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12화 (112/200)

112. 최종전(1)

오랫동안 다저스의 1선발이자 군기반장으로 군림하던 로버트 켈리의 은퇴.

서로 고민을 털어놓고 지내던 비슷한 연차의 선수들이나, 눈치 빠른 선수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다.

솔직히 곧 떠날 사람처럼 구는데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지.

이번 시즌, 특히 올해 후반기 들어서고는 남한테 윽박지르는 일도 사라졌으니까.

솔직히 오늘 경기도, 카일이 홈런 치고 배트 플립 정도에 그쳤으면 별일 없이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로버트!”

“갑자기 은퇴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젊은 선수들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모양인지.

인터뷰를 마치고 라커룸으로 돌아온 로버트를 둘러싸고 추궁했지만.

“그렇게 됐다.”

로버트는 별말 없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그 홀가분한 태도에, 다른 선수들도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아이고야…… 충격이 큰 것 같은데.]

‘저 인간 진짜 가지가지로 사람 울리네.’

젊은 선수들, 특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투수들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솔직히 나도 로버트가 없는 클럽하우스가 상상이 잘 안 되기는 하지.

로버트가 하던 것처럼 기강을 잡아줄 사람이 누가 있나 생각해봐도 당장은 아무도 안 떠오르니까.

“누구 죽었어? 나는 끝났지만 니들은 내일도 경기 있는 거 알지? 질질 짜다가 지기라도 하면 내가 욕먹을 거 아냐.”

로버트가 농담을 던졌지만, 분위기는 좀처럼 수습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럴 때 능청스럽게 끼어들곤 하던 R.H.마저도 한숨만 쉬고 있고.

“이제 와서 이미지 관리하려고 해도 늦었어요, 로버트.”

가만히 보고 있기 힘들어서 한마디 던졌더니, 경악에 찬 시선이 쏟아진다.

정작 디스당한 본인은 박장대소하고 있었지만.

“프흐흐흐흑. 티 많이 나냐?”

“예. 이미 쌓아놓은 업보가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냥 눈치 보며 조용히 계시다가 반지나 하나 챙겨 가십쇼.”

월드시리즈 반지.

그 말에 잠시 잊고 있던 지금 상황이 떠올랐는지, 침울해져 있던 팀원들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은퇴하는 팀의 기둥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만한 선물로 그것보다 가치 있는 건 없을 테니.

“떠나는 양반한테 반지 하나쯤은 끼워줘야지!”

“기껏 줘봤자 가운뎃손가락에나 끼우고 다닐 것 같긴 하지만!”

“그거 끼고 사람 안 패는 게 어디야?!”

“로버트 넌 뒷방 늙은이답게 빠져 있으라고! 너 하나 빠진다고 우리 안 망하니까!”

오랫동안 수고해준 사람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감추려, 선수들은 더욱 목청을 높였고.

소란이 잦아들 생각을 안 하길래, 로버트 옆에 가서 슬쩍 말을 걸었다.

“앞으로는 뭐 할 생각이에요?”

야구장 밖에서의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되는 건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로버트는 별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음, 일단 최소 1년은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쉴 거고.”

그러더니, 갑자기 나한테 어깨동무를 하며 목소리를 낮춘다.

이미 벗어 던진 줄로만 알았던 군기반장의 얼굴을 하고서.

“그때쯤이면 Koo 너도 FA 신청할 테니, 너 가는 팀 코치나 지원해보는 것도 괜찮겠네.”

설마 이 양반, 평소 알게 모르게 깝쳤던 거 다 담아두고 있었나.

아무리 메이저리그에서 코치의 권한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해도.

이 양반한테 들이받을 간 큰 선수가 있을 리 없으니, 의외로 진짜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너 진짜 코치로서 로버트랑 다시 만나고 싶냐?]

‘미쳤어? 트레이드해달라고 드러누워야지.’

근데 적성이고 나발이고, 내가 그 밑에 들어가긴 싫다.

빅리그 콜업되고 나서 여태까지 함께 지냈으면 충분하지.

이제 자유를 찾아 떠나십쇼.

* * *

[LA 다저스 선발 투수 로버트 켈리, 생방송 인터뷰 도중 은퇴 선언! “올해 초부터 생각은 있었고, 후반기 들어서며 구단에 보고했다.”]

[로버트 켈리, 트레이드+FA로 10년간 함께한 다저스에서 커리어 마친다!]

[LA 다저스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로버트가 은퇴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붙잡으라고 단장 바짓가랑이에라도 매달렸을 거다.”]

[로버트 켈리, 자신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5.1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 등극!]

[파드리스와의 2차전에서 동점 홈런과 결승 득점을 올린 Koo의 짧은 한마디, “그와 커리어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다저스의 한 선수, “아쉬움과 기쁨이 교차한다. 좋은 선수와 이별하는 건 슬프지만, 이제 덕아웃에서 언제 고함이 날아올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니까.”]

[로버트 켈리, “익명을 요구한 선수와는 직접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표정이 왜 그런가? 나는 동료를 때리지 않는다.”]

[파드리스 감독대행, 패장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선수 이름 거론! “적어도 정규시즌 남은 경기에서 카일 캠프를 기용할 일은 없을 것.”]

로버트의 은퇴 소식은 그날 밤 내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그가 남긴 어록이나, 메이저리그에서의 활약상이 다양한 매체에 실려 사람들 사이를 떠돌았다.

데뷔했던 팀에서의 활약도 준수한 편이었지만, 다저스에 오고 나서부터 기량이 만개했던 만큼. 다저스에서의 활약이 주로 조명받았지만.

[근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 같이 뛰던 선수들이 얼마나 충격받았겠어. 내가 보기엔 본인의 임팩트 있는 은퇴 선언을 위해 팀 사기를 희생한 것 같은데?]

물론 구단이나 에이전트를 통해서가 아닌, 생방송에서 은퇴를 선언한다는 흔치 않은 방식인데다.

애초에 지구 선두 경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이런 발표를 잘 안 하다 보니.

나름 타당해 보이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LAD 6 : 4 SD]

다저스는 끝내 파드리스와의 3차전도 가져오면서, 그런 참견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증명했다.

파드리스 상대 시즌 17승 2패의 압도적인 전적.

다음 시즌 다저스의 구성원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한동안은 호구를 잡을 수 있을 듯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키스전 2승 1패로 위닝 시리즈 가져왔음에도 웃을 수 없는 이유는?]

로버트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의기소침해져 있던 다저스 팬들을 열광시킨 소식.

지구 선두 경쟁을 하던 자이언츠가 로키스와의 3차전에서 미끄러지며, 다저스가 1게임 차로 앞서 나가게 된 것.

“진짜 이렇게까지 빡센 시즌은 처음 같아.”

메이저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치열한 순위 싸움.

그 싸움의 결착을 짓기 위해, 다저스 선수단은 2037년 정규시즌의 마지막 시리즈가 열리는 곳.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이동했다.

* * *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의 양대리그. 그 안에서 각각 세 개의 디비전.

그중 아직까지도 최종 순위가 결정되지 않은 건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3위부터 5위까지는 확정이 된 지 오래인데, 지구 선두만 아직까지 결정이 안 난 거고.

심지어 그 두 팀끼리 시즌 마지막 3연전을 펼치기까지 한다?

‘내가 다른 팀 팬이라도 이건 못 참지.’

[그러게. 중립 팬들도 꽤 많이 왔네.]

유니폼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왔거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예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온 관중들까지.

오클랜드나 LA 에인절스, 샌디에이고 등 캘리포니아 연고 팀 팬들이 종종 눈에 띈다.

[파드리스 팬들은 왜 왔지? 무슨 좋은 구경 하겠다고…….]

‘자이언츠 응원하러 왔나 보지. 사실 에인절스 팬들도 그러려고 왔을걸?’

자이언츠와 라이벌리가 있는 오클랜드 팬들은 이쪽에 붙어줄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원정이라는 점도 있고, 팀의 리더격 인사의 갑작스런 은퇴라는 악재 아닌 악재까지 드리웠기에.

비록 다저스가 1게임 차로 앞서 있기는 해도, 마냥 낙관할 수는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혹시 오늘 자칭 전문가들이 우리에 대해 뭐라 씨부리는지 찾아보고 온 사람 있나?”

물론 팀 내부에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자이언츠 놈들이 유리하다며 입 터는 놈들 누군지 알지? 이번 시즌 개막 전 Koo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가 우스꽝스러운 가면 쓰고 방송하던 놈들이야. 그리고 그 Koo는 지금 우리 팀에 있지. 설명이 더 필요한가?”

“아닙니다!!!”

“그럼 나가기 전에 로버트 손이나 한 번씩 잡아주라고. 반지 끼우기 전에 손가락 사이즈는 알아 둬야 할 것 아냐!”

자칭 전문가들의 분석이 항상 틀리기만 했던 것도 아니고, 반지를 선수들이 제작하는 것도 아니니 손가락 사이즈 따위야 알 필요도 없지만.

원래 스포츠에서 기세란 논리보다 감정에 더 큰 영향을 받는 법이다.

따아아아악―!

[말릭 케이타의 스윙! 그리고 이 타구는! 우측 외벽을 훌쩍 넘어가 맥코비 만에 그대로 빠집니다! 다저스가 수많은 외야 유망주들 중에서 왜 자신을 낙점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투런포!]

따아아악―!

[쳤습니다! 높지는 않지만 빠르고 절묘한 코스로 향하는 타구! 우익수가 허둥지둥 쫓아가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2루에 서서 들어가는 Koo! 오늘 경기 아직 안타가 없던 Koo가 2루타를 날리며 두 명의 주자를 전부 불러들였습니다!]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정규시즌도 끝나겠다, 좀 일찍 포스트시즌 모드에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1선발의 로테이션을 앞당겨 다저스와의 1차전에 올리는 초강수를 뒀지만.

경기 시작 전 기세를 한껏 끌어올린 데다, 로버트에게 우승 반지를 선물해주려는 열망에 가득 찬 타자들을 견뎌내긴 힘들었고.

[8회 말 원아웃, 오늘의 선발 투수 아이작 란드리가 투수 코치에게 흔쾌히 공을 건넵니다. 투구 수 113개. 포스트시즌을 앞둔 만큼 투구 수를 관리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라면 의외네요.]

[다저스도 이제 단기전 대비 모드에 돌입한 거겠죠. 어차피 4일 휴식 후 등판할 수도 있고요. 지금 막 다저스의 두 번째 투수 모리츠 슈타인마이어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점수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지난 파드리스전 때처럼 Koo가 마운드에 서는 걸 기대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아마도 지난 시리즈에 등판이 없었던 만큼 컨디션 점검 차원의 등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이야 로테이션상 4선발에 배치되었지만, 아이작은 트레이드 전까지 컨텐더 팀의 2선발을 맡아온 투수.

오늘 이기지 못하면 뒤가 없는 자이언츠 타자들의 조급함을 절묘하게 공략하며 7과 3분의 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뒤이어 올라온 투수들도 뒷문을 철저하게 막아주면서.

[LAD 7 : 0 SF]

[LA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최종 시리즈 1차전 승리로 최소 타이브레이크 확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이제는 정말로 뒤가 없다! 타이브레이크 포함 3연승 해야만 지구 우승 가능!]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감독, “앞으로의 경기 운용 방향은 면밀한 코칭스태프 회의를 통해 결정할 것.”]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 “내일 경기 패배 시 3차전 선발 투수는 제리 헤이즈택. 승리한다면 대체 선발 기용할 것.”]

자이언츠 감독의 의도를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어차피 지구 우승을 위해서는 3연승을 해야만 하니, 차라리 2경기를 버리고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총력전을 펼치려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내일은 클럽하우스에서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의 동네에서 샴페인 터뜨리는 거 안 그래도 꿀잼인데, 그게 샌프란시스코다? 안 마셔도 만취할 듯.’

[인성 진짜…….]

박도현이랑 그런 대화를 나누며 원정 숙소로 돌아가려던 중.

“Koo, 잠시만.”

수석 코치가 붙잡길래 따라가 보니, 한동안 뜸했던 감독님과의 개인 면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경기에 대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는데.

“Koo. 이건 어디까지나 자네 의향을 물어보는 거니까, 절대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별생각 없이 듣고 있다가,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만약 내일 경기에서 승리하며 지구 우승을 확정한다면, 3차전에는 선발 투수로 나가볼 생각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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