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09화 (109/200)

109. Good bye, Badass(1)

[Koo, 마운드로 돌아오다!]

파드리스와의 1차전.

9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나는 우완투수로서의 데뷔전을 가졌고, 삼진 하나를 포함해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쳤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두 팔을 번쩍 치켜드는 순간을 찍은 사진이 MLB 공식 홈페이지의 대문을 장식한 건 물론이다.

‘제리 퍼펙트 할 때 2루타 치고 나서 처음이니까, 한 달쯤 된 것 같다.’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네.]

다시 투수로 복귀하는 날, 인터뷰에서 울어버리는 건 아닌가 막연히 상상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초구를 던지기 직전이 가장 떨렸고. 오히려 그다음부터는 원래 하던 대로 페이스를 배분해가며 던질 수 있었지.

경기가 끝나고 나서는 쏟아지는 질문을 감당하느라 감상에 젖어 있을 틈조차 없었고.

[너네 Koo 인터뷰 영상 봤냐? 제구 안 되는 변화구로 블로킹 훈련을 도와주려다 블래스 신드롬이 나았다는 걸 발견했단다. 착한 마음씨에 감동해서 신이 축복이라도 내려준 거야, 뭐야?]

└ 나 Koo 좋아하긴 하는데, 이건 너무 컨셉을 빡세게 잡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 작년까지 투수였던 선수가 지금 28홈런 유격수가 된 건 말이 되고?

└ 니들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이제 Koo가 마운드에서 변화구를 던질 수 있게 됐다는 건 팩트야, 친구들.

└ 진짜 팩트는 다저스가 이제 X 됐다는 거지. 너네 제리 헤이즈택이랑 Koo 두 명 다 잡을 수 있겠냐?

└ 그렇다면 저희 컵스!

└ 너네 크리스토퍼 인터뷰 못 봤냐? 필리스와 Koo는 운명이라고.

└ 양심 있으면 내년에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해서 몇 달만 쓰게 해주라. 우리도 사람다운 유격수가 경기 뛰는 것 좀 보자…….

└ 어휴, 평생 양심 쓸 일 없을 것 같아서 얼마 전 급매로 넘겼는데. 남아 있었음 큰일 날 뻔했지 뭐야 : D

이번 등판을 준비하게 된 사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역시나 진위여부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분위기.

그거야 상관없는데. 내가 변화구를 던지는 걸 가장 먼저 목격했다는 브레이든이 느닷없이 관심 폭격을 받은 건 좀 미안했다.

랜디나 조나단 같은 관종들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Koo의 투수 등판, MLB 각계에서도 ‘갑론을박’… 앞으로의 행보는?]

이번 등판이 일회성으로 그칠 것이다, 투수로 재전향할 것이다, 투타겸업을 시도할 것이다 등등.

업계 종사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쏟아내는 가운데.

평소 안면이 있는 몇몇 선수들은 직접 연락해오기도 했다.

[현기야, 마음고생 진짜 많이 했을 텐데 너무 잘됐다. 지금보다 더 꽃길만 걷자^^ ― 김희영]

[Koo, 소식 들었어. 솔직히 부담이 크지 않을까 걱정되긴 하지만, 네가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선택이라고 믿어. 좋은 플레이를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오지랖 좀 부려 봤는데, 주제넘었다면 미안. ― 앤드류 매닝]

오랫동안 나를 괴롭힌 병의 호전을 축하해주거나, 유격수 수비와 투수 등판을 병행하는 걸 걱정해주는 등.

상식적인 연락을 보내온 선수가 있는가 하면.

[그래. 이것이 네가 선택한 ‘Koo’라는 거네. ― 크리스토퍼 엘리엇]

이딴 메시지를 남겨놓은 놈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아들, 그러면 이제 공 던지는 거랑 치는 거 둘 다 하는 거야? ― 아버지]

야구라는 게임을 아주 단순하게 보고 있는 아버지의 연락이었다.

사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인터뷰에 몰려든 기자들도 캐물었던 거긴 한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저는 타자 전향을 결심했을 때, 두 번 다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2020년대 초, 선발 투수 겸 지명타자라는 정신 나간 짓으로 MVP를 받은 일본 출신의 한 메이저리거가 워낙 강렬한 이미지를 남겨서.

투타겸업으로 인정받으려면 선발 투수와 타격을 병행해야 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타자로 뛰다가 교체돼서 마운드에 올라가는 것만 해도 투타겸업은 맞지.

[야수가 등판하는 것보다는 믿을 만하고, 투수로서 확실히 계산은 안 서니. 좀 애매하긴 하네.]

‘원래 선발 로테이션 땜빵하는 게 대체 선발이잖아. 불펜 투수 자리를 땜빵하는 거니까 대체 투수라고 부르면 되겠네.’

물론 수비 부담이나 체력 문제에 대해서는 구단과 꾸준히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겠지만.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내야수로서의 내가 우선이라는 것.

[Koo의 블래스 신드롬 호전, 다저스 동료들도 몰랐다? 익명을 요구한 다저스 선수, “팬서비스 차원에서 투구 연습하는 걸로만 알았다.”]

말이 익명이지, 랜디가 떠벌렸다는 걸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기사.

실제 마운드에 오르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몰라서라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동료들에게 숨긴 건 사실이니, 혹시라도 배신감을 느끼는 건 아닌지 잠깐 걱정했는데.

“Koo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네가 피도 눈물도 없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기 가족한테도 말 안 했을걸?”

도대체 평소에 날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가족한테도 말 안 했을 거라는 말은 좀 찔린다.

딱 한 명,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외부인이 있으니까.

[오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인터뷰를 마치고, 원정 숙소의 객실로 돌아오고 나서.

수없이 찍혀 있던 부재중 전화 중 가장 먼저 응답한 상대.

“도아야.”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고 다니진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박도아한테는 모든 걸 솔직하게 밝히면서 살고 싶었다.

죽은 자기 오빠가 나랑 함께 다니고 있다는, 아주 커다란 사실 하나를 평생 숨겨야 하니까. 다른 건 아무것도 숨기기 싫어서.

[나 잠깐 나간다. 30분이면 되지?]

자기 동생이랑 통화할 때면 목소리가 끈적해져서 기분 나쁘다며 방에서 나가 복도를 배회하는 박도현을 보면.

얘가 내 깊은 뜻을 알기나 할지 잠시 현타가 오긴 하지만.

* *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찾은 원정팀이 머무르는 호텔.

다른 선수들이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에, 한 선수가 머무는 방의 문이 열렸다.

“로버트.”

FA 계약으로 다저스에 합류한 이후, 올해 전반기까지 LA 다저스의 에이스를 맡아온 로버트 켈리.

그는 자신을 찾아와준 손님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어서 오십쇼, 단장님.”

LA 다저스 마이크 올리버 단장은 테이블 위에 올라온 것들을 보고 놀라움을 숨겨야 했다.

미니바의 와인과 다과, 그리고 두 개의 잔.

그가 알고 있는 로버트 켈리는 시즌 도중 술을 입에 대는 선수가 아니다. 하물며 등판 전날에는 더더욱.

“자네 생각이 바뀌었는지 물어보러 왔네.”

와인을 채운 잔을 하나씩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더 좋은 제안을 가져오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만약 자네가 은퇴 의사를 철회한다면 우리는 퀄리파잉 오퍼를 제시할 생각이야.”

메이저리그 연봉 상위 125명의 평균 연봉을 지급하는 단년 계약.

물론 지금 받는 연봉보다는 소폭 삭감되긴 하지만.

이번 시즌 5이닝 이상 소화한 경기가 절반을 겨우 넘는, ERA 4점대 후반의 노장 투수에게 투자하는 금액치고는 아주 많은 편.

“죄송합니다.”

그러나, 로버트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올스타 브레이크 직후 은퇴 의사를 전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그 누구도 자네에게 성적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거야. 선발 로테이션 역시 보장할 거고.”

한 팀의 신뢰를 받는 선수의 가치는 성적만으로는 매길 수 없다.

악역을 자처하면서까지 팀의 기강을 확실하게 잡는 베테랑의 존재는 소중하다.

그런 점을 강조하면서 올리버 단장은 다시 한번 부탁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제가 빠져서 팀이 개판이 될 것 같았으면 저도 망설였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네요.”

로버트는 자신의 기량이 지금보다 떨어지면 떨어졌지, 더 올라오진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제리에게 에이스의 역할을 조금씩 넘기며 뒤로 물러났던 거고.

“저한테 쓸 돈을 아껴서 젊은 선수들을 잡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특히 Koo. 그놈은 성질이 더러워서 후배들도 죄책감 없이 갈굴 거고요.”

내년 시즌이 끝나면 내부 FA 단속을 위해 많은 돈을 써야 하는 건 맞다.

구현기는 준수한 수비력에 장타력까지 갖춘데다, 투수를 아껴야 할 때 1이닝 정도는 책임져줄 수 있는 선수.

이것만 해도 FA 때 얼마를 제시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데, 심지어 팀 구성원들에게 인망이 두텁기까지 하다.

“구단주가 사치세 라인을 넘기는 것도 감수하기로 했어. 다저스에는 아직 자네가 필요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질척거리는 올리버 단장.

잠시 침묵하던 로버트는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아내가 우울증이랍니다.”

지금껏 업무상의 만남에서 가족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로버트의 고백.

올리버 단장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가 1년 내내 싸돌아다니는 동안 남자아이 둘을 혼자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남들은 메이저리거 남편 뒀다면서 좋겠다고나 하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에요.”

나이를 먹어 떨어지는 기량에, 제 몫을 다해주고 있는 젊은 선수들.

거기에 가족이 보내오는 위험 신호까지.

야구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방금 말한 건 비밀로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왜지?”

“악당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퇴장한다는 건 안 어울리잖아요.”

올리버 단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다저스에 합류한 이후, 벤치 클리어링에서 단 한 차례도 물러서지 않으며 수많은 악명을 낳았던 이 남자만이 할 수 있는 농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버트는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내밀었다.

“이것도 대신 마셔주시겠습니까?”

“자네가 마시려고 준비한 거 아닌가?”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경기를 앞둔 로버트.

평소 안 하던 짓을 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생각해보니까 저다운 행동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 미소에는 한 치의 미련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 * *

로버트 켈리라는 선수는 만인에게 사랑받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팬들은 물론, 심지어 같은 선수들끼리도 여론이 갈리는 편이지.

다른 구단으로 이적한 후, 그 특유의 강압적 분위기가 싫었다고 고백하는 선수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와 별개로, 로버트 켈리가 클럽하우스에 불러오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선수는 없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모범을 보이면서, 분쟁이라도 벌어지면 가장 먼저 나서고, 후배 투수들에게 자기 노하우도 아낌없이 전수하니까.

“무서운 분이라고 미리 듣긴 했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엄격하셔서…… 그래도 지금은 적응이 좀 됐습니다.”

파드리스 산하 마이너에 있다가 트레이드된 후,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 빅리그로 콜업된 루키 투수 조쉬 먼로의 감상이었다.

‘지금 로버트가 무섭다고? 한 3년 전에 왔으면 오줌 지렸겠는데.’

[너 빅리그 처음 올라왔을 때 로버트 때문에 죽겠다고 징징대지 않았냐?]

농담 하나도 안 보태고, 고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루키 투수들은 로버트 앞에서 숨도 함부로 못 쉬었으니까.

지금은 정말 많이 유해진 거다.

로버트가 등판하는 날이면 항상 긴장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야수들도 더는 그러지 않게 된 것만 봐도 알지.

[카일 캠프, “로버트 켈리와의 맞대결? 이번 시즌 첫 홈런을 신고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안 그랬으면 카일이 이딴 인터뷰를 할 수조차 없었을 거다.

전날 신나게 입을 털어놓고 4타수 무안타 3삼진으로 탈탈 털린 주제에.

“이 새끼 또 X랄이네.”

“야, 괜히 먹이 주지 마.”

클럽하우스의 정신적 지주가 모욕당했는데도 다저스 선수단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벌컥 화를 내는 루키가 있으면 오히려 가만 있으라고 눈치를 줄 정도로.

‘생각이 아주 갸륵해. 어떻게든 흠집 내려고 발악하는 게 못 봐주겠어.’

[입만 털어도 추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오늘 인터뷰로 더욱 확실해졌다.

카일의 목적은, 전날 자이언츠와 동반 승리를 거두며 아직도 지구 우승 경쟁 중인 다저스를 흔드는 것이라고.

자기가 얼마나 추해지든 신경도 안 쓰겠다는 건데, 도대체 이미 끝난 사이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원.

경기 시작 전 홈팀 훈련 시간.

다른 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동떨어져 몸을 푸는 카일을 보니, 팀이랑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저러는 것 같고.

저격당한 로버트 본인도 이딴 수작질에 넘어갈 양반은 아니니,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따아아아아악―!

“What the heck……!”

“어떻게 된 거야?!”

그 엿 같은 인터뷰의 내용을 저놈이 실천해버린다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9월 말인 지금에 와서야 카일 캠프의 마수걸이 홈런이 나왔고.

그 홈런을 허용한 투수는, 오늘 경기의 선발 로버트 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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