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에이스 VS 에이스 (2)
“스트라이크 아웃!”
4회 초 투아웃 상황.
원정팀 컵스의 3번 타자가 맥없는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자, 숨죽여 지켜보던 팬들은 환호를 쏟아냈다.
“Jerry doing God’s work!!!”
“타자 놈들아!!! 니들이 점수 못 내니까 우리 에이스가 시위하잖아!!!”
그 열기는 선수 가족에게 제공되는 좌석에까지 퍼져나갔다.
손에 맺힌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한숨 돌리는 두 명의 동양인 여자.
며칠 뒤 UCLA에 입학하게 될 박도현의 동생 박도아, 그리고 박도현의 가족을 가이드하고 있는 같은 대학 3학년 선배.
“아, 목 탄다…….”
“음료수 판매원은 한참 있어야 올 것 같은데, 제가 사 올까요?”
“아뇨, 아빠가 금방 오시겠죠.”
3회 말이 끝나자마자 화장실에 가는 김에 음료를 사 오겠다던 박도현의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4회 초가 이렇게 금방 끝날 거라고는 예상 못 했을 거다.
그뿐 아니라, 양 팀 투수가 타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때려눕히면서 경기 템포 자체가 빨랐다.
공수 교대가 끝날 때까지 잠시 숨을 돌릴 겸 해서.
박도아는 옆에 앉은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예전에 다저스 경기 몇 번 보러 오긴 했는데……. 그때랑은 분위기가 좀 다르네요.”
“그런가요?”
선배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뭔가 좀, 되게 다들 흥분해 있고. 막 소리 지르고 그랬는데. 지금은 되게 점잖아졌다고 해야 하나?”
“아, 그거요. 아마 오빠분 때문이었을걸요.”
“박도현이요?”
“그러니까, 2031년이었나? 제가 LA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인데요…….”
“아니 뭔 소리예요 언니. 여기가 LA인데.”
선배는 추억에 젖은 얼굴로, 박도현이 살아 있을 때 다저스의 야구가 어땠는지를 풀어놓았다.
작년 9월에 콜업되어 반짝 활약하는 줄 알았던 동양인 루키가 주전 유격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더니, 메이저리그의 온갖 기록을 갈아치우며 팀을 멱살 잡고 끌어올렸고.
팬들은 눈이 높아지다 못해 반쯤 정신이 나갔다. 9연승을 하다 역전승 한 번 당했다고 기물 파손을 하던 시대였으니까.
그 모든 광란의 시대는 박도현의 사망과 함께 막을 내렸다.
“원래는 선수 가족들이 방문하고 그러면 사전 행사에서 다 알려주는 거 알죠? 박수 치면서 분위기도 끌어올리라고.”
“어……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오늘은 그런 게 딱히 없었는데?”
“제가 구단 운영하는 분들 생각을 다 알 수야 없지만, 제가 보기엔 박도현 선수 가족분들이 오셔서 그런 게 아닌가 싶네요.”
박도현의 사망 이후, 2035시즌의 잔여 경기와 2036시즌 전반기.
다저스는 끔찍한 암흑기를 겪었다.
연패기록만 세우지 않았을 뿐, 이번 시즌 파드리스에 필적할 정도로 주저앉았다.
주전 유격수는 물론, 팀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선수를 잃은 여파였다.
“오늘 경기가 진짜 중요하잖아요. 근데 박도현 선수 가족분들이 왔다는 걸 알면, 좀…… 부담스러워하는 선수들도 있을 것 같아서.”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구현기의 복귀 이후 조금은 바뀌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인터뷰에서 박도현을 언급하는 게 금기시되는 게 현실.
너무나 위대한 선수였기에 그만큼 이별이 아팠던 거다.
“그래도 요새는 슬슬 다시 그때 분위기로 돌아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그 자리를 다른 선수가 메워주고 있으니 괜찮…….”
말하는 사이 다저스의 4회 말 선두 타자 조지 라모스가 1루수 땅볼로 아웃되자, 선배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야!!! 자동 스윙 켜놓고 게임하냐!!! 무슨 X발 리드오프가 저딴 공에 배트를 쳐 내밀어?!”
“나현 학생……?”
다저스 팬덤이 예전의 광기 어린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몸소 증명했고.
때마침 돌아온 박도현의 아버지는 그걸 보고 경악했다.
박도아는 그 난리에서 고개를 돌려, 타석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2번 타자, 유격수, 구현기.
박도현 이후 오랜만에 나타난 타격을 기대해볼 만한 유격수이자, 그녀에게 있어 가족과도 같은 남자가.
오늘 경기 두 번째 타석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타순이 한 바퀴씩 돌아간 3회까지, 양 팀에서 1루를 밟아본 타자는 없었다.
아직 퍼펙트니 노히터니, 이런 걸 입에 올릴 단계는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타자들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흐름 속에서 맞이한 두 번째 타석.
“Koo!!! Koo!!! Koo!!! Koo!!!”
“너만 믿는다!!! 너 이럴 때 사고 쳐 주는 놈이잖아!!!”
홈팬들의 간절함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첫 타석에서 헛스윙 삼진을 당한 타자에게 이만한 믿음이 쏟아지는 경우는 드물지.
타율 0.338로 다저스 전체 1위를 기록 중인 것도 있지만, 이번 시즌 내가 퍼펙트만 두 번을 깨트렸던 것도 한몫했을 거다.
그중 한 번이 바로 저 양반을 상대했을 때였지.
온 근육을 긴장시키며 언제라도 스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며, 와인드업에 들어간 존슨을 지켜봤고.
“스트라이크!”
1회 말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패스트볼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진짜 이걸 어떻게 치지?’
지난번 시카고 원정에서 상대했을 땐, 움직임이 지저분한 투심보다는 포심을 노리는 식의 공략법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여름이 지나가 폼이 올라온 건지, 포심조차도 쉽게 건드릴 수 있겠단 생각이 안 든다.
“볼!”
빠져나가는 체인지업을 지켜보면서 카운트를 하나 벌었지만.
“파울!”
3구는 거의 홈플레이트쯤 다다라서야 격한 움직임을 보인 투심.
배트 윗부분을 맞고 파울이 되긴 했는데, 오히려 제대로 맞았으면 땅볼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인터벌은 또 엄청 빠르고.
체감상 타석에 들어선 지 1분도 안 됐는데, 벌써 투 스트라이크.
사인 교환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생각 정리할 틈도 없이 바로 투구 동작에 들어가고 있다.
‘슬라이더? 아니면…….’
오늘 경기 내내 투 스트라이크 이후 변화구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존슨이기에.
변화구 중에서도 가장 빈도가 높고 위력도 센 슬라이더 타이밍을 맞춰보기로 했는데.
쐐애애액!
‘이런 미친!’
그냥 존 아래쪽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라고 생각해 배트를 냈는데.
뭔가 궤적이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 이후, 훅 떨어지는 공.
존에 자유롭게 넣었다 뺐다 하는 걸로도 모자라, 낙폭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건가.
틱!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 떨어져 굴러가는 공.
결과가 이미 뻔히 보이지만, 1루까지 설렁설렁 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오늘처럼 다저 스타디움이 만석을 채운 날이라면 더더욱.
바로 그때.
“와아아아아아아!!!”
투수 앞 땅볼을 쳤음에도 1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내 투혼을 향한 환성?
그럴 리가 없지.
상대편에서 뭔가 실수가 나온 거다.
무슨 상황인지 확인할 시간은 없지만, 공 받을 준비도 안 하고 있던 1루수가 황급히 자세를 잡는 것만 봐도 알겠다.
“세이프!”
4회 말 1사에서 나온, 땅볼 실책 출루.
이번 시즌 존슨과의 두 번의 맞대결에서 모두 퍼펙트를 깨트리게 됐다.
[경기 후반도 아니고, 고작 3이닝인데 깨트렸느니 뭐니 하면 양심에 안 찔려?]
‘말은 똑바로 해라. 3.1이닝이거든?’
땅 파 봐라. 아웃카운트 하나 나오나.
장갑을 갈아 끼면서 전광판을 보니, 방금 상황이 흘러나온다.
존슨이 자기 앞으로 굴러오는 땅볼을 굳이 글러브 놔두고 맨손으로 처리하려다 한 번 떨어트린 것.
이번 시즌 정신 나간 활약을 보여주는 저 투수가 유일하게 평균 이하의 지표를 보여주는, 투구 이후의 땅볼 처리.
결국 본인 손으로 퍼펙트를 날려버린 셈이다.
[뛸 거야?]
‘그럼. 우리 인연이 있는데.’
퍼펙트 무산 이후 도루. 어디서 많이 본 상황 아닌가?
가능하면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길 바라며 슬금슬금 1루와 거리를 벌렸지만.
“세이프!”
같은 퍼펙트라도 9회와 4회는 받는 충격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건가.
느린 견제 이후 1루 쪽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존슨.
어디 뛰어볼 테면 뛰어보라는 태도.
팍! 팍! 팍! 팍!
“세이프!”
그럼 뛰어야지.
2루심의 확신에 찬 판정이 떨어지자마자 홈팬들이 환희에 차서 소리를 질러댄다.
홈이 좋긴 좋아. 리글리 필드에서 도루했을 땐 아주 날 죽이려 들었는데.
안타는 하나도 없는데 실책과 도루로 득점권 위기.
어지간한 투수라면 이 타이밍에서 뭔가 삐끗하겠지만.
솔직히 그럴 거란 기대는 크게 없었다.
따아악!
아니나 다를까.
이젠 구종이 뭔지도 모르겠고, 하여튼 짜증나는 코스의 짜증나는 구질의 공을 건드린 R.H.가 2루수 땅볼로 아웃되는 사이, 3루로 입성했다.
그러자 존슨은 유니폼으로 땀을 닦아내는 척하며, 1루에서의 그 표정을 똑같이 지어 보인다.
너 어차피 못 들어간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통 아웃카운트 사정이 어떻건, 투수가 느끼는 압박감 자체가 다른 만큼 주자가 3루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타자 쪽이 한결 유리해지지만.
[하필이면 2사냐.]
아마 덕아웃에서도 박도현이랑 똑같은 푸념을 내뱉고 있지 않을까.
1사였다면 어떻게든 공을 띄우거나, 아니면 일부러 낮게 던지는 볼 배합을 의식해 볼넷이라도 노려볼 텐데.
마침 타자도 베테랑인 클레망이니, 그런 식의 수 싸움이 강제된다면 승산이 있었겠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반대로 말하자면, 빠른 공에 대한 반응속도는 그만큼 약점을 보이는 클레망은 결국 삼진으로 물러섰고.
선취점까지 베이스 하나만을 남겨둔 채 돌아서야만 했다.
“자자! 고생들 했다! 얼른 나가자! 글러브 다 챙겼어?”
“수비 똑바로 하자! 덕아웃 사인 잘 읽고!”
공수교대 타이밍이 찾아오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야수들.
제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움직임이 더 분주해진다.
투수 눈치야 이미 한참 전부터 보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선취점이 코앞에서 무산된 상황이라면 더 그렇지.
줬다 뺐는 것 같은 그 실망감이 투구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괜찮아.”
물론.
투수 본인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상대 기세를 꺾어놓을 기회로 돌아오지만.
“이제 겨우 4회 끝났다. 아직 기회 많아. 수비할 때 집중만 하자.”
평소의 컨셉질을 내다 버린 채 조용히 읊조리는 그 말에, 야수들의 시선이 전부 제리를 향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제리가 절체절명의 위기나 중요한 국면을 맞으면 홈팬들은 화장실로 향했다.
어차피 얻어맞을 거 계속 지켜봐 봤자 속만 터진다는 거지.
“뭐래. 가서 공이나 던져, 찐따야.”
그 오명을 완전히 벗으려면 몇 번의 검증을 더 거쳐야겠지만.
적어도 오늘 경기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런 소리를 듣고도 울상을 짓기는커녕 씨익 웃는 걸 보니.
* * *
“Go Cubs Go!!!”
“안타 하나!!! 안타 하나만 날려줘!!! 그럼 알아서 무너질 거야!!!”
다저스에게 있어 절호의 찬스가 무산된 만큼, 컵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셈.
원정팬들도 그렇고, 상대 덕아웃도 그렇고. 파이팅이 아주 넘쳐흐르고 있다.
그게 표정이나 몸짓에서 다 드러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쟤네 힘 빡 주고 있는데, 헨리가 눈치챘겠지?]
다저스와 컵스의 타선.
내셔널리그 상위권의 공격력을 자랑한다는 건 같지만, 타선의 특성이라고 해야 하나. 팀의 운영 방향은 좀 다르다.
다저스가 일부 포지션을 제외하면 장타력을 갖춘 선수들을 주로 배치하는 데 비해, 컵스는 컨택 능력과 주루 센스를 바탕으로 상대 투수를 무너뜨리는 선수들을 기용하는 편.
그러니까, 배드볼 히터를 데려다 놓은 건 좋은데.
그런 타자들이 몸에 힘이 들어간 나머지 빠른 타이밍에 승부를 들어가고, 정교한 타격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아웃!”
범타 제조기로 재탄생하는 거지.
그래도 일단 빠른 타구를 만드는 데는 도가 튼 만큼, 3―유간 쪽 까다로운 코스로 타구를 보내긴 했지만.
“아웃!”
이미 이런 타구는 이번 시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처리법을 몸에 익혀 왔다.
“Koo!!! Koo!!! Koo!!! Koo!!!”
“네가 제리를 구했어!!!”
명품 투수전의 홈 어드밴티지가 바로 이런 거지.
좀 까다로운 수비를 해낸 것만으로도 과장 좀 보태서 무보살 삼중살 했을 때만큼 성원을 보내주니까.
짜증스럽게 헬멧을 벗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타자를 보면서.
지금 양 팀 타자들이 이토록 철저하게 농락당하는 이유가 뭔지 가늠해봤다.
‘지금 너무 흥분들 했어.’
몸에 힘도 들어가고. 갖다 맞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수 싸움도 밀리고 있다.
이 상태 그대로 경기 후반까지 진행된다면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진 않을 테고.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아냐, 너 스윙 동작은 괜찮았어. 아까 그건 그냥 못 친 거야.]
아, 그래……?
박도현이 굳이 안 알려줘도 되는 걸 알려주긴 했지만, 아무튼.
묘한 긴장감과 답답함이 흐르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경기는 반환점을 돌아 후반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