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13화 (113/200)

113. 최종전(2)

2037시즌 메이저리그 잔여 경기는 2경기.

그 두 경기 중 한 경기만 이겨도 다저스의 지구 우승은 확정이다.

원래대로라면 3차전에는 제리가 등판할 차례지만, 가뜩이나 올해 200이닝을 넘기며 갈려 나갔으니 차라리 휴식을 주는 게 낫다는 건 나도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오늘 이긴 게 너무 기뻐서 술이라도 한잔 하셨나?]

박도현의 싸가지 없는 반응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이제 막 투수 복귀전을 치렀고. 이번 시즌 소화한 이닝은 1이닝에 불과한데.

“정확히 말하자면 오프너로 나가볼 생각이 없느냐는 거지.”

“아, 오프너요…….”

[하긴. 지금 너한테 선발 맡기면 그냥 혹사지.]

오프너.

공의 위력은 괜찮지만 이닝 소화력이 부족한 불펜투수에게 게임 초반을 맡기고.

긴 이닝을 책임져줄 다음 투수로 교체하는 전략.

콜업 첫해를 제외하면 선발로만 뛰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긴 이닝을 책임져달라는 줄로 착각했다.

애초에 우리가 원래 오프너 전략을 써먹던 팀도 아니고.

“가장 큰 이유는 팬 서비스 차원에서야.”

내가 다시 마운드에 오른 걸 보고 감격했다는 팬들이 예상보다도 훨씬 많더라.

타자로서 제법 센세이션한 한 해를 보냈음에도 여전히 남몰래 투수 구현기를 그리워하던 팬들도 많았고.

게다가 팬 서비스도 팬 서비스지만, 화제몰이에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선발 투수로 주전 유격수가 나온다는데 안 보고 배겨? 절대 못 참지.

물론 내가 그냥 야수였으면 야구가 우습냐면서 욕을 배부르게 먹어도 싸지만.

나는 애시당초 투수 출신이니까.

“아직 지구 우승을 확정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팬 서비스 타령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내일 경기에서 자이언츠가 베스트 라인업을 내보낼 확률은 적다고 봐.”

지구 선두 경쟁 때문에 다저스는 시즌 말까지 주전들을 대거 기용했지만.

사실 그건 같이 경쟁에 참여한 자이언츠도 마찬가지.

베스트 라인업을 가동해도 타이브레이크 포함 3연승에 성공할 보장이 없다는 거다.

“그리고, 자네가 지금 투수로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와 있는지 테스트할 기회기도 하고.”

“테스트라 하시면…….”

“아, 오해하지는 말고. 얼마나 자주 올릴지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올릴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려는 거니까.”

[상황? 무슨 상황?]

감독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는데도.

박도현은 투수로 뛰어본 적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하는 듯하다.

‘등판 간격은 조절해주되, 좀 빡센 상황에서 올라가도 괜찮을지 보겠다는 거 아냐.’

주전 내야수로 뛰면서, 보통 불펜 투수처럼 등판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혹사지.

근데 등판은 좀 간격을 두되, 2~3점 차이에서도 믿고 올릴 수만 있다면.

내년 투수 운용에서 엄청나게 숨통이 트일 거다.

“물론 이건 전부 내일 경기에서 이긴다는 게 전제이긴 하지만. 자네 생각은 어떤지 물어봐도 되겠나?”

시즌 초, 입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때는 이런 부탁이 사실상 지시사항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거절한다고 해서 나를 안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래도.

“당연히 해야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내 대답에, 박도현이 의외라는 듯 쳐다본다.

[좀 고민해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다? 팬 서비스 때문에? 아니면 진짜 팀을 생각해서…….]

‘뭐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나랑 같이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나를 너무 모른다.

‘내가 선발 등판하면 자이언츠 놈들이 빡칠 거 아냐.’

주는 것 없이 미운 놈들이 있다.

선수들끼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차라리 파드리스가 더 험악하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라이벌 관계답게, 이상하게 자이언츠를 엿먹이고 나면 밥맛이 그렇게 좋더라고.

내일 경기 이기면서 지구 우승 확정하고, 샴페인 파티 시원하게 조지고. 하룻밤 자고 선발 등판으로 추가타까지.

해장이 따로 필요 없겠다. 속이 아주 시원하겠어.

[아…… 나도 자이언츠 싫어하긴 하는데 그건 좀…….]

‘뭐래. 샌프란시스코 랍스터는 맛이 없다느니 개소리나 하는 놈이.’

겉으로는 선량한 선수를 연기하며, 속으로는 박도현과 투닥대고 있는데.

감독님은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이것도 상황을 봐야겠지만,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나면 1루수로 교체해줄 생각이고.”

“네……?”

“응……?”

차라리 휴식을 주면 줬지, 갑자기 1루수라니.

내가 당황하자, 감독님은 오히려 본인이 더 의아하다는 듯 되묻는다.

“내가 입에 담는 게 적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Koo 자네, 남은 2경기 동안 이뤄야 할 목표가 있지 않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아홉수에 걸려 있던 두 가지 기록이 갑자기 눈앞에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29개의 홈런과 39개의 도루.

특히 홈런 하나만 더 때리면 30―30이 눈앞이었다.

‘지금이라도 등판 무른다고 해볼까……?’

[낙장불입. 그러게 마음을 곱게 써야지.]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이냐.

친구가 곤란한 상황에 부딪혔는데 실실 쪼개기나 하고.

* * *

다음날 펼쳐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마지막 3연전 중 2차전.

감독님의 예상대로, 자이언츠는 대체 선발을 포함해 백업 위주의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면밀한 회의를 통해, 지금 상황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라인업을 구성했습니다.”

‘남은 경기는 버리고 와일드카드에 집중하겠다’라는 말을 최대한 부드럽게 바꾼 상대 감독의 인터뷰.

오라클 파크를 찾은 자이언츠 팬들도 못마땅한 시선보다는 격려를 보내왔다.

“저 새끼들 수건 던졌다! 맛있게 받아먹고 샴페인으로 입가심하자!”

“Let’s Go! Dodgers!”

반대로 전날처럼 주전 선수들을 총동원한 다저스는 기세를 한껏 끌어올렸고.

덩달아 빽빽 소리를 지르다, 경기 시작과 함께 대기 타석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왜 그렇게 표정이 죽상이야? 홈런이랑 도루 기록이 그렇게 신경 쓰여?]

경기를 앞두고 잘할 수 있을지 신경이 쓰이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애초에 30―30에 관해 기자들이 수도 없이 질문해왔는데. 그걸 일일이 신경 썼으면 야구 못 했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할 거라고, 느긋하게 마음먹으려고 죽도록 노력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도 봤고.

‘근데 감독님이 직접 언급하니까, 좀…… 느낌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뭐가 다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든데.

그냥, 지금까지는 30―30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 한 사람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체력이나 수비 부담을 배려해줄 만큼 팀에서도 중요하게 보는 중이며, 더 나아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팬들이 엄청 많겠구나, 뭐 이런 걸 새삼 느꼈다고 해야 하나.

따아아악―!

리드오프 조지가 안타를 치고 나가며, 타석으로 나갈 차례가 돌아왔다.

타석에 들어가 준비를 하는 동안, 투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고.

‘텄네, 텄어.’

지금까지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홈런을 치고 도루를 할 능력이 돼도, 상황이 안 받쳐주면 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까.

“베이스 온 볼스!”

벤치의 지시와 자기 뜻이 엇갈렸는지,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던 투수는.

미련을 못 버린 듯 벗어나는 유인구 두 개를 던졌다가, 내가 미동조차 안 하자 자포자기하며 스트레이트 볼넷을 선사했다.

“우우우!!! 바퀴벌레 놈들아!!! 니들답게 참 졸렬하게도 한다!!!”

“기록 내주는 게 그리도 배알 꼴렸냐!!!”

지구 우승이 좌절되기 직전, 라이벌 팀의 인기 스타에게 대기록마저 내주는 건 참을 수 없었나 보다.

게다가 나랑은 어렵게 승부하는 게 꼭 최악의 선택인 것만은 아니기도 하고.

다음 타자인 켄 워싱턴은 앞선 두 명과는 달리 우타자.

게다가 부상 복귀 이후 홈런 페이스도 줄고, 최근 몇 경기에서 역회전성 변화구를 건드렸다가 땅볼을 자주 때리기도 했으니.

나보다는 차라리 켄과 승부하는 게 피해를 최소화할 수도 있다는 덕아웃의 판단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따아아아악―!

물론 투수가 그런 공을 던지지 못하면, 전부 쓸데없는 가정이 되어버리지만.

아주 살짝 몰린 변화구를 제대로 후려친 켄의 타구는 오라클 파크의 중앙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스코어 3대 0을 만드는 선제 쓰리런.

“Yeahhhhhh!!!”

“이러려고 걸러준 거구나!!! 그 따뜻한 배려를 우리가 미처 몰랐네!!!”

땅, 땅, 땅.

쫌생이처럼 기록 내주기 싫다고 거르는 볼넷 주는 투수에게 내려진 정의의 판결에, 거의 다저 스타디움만큼 들어찬 푸른 물결이 요동쳤다.

[아까는 덕아웃 판단에 따랐을 거라며…….]

‘과연 그걸 내가 신경 써야 할까?’

한 명 한 명, 홈베이스를 밟은 끝에 다시 뭉친 세 명의 주자들.

타석으로 다가오는 R.H.와도 흥겨운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이미 선수들이 줄지어 서 있는 덕아웃 입구로 향하는 길.

“푸하하하학!!!”

“켄,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켄이 자기 자신에 깊이 심취한 표정으로 걸음걸이마다 그루브를 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따라가던 조지도 곧장 따라 했고.

FA 계약으로 합류한 고참급 야수들이 촐싹거리는 모습에 황당해하던 것도 잠시.

“그냥 즐겨! 인생에서 이런 경기를 언제 또 치러보겠어?!”

평소 사인 맞출 때 말고는 점잖던 조지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작년의 암흑기를 견뎌내고, 코앞까지 찾아온 지구 우승.

상대 선발은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3실점을 기록한 데다.

잠시 후에는 아무리 안 긁히는 날이라도 4~5실점 정도로 버텨내게 된 아드리안이 마운드에 올라갈 텐데.

고작 홈런 하나 못 친 게 무슨 대수라고.

뒷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양아치처럼 어슬렁대는 걸음걸이로.

덕아웃을 활보하는 득점 주자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실시간으로 이 꼬라지를 비추고 있을 카메라를 잠시 떠올렸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면서.

“으하하하학! Koo 저놈 포즈 좀 봐!”

“저런 Swag을 누가 따라 할 수 있겠어?! 하고 싶은 놈이 없을 텐데!”

“역시 평소부터 남 깔보고 다니는 놈은 달라!”

누가 혹평을 쏟아내는지 마음속 리스트에 적어두며, 겨우 덕아웃 일주를 마치고 생수병 뚜껑을 따려던 순간.

따아아아아악―!

“뭐야?! 백투백이야?!”

“넘어갔다아아악! 야! 다시 일어나!”

“숨 좀 쉬자! 우리 방금 앉았다!”

1회 초, 승부를 일찌감치 끝내 버리는 R.H.의 쐐기포가 나온 이후.

평소보다 자비로워진 팬들은 삼진을 당하거나 병살을 때려도 격려를 보내줬고.

안타를 치거나, 하다못해 볼넷으로라도 나가기만 하면 그보다 훨씬 격한 환호성이 쏟아진 오늘 경기.

비록 나는 볼넷 두 개를 포함해 2타수 무안타에 그쳤고.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는 무관심 도루를 하나 추가했을 뿐이지만.

우리가 승리를 가져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LAD 11 : 4 SF]

덕아웃에서의 열기는 고스란히 지구 우승을 기념하는 샴페인 파티로 이어졌다.

차갑게 식혀둔 데다 뚜껑까지 미리 따 놓은 샴페인 병들이 무더기로 놓여 있는 원정팀 클럽하우스.

고글 OK. 티셔츠 OK. 기자들 카메라 방수포 OK.

남은 건?

“야!!! 로버트부터 조져!!! 이제 좀 있으면 그냥 아저씨야!!!”

“뒷감당?! 그건 니들이 해야지!!!”

“Koo 이 뺀질이 새끼 어디 갔어?! 내가 오늘 그놈 사타구니에서 알콜 냄새날 때까지 담가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잽싸게 제리 뒤로 숨었어요!!”

“감히 우리 에이스를 방패로 삼아?! 그렇다면 1타 2피다!!!”

선수든, 코칭스태프든, 기자든, 하여튼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눈앞에 보이면 일단 거품을 쏘아대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크흐으으, 이 맛을 내가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박도현을 포함해, 남한테 뿌리는 데는 관심 없고 귀한 술 뱃속에 담아 가기 바쁜 사람들도 있고.

“팀에 처음 합류했을 때만 해도, 그저 액티브 로스터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런 제가 이렇게 지구 우승팀의 일원으로서 이 자리에 서게 되다니…….”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리고 인터뷰 요청에 성실하게 응하는, 기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도 있었다.

근데 채드윅 저놈은 또 즙 짜고 있네.

온통 젖어서 눈물 흘리는 거 티도 안 나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광란의 파티를 즐기다, 겨우 열기가 사그라들고.

감독님을 비롯해 지구 우승의 주역들이 하나둘 제대로 된 언어로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했는데.

“전에 말했다시피, 오늘 지구 우승이 확정된다면 최종전에서는 대체 선발을 기용하기로 했죠. 그리고 누구를 세울지도 결정되었습니다. 내일 경기,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Hyun―Ki Koo입니다.”

감독님의 그 한마디가, 파티의 불꽃을 온라인으로 옮겨 밤새 활활 붙타도록 만들었다.

물론 자이언츠 팬들의 억장에도 옮겨붙었겠지만.

내가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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