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98화 (98/200)

98. 코리안리거 (1)

노히트노런은 투수의 기록이지만, 퍼펙트게임은 팀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진지하게 두 기록을 구분하기 위한 말은 당연히 아니고, 아웃카운트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팀워크를 강조하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제리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면서 나한테도 콩고물이 떨어졌다는 거다.

[병원탈출 넘버원(A등급) ― 상시형]

○ 경기 도중 선수 생명에 위협이 가는 수준의 장기부상을 방지합니다.

○ 부상 발생 시 회복 및 재활 속도가 2배 상승합니다.

꾸준히 모아온 포인트에 퍼펙트게임으로 얻은 포인트를 합쳐서 뽑은 이번 재능.

어쩌면 지금까지 얻어낸 재능을 통틀어 가장 쓸만할지도 모른다.

[잘 읽어봐라. 자잘한 게 쌓여서 생기는 부상은 못 막아. 알지?]

‘이게 어디야.’

어차피 부상에 대한 리스크는 모든 선수가 감수하고 뛰는 것.

선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두 번째 효과는…… 엄청 유용하지만. 쓸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겠고.

부상은 선수 개인한테도 손해지만, 팀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올해의 다저스처럼 유망주를 털어서 즉전감 선수를 데려와 우승을 노리는 팀.

이런 팀에서 주전 선수가 이탈하기라도 하면 프런트가 그리던 그림이 물거품이 되는 거다.

“오랜만이다. 나 없는 사이 대형사고 하나 쳤다면서?”

“켄! 어서 와!”

“3일만 빨리 오지, 좋은 구경 놓치셨네요!”

팀의 주전 3루수이자 3번 타자로 활약하다 옆구리 부상으로 팀을 떠났던 켄 워싱턴.

복귀까지 최소 4주가 걸린다고 들었는데, 시간을 좀 더 들이면서 리햅 경기까지 소화하다 오늘 막 복귀했다.

“오, 네가 조나단이구나.”

“넵!!! 안녕하십니까!!! 조나단 라틀리프입니다!!!”

켄이 활짝 웃으며 조나단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 네가 잘해준 덕분에 재활 잘 끝내고 돌아올 수 있었어.”

뎁스가 두꺼운 팀의 진가는 이런 상황에서 드러난다.

만약 켄이 자리를 비운 동안, 조나단 없이 나랑 지금은 방출된 제프리 둘이서 3루 자리를 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제프리는 타석에서 식물이나 마찬가지였고, 나도 다른 포지션을 자주 오가면서 수비 집중력이 떨어졌으니. 어쩌면 와일드카드 자리도 간당간당했을지 모르지.

켄은 켄대로 적지 않은 연봉을 받는 선수로서 팀 상황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재활 스케줄을 조금 앞당긴다던가, 리햅 경기를 형식상 치르고 올라온다든가 하는 식으로 서두를 수밖에 없었을 테지.

처음 한두 번이야 어떻게 넘어간다 쳐도, 이런 사이클을 여러 번 반복하면 사고가 안 날 수 없다.

“Koo, 너도 고마워.”

“네? 왜요?”

너무 뜻밖이라서 조금 싸가지 없는 대답이 나와버렸다.

초짜 유격수인 나를 데리고 수비하느라 탈이 난 게 아닌가 걱정했으니까.

“사실 마이너 때 아팠던 부위가 재발한 건데, 한 5월 말이었나? 그때부터 슬슬 느낌이 오더라고.”

5월 말이라.

이때 미리 얘기하고 일찌감치 치료받았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딱히 순위 경쟁에 신경 쓸 타이밍도 아니니까.

[5월 말이면 그때 아니냐? 너 무보살 삼중살도 하고 14연타석 안타도 치면서 팀 분위기 장난 아니었을 때.]

‘아, 그러네.’

그때 있는 힘껏 끌어올린 사기를 유지하면서 한창 잘나갔었지.

지구 1위도 유지하고. 파드리스 원정 스윕하면서 그쪽 단장이랑 감독 동시에 물갈이도 시키고.

도저히 경기 출전이 불가능한 상태라면 모를까. 참을 만했으면 나라도 참고 뛰었겠네.

“Koo. 너는 야수로서의 너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네 수비 범위 넓으면 넓었지 절대 좁은 편 아냐. 네가 3루수로 출장해주면서 정기적으로 휴일도 가졌고. 너 아니었으면 진작에 퍼졌을 거다.”

그 말을 남기더니, 괜히 민망해졌는지 재빨리 자리를 뜨는 켄.

혼자 남은 내 표정을 들여다보며 박도현이 물었다.

[왜 그러냐?]

‘아니, 그냥.’

어차피 경기 경험은 마이너에서 쌓을 거니까, 당장 실책이 많더라도 천천히 기본기부터 쌓자고 여유 부렸다가.

덜컥 개막 로스터에 들어가는 바람에, 시즌 초반 개고생했던 기억이 어른거린다.

그런데 이제는 뭐.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는 거네.’

[누가 들으면 퍽이나 열심히 하는 줄 알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발전하는 타격 기술로 타자들은 점점 더 까다로운 타구를 만들어내고.

지금처럼 하룻밤 자고 일어나도 체력이 회복되는 젊은 몸은 영원히 유지되지 않으니.

결국 노력 없이는 지금 수준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질 거다.

이제는 장기부상에 대한 염려도 덜었으니.

까다로운 타구에 좀 더 집요하게 달라붙는 버릇을 들이면서.

더 정교하게, 안정적으로 처리하는 노하우를 쌓아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되겠지.

* * *

부상자 명단에 올라갔다가 복귀하는 투수들의 경우, 원래 맡던 보직 그대로 투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복귀 경기에서 선발 투수는 선발로, 불펜 투수는 불펜으로 올라가되, 관리 차원에서 이닝은 조금 적게 할당하는 식으로.

그런데 야수들은 팀 사정에 따라 복귀 타이밍이 다르다.

당장 순위 다툼이 치열해 한 경기라도 잡아야 하는 경우, 어차피 리햅 경기도 치르고 온 거니 냉큼 선발로 내보내기도 하고.

반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 대타나 대수비로 몇 경기 적응할 시간을 주기도 하지.

켄은 팀에 복귀한 날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경기 후반 대타로 나갈 거다, 뭐 이런 귀띔을 받았던지, 경기가 반환점을 돌고 나서부터 덕아웃 밖으로 나가 몸을 풀기 시작하던데.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WSH 1 : 10 LAD]

선발 투수 아이작이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해준 가운데.

6회 말 공격에서 빅이닝을 만들며 완전히 승기를 잡은 것.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9월이니만큼, 굳이 승패가 뻔한 경기에서 주전들의 체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

양 팀 모두 대거 선수 교체가 이루어졌고.

[대수비: 조나단 라틀리프 → 켄 워싱턴]

[켄 워싱턴, 34일 만의 다저 스타디움 복귀!]

3루수 자리에 조나단 대신 켄이 투입되는 순간, 다저 스타디움의 홈팬들이 뜨거운 박수를 쏟아냈다.

트레이드와 FA를 거치며 다저스의 3루를 맡아온 지가 어느덧 4년 차.

아무리 조나단이 빈자리를 잘 채워줬다고 해도 허전하지 않을 순 없었을 거다.

“켄, 긴장하는 거 아니죠?”

“내가 은퇴할 때가 됐나 보다. Koo 너한테 이런 소리도 다 들어보네.”

옆에 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다.

클레망, 조지, R.H. 등등. 중심 타자들이 죄다 교체되는 와중에 나는 여전히 유격수 자리에 있다.

[켄이 너랑 호흡을 더 오래 맞췄잖아. 배려 차원에서 그런 거겠지.]

‘아마 타석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하는 걸 수도 있어. 규정타석 때문에.’

시즌 초반에 대타와 백업으로 한 달 정도 뛰면서 타석 수를 많이 까먹어서, 9월인 지금까지도 빠짐없이 출장하고 있다.

물론 남은 경기를 다 뛰면 무난하게 채울 수 있긴 한데.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겉으로는 아무런 징조도 없던 켄이 부상으로 빠질지 누가 알았겠어.

“베이스 온 볼스!”

트리플 A서 확장 로스터로 올라온 막 투수는 풀카운트까지 끌고 가다 아쉬운 볼넷을 내줬고.

무사 1루에서 맞이한, 내셔널스의 뎁스 보강용 유틸리티 내야수.

팀 내 입지가 불안정한 선수인데도, 과도한 의욕 없이 차분하게 투수를 상대하는 게 어째 불안하다 했는데.

따아악―!

3루 쪽으로 향하는 빠르고 강한 타구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백업에 들어갔다.

빅리그에서 3루수로 먹고산 지 10년이 넘은 켄이 못 처리할 타구는 아니지만, 오늘은 부상 후 복귀 경기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서둘렀는데.

“앗……!”

위치는 잘 잡아놓고 글러브로 타구를 튕겨내 버린 켄.

공이 튀는 걸 보자마자 방향을 틀어 몸을 던져 잡아냈고.

“아웃!” “아웃!”

1루 주자가 발이 느린 덕도 있었지만, 더블 플레이를 완성했다.

날아온 공을 토스하기 위해 3루 쪽을 쳐다보니, 켄이 입을 떡 벌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한 거지, Koo? 그런 수비는 또 어디 가서 배워 온 거야?”

새로운 재능도 얻었으니 몸을 막 굴려도 되겠다 싶었다……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하겠으니.

“원래 아기들은 하룻밤만 자도 쑥쑥 크잖아요.”

“6.2피트(190cm)짜리 아기도 있나?”

내야수 경력만 따지면 나는 아직 신생아인데. 그럴 수도 있지 뭐.

원래 신인들이 다 선배들과 코칭스태프들의 관심과 애정 속에서 크는 것 아니겠는가.

[사자는 자기 자식을 절벽에서 떨어트린다고 하던데. 절벽은 좀 그렇고 외야 펜스에서 머리부터 떨어지는 건 어떠냐?]

차라리 쌍욕을 해 미친놈아.

그리고 그게 진짜였으면 진작에 멸종했겠지.

* * *

내셔널스와의 3차전과 4차전을 다저스가 연달아 가져오면서 홈 4연전은 동률 시리즈로 끝났고.

4차전이 끝나기 무섭게 다저스 선수단은 전용기가 대기하고 있는 공항으로 향했다.

동부지구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원정 시리즈가 이동일 없이 바로 치러질 예정이었으니까.

“애틀란타에서 피츠버그 들렀다가 필라델피아로. 누가 짰는지는 몰라도 일정이 아주 다이나믹해. 응?”

“우린 그나마 낫지. 자이언츠 놈들은 뉴욕에서 세인트루이스, 그리고 마이애미 순으로 갔다 온다더라.”

“미친놈들이네 진짜. 하다못해 말린스전이랑 메츠전은 붙여주던가.”

“그 지X로 이동하다가 진 빠져서 연패라도 해주면 우리야 땡큐지. 그리고 장거리 원정은 이번이 마지막이잖아.”

이번 9연전을 마지막으로 원정 경기는 같은 지구 팀들이랑만 잡혀 있다.

서부지구 선두 자이언츠가 4연승을 달리며 승차는 여전히 2게임이지만.

그쪽의 가혹한 원정 스케줄을 고려하면 9월 중순쯤까지 치열하게 선두를 다툴 가능성이 크겠다.

늦은 밤에 원정 숙소에 도착해 곯아떨어지고, 다음날 경기장에 출근해 먼저 몸을 푸는 홈팀 선수단을 살폈다.

내가 유망주 시절부터 빅리그까지 다저스에만 있었는지라 발이 넓진 않지만.

애틀란타에는 친분까진 아니어도 안면은 튼 선수가 한 명 있거든.

“Koo! 올스타전 이후로는 처음이네. 잘 지냈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중견수, 앤드류 매닝.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 나를 추천한 걸 계기로 SNS 팔로우를 맺었다.

“서부지구는 진짜 누가 우승할지 모르겠더라. 우린 이미 확정이나 마찬가진데.”

올해 내셔널리그 동부지구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독재 체제다.

필리스가 5경기만 이기면 지구 우승 확정이라던데 지금은 9월 초니까.

현 지구 2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와일드카드를 노리는 중.

“그래도 너희가 이겼으면 좋겠네. 와일드카드에서 너희랑 붙는 게 더 짜증 날 것 같거든.”

“자이언츠랑 경기 뛸 땐 반대로 말했죠?”

“하하하! 들켰나?”

앤드류의 멋쩍은 웃음을 뒤로하고 펼쳐진 브레이브스와의 3연전.

이 시리즈에서 나는 단 하나의 안타도 때려내지 못했다.

[2사 만루, 타석에는 2번 타자 Koo. 3―1의 절체절명의 카운트에서 5구째! 쳤습니다! 이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아아아! 중견수 앤드류 매닝의 슬라이딩 캐치!!! 만루 위기에서 팀을 구해내는 슈퍼 캐치가 나왔습니다!!!]

경기장 밖에선 클레망 수준의 성인군자로 불리면서 경기 중엔 하나도 안 친절한 앤드류 매닝이 내 안타성 타구를 두 개나 막아내기도 했고.

[5구도 크게 빠집니다. Koo, 이번 시리즈 벌써 다섯 번째 볼넷이네요. 이제 2사 주자 1, 3루. 한 점 차이의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브레이브스 배터리의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시리즈 내내 자동고의사구 포함 볼넷만 다섯 개를 얻으면서 출루율만 실컷 높였으니까.

물론 핑계가 될 만한 것들은 아니지.

상대가 좋은 수비로 내 타구를 잡아냈다면, 더 까다로운 타구를 만들지 못한 나를 탓할 일이고.

어쩌면 요즘 홈런은 안 나와도 2루타나 3루타를 종종 때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스윙이 커지면서 페이스가 흐트러졌을지도 모를 일이고.

이런 상황에서도 팀에 도움이 될 방법은 있으니까.

나는 나대로 할 수 있는 걸 하면 그만이다.

[1루의 Koo, 뛰었습니다! 2루에서! 세이프! 도루 성공! 투수가 Koo한테만 견제구를 다섯 개 던졌는데, 결국 1루와의 거리를 좁히지도 못하고 괜히 2루만 내줬군요!!!]

3연전 동안 도루를 네 번 시도해서 그중 세 번을 성공.

그리고, 마지막 도루에는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제 도루에 실패하면서 시즌 30도루를 채우지 못했는데, 오늘 바로 성공해버리는군요! 이제 ‘내야수’ Koo가 30―30 클럽에 가입하기까지는 6개의 홈런이 필요합니다!]

시즌이 대충 한 달 남았는데, 그동안 홈런 여섯 개.

어떤 팀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성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겠지.

신인에게 기회를 주는 리빌딩 팀과 자주 만난다면 그만큼 홈런 확률이 늘어나는 거고.

애초에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너 이제 웬만하면 니 기사 찾아보지 마라. 괜히 영향받을라.]

괜히 언론에서 오르내리는 걸 신경 쓰다가 경기를 망치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 것.

아무튼, 내 활약은 미미했지만 다른 타자들이 적절하게 점수를 내주면서 브레이브스와의 3연전은 2승 1패 위닝 시리즈로 마무리했고.

다음 원정지로 이동하는 동안, 태블릿은 잠시 넣어두고 비행기 좌석을 플랫 모드로 바꿔서 뒹굴며 여유를 즐겼다.

“Hey, Koo.”

물론 혼자 여유롭게 쉬도록 내버려 둘 동료들이 아니었지만.

“피츠버그에 너랑 같은 나라에서 온 선수가 한 명 있잖아. Kim? 이 사람 한국인 맞지?”

“아, 네. 그렇죠.”

“어떻게, 이 사람에 대해 좀 아는 거 없어?”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코리안리거는 나를 포함해 총 네 명.

피츠버그에는 그중 나를 제외하면 유일한 내셔널리그 소속 한국인 선수가 한 명 있다.

“그 선수 말인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