 다음 주라는 게 조금 아쉬울 뿐.
백업 선수인 조나단으로 경기를 치르는 이상, 투수건 타자건 조건은 비슷하다고 봐도 된다.
“플레이 볼!”
주심의 선언과 함께, 마운드 위에 선 제리가 짧은 한숨과 함께 와인드업을 했고.
다저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푸른 물결이 일제히 숨을 죽이는 가운데.
수많은 관심이 쏠리는 오늘 경기의 첫 공이 뿌려졌다.
쐐애애액―!
퍼엉!
“스트―라잌!”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깥쪽 라인을 스치듯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
쏟아지는 홈팬들의 환호 속에서, 컵스 리드오프는 멘탈이 살짝 나간 듯 2초 정도 멈춰 있었다.
‘오늘 다 뒤졌다.’
바로 전 경기에서 6이닝 3실점으로 아슬아슬하게 퀄리티스타트를 지켜내며 주춤하기도 했고.
데뷔 초부터 작년까지는, 반드시 잡아내야만 하는 경기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경향이 있어 조금 걱정하긴 했지만.
저 정도 컨디션이라면 어지간한 타자는 배트를 내는 것조차도 망설여질 거다.
“스트라이크 아웃!”
파울 하나를 쳐내며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1번 타자를 소득 없이 돌려보낸 것을 시작으로.
“아웃!”
내 앞으로 날아오는, 고교야구 유격수를 데려다 놔도 처리할 만한 힘없는 땅볼을 끝으로.
공 10개 만에 1회 초 수비를 마친 제리.
턱을 치켜들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이닝을 잘 마쳤을 때 나오는 특유의 제스처와 함께 마운드를 내려갔다.
“세레머니도 뭣도 아닌 그딴 짓 좀 그만해!!! 그래도 잘했어!!!”
“하는 짓은 재수 없지만 사랑해!!!”
팀원들은 물론 팬들마저도 질색했지만, 저런 상태의 제리한테는 들리지도 않는다.
불펜 문이 열리고, 마운드의 주인이 시카고 컵스의 에이스 A.D. 존슨으로 바뀌는 순간.
경기장을 가득 채운 홈팬들이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야!!! 그때는 너네 홈이었지?! 다저 스타디움에선 만만치 않을 거다!!!”
“화장실도 제대로 안 갖춘 구장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이 말이야!!!”
차마 실력으로는 못 까겠는지, 시설 구리기로 유명한 리글리 필드를 걸고넘어지는 우리 팬들.
그러거나 말거나. 존슨은 연습구를 몇 개 던지더니 리드오프 조지 라모스를 타석으로 불러들였고.
“아웃!”
2구 만에 외야 플라이로 돌려보냈다.
황당하다는 듯 잠시 투수를 쳐다보던 조지는, 지나가다 마주친 나를 향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큰일 났는데.”
원래부터 말수 적은 사람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감상이 너무 짧잖아. 무슨 벤도 아니고.
아무튼.
주심을 향해 헬멧 끝을 살짝 잡으며 인사를 건네고. 포수에게 괜히 재수 없게 한 번 웃어준 다음. 투수를 있는 힘껏 꼬라보면서 타석에 들어갔다.
나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며 입술을 살짝 핥는 투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조지를 2구 만에 잡아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오늘 경기도 그리 만만치 않을 거란 걸 느꼈다.
타이틀 홀더를 상대로 좋은 컨디션을 발휘하게 해주는 ‘왕관의 무게’도 소용이 없다.
작년 한 해를 통째로 날렸는데 타이틀은 무슨.
‘평소대로. 평소대로.’
많은 것이 걸린 경기에, 상대 투수는 언터쳐블의 에이스.
내가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거나,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쳐 수 싸움에 불리해질 수 있다.
정면을 쳐다보며 집중력을 끌어올리려는데.
[홈런 쳐야지. 박도아랑 데이트가 걸려 있는데.]
“풉!”
박도현이 뜬금없이 던진 소리에 타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투수가 투구 동작에 들어간 건 아니니 주심도 받아주긴 했는데, 얘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
미친놈인가 진짜?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낸다고?
[집중해라 집중. A.D. 심기 불편한 거 안 보여?]
‘똥 싸고 있네. 지가 다 깨놓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 거긴 해도, 일단 웃고 나니 뭔가 어깨에 힘이 좀 빠지는 기분.
설마 이걸 의도한 거라면 고맙…… 지는 않고.
두 대 맞을 거 한 대로 줄여줄 의향 정도는 생긴다.
긴장도 풀었으니, 이제 진짜 승부에 들어가야 할 타이밍.
다들 숨죽인 채 존슨의 와인드업을 지켜봤고.
쐐애애액!
퍼엉!
“스트―라잌!”
주심의 우렁찬 콜과 함께, 잠시 머리가 새하얘졌다.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위력적이고 까다로운 패스트볼.
‘큰일 났는데.’
오늘 컨디션이 절정에 오른 건 제리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