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97화 (97/200)

97. 귀국

[‘Perfect Game!’ LA 다저스의 새로운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 시카고 컵스 상대로 퍼펙트게임 달성!]

[메이저리그 사상 29번째 퍼펙트게임, 그 피칭 내용은? ‘108구 10K 무피안타 무사사구 완봉승’]

[9이닝 퍼펙트 ‘진행 중’… 마침표 찍은 것은 9회 말 Koo의 끝내기 2루타!]

[‘광란의 밤’ 없이 조용히 지나간 LA의 ‘퍼펙트 데이’, 경기 지켜보느라 기력 다 쓴 관중들 때문인가?]

[‘퍼펙트 피처’ 제리 헤이즈택, “타자들을 탓한 적은 없다. 그 또한 야구의 일부다. 9회에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내가 10회에도 올라갔을 거다.”]

[투 아웃에서 극적인 끝내기 2루타! ‘레코드 브레이커’ Koo, 퍼펙트도 노히터도 혼자 깨부수며 A.D. 존슨과의 악연 이어가]

[‘8.2이닝 129구 노히터’ A.D. 존슨, “9회에 등판한 건 내 고집이었다. 팀의 승리를 지켜내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이다.”]

[퍼펙트게임에 가려진 또 하나의 대기록! LA 다저스 제리 헤이즈택, 24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로 메이저리그&세계 기록 경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1대 0 석패! LA 다저스 70승 65패로 NL 서부지구 단독 선두 등극!]

[LA 다저스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2037년은 내가 다저스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이래 가장 놀라운 시즌이다.”]

* * *

그날 밤.

그러니까 제리의 퍼펙트게임으로 경기가 끝나고, 떠날 생각을 않는 팬들 앞에서 온갖 세레머니를 펼치고, 끝도 없이 들이닥치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전부 마친 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박도현의 가족들과 합류했다.

“오빠, 수고했어…….”

“현기야. 어떻게 그 9회 말 투아웃에서 그렇게, 와, 참…….”

아저씨와 박도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체력이 다 빠져나가 온몸은 흐늘거리는데, 눈빛만은 다저 스타디움의 야간 조명을 담아놓은 듯 반짝거리고 있다.

저게 바로 ‘뽕’이 가득 들어찬 상태지.

만약 부모님 손에 이끌려 오늘 경기를 보러 온 어린이가 있다면.

이 팀이 어떤 암흑기를 맞더라도 쌍욕을 퍼부으면 퍼부었지, 평생 다저 스타디움에 발길은 못 끊을 거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운전하면서 울어도 괜찮을까요?”

박도현의 메이저리그 첫 경기와 생애 마지막 경기를 직관했다던 가이드는 이런 소리까지 했다.

실례는 아니지만 좀 무서웠다.

경기 종료 후 한참이 지났는데도 해소되지 않은 교통 정체를 뚫고 집에 도착했고.

씻고 대충 저녁을 먹으니 벌써 하루의 끝이 가까워졌다.

[이런 날 괜히 어디 쏘다니지 말고. 일찍 잠이나 자.]

‘가긴 어딜 가겠냐.’

아무리 좋은 플레이를 하고, 아무리 위대한 경기를 치렀어도. 그건 결국 지나간 경기.

내일은 다시 0대 0의 스코어에서 새로운 경기를 치러야만 하는 게 야구 선수의 일이다.

“저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거실에 두 사람을 남겨놓고 방으로 올라가려던 그때.

박도아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오빠. 잠깐만.”

“응?”

“나랑 잠깐 어디 좀 가줘.”

피로와 졸음으로 몽롱하던 아저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경기장에서 테이크아웃해온 다저스 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건 덤이고.

[너 뭐냐. 왜 고개 끄덕이냐. 가긴 어딜 가겠느냐며.]

그…….

저녁 경기 있는 날에는 지금보다 더 늦게 자니까.

오히려 좀 이따 자는 게 루틴을 지키는 거 아닐까?

* * *

박도현과 아저씨의 걱정(?)과는 달리, 박도아가 함께 가자던 곳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냥 계단만 올라가면 나오는 곳.

가끔 청소할 때 말고는 항상 굳게 잠겨 있는, 박도현이 생전 쓰던 방.

“여기 오는 거 진짜 처음이야?”

“응. 손님방 있는데 여길 뭐 하러 와. 냄새날 것 같고. 침대 밑에 코딱지 붙어 있을 것 같고.”

[아니 얘가 뒤질라고 진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솔직히 코딱지 얘기는 팩트잖아. 청소할 때 다 봤어.

오빠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말은 안 할 거지만.

아무튼.

사람 냄새가 하나도 안 나는 걸 빼면, 그냥 영락없는 남자 자취방이랑 다를 게 없다.

침대, 책상, 영어회화 책 몇 권, 혼자 먹으려고 방구석에 꼬불쳐둔 간식거리들.

그리고 지금은 텅 빈, 커다란 장식장 하나.

“원래 저기가 트로피나 기념구 같은 거 보관하던 데야.”

지금은 전부 다저 스타디움의 전시관이나, 고향 한국으로 보내고.

남은 건 고작 작은 사진 액자 몇 개 정도.

[얘는 또 왜 이러냐.]

박도현의 말에 옆을 쳐다보니, 액자 하나를 집어 든 박도아의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다.

박도현의 가족들이 이 집에 처음 방문했던 날, 내가 사진 기사를 자청해서 찍었던 가족사진.

“아 진짜…… 이래서 여기 오기 싫었는데…….”

액자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 박도아.

위로해줄 만한 말재주는 없으니 그냥 조용히 품에 안았다.

뿌리치려는 것 같지는 않아서,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아주 잠깐 떠올랐지만.

얘 입장에서는 오빠 두 명이 갑자기 한 명으로 줄어든 거니까.

그만큼 나한테 더 기대도 되는 거 아닐까, 하고.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해봤다.

“오빠.”

“왜?”

“박도현도 오빠가 야구 하는 거 보고 있을까?”

그래도 둘이 남매는 맞는구나 싶다.

가족들을 지켜보고 있을까, 거기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까, 뭐 이런 소리는 안 하는 거 보니.

네가 걱정 안 해도, 야구는 실컷 보고 있어.

그라운드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한테 온갖 잔소리란 잔소리는 다 해가면서.

야구 없이는 못 살겠다더니, 죽어서까지 야구의 신인지 뭔지 하여튼 희한한 게 되려고 용쓰는 놈이라니까.

[이 연놈들이 신성한 내 방에서 뭔 짓거리야. 니 방 가서 하든가. 여기서 갈 데까지 가면 진짜 죽여버린다.]

오히려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함께 있어서 문제지.

박도현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통에 괜히 의식하게 된다.

체온이나 얼굴에 스치는 머리카락이나 샴푸향 같은 것들.

조금 민망해져서 딴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아, 홈런 못 쳤네.’

오늘 경기에서 홈런 날리면 데이트하는 거 생각해보겠다는 약속.

많은 걸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딱 한 가지만 실패한 하루였다.

* * *

퍼펙트게임이나 노히트노런 같은 대기록은 팬들의 기를 톡톡히 살려주는 효과가 있다.

물론 그게 과해지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고.

예를 들어, 지금부터 남은 경기를 전승하며 97승으로 시즌을 마감하는 게 아니냐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던 다저스 포럼의 팬들이라던가.

물론 그런 망상은, 다시 경기를 치르다 보면 빠르게 가라앉기 마련이다.

따아아아악―!

[이 타구는! 더 지켜볼 필요도 없이!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거리낌 없이 배트를 날려 보내는 타자! 로버트 켈리,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면서 스코어 8대 0! 다저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던 전날의 열기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싸늘해졌습니다!]

[아, 투수 코치가 올라왔습니다. 묵묵히 교체를 받아들이는 로버트 켈리. 오늘 성적은 1.1이닝 6피안타 4볼넷 1사구 1K 8실점. 저희는 잠시 후 다저스의 두 번째 투수 모리츠 슈타인마이어와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로버트가 원래부터 시즌 초반에 잘 나가다가 후반에 주춤하는 스타일이긴 해도.

2회조차 채우지 못하고 강판된 건, 적어도 내가 다저스에 입단하고 난 이래로는 처음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고맙다.”

중계 카메라는 덕아웃으로 들어간 로버트의 모습을 비췄다.

원래 경기를 심하게 말아먹은 날이면 글러브를 내팽개치거나 음료 통을 걷어차거나, 하여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곤 하는 로버트지만.

[왜 저렇게 얌전하냐. 사람 짠하게…….]

그저 지정석에 가만히 앉아 투수 코치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늙어서 기력이 쇠한 맹수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 같아 안타까워진다.

불펜들이 멀티 이닝을 먹어주면서도 실점을 최소화하긴 했지만, 이미 벌어진 격차를 메꾸기엔 역부족이었고.

[Washington Nationals 10 : 2 LA Dodgers]

홈 10연전의 마지막 상대,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1차전은 전날의 감동을 말끔히 씻어내는 대패로 끝났다.

[디백스와의 3차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지구 선두 자리를 하루 만에 되찾은 SF! 포스트시즌 향방은 과연?]

└ 퍼펙트게임 뽕에 차서 유니폼 여러 벌 주문했는데, 오늘 경기 보고 정신 번쩍 들어서 취소했네. 돈 아끼게 해줘서 아주 고오맙다. 응?

└ 아니, 로버트 요새 대체 왜 이러지? 마지막 승리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에이스는 고사하고 빅리그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할 수는 있나?

└ 중간에 한 번 건너뛰면 쓸만하긴 해. 원래부터 시즌 후반부에 주춤하던 선수이기도 하고, 9월 돼서 투수들 더 올리면 좀 나아지겠지…….

└ 아니, 확장 로스터라 해봤자 고작 두 명인데. 조나단 안 올릴 거야? 켄이 실전 감각 되찾는 동안 또 Koo를 뺑뺑이 돌리게?

하필이면 바로 전날 역대급 경기를 치렀는지라, 그 환상이 박살 난 팬들은 로버트를 더욱 거세게 물어뜯었다.

심적으론 이해할 수 있지.

신구 에이스가 연달아 좋은 모습을 보이며 화려한 세대교체를 기대했을 텐데, 그 기대가 어긋났으니까.

“어제 좋았다, 제리.”

“아, 예! 감사합니다!”

그나마 로버트는 자기 경기 안 풀린다고 남한테 화풀이하는 성격이 아니고.

제리는 제리대로 좀 잘나간다고 뻐기는 성격이 아니라서.

덕아웃 분위기가 필요 이상으로 나빠지진 않았지만.

[Washington Nationals 4 : 3 LA Dodgers]

이번 시즌 ERA 3.66에 4승 12패로, 패배 귀신이 붙었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다니엘이 시즌 13번째 패전을 당하며, 퍼펙트게임의 여운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심지어 자이언츠는 연승을 하면서 승차는 다시 2게임으로 늘어났고.

“어쩌면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이 팀이 아닐까……?”

6회 초 2사에 주자 2명을 남겨놓고 내려갔는데, 후속 투수가 홈런을 맞으며 고스란히 자책점을 떠안은 다니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보통 저런 소리 하면 누가 한소리 할 텐데. 로버트마저도 조용히 모른 척해주고 있다.

어쨌든.

내 삶은 야구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경기장 밖에서도 똑같이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다.

우선 다저스가 연패를 당하는 동안, 보증회사의 빠른 일처리 덕분에 살던 집을 매입하는 절차를 전부 마칠 수 있었다.

‘이제 이 집은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드립 치고 싶어서 집 산 건 아니지……?]

박도아는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고. 대학 입학식도 치렀다.

경기 준비 때문에 학교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입학식을 지켜보진 못했는데.

어차피 내가 갔으면 사람만 잔뜩 몰려서 민폐나 끼쳤을 것 같으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고.

“무슨 일 있으면 아빠한테 바로바로 연락하고. 알지?”

“알았다니까, 진짜…….”

박도현의 아버지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도 찾아왔다.

금이야 옥이야 기른 딸내미를 외국에 혼자 두고 가는 기분이야 짐작은 가지만.

남들 다 다니는 공항에서 품에 안고 놓을 생각을 안 하시네.

나도 시간이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닌데.

[나 두고 한국 가실 때도 그랬는데 뭐.]

‘그랬냐?’

한참을 그러고 있던 아저씨는 전화가 오고 나서야 박도아를 놓아주었다.

“여보? 응. 지금 공항이야. 어, 잠깐만.”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갑자기 나한테 넘어왔다.

“도현 엄마가 현기한테 할 말이 좀 있다네.”

“아, 네.”

가게를 봐야 한다며 한국에 남아 있길 자청했던 박도현의 어머니.

하늘로 보낸 첫째에 이어 둘째까지도 자기 품을 떠나게 됐으니, 가까운 곳에 사는 나한테 이것저것 당부하고 싶은 게 많겠지.

그렇게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지만.

[현기야. 우리 도아랑은 어디까지 갔니?]

“여긴 공항인데요.”

너무나도 예상을 벗어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동문서답하고 말았다.

[그래? 엄마는 현기한테 그런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면 미안하고~]

“아뇨, 죄송하실 건 없는데요. 그건 갑자기 왜…….”

[근데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니? 도아가 미국에서 의지할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서로 연락하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바뀌고 그럴 수도 있잖아.]

내 말은 들을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아서, 그냥 다물고 있기로 했다.

[만약 너희 둘이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면, 엄마는 무조건 응원해줄 거야. 대신 도아도 거기 놀러 간 게 아니라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간 거니까. 관계는 항상 책임 있는 자세로. 알지?]

“잘…… 모르겠는데요.”

[아, 이제 다시 도현 아빠 좀 바꿔줄래?]

도대체 무슨 말을 들으신 건지는 모르겠는데. 다시 전화를 받더니 정말 떠나기 싫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저씨.

시간이 다 되어 게이트로 나가면서도 내내 뒤를 힐끔힐끔 돌아본다.

‘도대체 왜 죄짓는 기분이 드는 거지. 잘못한 게 없는데.’

[평소에 쌓은 업보가 있으니까 그렇지.]

박도현의 말을 무시하면서, 두 살 터울의 가이드와 재잘대고 있는 박도아를 쳐다봤다.

이목구비는 어린 시절부터 봐오던 거랑 똑같은데, 키가 훌쩍 자라 누가 봐도 어른으로밖에 안 보이는 모습.

그날, 박도현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서로 딱히 입에 올린 적은 없지만.

나이가 들면서 살아가는 방식도 바뀌니까, 관계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겠지.

어떤 식으로 바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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