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아빠와 나(3)
사회랑 격리되다시피 한 환경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사람이 좀 이상해지기 마련이다.
나한테는 마이너리그가 그랬다.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가 방출이나 승격, 강등으로 팀을 떠나고. 내 옆에서 어깨동무하고 웃어주는 친구가 뒤로는 내 호박씨를 까고. 하여튼 성격 버리기 딱 좋은 곳이지.
미국에 온 초기까지만 해도 영어도 잘 못 했던 나는 항상 팀에서 겉돌았고.
함께 마이너리그 생활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던 박도현은 나보다 상위 레벨에 배치됐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야구에 과몰입하게 됐던 건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도 능숙해지고, 친구도 생겼지만.
여전히 내 인생의 1순위는 야구였다.
그러니까 블래스 신드롬에 걸려 투수를 못 하게 됐다는 건, 내 인생을 통째로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야구 하는 거 힘들면 너무 힘 빼지 말고 그냥 때려치워. 정 아쉬우면 취미로 해도 되는 거고. 여기 생활 정리하고 아빠 하는 일 배우자. 응?”
재활 센터에 머물며 어떻게든 제구를 되찾으려고 매달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찾아와서 한 말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을 통틀어, 그때만큼 화가 치밀었던 순간은 없었다. 정말로. 파드리스와의 난투극에서 카일이 내 얼굴을 향해 스파이크를 들이밀었을 때보다 더.
그날 내가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던 건, 아버지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아서가 아니었을까.
“제가 그때까지 이뤄낸 게 얼마나 대단한 거고, 그걸 되찾으려고 얼마나 힘들게 애쓰고 있는지. 아빠가 그걸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서, 폭발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처음으로 대들었던 거다.
대들었다고 하긴 좀 많이 과격하게. 쌍욕을 섞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바닥에다 물건도 집어던지고. 삿대질하고.
눈물은 보였나? 잘 모르겠다. 자기 자식이 울지도 않고 그런 짓을 했다면 용서할 마음도 안 들었을 것 같긴 한데.
“아빠는 우리 아들이 영어 하나는 제대로 배웠구나 싶었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내 안의 유교맨이 최후의 브레이크를 걸었던 건지, 그나마 한국어는 아니고 영어로 했었지.
“아빠도 사람이라 솔직히 그땐 좀 서운했지. 아들 타지에서 고생하는 거 보기 힘들어서 데려오려고 했는데 그렇게 뻑뻑 소리 들을 줄 누가 알았겠어. 너무 속상해서 담배만 뻑뻑 피웠지 뭐야.”
웃기려고 하신 말씀 맞겠지?
“근데 아들이 나한텐 야구밖에 없다고 하는 거 듣고,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내가 아빠 노릇을 못 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거구나. 내가 아니라 야구에서 사회를 배우고 인생을 배우면서 그렇게 컸구나. 그랬더니 아빠도 아들 볼 면목이 없더라고.”
아버지한테 배운 게 없긴 왜 없어. 많지.
여자는 신중하게 만나야 한다는 교훈이라던가.
“내색은 안 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 많이 했다. 야구 룰도 외우고 경기도 보러 갔어. 근데 거짓말하기 싫으니까 말하는 건데, 어디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더라.”
“그럼요. 그럴 수 있죠.”
어린 시절 아버지와 아주 가끔 바깥나들이를 갈 때면 항상 축구 경기장에 갔는데, 90분이 고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축구장에 데려가는 것도, 재활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제안하는 것도, 아버지가 나를 위하는 방식이었다.
나한테는 맞지 않는 방식이었을 뿐.
“그러니까, 적어도 아들이 나를 찾을 때는 무조건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면…….”
“당연히 아빠가 힘 좀 써야지. 우리 아들한테 야구보다 더 중요한 게 생길지도 모를 일인데.”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돈과 인맥이 있으면 어지간한 일은 해결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니까.
아버지가 도와만 주신다면 금방 상황이 나아질 거다.
마지막에 뭔가 이상한 말을 덧붙인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내일 출국하기 전에 우리 예비 며느리랑도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은데. 시간 괜찮은지 네가 좀 물어봐라.”
꼭 이럴 땐 착각이 아니더라.
“저기, 제가 도아랑 사귀거나 그런 사이는 아니라서…….”
“내가 아무리 무심했어도 니 아빠인데 널 모르겠니? 정말 아무 감정이 없는데도 경기에 지장이 갈 정도로 신경을 쓰겠어?”
“며느리니 뭐니 그런 건 좀 앞서나가시는 것 같고요. 그것도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는데…….”
“그래? 그럼 아들은 마음이 있다는 거네? 아빠가 힘까지 써줄 건데 설마 이런 것도 솔직히 못 말해주는 거 아니지?”
저기, 그.
부모 자식간에 연애 얘기가 어색하긴 해도 못 할 건 없는데.
당사자의 오빠가 바로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거든요.
[그냥 딱 말해. 언제까지 질질 끌 거야?]
모처럼 분위기를 파악하고 한동안 계속 닥치고 있던 박도현이 냉큼 끼어들었다.
누구 때문에 지금까지 속으로 앓고만 있었는지도 모르고. 말은 참 편하게 하네.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던 7살 아래 여자애.
심지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옆에서 둥둥 떠다니는 친구의 가족.
연애를 너무 안 하다 보니, 괜히 별것도 아닌 행동에 나 혼자 의미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도 됐다.
만약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하면 나를 친아들처럼 아껴주신 박도현의 부모님과도 멀어질 테니.
아버지한테 대답하기 전에, 박도현을 향해 계속 미뤄둔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내가 도아랑 사귀면 어떨 것 같냐?’
박도현이 결사 반대한다고 해서 이미 품은 마음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얘한테 나는 친구고. 박도아는 동생인데.
내 마음이 어떤지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건 박도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나름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박도현은 듣자마자 코웃음부터 친다.
[니가 차이든 둘이 짝짜꿍하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빨리 결론 내고 야구에 집중이나 해라. 진짜 뒤지기 싫으면.]
하긴.
연애를 피했던 게 야구에 집중하기 위해서인데, 답이 안 나오는 생각만 계속하느라 야구에 집중하기 힘들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들이받는 게 낫겠다 싶다.
“좋아하는데요.”
입으로 뱉고 나니까 괜히 민망해졌는데.
정작 아버지의 표정은 오늘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밝다.
“그럴 줄 알았다. 내일 약속이나 잡아라. 어차피 어떻게 처리할지 얘기하려면 직접 얼굴은 봐야 할 거 아냐.”
“그래야죠. 근데 예비 며느리니 그런 소리는 진짜 하시면 안 돼요. 그쪽 마음이 어떤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아빠는 딱 보면 다 알아. 솔직히 실망했다, 아들. 학교도 다닐 만한 거리 같던데, 이미 살림 차렸을 줄 알았지.”
“아니 뭔 소리예요. 설마 연락받자마자 바로 온 게 불시 검사라도 하시려고 그런 거예요?”
“원래 기숙사라는 게 다 그런 거다. 이름만 올려두고 다른 데 사는 거지 뭐. 아빠 대학 다닐 때도 그랬어.”
“왜 대답 안 하세요? 네? 아빠?”
그날 밤.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대학 시절 연애사를 포함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눴던 모든 대화를 합친 것보다도 더 오래.
아버지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박도아한테 무어라 떠벌리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먼저 해야겠더라고.
* * *
다음 날.
구단에 연락해서 양해를 구하고 출근 시간을 조금 늦췄다.
아무리 미국이 시간 약속에 빡빡해도, 가족이 관련된 일엔 조금 융통성을 발휘해주는 편이니.
마음 편히 아버지를 배웅하러 공항에 올 수 있었다.
“고맙다, 도아야. 우리 아들이 살가운 편은 아닌데, 너랑은 자주 연락하는 것 같으니 잘 좀 부탁할게.”
“아니에요. 저야말로 이래저래 신경 많이 써주셔서 너무 감사하죠.”
오전 수업을 마친 박도아를 아버지와 만나게 해서, 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오후에는 수업이 없으니 함께 가고 싶다길래, 같이 공항으로 왔는데.
아버지는 사업을 하고 박도아는 원래부터 친화력이 좋다 보니,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엄청나게 친해졌다.
“이제 들어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네. 다음에 한국 올 일 있으면 놀러 와. 현기랑 일정 겹칠지는 모르겠는데 시간 되면 같이 오고.”
“정말요? 꼭 갈게요!”
이렇게 어영부영하다 진짜로 약속이 잡힐 것 같아 황급히 끼어들었다.
“경기는 안 보고 가셔도 되겠어요?”
바쁜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일정을 하루만 늘렸더라면 내가 뛰는 경기는 보고 가실 수 있었을 텐데.
전날에도 다저 스타디움을 찾긴 했지만, 입장을 위해 이런저런 절차를 진행하는 사이 경기가 끝나버렸으니까.
“괜찮아. 아빤 역시 야구보다는 축구가 좋더라고.”
누가 들으면 메이저리거 아들을 둔 아버지가 맞나 의심할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자기 자신한테 참 솔직한 분이시네.]
‘억지로 포장해주려고 안 해도 된다.’
박도현네 남매한테 조금 복잡한 부자 관계를 낱낱이 들키기는 했지만.
포스트시즌을 앞둔 이 중요한 시기, 머릿속으로 어지럽히는 고민거리를 덜어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물론 미뤄둔 고민이 아직 하나 남긴 했지만.
아마 조금 있으면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방향으로든.
“나 인터넷에서 욕먹는 게 그렇게 신경 쓰였어?”
다시 각자 학교와 구장으로 돌아가는 길.
조수석에 탄 박도아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다 아니까 얼른 말하라는 태도로.
“너희 부모님이 지금껏 월세 없이 살게 해 주셨는데. 그 정도 은혜는 갚아야지.”
“진짜?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지금까지는 이럴 때 화제를 돌리면서 도망쳤지만.
“있는데. 있으면 안 돼?”
그러자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는 박도아.
평소엔 흘려넘기던 내가 갑자기 진지하게 받아주니 당황한 걸까, 아니면 부끄러워하는 걸까.
공항을 빠져나가려는 차들로 정체되고 있는 지금.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엔 가장 좋은 타이밍이겠지.
“도아야.”
“어?! 왜?!”
분위기 잡으려는 걸 감지하기라도 한 걸까.
박도아가 평소보다 좀 과장되게 반응한다.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많이 되더라. 이번처럼 아버지가 계속 미국에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어…… 그치.”
떨리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박도아와 눈을 마주치면서.
지금까지 품어둔 감정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법적으로 가족이 되면, 이런 개인 신상 문제를 에이전시한테 맡길 수가 있거든. 선수 복지에 포함이 되어 있어서. 우리 에이전시는 한국 지부도 체계가 잘 잡혀 있어서…….”
주절주절 떠드는 동안 박도아의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식는다.
심지어 룸미러 너머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박도현까지도.
둘이 이목구비는 하나도 안 닮았는데, 둘이 짓고 있는 표정만 보여주면 남매라는 걸 바로 알겠네.
“오빠 혹시 지금 그걸 고백이라고 한 거야?”
[넌 앞으로 제리한테 모쏠이라고 놀리지 마라.]
그렇게 구린가?
나름 밤늦게까지 머리 싸매면서 떠올린 멘트인데.
만약 그랬다면 이쪽으론 재능이 없는 게 분명하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을 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도 듣기 좋게 말해주는 남자는 될 수 없다, 뭐 이런 거지.
“기회 한 번 더 줄게. 좀 전처럼 이유 같은 거 덕지덕지 붙이지 말고. 오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나랑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지만 간단하게…….”
“사랑해.”
어차피 변화구도 못 던지는 몸이겠다, 바로 풀파워로 직구를 던져버렸다.
그러자 말문이 막힌 듯 조용히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박도아.
“나도…….”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들었다.
앞선 차들의 정체가 해소되자, 차를 몰아 공항을 빠져나갔다.
각자의 학교와 일터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우리의 관계에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