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96화 (96/200)

96. 에이스 VS 에이스 (3)

LA 다저스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그는 다저스에서만 올해로 7년째 감독직을 맡아오며, 여러 투수들이 대기록을 달성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해 왔다.

당장 올해만 해도 전반기에 아드리안 빌라의 노히트노런이 있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7회 초, 제리가 삼진으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순간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현재까지 7이닝 퍼펙트. 투구 수는 87개.

9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고. 한계 투구 수를 초과하더라도 기록 중단 전까지 내릴 의향은 없다.

퍼펙트게임이나 노히트노런이 진행 중인 경기에서, 타선이 두 바퀴 돌고 나면 투수는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른다.

실제로 6회와 7회, 각각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 찾아왔지만 내야수들의 집중력 있는 수비로 막아냈고.

투수의 컨디션과, 야수들의 집중력은 양호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돌겠네 진짜…….”

“저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타석에 선 선두 타자 구현기를 향해, 초구로 시속 96마일짜리 공을 존에 집어넣는 상대 선발 투수.

그 모습을 본 타자들이 탄식했다.

덕아웃에서는 무기력에 빠져 있다가도, 타석에 나가면 조급함에 사로잡히는 선수들.

심지어 평소 덕아웃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던 선수들도 생각에 잠기거나 투수를 노려보고만 있다.

‘안타 하나. 안타 하나면 돼.’

상대 투수도 저런 공을 9이닝 내내 뿌릴 순 없다.

그러니 지금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반전시킬 만한 안타가 하나만 나와 준다면, 곧바로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오늘 유일하게 출루에 성공해 도루까지 해낸 구현기에게 기대를 담아 지켜본 오브라이언 감독이었지만.

따아아악―!

“어?! 뭐야?!”

“제대로 맞은 것 같은데?!”

몇몇 선수들이 황급히 덕아웃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아쉬움에 가득 찬 얼굴로 다시 주저앉았다.

잘 맞은 타구였지만, 파울 라인 바깥쪽으로 날아간 것.

“아웃!”

심지어 컵스 우익수가 벽에 부딪혀 가며 타구를 잡아내는 바람에 아웃카운트까지 올라갔다.

주자가 3루까지 나갔던 4회 말과 마찬가지로, 눈앞에 다가온 찬스를 놓친 상황.

“괜찮아, Koo!!! 여기 너 뭐라 그럴 사람 아무도 없어!!!”

“안타 못 쳐도 돼!! 대신 안타를 지워줘!!!”

오늘 경기에서 그나마 뭔가 가능성을 보여준 유일한 타자이기에, 홈팬들도 격려하면 했지 비난을 보내진 않았지만.

저 타구를 날린 본인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겉으로는 묵묵히 덕아웃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지만.

만약 속으로는 열불을 내고 있다면, 수비마저도 흔들릴지도 모르지.

“저기, 코치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러나 오브라이언 감독은 잊고 있었다.

지금 저 선수는, 이미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낸 적이 있다는 것을.

“만약 지난번 경기처럼 후반 들어갈수록 체인지업 비중을 높인다면, 좌타자 기준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체인지업은 생각보다 쉽게 타이밍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집어넣기엔 방금 저한테 던졌다가 큰 타구가 나왔으니 부담스러울 거고요. 또…….”

자기보다 훨씬 경력이 긴 타자들도 막막해하고만 있는 상황에서.

구현기는 묵묵히 자기가 알아낸 정보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지.’

그라고 해서 저 꼬라지가 보기 좋았겠는가.

투수의 평정심이 깨지거나 수비에 영향을 줄까 봐 참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구현기가 아직까지 경기에 몰입하고 있는 걸 발견한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건 핑곗거리가 될 수 없으니까.

“거기, 타자들. 이리 좀 와. 그래. 오늘 스타팅 라인업에 안 올라간 친구들도. Koo 자네도 들어가지 말고 잠깐 대기해.”

주전과 백업을 가리지 않고 모든 타자들이 모여 서자.

오브라이언 감독은 그들의 얼굴을 쭉 훑어본 다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야구를 하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 * *

경기 중 선수들을 다그치는 것의 효과에 대해서는 찬반이 갈리는 편이다.

괜히 주눅 들어 있는 놈들 건드려서 벌집을 쑤시는 꼴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데.

결국 진리는 사람 바이 사람.

다그치는 사람이 얼마나 감정을 배제하느냐와, 받아들이는 사람의 멘탈이 얼마나 단단한지에 따라 그 결과는 천지 차이다.

그런 점에서, 다저스의 오브라이언 감독님은 그 까다로운 라인을 잘 조율할 줄 아는 지도자라고 본다.

‘우리 덕아웃이 대체 언제부터 공동묘지로 바뀐 거지? 야구 선수가 경기 중에 이기려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으면 그건 죽은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감정은 담지 않으면서 자존심은 엄청나게 긁는 말.

조곤조곤한 팩트 폭격을 얻어맞은 덕아웃에는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 효과는 바로 다음 이닝 수비에서 드러났다.

촤아악―!

깊은 3―유간 타구를 슬라이딩 캐치로 잡아내더니, 1루를 향해 번개 같은 송구를 보내는 조나단.

“아웃!”

“좋았어!!!”

8회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잡히자, 조나단은 펄쩍 뛰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슬슬 퍼펙트를 의식하기 시작할 경기 중반부터, 3루 쪽 땅볼이 거의 안 나왔던 게 다행일 정도로 꽁꽁 얼어 있었는데.

적어도 수비에서는 제 페이스를 되찾은 모양이다.

‘수비 나가기 전에 살짝 귀띔해준 게 도움이 된 거면 좋겠는데.’

[제리 쟤는 찐따니까 실책으로 퍼펙트 깨트려도 아무 말 못 할 거라는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소름인데……?]

제리가 설마 그 정도도 이해 못 할까.

자기 퍼펙트를 지켜냈으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도 모자랄 판인데.

* * *

퍼펙트게임이 진행 중인 9회 2사 상황.

원래대로라면 홈팬들이 진작에 일어서서 마지막 타자와의 승부를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볼 타이밍이지만.

다저 스타디움의 팬들은 그저 자리에 앉아 고군분투하는 제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오늘 종일 타자들을 성토하느라 목이 죄다 쉬어 버려서일지도 모르지만.

[CHC 0 : 0 LAD]

8회 말 공격에서 끝내 점수를 내지 못하면서, 타석에는 컵스의 선발 투수 A.D. 존슨이 올라온 것.

그리고 존슨은 곧이어 이어질 투구에 집중하려는 건지, 배터 박스 끝에 서서 삼진을 당했다.

[제리 헤이즈택, 9이닝 퍼펙트 진행 중!]

달성이 아니라, 진행 중이다.

만약 9회 말 점수를 내지 못한다면 제리가 10회에도 마운드에 올라갈 수 있다는 거다.

9이닝 퍼펙트를 해놓고도, 한 점도 못 낸 타자들 때문에.

하위 타선, 특히 투수가 타석에 들어가야 하는 이번 이닝.

아마 감독님도 고민이 많았을 거다.

여기서 대타를 대거 투입해 득점 확률을 높일지, 아니면 그나마 타이밍이 눈에 익었을 타자들을 그대로 밀고 나갈지.

공수 교대 시간 내내 머리를 맞대던 코칭스태프들이었지만.

“10회에도 제가 올라갑니다.”

제리의 한마디에 논의는 싱겁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에이스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감독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괜찮겠어?”

“네. 괜찮습니다.”

게다가 투구 수가 아직 108개인 만큼 조금 더 길게 봐도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

물론 타자들 생각이야 다르겠지.

쪽팔리고, 미안하고, 짜증도 나고 그럴 거다. 안타 하나 못 뽑고, 결정적인 찬스도 놓치면서 결국 벼랑 끝까지 온 건데.

‘아니 왜 내가 다 빡치는 거지? 나도 할 말 없는 건 똑같은데.’

[니가 아직 투수 물이 덜 빠져서 그렇지.]

다들 말을 아끼는 건 경기 중반부 때랑 똑같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다들 독기 어린 눈으로 투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

결국 대타 투입 없이 9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이 경기를 무사히 마치면 SNS 계정을 비공개로 돌려놓을 거야.”

이 와중에 농담할 정신은 남았는지, 그런 말을 남기고는 덕아웃에서 나가는 헨리.

9회 말 선두 타자로 8번 타자가 나갔다는 건, 저 미친 양반도 4회 초 본인의 실책 말고는 한 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파울!”

“파울!”

아무리 지X 맞은 공이라도, 투수 교체 없이 3번째 타석쯤 되면 어느 정도 타이밍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헨리 역시 배트 컨트롤이 괜찮은 타자답게 끈질긴 승부를 이어갔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8구째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

그러나 덕아웃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저 새끼 이제 지쳤어. 다 왔다. 진짜 거의 다 왔어.”

8회 말부터 다저스 타자들이 배트를 짧게 잡고 커트를 반복하며 괴롭혀온 덕에.

9회 말 공격 시작 시점에서 이미 존슨의 투구 수는 110개였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제리가 삼구삼진으로 내려오면서, 정규이닝이 끝나기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뿐.

그러나 투수에게 모든 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타석에는 6월 이후 팀의 리드오프를 맡으며 컨택 능력을 발휘해온 조지 라모스.

그리고 대기 타석에는 오늘 유일하게 출루를 허용했으며,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큼직한 플라이볼을 날려낸 나.

퍼엉!

“스트라이크!”

A.D. 존슨은 대단한 투수다.

이 지경까지 와 놓고도 지친 티를 내지 않고 마운드에서 묵묵히 공을 뿌릴 수 있는 투수는 거의 없을 거다.

그러나 공의 위력마저도 경기 초반과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은, 타자들도 알고 관중들도 알고 투수 본인도 알 거다.

사람의 몸은 그걸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볼!”

“파울!”

“볼!”

적극적으로 커트하면서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던 조지.

그러나 조지의 진가는, 리드오프에 걸맞은 선구안에서 드러났다.

“베이스 온 볼스!”

포크볼과 구분하기 힘들던 그 까다로운 슬라이더에 배트를 움찔하긴 했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참아내면서 얻어낸 볼넷.

2사 주자 1루.

이미 127구를 던진 투수를 상대하기 위해 타석으로 향했다.

‘교체는…… 없네.’

[당연하지.]

이 상황에서 잠깐이라도 교체 가능성을 떠올렸던 건, 내가 완투 경험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할 생각이 없었는데. 한국에서 어떤 기자가 완투를 꺼리는 내게 절실함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개소리를 지껄인 이후로부터는 더 꺼리게 됐고.

“Koo!!! Koo!!! Koo!!! Koo!!!”

“제발!!! 너 할 수 있잖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점을 바라는 가운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 경기는 내 손으로 끝내야겠다는 고집.

저런 모습에 소수의 원정팬들, 그리고 TV 중계로 지켜보고 있을 컵스 팬들이 열광하는 건 아닐까.

쐐애애액―!

초구부터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오는 공.

그러나 하필이면 내가 극도로 강점을 보이는 몸쪽 코스.

위력 자체도 지금껏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그 공을 바라보며, 최대한의 경의와 존경을 담아 배트를 휘둘렀고―

‘고생하셨습니다.’

따아아아아악―!

중앙 담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타구.

필사적으로 타구를 쫓던 중견수가 슬라이딩 캐치를 시도했지만, 아마 본인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던졌을 거다.

조지가 3루를 지나 홈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순간, 2루 베이스에 우뚝 멈춰 섰고.

“으아아아아아아아!!!”

오늘 종일 아슬아슬하게 놓쳤던 기회들을 떠올리며, 울분을 가득 담아 포효했다.

[메이저리그에서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6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1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히든 업적 달성!]

[27개(혹은 그 이상)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단 한 명의 주자도 내보내서는 안 되는, 모든 투수들이 한 번쯤 꿈꿔볼 영광, 퍼펙트게임. 팀의 일원으로서 대기록에 공헌한 당신은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3,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12,410]

주르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따위에 눈길을 줄 틈은 없었다.

덕아웃에서 뛰쳐나온 선수들이 나를 덮쳤으니까.

“Kooooooooo!!!”

“너랑 제리가 다 했어!!! 너희 동기 두 놈끼리 다 해먹었다고!!!”

“제리가 스포트라이트 받으면 기절할까 봐 일부러 9회에 친 거냐?! 이 미친놈!”

땀내 나는 몸뚱이들 사이에서 이리 치리고 저리 치이다 아예 파묻혀 버렸고.

폭발하는 아드레날린 속에서 홈팬들의 Koo 콜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Hey, Koo.”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팬들의 환호성이 겨우 잦아든 다음에야 제리와 만날 수 있었다.

“9회에 점수 내줘서 고맙다. 만약 9회 초 마운드 위에서 완성했으면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울어버렸을 테니까.”

콧물이나 좀 닦고 말해라, 이 찐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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