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00화 (100/200)

100. 코리안리거 (3)

웬만한 팀에서는 대체 선발을 기용할 때, 등판 며칠 전에는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2037시즌의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그 웬만한 팀에 끼지 못한다.

현재 팀에 규정이닝을 충족할 가능성이 있는 투수가 한 명도 없다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그나마 1선발과 2선발이 있었는데 지금은 팔아버렸으니까.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투수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올해의 피츠버그는 FA가 가까워지는 선수들을 죄다 팔아치우며 유망주를 수집하는 극단적인 리빌딩 팀.

기복도 심하고 나이도 많은 김희영보다는, 젊은 투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는 건 본인도 각오했을 거다.

[그럼 다른 팀을 알아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투수진 약한 팀이 죄다 여기처럼 탱킹만 하는 건 아니잖아.]

정확한 이유야 나도 모르지만.

아마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안한 팀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등록일수에 따라 연봉이 차등 지급되는 스플릿 계약이었다면 그나마 지금만큼의 기회도 얻기 힘들었을 테지.

사담이 길었는데,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파이리츠의 마운드 사정이 김희영의 선발 등판을 경기 전날 통보할 정도로 개판이라는 거다.

[피츠버그 파이리츠, LA 다저스와의 홈 시리즈 2차전에서 Kim의 선발 등판 예고! 같은 한국 출신 Koo와 코리안 더비 성사!]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원정 2차전이 열리는 PNC 파크.

조만간 김희영이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다는 언질만 나왔을 뿐, 구체적인 일정은 밝히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도시 규모에 비해 한인들이 많이 사는 피츠버그답게, 온갖 한국어 플래카드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Koo, 나 한글 읽을 줄 알아. 저게 그러니까…… 국민, 하자, 쿠횬키! 맞나?”

신기하다는 듯 관중석을 쳐다보던 클레망의 말.

국민하자가 아니라 국민타자겠지. 국민으로서 하자가 있는 것 같잖아.

[인간으로선 하자가 좀 있긴 하지.]

‘지는 인간 아니게 된 지가 언젠데 누구보고 하자 타령이야.’

평소처럼 시비 거는 박도현을 향해 조용히 퍽유 삼창을 날려준 뒤, 관중석을 둘러봤다.

솔직히 여기가 파이리츠 홈이라는 걸 감안해도, 나보다 김희영을 응원하는 문구가 훨씬 많다.

“척―슨? 저건 무슨 뜻이지? 사람 이름인가?”

“척슨이 아니라, 첫―승.”

그리고 그중에서도, 김희영의 메이저리그 첫 승을 염원하는 것들이 절반 이상은 되어 보인다.

어쩌면 저 플래카드 수의 격차도, 언더독을 응원하는 심리 때문은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

귀중한 첫 승을 지구 1위를 다투는 다저스를 상대로 따내면 얼마나 의미 있겠냐, 뭐 이런 거지.

‘그런 기대는 꺾어야 제맛이지.’

물론 야구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은 스포츠이다 보니, 탱킹 팀이라고 해서 방심했다간 한 방 먹을 수 있지만.

그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야, 지구 선두 탈환을 위한 제물에 불과하니.

상대 선발의 승리를 기원하는 플래카드를 눈에 담으며 승리를 향한 열망을 불태웠다.

[거봐. 인간으로서 하자 있는 거 맞다니까.]

그 와중에 박도현이 뭐라 한 것 같긴 한데. 아마 칭찬이었겠지.

* * *

“플레이 볼!”

주심의 선언이 떨어지자, 대기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며 마운드를 쳐다봤다.

김희영의 상대 투수로서 첫인상은.

‘온오프가 아주 확실한 사람이네.’

인터뷰에서 조잘대던 모습도 그렇고. 경기 시작 전 야수들과 다소 큰 몸짓으로 소통하는 모습도 그렇고. 좀 가벼운 인상이 있었는데.

웃음기를 싹 지운 채 리드오프 조지를 노려보는 걸 보니, 정말 같은 사람이 맞나 싶다.

마운드에서 헤실대는 투수가 있을 리 없긴 한데, 그냥 갭이 좀 크다는 거지.

따악―!

물론 인상이 바뀐다는 거지,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기에.

3―1의 카운트에서 김희영의 살짝 몰린 포심을 가볍게 밀어치며 안타를 만들었다.

“타자 위치로!”

무사 주자 1루, 2번 타자로서 김희영을 상대할 차례.

평소보다 한국인 기자들의 손놀림이 분주해질 프레스석을 흘낏 쳐다본 다음, 타석으로 걸어가는 길.

“Koo!!! Koo!!! Koo!!! Koo!!!”

1회부터 맞이한 좋은 기회에 원정팬들이 흥겨운 Koo 콜을 보냈지만.

그 사이로 낯익은 언어가 섞여 들려온다.

“하나 둘 셋! 김희영! 파이팅!”

피츠버그의 한국인 팬들의 김희영을 향한 절실한 응원이다.

최소한 휴이 킴을 응원하는 목소리보다는 훨씬 우렁찬 소리.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김희영이 경기 초반 주로 활용하는 변화구 순서를 외웠다.

자꾸만 상대 투수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드는 내 안의 유교맨을 몰아내면서.

한국에서도 중계되고 있을 오늘 경기, 투수 김희영과 타자 구현기의 첫 승부.

대기 타석에서 맞춰봤던 타이밍을 떠올리며 타석에 들어가 자세를 잡은 바로 그 순간.

“응……?”

파이리츠 배터리가 보인 행동은, 와인드업도, 견제도, 하다못해 사인 교환도 아닌.

포수의 마운드 방문이었다.

* * *

[Live] LA 다저스 0 : 0 피츠버그 파이리츠 (1회 초)

[2번 타자 구현기(0.327, 유격, 좌타)]

└ 와 씨, 치킨 와서 세팅 딱 끝내니까 바로 구현기 차례 오는 거 보소 ㄷㄷ 타이밍 오져따리

└ 현기야 대선배님이시다. 너네 선배 파이리츠에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주자까지 원쁠원으로 지워드려야 하지 않겠니?

└ 아니 대선배는 뭔놈의 대선배임? 믈브 경력은 구현기가 한참 선배인데 ㅉㅉ

└ 현기야 경기중에 텔레파시로 글쓰니?

└ 구혐기 갓희영이랑 인터뷰한 거 봄? 대선배님한테 김희영 ‘선수’라고 굳이굳이 강조하는 거 보면 인성 사이즈 나오지 ㅇㅇ

└ 아니 그럼 뭐라부름?? 둘이 뭐 고등학교 선후배도 아니고 크보 선후배도 아닌데 선수라 부르고 존칭 쓰면 되는 거 아님??

└ 응 우리 희영님이 구혐기 정의구현해주실 거야~

└ 네 다음 비밀번호 9878~

[포수 마운드 방문]

└ ????

└ 아니 이 타이밍에 쟤가 왜 올라감?

└ 믈브에서도 저거 제한 있는 거 아닌가?

└ ㅇㅇ 한팀당 9이닝 6회까지 가능함

└ 어제 둘이 같이 인터뷰하면서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나보네. 바로 내려오는거 보니 ㅇㅇ

[자동고의사구]

[무사 주자 1, 2루]

[3번 타자 켄 워싱턴(0.298, 3루, 좌타)]

└ ?!?!

└ 김희영 오늘 경기 끝나고 방출 예고라도 받음?

└ 1회 초인데? 무사 1루인데? 이것이…… ‘하위리그?’

└ 야 구현기 심판한테 물어보고 있다 ㅋㅋㅋㅋ 근데 나라도 그럴 듯

└ 안 돼. 안 바꿔줘. 어서 1루로 나가~

└ 파이리츠 야구 재밌게 하네 ㅋㅋㅋㅋㅋ 이래놓고 다음 타자한테 홈런이라도 맞으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 스포츠티비 PD 지금쯤 오열하고 있겠넼ㅋㅋㅋ 코리안 더비니 뭐니 홍보 오지게 때려박았는데, 응 자동고의사구~

* * *

‘이거 꿈인가?’

1루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자동고의사구, 나올 수도 있지. 나도 14연타석 안타 치고 한창 타격감 올라갔을 때 종종 당했으니.

근데 그것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내 타순이 한 6번이나 7번쯤 되고. 뒤에 타격 생산성을 기대하기 힘든 선수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아니면 비어 있는 1루를 채우며 더블 플레이를 노린다거나.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상대 덕아웃을 흘낏 쳐다봤지만,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당연히 코칭스태프의 지시가 있었겠지. 빅리그 초년생인 김희영에게 이런 결정을 단독으로 내릴 권한이 있을 리 없으니.

문제는 김희영이 이 정신 나간 작전을 왜 받아들였냐는 거다.

[내야수들 경험 쌓게 해주려는 거 아냐? 어차피 망한 시즌인데. 얘네 한 명 빼고 싹 다 유망주들이잖아.]

‘그딴 팀이 세상에 어딨어…….’

머릿속으로 그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경기는 진행됐고.

무사 1, 2루의 기회 앞에서 3번 타자 켄이 타석에 들어갔다.

덕아웃에서 내려온 작전은 페이크 번트 앤 슬래시.

번트 수비에 익숙하지 않은 유망주 내야수들을 교란시키기 적당한 작전.

“파울!”

그러나 작전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파이리츠 내야수들이 좀 움찔거리긴 했지만. 번트 대비가 아닌 정상 수비 위치를 제대로 지키기도 했고.

결국 작전 없이 맞이한 2구.

“파울!”

파울 두 개로 순식간에 0―2의 카운트.

초구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비슷한 코스에 두 번 연속 배트가 나가는 걸 보니 뭔가 좀 마음에 걸린다.

‘왜 저리 조급해 보이지?’

솔직히 제구가 잘 되긴 했는데, 켄이 골라내지 못할 공은 아니었다.

저것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공에도 망설임 없이 배트를 빼는 선수인데.

켄의 모습을 살피는 사이, 김희영은 이미 투구 동작에 들어가 있었고.

타석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켄은 3구에도 기어이 배트를 휘둘렀다.

딱!

“아웃!” “아웃!”

죽어라 뛰었지만, 더블 플레이를 막을 순 없었다.

무사 1, 2루의 기회를 2사 3루로 바꿔버린 켄은 헬멧을 내던졌고.

“나이스, 제이미! 나이스, 로디!”

유격수의 타구 처리가 살짝 늦어지면서 2루수가 허겁지겁 송구에 들어가는, 1년 차 내야수인 내 눈에도 미숙한 점이 엿보이는 수비였지만.

김희영은 내야수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거의 어지간한 히스패닉 선수들 못지않은 리액션.

“고생했다, 켄.”

“……예.”

반대로 다저스 덕아웃은 침울해졌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비록 이번 타석에선 최악의 결과를 냈어도 켄은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넘게 뛰어온 선수.

괜히 분풀이하는 대신 덕아웃 난간에 기대더니 김희영의 피칭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시속 88마일짜리 포심으로 카운트를 잡아내는 김희영을 보며 켄이 중얼거렸다.

“분명 칠 만해 보였는데…….”

고개를 갸웃하는 켄을 보면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나를 거르면서 김희영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메리트.

그건 바로 다음 타자의 멘탈을 흔들리게 만드는 것.

[고작 그걸 위해 1점을 더 내줄 수 있는 리스크를 감수한다고?]

박도현의 지적은 타당하다.

멘탈이라는 건 수치화가 불가능한 지표. 게다가 반드시 효과를 본다는 보장조차 없다.

오히려 안타 하나만 나와도 확실하게 실점하는데, 어지간하면 손해지.

그러니까.

‘저건 전략이 아니라 배짱질이지.’

패스트볼 최고 구속도 90마일에 불과하고, 변화구도 그리 위협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투수.

이런 투수가 자신을 ‘해볼 만한 상대’로 지목했다는 사실에 타자가 흥분해서 자기 스윙을 하지 못하는 것.

오직 그것만을 노리는, 잃을 게 없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

“아웃!”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R.H.는 4구째 떨어지는 변화구를 퍼 올렸다가 외야 플라이로 아웃당하고 있었다.

무사 1, 2루에서 득점 없이 이닝 종료.

“김희영! 김희영! 김희영!”

한인 홈팬들의 성원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더니, 자기보다 한참 어린 내야수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김희영.

만약 저 전략 같지도 않은 전략에 휘둘리다가, 자기 페이스를 잃고 투수에게 끌려가기만 한다면.

정말로 저 투수한테 메이저리그 첫 승을 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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