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마운드(2)
“사실은 제가 요즘 수비 때문에 고민이 많아서 말입니다.”
브레이든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느냐는 말이 튀어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근데 맞잖아. 배터리 코치도 있고. 하다못해 헨리한테 물어보던가.
“코치님께 여쭤봐도 지금은 괜찮다고만 하시고, 헨리는 Koo가 수비 전문가니까 가서 물어보라고 해서…….”
“수비 전문가? 헨리가 그랬다고?”
“예. 1년도 안 돼서 내야 수비를 그만큼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어떤 포지션이든 잘할 거라시던데요.”
헨리 이 자식을 그냥.
선배 포수로서 잘 좀 다독여줄 수 있는 걸 나한테 보내고 있어.
“구체적으로는 뭐가 문제인데?”
“사실 총체적 난국입니다. 수비할 때 집중력도 떨어지고, 자꾸 실수가 나오니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뭔 소린가 했더니.
이건 배터리 코치 말대로, 지금은 걱정할 필요 없는 문제다.
[얘 오히려 되게 잘하고 있는 편 아닌가? 나 신인 때만큼은 아니지만.]
‘꼭 그딴 소리 덧붙여야겠냐?’
유망주가 빅리그에 안착하려면, 어느 정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한데.
적어도 지금 브레이든의 수비는 갓 콜업된 포수에게 요구되는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요새 몇 경기 삽질하는 거야, 한 경기 승패에 지구 1위가 왔다갔다하니 긴장해서 그러는 것도 있고. 체력 이슈도 있을 테니 이상하진 않지.
[어쩌게? 포수 수비 관련해서 니가 해줄 말 있어?]
‘당연히 없지.’
그래도 방황하는 유망주에게 무조건 통하는 마법의 말은 있다.
“어차피 너 아니면 당장 쓸 사람도 없어.”
당장 좀 못해도 마이너로 내려갈 일은 없으며, 내려가더라도 팀이 널 핵심 자원으로 보고 있으니 영영 거기 처박혀 있을 일은 더더욱 없다.
여기에 내야 수비에 적응하는 과정과, 그립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입스 초기 증상을 극복했던 내 경험을 섞어서.
영양가는 없지만 듣기엔 좋은 격려를 해줬더니, 브레이든은 금세 기운을 되찾았다.
“감사합니다, Koo!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너는 연습 좀 더 하다 가게?”
“예! 오늘 블로킹 실수한 게 있어서요. 피칭캠으로 타이밍 좀 점검해보려고 합니다.”
자기가 약한 부분을 콕 집어 보완하려는 성실한 모습.
처음 콜업된 날부터 배터리 코치가 애지중지하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화구 받으면서 연습 좀 해볼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말을 던졌다.
헨리한테도 그렇고. 다른 타자 놈들한테도 비슷한 제안을 해본 적이 있고.
어디 대가리 뚜까질 일 있냐며 다들 기겁하길래, 브레이든도 슬금슬금 물러날 줄 알았는데.
“정말이세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어라.
이게 아닌데.
[아까 인터뷰에서도 입 간수 못 할 뻔하더니, 이런 식으로 사고를 치네.]
어영부영하는 사이 시설 관리자에게 실내 불펜 사용 허가를 받고. 라커룸에서 글러브를 꺼내 오고. 스트레칭까지 마치고는 연습용 마운드에 오른 나를 보며 박도현이 혀를 찼다.
‘보통 이럴 땐 사양하지 않나?’
[쟤도 보통 놈은 아닌가 보지.]
막상 여기까지 오니, 기대에 가득 찬 브레이든을 봐서라도 빼질 못하겠다.
어차피 많이도 아니고. 이것저것 섞어서 10개만 맛보기로 보여주기로 했으니.
‘심지어 좌완 글러브도 아니야.’
예정에 없던 상황이었으니 당연하긴 하지. 공 10개 던지자고 남의 글러브 빌려올 수도 없고.
평소 쓰던 내야수용 글러브를 왼손에 끼고, 브레이든이 내는 사인을 쳐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가운데, 커브.
어차피 사인은 장식이나 마찬가지지.
미트만 보고 던져도 아무렇게나 날아갈 거다.
오른손으로는 그나마 왼손보다 정확도가 높았다고는 해도, 폐급이라는 건 매한가지.
포수를 바라보며 와인드업.
이번엔 과연 어디로 날아갈까, 박도현이랑 내기라도 할 걸 그랬나, 뭐 이런 시시콜콜한 생각이나 하며 팔을 휘둘렀는데.
‘어……?’
공이 빠져나가는 순간, 손끝에 느껴진 익숙한 감각.
그리고는.
퍼엉!
경쾌한 소리와 함께 미트에 틀어박힌 공.
그리고, 브레이든은 미트를 제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을. 변화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던졌다는 거다.
“잠깐만.”
[잠깐만.]
아니 박도현 너는 뭔데 잠깐만이래.
눈알이 핑핑 돌아가고 있는 박도현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당황스러울 따름이지만.
일단 쿵쾅대는 가슴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면서, 브레이든을 불렀다.
“같은 코스로 몇 개만 더 던져볼게.”
좀 전처럼 미트를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잡아내진 못했지만, 포수가 요구하는 코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커브볼들.
“이번엔 존 아래로 확 떨어지게 던질 거야.”
좀 전과 비슷하게 날아가나 싶더니, 궤적을 바꿔 미리 낮춰둔 브레이든의 미트에 틀어박히는 공.
던지면 던질수록, 맨 처음 느꼈던 손끝의 감각이 점점 되살아나고 있다.
투수 시절 공을 던질 때의 그 감각.
“브레이든.”
“예, 옙.”
슬슬 자기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깨달은 듯,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브레이든.
“지금 불러올 타자 있을까? 타자 눈에도 지금 나랑 비슷하게 보이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그래.”
“어, 그. 조나단이라면 아직 있을 겁니다.”
잠시 후, 남아서 타격 연습을 하던 조나단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Koo가 커브를 던진다고요?”
유인구성 커브를 던지면서, 존에 들어오는 공을 생각하고 배트를 휘둘러보라고 주문했는데.
번번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붕붕 돌아가는 배트.
타자를 속여넘기는 최소한의 조건은 갖췄지만. 이것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렵다.
더 객관적으로 판단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Koo가 존 안에 들어오는 커브를 던진다고?!”
투수 코치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더니, 퇴근길에 차를 돌려 한달음에 찾아와줬고.
피칭캠과 스피드건 등 여러 장비를 설치한 뒤 다시 공을 던졌고.
“Koo가 변화구로 스트라이크를 잡는다고?!”
투수 코치가 불렀는지, 허둥지둥 합류한 감독님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지시에 따라 지금껏 구사해왔던 여러 변화구를 다양한 코스로 꽂아 넣었다.
실내 불펜 특성상 포구음이 커서 공의 위력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스피드건으로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구속을 보며 그 역시 확인할 수 있었고.
“Koo의 블래스 신드롬이 나았다는 게 정말인가?!”
결국 단장님까지 찾아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이 시점에서 어지간한 불펜 피칭 이상으로 공을 던진지라 추가 투구는 없었고.
지금껏 보여준 투구의 영상 자료와 데이터를 놓고 이런저런 논의가 이어진 끝에.
“그러니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우리 팀의 선발 투수를 주전 유격수로 바꿔버린 블래스 신드롬이 완치되는 순간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루키 포수의 블로킹 훈련을 도와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 * *
블래스 신드롬의 원인과 치료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병은 근본적으로 정신병이다.
그래서 최근 심경의 변화가 일어날 만한 일들이 있었는지 떠올려봤는데.
‘너무 많은데?’
바로 옆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던 박도현과 유령으로나마 재회했던 것도 멘탈 회복에 큰 도움이 됐고.
원래부터 좀 서먹하다가 작년엔 크게 싸우기까지 했던 아버지랑도 사이가 좋아졌지.
게다가 내야수로서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으며, 다시 수많은 팬들과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은 것도 한몫했을 거고.
그리고 어젯밤에는…… 음.
[너 그 표정 뭐냐? 무슨 생각 했어?]
‘아니, 그냥.’
평생 받아본 적 없는 무한한 애정을 받았지.
사랑의 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지도.
아무튼, 이번 시즌은 나와 내 주변에서 정말 커다란 변화가 수도 없이 일어났는데.
그 일부, 혹은 전부가 영향을 준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어쨌든.
단장님은 완치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완치는 아니다.
정작 왼손으로 공을 던져봤더니, 몇몇 공은 내 의지랑 상관없는 괴상한 무브먼트를 선보였거든.
물론 예전에 비하면 선녀라는 건 마찬가지지만.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정확한 게 참…….”
“올 한 해 오른손으로만 던져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좌완투수 출신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했는데.
아무래도 오래 해왔던 만큼 구위 자체는 왼손이 더 낫지만, 제구가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건 밸런스 문제일 거다.
내 몸은 가장 먼저 뽑았던 재능 ‘체력은 근력’의 영향으로 타격에 최적화되어 있다.
예전 투구폼 그대로 공을 던진다면 투구 밸런스를 처음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구속은 또 어떻게 개선된 거지?”
우완투수 전향을 처음 시도했을 때 패스트볼의 위력이 너무 떨어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오른손으로 던진 패스트볼의 회전수도 왼손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회복된 상태.
아마도 내야수로 뛰는 동안 오른손으로 공을 던지는 경험이 축적된 덕분이 아닐까 싶다.
“Koo. 혹시 이번 시즌 동안 이런 식으로 틈틈이 투구 연습을 했었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처음엔 투수에 대한 미련이 생길까 봐 의식적으로 피했는데.
시즌에 돌입하고 나서부터는 순전히 바빠서 그럴 시간이 안 났지.
당장 할 일이 태산인데 투구 연습할 시간이 어딨어.
“가비지 이닝을 야수한테 맡기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Koo한테 맡기지는 않았죠.”
이미 승패가 확정된 거나 다름없어, 몇 점을 내주든 상관없는 가비지 이닝.
사실 이번 시즌 다저스에도 그런 상황이 없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던 내 사정 때문인지, 감독님이 내게 투구를 지시한 적은 없다.
“그러면, Koo.”
단장님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나? 다시 투수로 돌아가고 싶나?”
단장님의 그 한마디에, 어깨에 쌓인 피로만큼이나 묵직한 현실이 느껴졌다.
숨죽인 채 내 대답만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박도현.
이 거지 같은 병에 걸리고서부터 이 순간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모른다.
다저 스타디움의 마운드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공을 뿌리는 내 모습을.
그렇지만.
“아뇨, 다시 투수로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가지 못하는 거다.
제구가 돌아오긴 했지만, 다시 예전 수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 시간을 거쳐 투수로 돌아간다 한들, 지금만큼 임팩트 있는 활약을 보이기도 힘들겠지.
물론 블래스 신드롬에 걸리기 전의 나는 괜찮은 투수였다.
빅마켓 팀의 3선발을 맡았고, 사고 없이 커리어를 이어갔더라면 FA로 한몫 제대로 챙길 수도 있었겠지만.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만한 재능은 없다.
‘니가 나 명전 보내준다면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하면, 박도현을 만나고서부터의 기억은 전부 사라진다.
아버지와 화해했던 것도. 박도아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도.
[보내주는 게 아니라, 같이 가는 거지.]
그거나 그거나.
내가 원래 지니고 있던 타격 재능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적어도 박도현의 재능을 무의미하게 썩힐 정도로 구데기는 아닌 모양이니까.
“그렇단 말이지…….”
사람들의 표정에 아주 약간의 안도감이 스쳐 지나간 것만 봐도, 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겠다.
하긴 이 사람들로선 당장 30―30이 코앞인 유격수가 갑자기 투수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아득해지겠지.
내년 시즌 구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테니까.
“대신 투수를 아껴야 할 때 제가 올라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앞서 언급했듯, 가비지 이닝을 처리하려고 마운드에 야수를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 정도로 점수 차이가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필승조를 쓰기는 좀 아까운, 대략 5~6점의 차이.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도대체 내년 연봉을 얼마나 받아내려고 이러는 거지?”
단장님이 탄식한다.
이번 시즌 이후엔 마지막 연봉조정이 예정되어 있고, 내년 시즌이 끝나면 FA.
주전 유격수에 추격조 불펜까지 맡아줄 수 있는 선수에게 설마 돈을 아끼기야 하겠어.
연봉협상을 준비하고 있을 데릭의 머리가 쌩쌩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 * *
경기를 치르고 나서 투구까지 소화한 여파로 다음날 경기는 벤치를 지켰는데.
나뿐 아니라 백업 내야수를 대거 출전시켰는데도 승리를 가져오긴 했지만, 내 결장이 워낙 뜬금없어서였는지 여론은 들끓었다.
체력 이슈가 발생했다느니, 정밀검사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느니, 아주 잘도 떠들어댔지.
내 블래스 신드롬이 호전되었다는 것과, 다시 마운드에 올라갈 수도 있다는 건 당장은 밝히지 않기로 합의했다.
실전에서 어떻게 될지는 직접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일이니,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파앙!
“스트라이크! 공 좋습니다!”
그 배려에 힘입어, 나는 출근 시간을 조금 앞당기고 훈련 세션에 피칭을 추가했다.
왼손으로 공을 던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오른손으로 진행한 훈련.
몇몇 베테랑들이나 입 무거운 선수들에게만 알릴 정도로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우완투수로서의 데뷔전을 위한 세부 조정을 거쳤고.
“Koo, 몸 푸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에 등판 기회를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