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마운드(1)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날.
아버지는 이번 일에 딱 맞는 사람을 구했다며 연락해왔다.
[믿을 만한 사람 같다. 전부터 아들에 대해 좋은 글도 많이 올려주고. 악성 게시물 같은 것도 증거 싹 다 수집해서 대가도 안 바라고 에이전시에 넘겨주던 그분이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묻어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예전에 한국 포털사이트에 잠깐 접속했다가 ‘현느님’ 어쩌고 하는 찬양글이 있길래.
이런 등신 같은 별명이 붙은 사람이 있구나 싶어 클릭했는데, 내 사진이 떡하니 박혀 있더라고.
[현느님 콧날에 베이면 최소 중상이니까 벤클 참여 못 하게 해야 한다고 그랬던가?]
‘닥쳐.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 죽여버린다 진짜.’
그 사람이랑 동일 인물인지는 모르겠는데,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그 정도로 집요한 사람이 최소 한 명은 더 있다는 거 아냐.
[(팩트주의) 박도현 가족 이민 논란 관련해서 팩트만 정리한다.]
└ 세줄요약좀
└ 1. 박도현 부모 이민 계획 없음 2. 박도현 동생 미국 주립대에 기숙사 들어감 3. 손가락 뒀다 국 끓여먹을 거 아니면 나머진 니가 검색해라
└ 아니 근데 왜 기숙사 들어갔지? 박도현 선수 살던 집 있지 않나? 이미 팔았나?
└ 거기 구현기가 아직 살고 있을걸?
└ 구현기? 킹갓제네럴충무공마제스티와퍼주니어현느님이 니 친구냐?
└ 얘 또 이러네
└ 누가 농약이랑 화염방사기 좀 가져와봐
아버지가 고용했다던 그 사람은 확실히 능력이 있었다.
팩트를 알기 쉽게 적어놓는 한편, 만약 여기 반박하면 유명인에게 질투나 하는 찌질이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게시글을 여러 가지 레퍼토리로 만들어 뿌려댔더니.
온라인상의 여론이 박도아나 부모님께 우호적인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유튜브 문제도 생각보다 깔끔하게 해결됐네.]
‘썸네일에 도아 얼굴이 쫙 깔린 거 보니까 좀 쫄리긴 했는데, 다 조그만 채널들이어서 다행이야.’
애초에 대형 유튜버들은 소위 ‘역풍’을 맞을 게 뻔해 보이는 화제에는 말을 얹지 않는다나.
대신, 다른 유튜버가 역풍을 얻어맞겠다 싶으면 그 즉시 물어뜯는 거고.
규모가 적당하고 입이 무거운 몇몇 채널에 명백한 팩트로만 구성된 반박 영상을 의뢰하면.
그걸 본 대형 채널들도 증거를 더 모아서, 박도현네 가족들을 물어뜯은 유튜버를 저격할 거라던데.
정말 놀랍도록 예측한 그대로 상황이 흘러갔다.
“최근 이슈가 되는 사건이 있죠. 메이저리거 가족이 죽은 아들 유산 들고 미국으로 튈 거라느니, 뭐 이런 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X신들이 X신 짓 했다고…….”
“본인이 셀럽이라고 자랑하기는커녕 아예 SNS 계정도 없는 일반인인데, 이런 사람 저격해서 조회수 빨아먹으려는 쓰레기들은 사라져야…….”
“저격 내용 보세요. 유산을 사회 환원할 생각도 안 하고 외국으로 튄다는 건데. 일단 유산 가지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X나 실례고. 또 어차피 그 재산 다 미국에서 벌어온 거 아닙니까? 그냥 돈 많은 사람들 부러워서 개소리하는 거…….”
온라인상의 여론을 주도하는 대형 유튜버들까지 나서자, 적의를 보이는 글은 자취를 감추었다.
[‘故 박도현 유산 사회 환원하라’ 1인 시위자, 각종 허위 사실 유포 전과자로 밝혀져]
박도현네 가게에서 진상짓을 하던 1인 시위자는 신상은 물론 과거 행적까지 싹 다 유출되며 나락길을 탔다.
두 분도 가게가 잘되다 보면 진상이 꼬이기 마련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고.
가장 먼저 악의적인 기사들을 양산하던 놈은 아직 잡히지 않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나.
그렇게 진행 상황을 전달받고, 감사 인사도 드릴 겸 아버지에게 연락했더니.
[이번에 도와준 그 친구가 아들을 진짜 많이 좋아하더라고. 혹시라도 한국 들어오면 만나볼 수 있는지 간절히 부탁하는데, 일단 물어는 보겠다고 했지.]
반박 게시물을 퍼뜨리고, 이슈 채널에 영상을 의뢰하는 맞불작전을 제안하고, 박도현네 가게를 찾아간 미친놈의 신상도 캐내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는 그 사람.
당연히 고맙고. 심지어 내 팬이라는데. 잠깐 시간 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거 꼭 지금 대답해야 돼요?”
[당장은 괜찮지. 왜, 시즌 끝나도 미국에 좀 더 남아 있게?]
“아뇨, 그건 아닌데.”
내 사진을 가져다가 현느님 어쩌고 하며 주접 싸는 글이 갑자기 떠올라서.
아니겠지? 그럼. 아닐 거야.
세상에 또라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우연이 어디 있겠어.
* * *
한국에서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와 박도아.
물론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온 건 아니지.
아버지를 배웅하고 오는 길에 내가 박도아에게 고백했고. 박도아가 받아들였으니까.
하루아침에서 소꿉친구에서 연인으로 관계가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
박도아는 유학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고. 나는 9월이 다 가도록 지구 1위를 확정짓지 못한 메이저리거니까.
“Koo, 오늘도 수고했어. 여자 없는 남자들끼리 가볍게 한잔하면서 내일 경기 얘기나…….”
“미안, 제리. 나 바쁘다.”
“뭐야, 여자라도 생겼어? 하긴 그럴 리가 없지. 너는 야구밖에 모르는데. 저기 근데 Koo, 왜 대답 안 하고 그냥 가는 거야? 응?”
그나마 달라진 점이라고 하면, 경기 끝나고 핸드폰에 감자탕 사진이 도착해 있는 날이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집에 가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오빠.”
“어, 왜?”
“그냥 불러봤어.”
박도아의 거리감이 부쩍 가까워졌다는 것.
저녁을 먹을 때도 마주 앉는 게 아니라 나란히 앉게 됐고.
밥 먹고 커피 마시며 한숨 돌리는 지금은 아예 무릎 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오빠는 나랑 결혼 생각하면서 만나는 거야?”
“어? 그건 갑자기 왜…….”
“갑자기라니. 법적으로 가족이 되면 선수 복지 혜택을 본다느니 하는 얘기는 오빠가 먼저 꺼냈으면서.”
박도현의 가족들을 향한 관심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다길래, 공개 연애는 잠시 미뤘는데.
그 탓인지 둘만 있을 땐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좀 있다.
“당장은 아니라도 어쨌든 그런 생각이 없진 않다는 거잖아.”
“당연하지. 근데 너 아직 스무 살이잖아.”
“말 잘했네. 나 이제 스무 살이야. 어린애 아니라고. 내가 왜 이러는지 진짜 몰라서 그래?”
모르면 알게 해주겠다는 듯, 박도아의 손이 내 옷깃 속으로 파고든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지만.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고 말았다.
“아, 미안. 저기, 그…….”
솔직히 나도 미치겠다.
마음은 다 확인했고.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일만 남았지.
근데 이 집엔 박도현이 있단 말이다.
“아냐. 오빠가 전에 그랬잖아. 나랑 여기서 함께 있으면 박도현 생각 때문에 마음이 좀 복잡하다고,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다정한 박도아의 말에 양심이 콕콕 찔린다.
사실 나도 복잡한 건 마찬가지긴 한데, 진짜 심각한 건 박도현이지.
박도아가 찾아오는 날이면 아예 운동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니까.
여동생의 애정 표현을 보면 본능적으로 비위가 상한다나 뭐라나.
“근데 오빠…….”
박도아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내 얼굴을 기습적으로 끌어당겼고.
이윽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기습.
시속 150km가 훌쩍 넘는 안타성 타구도 잡아낸 적 있지만, 아무튼 못 한 거다.
내가 멍 때리는 동안 박도아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더니.
“나 10년 넘게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게 할 거야?”
내 인내심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얘가 진짜, 운동선수 스태미너를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박도현이고 나발이고, 여자친구가 이러는데도 내버려 두는 놈이 있으면 거기를 떼 버려야 한다.
“꺅……!”
바로 들어다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박도현, 이리콤.’
부르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생각하면, 방음벽 너머로도 박도현에게 내 목소리가 닿는다.
똥 씹은 얼굴로 날아오던 박도현은, 지금 우리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가.
체념한 듯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2층 올라오지 마. 아까 그 방에서 아예 나오지 마. 진짜 뒤지는 수가 있다.’
[대가리에 총 맞았냐?]
지금 박도현의 기분을 내가 전부 알지야 못하겠지만.
아버지의 그렇고 그런 모습을 목격한다고 생각하면…….
어우,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흥분 가신다.
[너야말로 혹시라도 중간에 나 부르지 마라. 니들 하는 짓거리 조금이라도 나한테 들리는 순간 진짜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뭐래. 이미 죽은 놈이.’
박도현한테 생각을 전달해서 대화하는 방식이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혹시라도 나도 모르게 그…… 도중에 내 의지랑 상관없이 연결(?)될까 불안하긴 했지만.
그런 불안은 잠시 접어두고, 박도아를 품에 안은 채 2층으로 올라간 지 몇 시간 후.
“하핫…….”
“왜, 오빠?”
“그냥, 행복해서.”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쓸어주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연결은 개뿔.
눈에 들어오는 게 얘 하나밖에 없던데.
운동방에 처박혀 있을 박도현 따위 신경도 안 쓰이더라.
“오, 오빠? 나 이제 힘들어…….”
“잠깐만.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
현자 타임이라기엔 행복으로 가득한 순간이지만.
그래도 박도현 얼굴을 다시 보기엔 용기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이러고 있지 뭐.
* * *
박도아가 대학 기숙사에서 살게 된 후,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외박을 하고 난 다음 날.
꿈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다저 스타디움을 찾았는데.
“Koo,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설마 여자랑…….”
메이저리거들은 경기장에서 선보이곤 하는 놀라운 직감을 뜬금없는 타이밍에 발휘하곤 하는데, 지금이 딱 그렇다.
클레망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길 타이밍을 놓치면서, 잠깐 위기가 찾아왔지만.
“못 들었어요? 얼마 전에 Koo 아버지가 잠시 미국 왔다 가셨다잖아요.”
“아, 그랬구나. 한국 사신다고 했었지?”
“우리도 시즌 중에 부모님 얼굴 보기 힘든 건 마찬가지긴 한데, Koo만 하겠어요?”
제리가 평소처럼 헛다리를 짚어준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저 모쏠도 도움이 되는 날이…… 아, 이거 가지고 놀리지 말라 그랬지.
[오늘은 몸 좀 가볍게 풀어라…….]
‘왜?’
[어제는 경기 끝나고도 신체활동을…… 아니, 아니다. 빡세게 풀어. 풀다 죽어 그냥.]
묘하게 수척해 보이는 박도현.
전날 일을 조금이라도 연상시키는 표현만 나오면 저렇게 급발진하더라.
약점을 쥔 것 같긴 한데, 아무리 얘랑 절친이라도 이건 선 넘는 것 같아서 자제 중이다.
아무튼 박도현의 말대로 가볍게 몸을 풀고,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남은 피로감을 해소하려 애쓰면서 경기에 임했는데.
따아악―!
[1루수 키를 넘기는 타구! 페어! 우익수가 황급히 쫓아갑니다! 그사이 조지 라모스는 홈인! Koo는 2루에 여유롭게 들어가며 1타점 적시 2루타! 다저스가 1회부터 선취점을 만들어냈습니다!]
1회 말 첫 타석부터 2루타를 치면서, 거의 열흘 가까이 휴업 중이었던 장타를 만들어냈고.
한 번 물꼬를 튼 타격은 이어지는 타석에서도 여전했다.
따아아아아악―!
[타석엔 Koo! 가운데로 몰린 공을 제대로 끌어당겼고! 투수는 눈을 질끈 감았으며! 야수들은 타구를 외면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See! You! LAter!!! 시즌 28호 홈런! Hyun! Ki! Koo! 이제 작년까지 투수였던 이 선수가 30―30을 달성하기까지 단 두 개의 홈런만이 남아 있습니다!]
상대의 실투를 받아쳐 승부에 쐐기를 박는 쓰리런까지 만들어냈으니까.
[ARI 2 : 7 LAD]
다저스가 이기고, 자이언츠가 지면서 다시 공동 선두로 올라간 오늘 경기.
MVP 인터뷰에서 흥이 오른 나머지 나도 모르게 박도아를 언급할 뻔했던 걸 빼면 완벽한 하루였다.
‘도아는…… 기숙사 들어갔네.’
[아주 여친 생겼다고 벌써부터 관리하는 거 보소.]
한인 동아리 모임이 있다던 도아는 이미 기숙사에 들어왔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당연히 믿음이 있고. 구속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아주아주 조금 불안하긴 했는데.
입학 전 가이드를 맡아준 선배와 같은 동아리라는 걸 듣고 마음을 놓았다.
“저기, Koo. 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려던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 이는, 오늘 경기 선발 출장한 백업 포수 브레이든.
“잠깐 상담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지금 바쁘시면 나중이라도 잠시 시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집에서 도아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볼 것도 없이 내뺐겠지만. 오늘은 그런 것도 아니고.
[얘 이대로 두고 가면 꿈자리가 좀 뒤숭숭할 것 같은데……?]
애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여서, 얘기라도 좀 들어봐야겠다 싶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다른 타자들이 방망이에서 불을 뿜으며 상대 투수들을 괴롭힌 가운데, 유일하게 무안타로 침묵한 걸로도 모자라.
실책까지 두 개 적립하면서 경기를 완전히 말아먹었으니까.
“그래, 뭐. 일단 장소를 좀 옮길까?”
그렇게 상담 요청을 받아들인 지 대략 한 시간 후.
‘뭐지.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쩌다 보니, 나는 연습용 마운드 위에 올라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