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10화 (110/200)

110. Good bye, Badass(2)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하면서 피홈런을 단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 투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홈런이라도 투수가 받는 충격까지도 같을 수는 없다.

솔로 홈런과 그랜드 슬램의 데미지가 다르고, 거포에게 맞는 홈런과 똑딱이에게 맞는 홈런의 데미지도 다르지.

이번 시즌이야 부상으로 오래 자리를 비웠다지만, 카일 캠프는 애초에 다저스가 장타력을 기대하지 않던 타자.

그런 타자의 시즌 첫 홈런을 허용했다는 것은, 자칫 잘못했다간 대량 실점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맞을 만했어.’

아무리 파워가 부족한 수비형 내야수라지만.

구속도 별로 빠르지 않은 투심이 한가운데로 들어오는데 그걸 못 치면, 메이저리그에서 뛸 자격이 없다.

상대 상관없이 본인의 실투였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

로버트 같은 베테랑이라면 그런 마인드컨트롤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다.

“으아아아아!!!”

카일 저놈이 어떻게든 신경 긁으려고 발악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1루까지 배트 들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타구 감상하다가, 펜스 너머에 떨어지자마자 배트를 내동댕이치더니.

“이게 나야!!! 이게 나라고!!!”

경보 수준의 속도로 베이스를 도는 내내, 다저스 내야수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고래고래 소리치기까지.

예전 메이저리그였으면 바로 다음 타석에서 머리 쪽 위협구가 날아왔을 짓만 골라서 한다.

“저 새끼 지금 돌아버린 거 맞지?! 어차피 쓸데없는 대가리 날려버리고 싶어 환장했냐?!”

“이제 로버트랑 같은 팀 아니라고 막 나가나 본데, 그러다 오자마자 다시 실려 가는 수가 있어!!”

펫코 파크 관중석의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한 다저스 팬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카일.

[야, 홈런 친 타자 맞냐? 루키가 들이받았다는 거 진짜일지도 모르겠는데?]

팀 분위기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홈런이 나오면 덕아웃이 들썩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코칭스태프들이나 베테랑 선수들만 카일의 부담스러운 텐션을 도의상 받아줄 뿐.

대부분의 선수들이 하이파이브 정도만 나누고 돌아서더니, ‘쟤 왜 저래?’ 하듯 서로 마주 보고 쑥덕인다.

카일이 저쪽에서 왕따를 당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지금 중요한 건 로버트다.

어지간하면 홈런을 맞은 뒤에도 다른 데로 고개 안 돌리고 포수만 쳐다보는 로버트지만, 이번엔 홈팀 덕아웃을 활보하는 카일을 쏘아보고 있다.

“베이스 온 볼스!”

“세이프!”

감정을 전부 추스르기는 역부족이었는지, 볼넷과 안타를 연달아 허용하며 위기를 맞은 로버트였지만.

“아웃!” “아웃!”

로버트 옆을 빠져나가는 타구를 미끄러지듯 잡아내면서 더블 플레이로 이닝을 끝냈다.

전날 마운드에 올라가면서 내가 다시 투수로 돌아갈 거라느니, 뭐 이런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는데.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거 다른 팀 팬들이 도배하는 걸 수도 있어. 자기네 안타 좀 그만 뺏으라고.]

‘최고의 칭찬이었네.’

좋은 수비로 추가 실점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기분 좋은 티를 낼 순 없었다.

덕아웃 분위기는 최악이었으니까.

“저 개자식이 진짜…….”

다른 사람도 아닌, 메이저리그의 몇 안 되는 성인군자 클레망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 정도의 명백한 도발.

배트 플립에 보복구를 금지한 지가 꽤 됐지만, 로버트는 먼저 걸어오는 도발에는 퇴장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또 유격수라는 포지션이 공수 양면으로 상대 선수들과 마주칠 일이 많으니,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저러나 싶겠지만.

오늘 다저스는 함부로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킬 수 없다.

“자이언츠는…….”

“이겼죠. 오늘도.”

“징글징글한 놈들, 지치지도 않나 보네.”

홈에서 로키스를 만나 낮 경기를 치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진작에 승수를 추가했다.

오늘 경기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벤치 클리어링으로 출장정지 징계라도 나왔다간 진짜 치명적이겠지.

선수들은 안 보는 척하면서도 지정석으로 향하는 로버트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덕아웃에서도 개인 플레이를 이어가는 파드리스의 현 상황을 보면, 난투극 시즌 2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지만.

로버트가 폭발하면 물리적 충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야.”

로버트의 입이 열리자마자, 아마 이 자리의 모든 선수들이 알아챘을 거다.

폭발 직전의 상태에서 아슬아슬하게 참는 중이라는 걸.

“내가 지금 저 새끼랑 대화 좀 하고 싶은데, 그러진 않을 거거든? 왜냐하면 저 병X이 그걸 원할 테니까.”

보통 폭력을 동원하는 걸 대화의 범주에 넣진 않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보복구는 없다. 오늘 보복하는 건 전부 니들한테 맡길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그라운드 위의 폭군이 팀을 위해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로버트의 결단에 감화되어서인지.

아니면 상대 선발에게서 선취점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우리가 깡패도 아니고! 애새끼가 깐족대는데 무슨 주먹까지 쓰나?”

“이번 시즌 저놈들이 강팀이었던 적 있어? 없잖아!”

세레머니는 세레머니로 갚아주자.

카일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다저스 타자들은 상대를 향해 분노를 드러내는 대신 몸 안에 꾹꾹 다져 넣었고.

그 다짐을 실천할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Koo! Koo! Koo! Koo!”

“한 방 날리고 진짜 배트 플립이 뭔지 보여줘!”

3회 초,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맞이한 두 번째 타석.

마운드에 서 있는 건 시즌 중반 콜업되어, 점차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며 사실상 팀의 후반기 에이스 노릇을 하고 있는 루키 투수.

지금까지는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있지만, 내 앞에서 경험이 부족한 티를 내고 말았다.

쐐애애액!

릴리즈 포인트에서 이미 커브를 던졌다는 걸 읽어냈다.

상대 쪽에서 존에 들어오느냐, 훅 떨어지느냐의 선택지를 제시한 셈.

그러나 지금 카운트는 원 스트라이크.

어차피 헛스윙이 되어도 삼진은 아니니, 앞뒤 잴 것 없이 풀파워로 휘둘러도 된다는 소리였고.

따아아아아아악―!

타구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배트에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했고.

배트를 손에서 놓는 순간, 특별히 신경 써서 스냅을 좀 줬다.

이러면 배트가 허공에서 아주 아름답게 회전하거든.

[이건 진짜 인정. 적어도 빠던에서는 니가 나보다 재능충이다.]

박도현의 칭찬과 100포인트 수급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를 뒤로하며.

허공에 팔을 쭉 뻗고, 손가락 하나를 세운 채 1루를 향해 달렸다.

뭐긴 뭐겠어. 30―30 달성까지 남겨둔 홈런 개수지.

“Koo! Koo! Koo! Koo!”

괜히 똑같은 취급 받기는 싫으니 설렁설렁 뛰지는 않았지만.

2루 베이스 근처에서는 속도를 살짝 늦췄다.

똥 씹은 표정으로 딴 곳을 바라보는 저 친구한테 해줄 말도 있고 하니까.

“다리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까 제대로 못 뛰던데.”

뭐라 반응하는지는 제대로 못 봤다. 사실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아무리 내로남불 심한 놈이라고 해도 지가 먼저 한 짓이 있는데. 무슨 말을 하겠어.

홈베이스를 밟으며 전광판에 동점 득점이 올라가는 순간, 다저스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날뛰기 시작했다.

“One More!!! One More!!! One More!!!”

오늘 경기에서 홈런 하나를 더 때려, 30―30을 달성하길 바라는 팬들.

거의 홈 경기 수준으로 사방에서 들썩이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니.

동료들이 손가락 관절을 꺾어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로버트조차도 지정석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맨 앞에서 대기 중이었고.

“이리 와! 쳤으면 맞아야지!”

“다음 타석에서 2루 나가면 카일한테 좀 알려주라고! 아까 그 배트 플립 어떻게 하는지 말이야!”

“전날은 홀드 챙기더니 오늘 30―30까지 챙겨가려는 거야?! 너 이러다 펫코 파크 출입 금지당해!”

덕아웃을 가로지르는 동안 쏟아지는 사랑의 손길 탓에 등짝이 남아나질 않았지만.

이게 홈런의 참맛이라는 걸 이번 시즌을 치르는 동안 알게 됐다.

홈런 치고 들어와 봤자 외면이나 당하는 누구는 평생 알 일이 없겠지만.

* * *

3회 초 수비를 막 마치고 들어온 홈팀 파드리스의 덕아웃.

방금 수비에서 실책을 적립한 유격수 카일 캠프를 향해, 선수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골드 글러브는 무슨, 괜히 핵심 유망주만 내주고…….”

“예전 단장도 진짜 눈깔이 삐었지…….”

들릴 듯 말 듯 수군대는 선수들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 연차였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양심에 찔려서가 아니다.

갓 콜업된 루키조차 그에게 대놓고 들이받았는데, 저 선수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뻔했으니까.

“빌어먹을…….”

아무리 실책을 했다지만 추가 점수를 내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심지어 오늘 홈런까지 친 몸인데.

‘전임 감독이 있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팀은 무한 경쟁 체제다. 자네도 예외는 없어.’

기껏 부상에서 복귀했더니, 감독대행이란 양반은 대놓고 찬밥 취급을 하질 않나.

‘당신이 뭔데 나한테 참견입니까? 이 팀에서 당신이 한 게 대체 뭔데요?’

어설프게 플레이하는 루키 유격수에게 한 수 가르쳐주려고 말을 걸었더니, 싸가지 없게 반응하질 않나.

생각해보면 트레이드로 팀을 옮기기 전부터 그랬다.

‘여기 너 싫어하는 사람 X나 많아.’

오늘 마운드에 서 있는 저 퇴물 투수는, 그가 트레이드되기 직전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대들었더니, 뭐라 주절거리면서 화도 못 내고 물러났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게 개소리라는 걸 여기 와서 보여주려고 했는데.

‘다리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까 제대로 못 뛰던데.’

Koo.

조금 전 자신을 지나치며 그놈이 내뱉은 목소리를 떠올리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발목을 붙잡던 단단한 손길과, 정강이를 내려찍던 묵직한 주먹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그런 식으로 능욕이나 하고.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자신이 펼쳤던 홈런 세레머니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직 당한 걸 갚아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저기, 안토니오.”

카일은 홈런을 맞은 것 때문인지 의기소침해져 있는 선발 투수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 노력하면서.

“조금 전 실책은 내가 미안했어.”

“……괜찮습니다.”

대답이 조금 늦긴 했지만, 그 싸가지 없는 루키 놈과는 반응이 달랐다.

자기 뒤에서 죽도록 구르는 유격수 포지션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그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투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까 홈런 때리고 배트 던진 놈 말이야.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 둘 거야? 같은 지구 놈인데 저자세로 나갔다간 호구 잡힌다?”

투수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확인하며, 카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장 자신이 나설 수 없다면 남을 움직이는 것.

야구는 팀 게임이라는 상식을, 카일 캠프는 그런 식으로 해석해 왔다.

* * *

5회 말, 파드리스의 공격이 끝난 시점에서 스코어는 1대 1.

다저스 선발 투수 로버트 켈리의 투구 수는 90개를 초과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오브라이언 감독이 로버트에게 다가가 의중을 물었다.

로버트가 이번 시즌을 마치고 유니폼을 벗을 거란 사실을 감독 역시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경기는 로버트 켈리의 야구 인생에 있어,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였지만.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이, 교체 타이밍이 오면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미리 전했다.

투심의 위력이 떨어지면서 워닝 트랙까지 가는 플라이볼을 두 개나 허용한 지금 컨디션으로는.

지구 선두 경쟁을 하고 있는 팀의 마운드를 책임지기 힘들다고 그 역시 인정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로버트!”

“고생하셨습니다!”

몇몇 베테랑들이나 눈치 빠른 선수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 눈앞에 늘어서 있는 꼬맹이들은 자신이 은퇴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

내밀어오는 손에 평소처럼 하이파이브를 해주면서 지정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5이닝 1실점. 현재까지는 노 디시전.

악당의 마지막 경기치고는 조금 심심한 면이 없지 않고

승리투수가 되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지만.

그건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일이다.

6회 초 선두 타자는 구현기.

오늘 동점 홈런을 만든 타자이자, 자신이 사라지고 나서도 덕아웃 기강을 잡아줄 거라고 기대하는 선수.

저놈이 오늘 홈런 하나를 추가한다면, 자신에게도 저놈에게도 오늘 경기가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겠지.

‘한 방 더 날려라, Koo.’

속으로 응원을 보내며, 누군가가 미리 음료수와 얼음을 가득 채워다 준 텀블러를 기울이려던 그때.

퍼억!

타자가 공에 맞으며 바닥에 쓰러졌고.

“이런 X발!!!”

동시에 로버트가 손에 들고 있던 텀블러도 바닥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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