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코리안리거(4)
[LAD 0: 0 PIT]
오늘 경기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선발 투수 김희영의 피칭 플랜은 단순했다.
실점이 늘어나든 말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빡센 타자는 일단 거르고 보자는 정신 나간 전략.
물론 말이야 쉽지.
실투가 나오는 순간 무조건 실점이라는 압박감 속에서, 자신이 의도한 대로 공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이건 뭐 절벽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웃!” “아웃!”
그걸 본인도 아는지, 하위 타선에서는 반대로 적극적인 승부에 임하기도 했다.
2회 초 루카스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헨리 대신 포수 마스크를 쓴 브레이든에게 더블 플레이를 유도해냈던 것처럼.
“구속이나 구위는 그렇게 위협적이란 생각이 안 드는데, 자꾸 짜증 나는 코스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변화구를 건드렸다가 맥없는 땅볼 타구를 만들어냈던 브레이든의 말.
구속이 정말 심각하게 느린 게 아니라면, 존에 자유자재로 넣었다 뺄 수 있는 제구력만 갖춰도 투수로서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배트 컨트롤이 좋은 타자들을 이겨낼 수 없기에, 베이스를 채우면서까지 피하려는 거겠지만.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나 역시 김희영이 피해야 할 타자 중 한 명으로 지정된 모양이다.
3회 초.
오늘 경기 다저스의 선발 투수 아이작과 리드오프 조지를 연달아 잡아낸 후, 2사 주자 없는 상황.
김희영은 다시 한번 결단을 내렸다.
[자동고의사구]
첫 타석에 이어 두 번째 타석 역시, 제대로 된 스윙 한번 없이 1루로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뭐야?! 아니 왜 승부를 안 해! 어차피 2사잖아!”
“같은 한국 선수라고 봐주는 거 아니지?!”
지금까지는 결과가 좋았으니 다소 의아한 타이밍의 고의사구에도 별말 없이 넘어갔던 홈팬들이었지만, 같은 짓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 이야기가 다르지.
특히나 같은 한국인들끼리의 뜨거운 대결, 뭐 이런 걸 기대하고 온 듯한 한인 팬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한국 해설자들은 이걸 어떻게 포장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네.
까다로운 타자 거르는 거, 좋다 이거야.
규칙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실점의 가능성을 줄이고 싶다면 그건 본인의 선택이지.
다만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
본인이 계획했던 거랑 달라진다고 해도 그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다.
“세이프!”
내가 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김희영도 했는지, 견제구를 몇 번 던지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내 도루를 저지할 수 없었다.
시즌 32번째 도루 성공.
따아악―!
자기 앞에서 두 번 연속으로 자동고의사구가 나오면 켄이 완전히 평정을 잃어버릴 거란 계산도 있었겠지만.
김희영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크게 위협적인 투수는 아니라는 걸 간파한 켄은 두 번 당하지 않았다.
타구가 그리 깊지 않고, 중견수가 빠르게 처리하면서 홈까지는 노려볼 수 없었지만.
“베이스 온 볼스!”
게다가 4번 타자 R.H.에겐 볼넷을 허용하기까지.
괜히 2사에서 나를 걸렀다가 투구 수는 투구 수대로 늘어나고, 만루 위기까지 맞이한 최악의 상황.
파이리츠 포수가 오늘 경기 두 번째로 마운드를 방문했는데.
‘웃어?’
정작 투수 본인은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눈웃음을 지으며 뭐라 몇 마디 하더니, 곧바로 포수를 내려보냈다.
혹시 몰라 다음으로 타석에 올라갈 클레망을 쳐다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첫 타석에서 조급하게 승부에 임했던 켄. 그리고 지금 막 김희영을 상대하고 있는 클레망.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올해 부상으로 잠시 팀을 떠난 적이 있다는 것과 직접적인 포지션 경쟁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팀에서 전성기 때만큼 입지가 강하진 않다는 거지.
너 지금은 그냥 X도 아니잖아, 라고.
별볼일없는 투수한테 선고받는 거나 마찬가지지.
“스트라이크 아웃!”
가뜩이나 최근 몇 경기 페이스가 떨어져 있던 클레망은 이런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했고.
벌써 두 번이나 절호의 찬스를 날려먹은 타자들 탓인지, 우리 투수의 페이스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 * *
전날 경기와 마찬가지로 한쪽의 일방적인 우세로 흘러갈 거란 예측이 지배적이었던 오늘 경기였지만.
뜻밖에도 3회가 끝나도록 0대 0으로 팽팽하게 진행됐고.
스코어의 균형은 4회에 들어오고서야 무너졌다.
[LAD 0 : 1 PIT]
유망주로 가득한 피츠버그 내야진에서 유일한 베테랑이자, 타율 2할 중반대에 27홈런을 때려낸 공갈포.
다저스 선발 아이작이 4이닝 동안 안타를 허용한 타자는 오직 이 한 명뿐이었다.
그게 하필이면 선취 득점을 상대에게 넘겨주는 홈런이었을 뿐.
[투구 수 생각하면 5회가 마지막일 것 같은데. 진짜 너랑은 승부 안 할 생각인가?]
5회 초, 9번 투수부터 시작하는 다저스의 공격.
4이닝 동안 70개가 넘는 공을 던진 김희영이기에, 나랑은 이번이 마지막 맞대결일 확률이 높다.
‘그거야 조지 하는 데 달려 있지.’
투수 아이작은 배터 박스 끝에 서서 삼구삼진.
김희영이 승리 투수 요건을 달성하기까지는 아웃카운트 두 개가 남았다.
대기 타석에서 바라보는 김희영은, 1회 초 그 살벌했던 눈빛을 어떻게든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타자들에게는 그저 경기 중반에 지나지 않지만. 첫 승에 의미를 크게 두고 있는 투수 본인은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살짝 흔들린 집중력은 투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볼!”
“파울!”
“파울!”
기본적으로 메이저리그 기준 구속이 빠른 편은 아니다 보니, 세 번째 타석쯤 돼서 눈에 익으면 그만큼 대처하기가 쉬운 건 당연지사.
존에 집어넣는 공은 커트하고, 벗어나는 공은 골라내기를 반복한 끝에.
“베이스 온 볼스!”
1사 주자 1루.
투구 수 80개를 넘겼고, 내 뒤로는 눈빛이 흉흉한 클린업 트리오가 기다리는 중.
사실 대체 선발인 만큼 지금 내려도 이상하진 않은데, 파이리츠 덕아웃에서 교체하려는 기색은 따로 없다.
한인 팬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자신의 첫 승을 기원하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날 거르긴 힘들 거다.
게다가 오늘 내가 타석에서 자기 공을 본 적이 없으니, 차라리 나한테서 땅볼을 유도하는 게 그나마 쉽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지.
“볼!”
“볼!”
떨어지는 공 두 개를 연거푸 골라내면서, 카운트 싸움이 투수에게 확 불리해진 가운데.
“세이프!”
잠시 1루에 견제구를 던지며 내 타이밍을 흐트러뜨리려는 모양이었지만.
이미 타이밍은 대기 타석과 덕아웃에서 질리도록 읽었다.
갑자기 이중 키킹 같은 걸 들고 오지 않는 이상, 주자를 끝까지 의식하다가 방향을 틀어 던지는 패스트볼은 나한테 그리 위협적인 구종은 아니라는 거다.
따아아악―!
잘 맞았고, 잘 띄우긴 했는데. 아주 살짝 빗겨 맞은 타구.
PNC 파크의 넓은 외야가 아니었다면 홈런도 기대해볼 만했겠지만,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접고 1루를 돌아 2루로 향하던 도중.
“와아아아아아아아!!!”
홈팬들이 경기장이 떠나갈 듯 환호를 보냈다.
조지도 상황을 파악한 듯했지만, 1루로 귀루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은 타이밍.
아웃카운트 두 개가 동시에 올라가며 이닝 종료.
“휴이이이이이이!!!”
그대로 뒀으면 담장에 맞고 떨어지는 장타가 되었을 타구를 훔쳐낸 파이리츠의 루키 중견수.
외야에서 내야까지 전력 질주하더니, 김희영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와 안긴다.
그러자 덩달아 김희영에게 달려드는 내야수들.
팀 내에서의 입지와는 별개로, 선수들 사이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저렇게 오버하나 했더니…….’
경험이 부족한 야수들에게 자주 호응해주고 격려를 보내며 자신감 있게 수비하도록 하는 것.
이것도 김희영의 생존 방식 중 하나였겠지.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해 좋은 타구를 만들었고. 그걸 좋은 수비로 막아낸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아쉬움을 삼키며 돌아서긴 했는데.
[오늘 콜드게임이라도 하냐? 이제 5회 초 끝났는데.]
문제는 지금이 아직 경기 중반이라는 거지.
승리가 간절했던 투수한테 선발승 요건 채워준 거야 당연히 기쁘겠지만.
아마 오늘 경기에서 김희영이 더 올라오긴 현실적으로 힘들 테고.
[근데 내가 알기로 파이리츠 불펜 ERA가…….]
‘나도 알아. 중부지구 최하위였을걸.’
선발 로테이션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 팀이, 불펜이라고 해서 특출날 거란 보장은 없지.
그나마 6회와 7회에는 주자를 계속 내보내면서도 어떻게든 실점 없이 막아낸 파이리츠였지만.
따아아아악―!
[Koo의 이 타구는! 외야 깊숙한 곳을 향해 날아갑니다! 외야수 올 스탑! See! You! LAter!!!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추고 간절한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고향 선배의 가슴에 대못을 선사합니다!]
8회 초,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맞이한 오늘 경기 네 번째 타석.
본인의 빠른 공을 과신하는 루키 투수가 안일하게 걸어온 몸쪽 승부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결과는 단숨에 경기를 뒤집는 시즌 25호 홈런이었다.
5이닝 3K 5피안타 7사사구 무실점.
제 몫을 다하고 내려왔는데도, 불펜의 방화로 김희영의 메이저리그 첫 승이 날아갔다.
[이걸 니가 불을 지르네.]
‘타자가 홈런 치는 걸 탓할 순 없잖아. 맞은 투수를 탓해야지.’
원래부터 당분간은 내 기사 찾아볼 생각 없었는데.
한동안 한국 포털사이트 쪽은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 * *
[LA Dodgers 4 : 1 Pittsburgh Pirates]
역전을 허용한 이후 급격하게 집중력을 잃어버린 파이리츠 선수단을 두들기며 승리를 챙겨온 2차전.
한국인 선수끼리의 투타 맞대결이나 김희영의 몇 개월만의 선발 등판 등, 한국의 메이저리그 팬들에게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 경기였지만.
굳이 오늘 경기의 반응을 찾아보고 싶진 않았다.
[말해 뭐 하냐. 당연히 두들겨 맞고 있지.]
선배 가슴에 대못을 막았다느니, 같은 한국인끼리 상도덕이 없다느니, 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
그딴 소리 들어봤자 기분만 잡치는데. 그냥 당분간 인터넷 끄고 사는 게 낫지.
[근데 김희영 선수도 욕먹고 있긴 하다. 얼마 만의 코리안 더비인데 피해 다니기만 하다 운 좋게 뜬공 하나 잡아낸 게 다라고.]
경기 종료 후.
김희영에게서 어제 함께 못 먹은 저녁을 오늘 함께 먹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연히 할 일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내가 첫 승을 빼앗기도 했으니, 솔직히 따로 얼굴 보면 좀 어색할 것 같긴 했는데.
베이스를 자꾸 채우는 그 정신 나간 작전의 저의가 하도 궁금해서 결국 만났다.
“아, 그거.”
생각보다 담담해 보이는 김희영은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감독님이 부탁하시더라고. 오늘 경기에서는 승패보다는 내야수들 경험 쌓는 데 집중해보자고.”
“……네?”
“2루가 채워졌을 때 땅볼 수비하면서 주자 위치 파악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
박도현이 지나가듯 했던 말. 그게 설마 진짜일 줄이야.
아무리 갖다 버린 시즌이라지만, 어떤 선수한테는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할 수 있는데.
어차피 싼 맛에 1년 쓰고 말 선수다 이거지.
“솔직히 내가 지금껏 해준 게 없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하냐? 무조건 알겠다고 하고 경기 준비하는데, 오히려 머리가 상쾌해지더라. 내가 여기까지 떨어졌구나 하고.”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남이 시키는 대로 거르긴 했지만.
더는 잃을 게 없다는 각오를 실제로 품고 던지긴 한 모양이다.
원래 감독의 계획대로라면 빠른 타구가 양산되면서 내야수들이 바쁘게 굴렀을 텐데. 그래도 경기가 정상적으로 굴러간 걸 보니.
“제구도 그렇고, 감각도 그렇고. 오늘이 거의 인생 경기급으로 잘 풀린 경기였는데. 이렇게 해서 안 되면, 그냥 안 되는 거구나 싶다.”
파이리츠 감독은 오늘 경기 김희영의 피칭을 극찬했고. 현지 언론도 호의적인 기사를 쏟아냈으니. 앞으로 몇 경기 더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본인이 간절히 원하던 첫 승은 손에 넣지 못한 김희영.
본인이 저런 생각에 빠져 있으면 앞으로 그 기회를 붙잡는 건 더더욱 어려워지겠지.
“저기, 형님.”
누구한테 형이라고 불러 본 지가 너무 오랜만이라 죽을 듯이 어색하긴 하다.
“점수 못 낸 타자들이랑 불 지른 불펜 놈들을 탓하셔야지. 왜 애꿎은 본인 탓을 하고 그러세요.”
어차피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이번 시즌.
잃을 게 없는 팀은, 잃을 게 없는 선수를 선호하기 마련인데.
이제 와서 패전 몇 경기 늘어난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러자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김희영.
“그게 니가 할 소리냐?”
그러게요.
근데 어떡하나. 칠 수 있는 코스로 공이 날아오는데.
“고맙다, 그래도.”
괜히 오지랖 부린 건 아닌가 싶었는데, 그래도 호의적으로 생각해줬는지.
조금 풀어진 얼굴로 김희영이 메뉴를 펼쳐 들었다.
“나보다 연봉 많이 받는 니가 쏘는 거지? 원래 돈 많은 사람이 형이랬어.”
그러면서 이름 앞에 프리미엄이 붙은 메뉴만 쏙쏙 골라 추가 주문하는 김희영.
내년에도 이렇게 같은 땅에서 야구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박도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랑 한국어로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원정지의 밤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