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코리안리거 (2)
[진짜? 오빠한테 김희영 선수에 대해 물어봤다고?]
“응. 그러더라.”
피츠버그의 원정 숙소 개인실.
방에서 한잔하자며 끈덕지게 달라붙는 제리와 랜디를 뿌리치고, 조용히 내 방에 틀어박혀 박도아와 통화했다.
박도아가 혼자 미국에 남고 나서부터 거의 이틀에 한 번씩은 통화하게 됐다.
원래는 이제 막 신입생이 된 박도아의 대학 생활을 전해 듣는 편인데, 오늘은 갑자기 저쪽에서 먼저 야구 얘기를 꺼냈다.
어쩌면 코리안리거끼리의 맞대결이 성사될지도 모를 이번 시리즈가 한국에서 엄청나게 화제가 됐다면서.
[그래서 뭐라 그랬는데?]
“나도 모른다고 그랬지.”
김희영.
KBO에서 데뷔해 올해로 프로 14년 차를 맞이한 베테랑 좌완 투수.
프로 7년 차에 메이저리그 포스팅을 신청했다가 결렬, KBO에 잔류했다가 2차 FA까지 마치고 나서야 다시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렸고.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1년 총액 120만 달러의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것까지는 좋은데, 부진한 성적 탓에 개막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트리플 A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래도 나름 KBO에서 이름을 날린 짬이 어디 가지는 않는지, 트리플 A에서는 나름 꾸준히 활약하며 투수진에 땜빵이 날 때마다 빅리그를 오가기는 했고.
불과 4일 전 시즌아웃을 당한 투수를 대신해 다시 콜업되었는데, 딱 이 타이밍에 다저스와의 경기가 잡힌 거지.
“근데 좀 이상하다. 이 사람이랑 나랑 접점이 아예 없는데, 왜 화제가 됐다는 건지 모르겠네.”
[오빠, 파이리츠 감독이 인터뷰한 거 못 봤어?]
“어? 응. 나 들어오자마자 씻고 바로 전화하는 거라.”
핸드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태블릿을 꺼내 포털사이트에 접속해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 깁슨 감독, “지금 우리 팀에는 경험 많은 선발 투수가 절실하다. Kim에게 머지않아 선발 등판 기회를 줄 것.”]
올라온 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 벌써 한국에까지 퍼졌나 보다.
지금까지의 김희영은, 시즌 초반 강등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외에는 전부 불펜으로만 뛰었는데.
만약 선발 투수와 선발 야수로서 맞대결을 펼치게 된다면 임팩트 자체가 다르겠지.
‘솔직히 선수 대 선수로서는 크게 신경 쓰이진 않지만.’
구속도 그렇고, 구사 가능한 구종도 그렇고.
빅리그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돌 만한 역량은 없다고 봐도 되겠지.
그때, 다른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지간하면 그냥 나중에 연락할 텐데. 에이전트한테서 온 전화는 미루기 좀 그렇지.
“도아야. 나 지금 전화 좀 받아야 해서.”
[아, 응! 내일 경기 잘해, 오빠!]
예정된 스폰서 행사나 촬영 일정은 전부 끝냈는데 무슨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합동 인터뷰를요? 김희영 선수랑 저랑요?”
미국물을 너무 오래 먹어서였을까, 잠시 잊고 있었다.
빨리빨리가 종족 특성인 한국인에게 몇 시간이면 기획서 하나 뚝딱하고도 남는 시간이란 것을.
* * *
미국을 제외하고, 프로야구 리그를 운영 중인 국가에서는 유독 자국 선수의 메이저리그 활약상에 민감하다.
만약 내가 박도현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언론 친화적인 선수였다면 지금쯤 국민 영웅으로 대접받지 않았을까.
물론 잠깐만 주춤해도 바로 물어뜯기긴 하지만, 아무튼.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선수들끼리 맞붙는 경기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번 시즌엔 같은 아메리칸리그 소속의 두 선수가 일정이 어긋나 만나지 못했기에 이번 시리즈에 더 관심이 더 쏠리는 것도 있지.
[근데 빨라도 너무 빠른 거 아냐? 하루도 안 됐는데 기획부터 편성까지 다 끝났네.]
‘아마 니 탓도 좀 있을걸?’
[나? 내가 왜?]
국뽕과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던 박도현의 사망 이후 메이저리그에 흥미를 잃은 팬들이 많다.
이미 메이저리그 관련 산업 및 콘텐츠를 취급하던 기업들은 작년 한 해 타격이 장난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건수 잡혔을 때 어그로 좀 왕창 뽑아먹겠다는 거겠지.
굳이 내가 응해야만 할 이유는 없지만, 솔직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같은 한국인 선수끼리의 선의의 경쟁, 뭐 이런 좋은 명분이 있는 기획까지 쳐냈다간 또 안티들이 시끄럽게 굴 게 뻔하기도 했으니.
파이리츠와의 1차전이 열리는 날,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구장을 찾았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구현기 선수!”
오늘 인터뷰를 주관한 스포츠 방송국 PD가 버선발로 맞이한다.
원래는 서로 이름만 아는, 소 닭 보듯 하던 사람인데.
메이저리그에서 성과를 내니까 대우가 거의 생전의 박도현급으로 달라지네.
“김희영 선수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시죠.”
미리 준비해온 대답을 점검하고, 전체 흐름을 확인한 다음 촬영 장소로 향했다.
솔직히 좀 긴장은 된다.
코리안리거를 상대하는 건 물론, 공적으로라고는 해도 따로 만나보는 것도 처음이라서.
워낙 KBO에서 이름을 날린 선수라, 대충 소문 같은 건 듣긴 했는데. 사람은 직접 만나봐야 아는 거니까.
‘너도 김희영 선수는 모르지?’
[뭐 SNS 친구 신청 보내오길래 온라인에서 몇 마디 나눠보긴 했는데, 가물가물하지.]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든 한국인 선수는 KBO를 거쳐 온 선수들이다 보니, 나랑은 인연도 없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난다.
만약 나이 앞세워서 꼰대질이라도 하는 선수라면 곤란해지겠지.
미국에서처럼 ‘X 까쇼’ 하고 들이받기도 애매하고.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김희영이 기다리고 있다던 스튜디오 문을 열었고.
“안녕하십니…….”
“Koo!!! Koo!!! Koo!!! Koo!!!”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우렁찬 목소리로 Koo 콜을 뱉어내는 덩치 큰 아재였다.
“…….”
“…….”
[…….]
철컥.
조용히 문을 다시 닫고 PD에게 물었다.
“원래 저런 분이신가요?”
“나쁜 뜻은 없으실 겁니다…… 아마도요.”
당연히 그렇겠지.
사람 멕이겠답시고 저딴 짓을 감행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 * *
“그 뭐냐. 구현기 선수랑은 또 처음이니까. 어색하지 않게 다저스 팬들이 많이들 하는 거 따라 해봤어요. 프리즌 브레이크로다가.”
“아이스 브레이크요?”
“그래요? 요새 젊은 애들은 그렇게 부르나 보다.”
저 정도로 뻔뻔해야 4년 100억짜리 FA 계약 기간에 구단 순위 9878을 찍고도 해외로 런할 수 있는 건가 보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경기 시작 전 짬을 낸 것이니만큼 사담을 나눌 여유는 없었고.
“2037시즌 메이저리그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한국인 선수끼리의 대결이 임박했다고 합니다. LA 다저스 소속 내야수 구현기 선수와 피츠버그 파이리츠 소속 투수 김희영 선수 만나보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구현기입니다.”
“반갑습니다, 휴이 킴입니다.”
본인의 등록명 ‘Heui―Young’을 동료들이 읽지를 못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휴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나.
한국에서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스타지만, 여기선 인지도는커녕 이름조차 똑바로 불리기 힘든 게 현실.
그래서였을까.
합동 인터뷰이긴 해도 서로 라이벌로 엮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격차라고 해야 하나, 인지도나 활약상 같은 게 너무 크게 차이가 나서.
“만약 두 분이 투수와 타자로서 맞붙게 된다면, 어떤 전략을 세우고 승부에 임하실 건가요?”
그래도 기획 자체가 코리안리거끼리의 맞대결에서 출발한 만큼, 이런 질문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나 보다.
“상대 감독도 언급했듯, 김희영 선수가 워낙 경험이 풍부한 선발 투수이기 때문에 방심하지 않고 제 스윙을 하는 게 유일한 해답일 것 같습니다.”
“저는 반대로 구현기 선수를 어떻게든 방심시키는 게 관건일 것 같네요.”
물론 돌아온 것은 이런 영양가 없는 대답뿐이었지만.
지금이 포스트시즌이거나 김희영이 자이언츠 선수였으면 몰라. 이번에 처음으로 상대하는 선수 상대로 무슨 말을 하라고.
게다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경험 많은 투수는 감정에 휩쓸려 터무니없는 공을 던지는 일이 극도로 적고. 전혀 예상치 못한 구종과 코스를 선택하기도 하니까.
어중간하게 게스 히팅 같은 걸로 장타를 노리기보다는 하던 대로 하는 게 제일이지.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번 시즌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남은 기간 동안의 목표가 있으실까요?”
리포터가 굳이 내 쪽으로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니, 30―30을 언급해주길 바라는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지만.
말해 봐야 인터넷에 박제나 당할 뿐 나한테 좋을 게 뭐가 있나.
“당장은 다저스의 지구 우승만 바라보고 달리는 중입니다. 그 과정에서 부상 없이 무사히 완주하는 게 목표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시군요. 홈런에 대한 욕심은 없으신가요?”
“따로 욕심을 내본 적은 없습니다.”
은근슬쩍 홈런 얘기를 끼워 넣으려 하기에 단칼에 쳐냈더니, 얌전히 물러나는 리포터.
이번에는 김희영이 입을 열었다.
“메이저리그 첫 승.”
초면에 대뜸 Koo 콜을 날리거나, 실없는 농담을 하던 사람이랑 동일 인물이 맞는가 싶을 정도의 진지한 태도.
지금이야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툭하면 장타를 얻어맞는 신세지만.
이 사람도 야구판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 온 사람이라는 게 새삼 느껴진다.
“멀리까지 나왔는데, 승리 하나도 못 챙겨 가면 너무 서러울 것 같습니다.”
빅리그와 트리플 A를,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는 김희영.
아무리 피츠버그가 리빌딩 팀이라고는 해도 김희영에게 선발 등판 기회를 지속적으로 줄 리는 없으니. 아마 본인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임하겠지.
‘무조건 이겨야겠는데.’
근데 그거야 본인 사정이고.
정말로 다저스 상대로 첫 승을 챙긴다면, 메이저리그 슈퍼스타를 꺾은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 등극할 텐데.
뭐 김희영한테야 좋은 일이겠지만. 그 상대로 내가 박제되는 건 못 참지.
* * *
“그럼 현욱이는? 현욱이 알아? 현욱이도 희문고 나왔는데.”
“어…… 도현이 소개로 밥은 먹은 적 있는데요. 지금은 따로 연락은 안 합니다.”
“진수가 그때 너랑 친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거 도현이 얘긴가?”
“도현이 맞습니다. 셋이 같이 U―18 대표팀 다녀오긴 했는데, 저랑은 딱히 접점은 없었습니다. 그때는 투수였어서요.”
인터뷰에서 첫 승을 갈망하던 아주 짧은 순간.
그게 지나가고 나니 김희영은 다시 수더분한 아재로 돌아왔고.
오늘도 등판 예정 없이 덕아웃 대기를 통보받았는지, 경기 준비 시간에 나를 찾아와 말을 걸었다.
어떻게든 접점을 찾고 그걸 토대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사회인끼리의 흔한 대화.
근데 애초에 나이대가 차이가 나다 보니, 겹치는 인맥이 하나도 없다.
[그건 니가 아싸라서 그런 거고. 나 봐라. 넌 대체 나 없었으면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했냐?]
‘너는 아무한테다 막 들이대잖아. 막말로 너 야구 못 했으면 나랑 별 차이 있었을 것 같냐?’
내가 머릿속으로 박도현과 투닥대는 동안.
김희영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말도 놓고, 연락처도 교환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구현기 선수’에서 ‘우리 현기’까지 10분밖에 안 걸린 것 같은데.
[만약 야구라는 스포츠가 없었다면 너는 사기 쳐서 먹고살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그런 너를 털어먹었겠는데?]
‘칭찬 아니지?’
[칭찬일 것 같냐?]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슬슬 원정팀이 몸을 풀 시간이 찾아왔고.
저녁 약속을 잡고 나서야 김희영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LAD 8 : 1 PIT]
원정 1차전의 결과는 다저스의 대승.
계속 패전과 노디시전만 반복하던 다니엘이 드디어 시즌 5승째를 챙겼다.
파이리츠 덕아웃은 멀리서 보기에도 충격에 빠진 듯했다.
순위는 지구 꼴찌.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맞춰 FA가 가까워진 1선발과 2선발을 팔아넘기며 유망주를 잔뜩 받아온 파이리츠.
그런 팀에서 사실상 후반기 에이스 노릇을 하던 투수가 3회를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으니.
[현기야, 미안하다. 아무래도 오늘 약속은 미뤄야겠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김희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본인이 거의 반강제로 잡았던 저녁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자는 것.
[하긴,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날 너랑 만나는 거 걸렸다간 돌 맞기 딱 좋지.]
보통 경기에서 대패한 날은, 상대 선수들과 사적인 만남을 피하는 선수들이 많다.
까딱 잘못했다간 분노한 팬들에게 물어뜯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그거야 물어뜯을 팬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
1선발과 2선발을 트레이드로 팔아버린, 사실상 탱킹 시즌에 접어든 팀에 그런 팬이 붙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렇다면 남아 있는 가능성은 사실상 하나뿐.
‘내일 선발인가 보네, 이 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