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테세우스의 배
[HeuiYeongKim_PIT]
[(사진) 이번에 좋은 인연이 닿아 친해진 LA 다저스의 현기동생과 한인식당 맛집에서^^ #맛스타그램 #열정 #소통 #구현기 #우리제법친해졌어요 #근데다음엔내가이김]
김희영은 그날 밤 나와 식당에서 함께 찍은 셀카를 자기 SNS에 올렸다.
신기하게도 그러고 나니 내 SNS에 몰려와 한국야구 선배의 간절한 메이저리그 첫 승을 날려먹었다, 뭐 이런 꼰대 같은 소리를 뱉어대던 사람들이 싹 사라졌다.
이 정도면 돈값은 충분히 했다고 봐도 되겠지. 그날 밥값 진짜로 내가 냈는데.
[(사진) (사진) (사진) 현기야 나 프로필 사진 좀 골라주라. 1번 2번 3번 중에 뭐가 제일 낫니?]
[4번이요.]
하는 김에 팔로우도 했는데.
딱히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누진 않아도, 고등학교 이후로 한국인 선수를 친구 창에 추가한 게 처음이라 좀 신선했다.
전날 밤에 이어, 3차전이 열리기 전에도 잠시 만나 대화도 좀 하고.
파이리츠 시즌권을 끊고 자주 찾아와준다는 몇몇 한국인 팬들에게 소개도 받고, 팬서비스도 해주고 하면서 훈훈한 분위기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LAD 7 : 5 PIT]
지난 시즌에 비하면 선녀가 따로 없지만, 어쨌든 여전히 기복이 조금 있는 아드리안이 점수를 좀 내주긴 했지만.
어쨌든 3차전마저 다저스가 승리를 챙겨오며, 경기장을 찾아와준 열성 팬들은 울분을 쏟아냈다.
“적당히 좀 해 처먹어라!!! 이 망할 약탈자 놈들아!!!”
“야!!! 구현기!!!”
3차전에서 나는 4타수 1안타에 그쳤지만, 두 명의 주자를 전부 불러들이는 싹쓸이 2루타를 치며 체면은 차렸다.
[스윕승 좀 챙겨 갔다고 사람을 아주 죽일 듯이 쏘아보네.]
‘야구팬들이 다 그렇지 뭐.’
경기 전 수줍게 웃으며 아들을 위한 사인볼을 받아 간 한국인 팬이, 2루에 안착한 나를 향해 절규하며 양손으로 퍽유를 날리던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파이리츠 상대로 스윕을 하며, 원정 9연전 중 6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5승 1패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NL 서부지구 순위]
1.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78승 67패)
2. LA 다저스 (77승 68패)
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69승 75패)
4. 콜로라도 로키스 (61승 83패)
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53승 95패)
‘자이언츠 놈들은 지치지도 않나. 뉴욕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동일도 없이 경기 치르면서 기어코 둘 다 위닝으로 끝냈네.’
[진짜 지옥은 다음 일정이니까 뭐…….]
슬슬 지구 우승을 확정한 팀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와중에, 유독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자이언츠와 다저스.
공교롭게도 시즌 최종전이 자이언츠전인데. 이대로라면 그때 가서야 결판이 날지도 모르겠네.
당장 지금 상대하러 가는 중인 필라델피아 역시도 지구 우승을 확정하는 매직넘버가 고작 한 경기밖에 안 남았는데.
“이봐, 8월의 투수님. 다저스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필리스 유격수께서 그쪽을 또 저격하던데. 어떻게 생각해?”
마지막 장거리 원정의 상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1차전 선발 투수는 제리 헤이즈택.
8월의 마지막 등판이었던 컵스와의 혈전에서 퍼펙트게임과 24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면서, 드디어 이번 시즌 처음으로 이달의 투수로 선정됐다.
“뭐라 그랬는데?”
“지구 우승의 제물로 써먹기엔 나쁘지 않은 투수라더라.”
퍼펙트게임의 후유증 탓인지, 지난 등판에서는 5이닝을 소화하는 데 그치면서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은 끝을 맞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개 내야수 놈이 감히 건드릴 만한 투수는 아니지.
“짖으라 해. 원래 잘 짖는 개가 사람 안 무는 법이니까.”
근데 또 저런 기세등등한 태도가 어울리는 투수도 아니긴 해.
“제리 너 지금 사람을 개한테 비교한 거야? 너무해…….”
“우리 고향집 개는 엄청 짖어대는데 사람 잘만 물더만.”
“너 이번 시즌 첫 패전이 필리스 상대 아니었냐? 어디서 입을 털어.”
팩트로 후드려 맞은 제리는 울상을 지은 채 화장실에 가겠다며 도망쳤다.
[쟤는 시즌 초에는 그래도 잘 받아치고 그랬는데, 왜 갈수록 찐따가 되어가냐.]
‘앞으로 당분간은 좀 잘해줘야겠다. 진짜 삐질라.’
[소개팅이라도 시켜주지 그래?]
‘나도 사회적 체면이란 게 있는데, 그건 좀…….’
자리에 벌러덩 누워서 제리를 저격했다던 선수를 떠올렸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
다저스가 계약금을 후려치는데도 좋다고 입단했다가 포지션 전환에 대한 갈등 끝에 트레이드됐고.
그 울분을 풀려는 듯 다저스만 만나면 펄펄 날아다니며 인터뷰로 저격을 날려대니, 상당히 만나기가 껄끄러운 선수지.
나한테는 조금은 다른 의미로도 껄끄러운 상대이긴 하지만.
* * *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전반기 맞대결에선, 나와 크리스토퍼 중 누가 올스타 유격수에 어울리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시즌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서 다시 성사된 후반기 맞대결에서, 사람들은 골드글러브와 실버슬러거 등 여러 타이틀의 주인을 가려보기 바빴다.
[개인적으로 골드글러브는 니가 훨씬 유리하다 본다.]
박도현의 말로는, 골드글러브는 스탯보다는 임팩트라고 한다.
비록 시즌 내내 풀타임 유격수로 뛴 크리스토퍼와는 달리, 나는 대타 요원이나 3루수로 적지 않은 경기를 치렀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희소한 기록인 무보살 삼중살의 임팩트는 이기기 어려울 거라나.
[근데 실버슬러거는 잘 모르겠다.]
시즌 종료까지 한 달 좀 안 되게 남은 지금, 내 타율은 0.329에 홈런은 25개.
크리스토퍼는 타율 0.314에 33개의 홈런을 기록 중이다.
남은 기간 안에 홈런 격차를 줄인다면 나한테도 가능성이 있지만.
문제는 거의 한 달을 백업으로 뛰는 바람에 타석 수에서 밀린다는 거지.
‘결국 이번 시리즈에서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하겠지 뭐.’
명예의 전당 통계에서 이런 굵직한 타이틀 보유 여부도 나름 중요하게 여겨지니, 욕심은 나긴 하지만. 크게 걱정은 안 된다.
전년도 타이틀 홀더를 상대로 만날 때 컨디션이 좋아지는 ‘왕관의 무게’의 효과를 이미 경험해봤으니까.
“안녕, Koo. 너도 나를 보고 싶었을 거라고 믿어.”
크리스토퍼 놈이 이렇게 질척대지만 않는다면, 정말 아무런 걱정 없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얼마 전 수비에서 힘들어했던 거 나도 봤어. 3루 수비 경험이 부족했을 텐데, 당연한 일이지. 만약 우리 팀이었다면 그런 일은 겪지 않을 거라고 SNS에 알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딱 그 타이밍에 계정을 압수당했지 뭐야.”
‘아마 그럴 줄 알고 구단에서 손을 쓴 거 같은데.’
[그보다 평소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메이저리거가 SNS 계정까지 뺏기는 거야?]
교통사고로 내 몸에 박도현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는 이 빡대가리.
덕분에 몸에 부담이 덜 가는 수비 노하우를 여럿 배우긴 했는데.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뭐 이런 자부심이 뚝뚝 묻어나는 그윽한 표정으로 자꾸 쳐다보는 걸 보면 진짜 패버리고 싶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준비해온 게 있지.’
[준비해왔다고? 뭘?]
통할지 안 통할지는 해 봐야 알겠지만. 내 앞에서 저 난리를 안 떨게 만들 비책을 준비해왔다.
“야, 크리스토퍼.”
“이런, 오랜만에 만나서 까먹은 건가? 나를 크리스라고 불러 달라고 했는데 말이야.”
“좋아, 크리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딱히 별 의미는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들어.”
경험상 저런 놈들은 이렇게 말해야 신경 써서 듣더라고.
“너 테세우스의 배라고 들어본 적 있냐?”
솔직히 나이 먹을 대로 먹고 아직도 중2병 환자마냥 저러는 걸 보면, 알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이놈 성격상 몰랐더라도 바로 찾아볼 것 같긴 하다.
“테세우스의 배……. 하나의 배를 구성하는 모든 판자를 새로운 판자로 바꾼다면, 그게 과연 예전의 배와 똑같은 배라고 볼 수 있느냐는 문제였지. 그런데 그게 왜…… 아니 잠깐. 설마 육체와 정신의 주인이 서로 다를 때 어느 쪽을 진정한 자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너 역시도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Park?”
“나는 Koo야, 미친놈아.”
“미, 미안하군. 그러고 보니 나는 너와 만나 설레기만 했을 뿐, 네가 정확히 어떤 상태이고 어떤 괴리를 느끼고 있는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어. 만약 육체의 기억과 영혼의 기억이 서로 부딪치고 있는 거라면…… 내가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너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거였군!”
뒤통수를 한 대 후려맞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크리스토퍼.
[쟤 뭐냐? 왜 지 혼자 질문하고 대답하고 검토까지 다 하냐?]
‘보통 저런 놈은 지들이 겁나 똑똑한 줄 알거든.’
대충 생각할 거리 하나 던져주면 지가 알아서 확대해석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어쩜 저리 예상대로 움직일까.
저놈이 2020년대 초 팬데믹 상황에서 선수 생활했으면 백신 안 맞는다고 나댔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했다, Koo. 내 배려가 부족했어. 앞으로는 조심할게.”
나는 한마디밖에 안 했는데, 혼자 이것저것 주절대다 풀이 죽은 채 홈팀 덕아웃으로 돌아간 크리스토퍼.
그게 멘탈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왕관의 무게’가 평소보다 잘 먹혔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1차전에서 4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물러난 걸 시작으로, 크리스토퍼는 시리즈 내내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Koo의 이 타구는! 시티즌스 뱅크 파크의 좌중간 펜스를 넘겼습니다! 1차전에 이어 3차전에서도 홈런을 기록하며 시즌 27호를 날린 Koo! 저 투수는 지금쯤 파업 절차를 떠올리고 있을 것 같네요! 가볍게 툭 밀어친 타구로 홈런을 만들어내면 도대체 무슨 공을 던지란 겁니까?!]
반대로 나는 3경기 모두 멀티 히트를 기록하며, 홈런 두 개를 추가했고.
30―30까지 홈런 세 개를 남겨두게 됐다.
[야, 쟤 또 너 쳐다본다.]
‘무시해, 무시.’
홈런을 치거나 까다로운 수비에 성공하는 등, 뭔가 해낼 때마다 크리스토퍼가 부담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것만 빼면 아주 만족스러운 시리즈였다.
귀찮게만 안 할 뿐이지 저딴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 똑같네.
* * *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홈팀 덕아웃.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한창 자기 팀 공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상대 선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촤아아악!
“아웃!”
상대 유격수가 슬라이딩을 감행하면서 라인드라이브 캐치에 성공했다.
손목이나 무릎이 먼저 땅에 닿는 걸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크리스토퍼.
자신이 알려준 노하우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테세우스의 배라…….’
표면과 본질.
둘 중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지금 저 선수 역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Park의 기억을 간직한들, 자신은 Koo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지.’
상대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는 크리스토퍼는, 구현기가 개인적인 고민을 자신에게 털어놓은 것이 마냥 기뻤다.
그때, 홈팀 덕아웃 쪽을 흘낏 쳐다보던 구현기와 눈이 마주쳤다.
쑥스러운지 괜히 눈을 돌리는 상대를 보며 크리스토퍼는 미소 지었다.
‘너의 본질은 숨길 수 없지만…… 그건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거겠지.’
박도현이라는 존재와 처음 맞대결을 펼쳤을 때, 평소 다저스 선수들을 상대할 때의 자신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경기 중인 박도현, 아니 구현기의 모습을 보면 사나운 맹수를 마주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크리스토퍼.
이것이야말로 그 둘의 영혼이 똑같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흐흐흐흐흐.”
그리고.
필리스의 동료들은 상대 내야진을 음침한 눈으로 쳐다보는 크리스토퍼 옆에서 조금씩 물러나 있었다.
“원래부터 이상한 놈이긴 했는데 요샌 확실히 맛이 갔어.”
“우리 팀에 미래가 있긴 할까? 저런 놈이 코어 선수라니…….”
“그럼 어떡해? 삼진당하고도 홈팬들한테 박수받는 놈은 저놈밖에 없잖아. 물론 두 번 연속이면 얄짤 없지만.”
“차라리 다저스로 트레이드해달라고 드러눕는 게 낫겠다. 저기 분위기 좋네.”
“단념하는 게 좋을걸. 다저스엔 크리스토퍼 같은 놈들밖에 없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미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인가?”
동료들이 대놓고 수군대거나 말거나.
구현기를 바라보기 바쁜 크리스토퍼의 귀에 그런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 * *
필리스와의 3연전은 2승 1패 위닝 시리즈로 끝났다.
2차전에 선발 등판한 로버트가 5이닝 3실점으로, 최근 보여준 극악의 페이스를 고려하면 꽤 선방하긴 했지만.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며 결국 패전투수가 됐다.
‘다니엘이 자기 인생에 연승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더라. 거의 울던데?’
[근데 3차전은 필리스에서 백업 위주로 출전시킨 게 좀 크긴 했지.]
필리스는 2차전 승리로 매직넘버를 완성하면서 지구 우승을 확정했고, 우리는 3개의 시리즈 모두 위닝 시리즈를 달성했으니.
서로 얻어간 게 있는 경기였다고 봐도 되겠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3차전에서 4대 12 대패… LA 다저스에 지구 선두 빼앗겨]
지옥의 원정 일정을 버티지 못한 자이언츠가 동부지구 꼴찌 말린스에게 루징 시리즈의 일격을 받으며, 다저스가 지구 1위를 재탈환하기도 했고.
“FxxK You Giants!!! 드디어 1등이다!!!”
“오늘은 비행기에서 맥주 마셔도 돼요, 로버트?!”
“누가 들으면 언제는 내 허락받고 처먹은 줄 알겠어.”
게다가 LA로 돌아가면, 장거리 원정 9연전의 피로를 달래줄 휴식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선수단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탔지만.
나는 돌아가는 길 내내 혼자서 심각한 표정으로 태블릿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작됐네.’
에이전트 데릭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박도아의 유학 생활이 알려졌을 때,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상황.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고.
[전 메이저리거 故 박도현 가족, 고인이 남긴 유산으로 호화 유학 생활 의혹]
남 좋은 일은 두고 못 보는 쓰레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