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아빠와 나(2)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언제나 바쁜 사람이었다.
육아는 어머니한테. 이혼하고 나서는 돌보미한테 맡겨 두고 평일이건 주말이건 가리지 않고 일하러 나가는 사람.
가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면 드러누워 잠이나 자고.
어린 마음에 관심 좀 받고 싶어서 찡찡대도 씨알도 안 먹히니, 다 포기하고 옆에 누워 자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아버지다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랄 것도 딱히 없고.
아버지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도 이 모양이다.
“아빠는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싸가지 없는 아이였다 싶다.
TV나 유튜브에서 영향을 받았던 건지, 아니면 항상 화목하던 박도현의 가족과 비교가 돼서 화가 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에 항상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아버지도 이때만큼은 충격이 컸는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은 없다. 대신 아들한테 돈 걱정은 안 시키는 아빠는 될 수 있어.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다 잘하겠어? 자신 없는 건 남한테 맡기는 게 낫지 않겠냐?”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취지의 말이었던 건 확실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말투가 아주 뻔뻔했다는 것도.
아무튼.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가 내 생일을 챙겨주거나, 학교에 데려다주거나, 어리광을 받아주거나 하는 그런 섬세한 보살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또 한 가지 변화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조금 집착하게 되었다는 건데.
박도현이 리틀야구단에 들어갈 거라 앞으로는 주말에 같이 놀기 힘들겠다고 하자, 야구가 뭔지도 몰랐던 주제에 당장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나도 들어갈 거라고 졸라댔다.
그게 내 야구 인생의 시작이었고.
그렇게 나는 메이저리거가 됐다.
* * *
미국에 오고 나서, 아버지에게 무언가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다.
다저스와 150만 달러의 국제 유망주 계약을 맺고 나서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으니까.
“미국에…… 오시겠다고요?”
그래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대뜸 미국에 갈 테니 직접 얘기하자는 아버지의 반응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오신다고?]
‘응. 우리 집에는 밤늦게 도착하실 것 같다던데.’
지금 여기는 다저 스타디움의 2루 베이스 위.
9회 말, 스코어 3대 3 동점에 2사 주자 2루의 끝내기 찬스.
상대의 투수 교체로 잠시 생긴 틈을 타, 박도현과 잠시 떠들며 긴장을 풀고 있다.
[너희 아버지 실행력 하나는 장난 아니다. 며칠이나 지내신대?]
‘며칠은 무슨. 하룻밤 자고 내일 저녁에 귀국하신단다.’
[아니 무슨 오자마자 가?! 그럴 거면 화상 통화로 얘기하지!]
그러게나 말이다.
나한테 상의도 없이 일정을 통보했는데, 만약 내가 원정 경기 중이었다면 어쩌려고.
[어, 야. 투수 준비 끝났다. 다시 집중해.]
경기에 집중하겠답시고 아버지한테 도움을 요청했던 건데, 정작 아버지 때문에 집중을 못 하면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짓이지.
타석에는 클레망의 타순에 대타 투입된 랜디.
2루 베이스에서 슬금슬금 멀어지면서 투수 눈치를 살폈다.
‘뭘 쳐다봐?’
투구판에서 발을 빼며 뒤를 돌아보는 투수.
2사에서, 그것도 2루도 아닌 3루 도루를 시도하는 게 흔치 않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겠지.
근데 끝내기 상황에서 주자가 2루에 있는데, 심지어 그게 시즌 30도루를 넘긴 준족이다?
견제사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는 않을 터.
촤아악!
투수가 두 번째로 뒤돌아보는 걸 확인하자마자 슬라이딩으로 2루에 귀루했다.
귀루에 대한 확신이 드는 거리를 설정하고, 그 이하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
투수를 초조하게 만드는, 주자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거리를 전혀 좁히지 않는 주자.
타석에는 장타력을 갖춘 대타.
본인이 자처한 위기도 아닌데 좀 가혹할 수도 있지만, 꼬우면 선발로 뛰었어야지.
쐐애애액!
궁지에 몰린 투수는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무기를, 그러니까 구위로 찍어누르는 걸 선택했지만.
이번 시즌 부쩍 출전 기회가 늘어나면서 스윙 메커니즘을 개선하고 있는 랜디이기에.
어지간히 살벌한 구위가 아니라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몰랐나 보다.
따아악―!
타구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더 확인할 것도 없이 홈을 향해 내달렸다.
이미 덕아웃에서 우르르 뛰쳐나오는 동료들.
[메이저리그에서 끝내기 득점을 기록했습니다.]
[1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3260]
홈베이스를 밟으며 경기가 끝나자마자 헬멧을 빼앗겼고, 사방팔방에서 생수를 뿌려대는 탓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이제 너 발 빠르다는 거 모르는 사람 없나 보다! 그러니까 저 정도 타구에도 외야수들이 수비를 포기하지!”
“이 미친놈아! 내가 투수였으면 차라리 타자 대신 네 대가리를 맞췄겠다!!”
“랜디 이 자식은 어디 간 거야?! 뭐?! 도망쳤다고?! 그럼 그만큼 Koo를 조져야지!!!”
[COL 3 : 4 LAD]
2연패를 끊어내는 한 점 차 아슬아슬한 승리.
만약 오늘도 졌다면 지구 선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격차가 더 벌어질 뻔했다.
‘이런 시즌은 또 처음이다. 진짜 사람 할 짓이 못 되네.’
끝내기 득점을 올리는 순간에는 힘든 것도 잊었는데.
퇴근할 때가 되니 힘이 죄다 빠져나가서 불린 미역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동안 투수로 뛸 때는, 그러니까 박도현이 살아 있었을 때는 항상 늦어도 9월 중순이면 지구 우승을 확정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한 게임 차이로 지구 선두가 오락가락하니 선수들도 좀 신경이 곤두서 있고.
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일주일에 4~5경기씩은 주전 선수를 총출동시키니, 체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수밖에.
[근데 너 오늘은 유독 지쳐 보인다.]
‘티 나냐?’
[어. 평소보다 20년은 늙은 것 같은데.]
여기서 20살 더 처먹었으면 벌써 은퇴했지.
‘너 학교 다닐 때 방학 마지막 날에 숙제 몰아서 한 적 있지?’
[당연하지. 12시간의 전사 모름? 원래 방학 숙제는 개학 전날 밤새 하는 게 국룰이야.]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다.’
아버지랑 평생 얼굴 안 보고 살기는 어렵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
근데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하하호호 웃으며 가까워지는 것도 힘든 일이잖아.
더구나 지금부터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하는 입장인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면서 선수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어가는데.
누가 불쑥 야구공을 내밀며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구현기 선수, 사인 좀 해주세요.”
다저스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자.
얼떨결에 공을 받아들긴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여기가 일반인 출입이 가능한 구역이었던가?
내가 별 반응이 없자,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어 모자 위에 올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서프라이즈를 이딴 식으로 하신대.
“성함이요.”
펜을 꺼내 들고 평소에 팬서비스를 하듯 이름을 물었더니.
“너네 아빠요.”
어제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던 아버지를 다저 스타디움에서 만나다니.
참 여러모로 평범한 아버지는 아니다.
* * *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입장한 건지부터 물어봐야 했으니까.
“너네 에이전트한테 부탁했지. 그랬더니 여기 직원이란 사람이 안내해주던데?”
그러고 보니 아버지한테도 에이전시 연락처가 있었지.
데릭한테서 아버지가 뭐 물어봤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다.
심지어 계약할 때도 변호사만 데려왔지, 본인은 고개 끄덕이다 사인만 했으니까.
“근데 진짜 하룻밤만 주무시고 갈 거예요?”
“어. 아빠 없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냐?”
대표가 자리를 오래 비울 수야 없겠지만.
체류 시간보다 비행 시간이 훨씬 긴 일정을 서슴없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이야, 여기가 아들 집이야? 성공했다. 미국에서 집도 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댔다.
산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본인이 좋으시다면야 뭐.
무슨 관광객처럼 들떠 있는 아버지를 보며 박도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야, 니가 하도 꺼리길래 되게 엄하거나 고집스러운 분일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은데?]
도대체 무슨 이미지를 기대했는지 모르겠네.
하긴 가장 친한 친구인 박도현조차도 우리 아버지랑 만나본 적이 거의 없다.
야구부 일정이나 진로 관련해서 면담이 꼭 필요할 때만 잠깐 들렀고, 경기장에서 내가 공 던지는 걸 지켜본 적도 없지.
내가 모르는 사이 그냥 조용히 경기만 지켜보고 갔을 수도 있지만.
“식사는 하셨어요?”
“비행기에서 실컷 먹고 왔다. 그보다 이리 와서 좀 앉아 봐.”
소파에 자연스럽게 주저앉은 아버지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이 들고 나서 바쁘다는 소리는 예전보다 안 하게 됐지만,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는 습관은 고치지 못한 모양이다.
“아빠도 오면서 다 봤다. 도현이 동생 저격하는 영상이랑, 남의 가게 찾아가서 깽판 치는 것들.”
“네, 지금보다 늘어나면 에이전트한테 계속 맡겨 두긴 힘들 것 같아서요.”
“아, 그치. 사람 호의에 계속 기대는 거, 그거 엄청 실례니까.”
박도현네 가족들의 호의에 기대서 월세 안 내고 살아온 나한테 날아와 콕콕 박히는 말이었다.
“아빠가 이쪽은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확실하다고는 못 하겠는데. 사람 하나 묻는 전형적인 수법 같다.”
“사람을…… 묻어요?”
“응. 팩트에다 정황 증거 몇 개 섞어가지고 시나리오 짜는 거. 렉카 유튜버한테 돈도 좀 뿌리고. 그러다 보면 이상한 놈들은 저절로 꼬이게 마련이거든.”
내 악플 고소 건으로도 신경을 많이 썼던 전적이 있어서인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아버지.
근데 수법이야 그렇다 쳐도, 누가 왜 이런 짓까지 하는 건지는 짐작조차 안 간다.
박도현의 가족들은 그냥 일반인인데.
[내가 뭐 크게 잘못한 거 있었나……?]
박도현도 충격받았는지 갑자기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것 같고.
“아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이 너를 노리고 이러는 것 같거든?”
당연히 그게 타당하긴 하지.
박도현이랑 달리 나는 일부 언론이랑 대놓고 척을 졌으니까.
공식 인터뷰에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기자들을 몇 번 물어뜯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더라고.
“아마도 그쪽 집안이랑 우리랑 사돈지간으로 알고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네? 아니, 그. 사돈이라니…….”
“아니었어? 아빠는 당연히 그런 줄로 알고 있었는데.”
박도현네 어머니도 그렇고,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젊은 남녀가 있으면 엮으려고 드는 게 어른들 특징인가.
[이 새끼 봐라. 너 지금 얼굴 붉혔냐? 투수 때려치우더니 이제 포커페이스도 개못하네.]
‘지금은 너까지 신경 쓸 정신 없으니까 제발 싸물고 있어.’
나를 저격하기 위해 박도현네 가족을 저격했다는 건 이해했다.
솔직히 털어서 먼지는 아버지가 더 많이 나오겠지만. 괜히 돈 많은 양반 건드렸다가는 뒷감당도 힘들 거고.
무엇보다 박도현네 가족을 건드리는 것만큼 멘탈에 타격은 안 갔을 거다.
적어도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소행일 확률이 높다는 것.
“그럼 해결 방법은…….”
“아, 해결이야 가능하지. 음주운전 같은 거 저질러 놓고 묻어달라는 거면 답이 없는데, 이건 그냥 허위사실 유포하는 것들 조져놓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마이너리그 때 기자들한테 들이받았다가 악의적인 기사가 난무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한 차례 자기가 해결해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적으로 나서는 것보다 에이전시한테 맡기는 게 유리할 것 같아서 거절했는데.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까.
“저, 그러면 부탁을 좀…….”
“그 전에. 아빠한테 뭐 할 말 없어?”
표정은 웃고 있지만 한치의 틈도 없이 단호한 말투.
먼저 언급하지 않길래 아버지도 어물쩡 넘어가려는 건 줄 알았는데.
하긴 그럴 거면 굳이 미국까지 찾아오시지도 않았겠지.
“죄송해요.”
“뭐가 미안한데? 우리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을까?”
“미국 처음 왔을 때 연락 무시한 거랑…… 한국 왔을 때도 연락 먼저 안 하고…… 회사 놀러 오라는 것도 거절하고…….”
“그리고 또?”
내 입으로 말하기에도 참 민망하고 쪽팔린 일이지만.
각오를 굳히면서 입을 열었다.
“작년에 아빠한테 쌍욕했던 것도…….”
[너 무슨 짓 하고 다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