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가을맞이(2)
다저 스타디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LA 다저스가 챔피언십시리즈 진출권을 놓고 다투는 디비전시리즈 3차전이 열리는 날.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고, 원정에서 2승을 챙겨온 개선장군들을 맞이하기 위해 관중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웠다.
“Let’s Go! Dodgers!”
“원정에서 스윕해놓고 홈에서 털리는 거 아니지?!”
“패배 귀신은 정규시즌에 지구 우승하면서 성불시켰을 거라 믿는다, 다니엘!”
경기 시작 전, 몸을 푸는 다저스 선수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홈팬들 사이.
모자와 선글라스로 무장한 두 명의 동양인 여자가 섞여 있었다.
“이것도 먹어봐요, 도아 씨. 한국식 양념치킨 윙이래요.”
“아, 네. 고마워요, 언니.”
젊은 나이에 요절한 다저스의 전임 유격수 박도현의 동생이자, 현 주전 유격수 구현기의 소꿉친구 겸 연인 박도아.
그리고 한인 가이드 아르바이트생이자 박도아의 대학 선배 이나현.
가이드와 고객으로 만난 두 사람은 야구팬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금방 친해졌다.
“오, 이거 맛있다. 내일 쪽지시험만 아니었어도 맥주랑 같이 먹는 건데…….”
선배의 한탄에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레포트가 떠오른 박도아였지만, 이내 외면했다.
보통 경기도 아니고 포스트시즌이지 않나.
교수님도 여기 어딘가로 야구를 보러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브레이브스랑 필리스는 지금 시리즈 스코어 1대 1이니까, 오늘 우리가 이기면 챔피언십 가서 유리해질 텐데 말이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와일드카드전은, 생각보다 싱겁게 결판이 났다.
구현기에게 30―30만은 못 내준답시고 시리즈 내내 피해 다니다가 결국 홈런을 맞으면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은 후유증이라도 앓았는지.
자이언츠가 경기 내내 졸전을 선보인 끝에 브레이브스에게 디비전시리즈의 마지막 한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으니까.
“아무래도 필리스보다는 브레이브스가 올라오는 게 유리하겠죠?”
“그쵸. 홈 어드밴티지도 그렇고, 필리스 유격수가 올해는 좀 덜했는데 다저스만 만나면 유독 깽판을 쳐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찾아온 경기 시간.
스타팅 라인업에 들어간 선수들을 소개하던 도중, 2번 유격수의 얼굴이 전광판에 올라왔고.
[2, SS, Hyun―Ki Koo, 디비전시리즈 9타석 7타수 3안타 2볼넷 2타점 3득점]
“Koo!!! Koo!!! Koo!!! Koo!!!”
“너라면 내 전부를 줄 수 있어!!! 우리집 강아지는 빼고!!!”
“너 로버트한테 신세 많이 졌잖아!!! 가는 길에 네가 반지 하나 맞춰줘야지!!!”
앞선 두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일부 전문가 양반들에게 또다시 사짜 딱지를 선물한 구현기였기에.
수만 명의 홈팬들은 그를 향해 괴성에 가까운 응원을 쏟아냈다.
“남자친구분 인기가 하늘을 찌르시네요.”
“아하하하하. 그러게요. 여자보다 아저씨들한테 더 인기가 많긴 하지만.”
“2010년대 초반 황금기 때 부모님 손 붙잡고 야구장 왔던 꼬마들이 지금 중년이 된 거죠. 저희 부모님도 그렇고.”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박도아를 바로 옆에서 챙겼던 만큼, 그녀와 구현기 사이의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진작부터 알아챈 이나현이지만.
사적인 연애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언니는 혹시 저랑 오빠 얘기 궁금하지 않으신…….”
1회 초 수비가 삼자범퇴로 끝나고, 막 시작된 1회 말 공격.
선두 조지 라모스의 타석에 정신이 팔려있는 이나현에게 말을 걸어보려던 박도아였지만.
따아악―!
“Yeahhhh!!! 그렇지!!! 오늘 네놈들의 눈물을 모아 치킨스톡으로…… 아, 미안해요 도아 씨. 뭐라고 했죠?”
“아니에요. 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보세요. 제발.”
“그래요? 아, 구현기 선수 타석이다! 응원해야죠!”
옆자리의 다저스 팬은 자기 나름대로 야구를 즐기도록 내버려 두기로 한 박도아는, 떨리는 심정으로 남자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선수 가족이나 여자친구에게 지급되는 좌석을 받았다면 여기보다 더 잘 보였겠지만.
아직까지 비밀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터라 그럴 순 없었다.
‘나 포스트시즌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줄 수 있지? 이번에 꼭 우승하고 싶어서 그래.’
구현기는 그렇게 말해줬지만.
인터뷰 자리에서도 연애 관련 질문을 쏙쏙 피해 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게, 자신을 배려해주기 위해서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허위 날조로 인해 갑자기 쏟아진 사람들의 관심이 두려웠으니까.
아직 사람들의 시선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한 명의 관중으로서 목청껏 응원을 보내주기로 결심했다.
“한 방 날려줘, Koo!!!”
따악―!
“아웃!” “아웃!”
비록 첫 타석에서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야!!! 지금 장난하냐?! 쓰리볼에서 그딴 공을 왜 건드려!!!”
친한 동생의 남자친구에게도 가차없는 옆자리의 분노한 다저스 팬에게서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박도아는 조용히 무선 이어폰을 꼈다.
* * *
시리즈 스코어 2대 0으로 앞선 상태에서 맞이한 3차전.
야심 차게 나간 첫 타석의 결과는 더블 플레이였다.
“포스트시즌 통산 첫 병살을 치고 돌아온 타자님이시다! 다들 박수!”
“꼭 그렇게 보이는 대로 휘둘러야만 속이 후련했냐?!”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이런 식으로 사람 놀려먹을 수 있는 것도 미리 쌓아놓은 승리 덕분이니, 좋게 생각해야지.
“악!”
“컥!”
[좋게 생각한다며 미친놈아.]
‘좋게 생각한다고 했지, 용서하겠다고는 안 했다.’
옆구리에 한국 급식들의 고유문화 G―Gun을 한 방씩 날려준 다음, 빈자리를 찾아 털푸덕 주저앉았고.
조금 전 유리한 카운트에서 나도 모르게 손대고 말았던 그 공을 떠올려봤다.
‘공의 거의 떠오르듯 들어왔어.’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 흔히들 얘기하는 공은, 특정 구종이라기보다는 회전수가 워낙 높아서 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는 포심 패스트볼이다.
[전에 만났을 땐 저 정도는 아니었지?]
‘그랬으면 기억을 해놨겠지.’
오늘 선발 등판한 투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3선발.
시즌 중반 홈 시리즈에서 이미 한 번 상대해본 적 있는 투수인데, 키가 크고 구속이 빨라 타이밍 맞추기가 좀 까다롭다는 걸 빼면 크게 인상 깊은 선수는 아니었다.
회전수의 향상이라 하면 으레 떠오르는 파인타르의 가능성도 아주아주 잠시 고려했지만.
2020년대 이후 파인타르 사용자를 쥐 잡듯 색출하기 시작하고서부터 그런 간 큰 선수는 없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저 투수는, ‘미스터 옥토버’의 영향으로 칼날처럼 예리해진 감각으로도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잘 긁히는 날이란 거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타자들은 X 됐다는 거지.
“스트라이크 아웃!”
켄이 파울 두 개를 커트했다가, 바깥쪽 살짝 애매한 코스에 루킹 삼진 판정이 내려지며 11구 만에 끝나버린 1회 말 공격.
그러나, 다저스도 마냥 기세에 밀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따악!
2회 초 선두 타자에게 투 볼로 밀렸지만, 3구로 먹음직스러운 프론트도어 슬라이더라는 미끼를 투척했고.
배트에 힘 좀 줄 줄 안답시고 까다로운 바운드를 일으키는 타구를 마중 나가서 깔끔하게 포구한 뒤, 그대로 1루를 향해 러닝 스로.
“아웃!”
“나이스, 다니엘! 원 아웃!”
“포스트시즌을 맞아 승리의 요정으로 전직하기라도 한 건가?!”
우리의 선발 투수님도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으면 좋았지, 절대 떨어지지는 않거든.
‘오늘 돌림판은 성공적이네.’
아마 감독님도 고민이 많았을 거다.
이번 시즌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패배 귀신이라도 쓰인 듯 등판하는 날마다 도통 이기지를 못했던 다니엘과.
뒷주머니에 내 사진을 넣고 다니면서부터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믿을맨으로 급부상하긴 했지만, 여전히 긁히는 날과 안 긁히는 날의 차이가 큰 아드리안 사이에서.
결국은 다니엘의 손을 들어줬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선택이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호투할 때마다 역전패를 당하는 그놈의 징크스가 문제지만, 그런 불경한 생각은 애초에 하는 게 아니지.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삼진 하나를 곁들여 삼자범퇴로 끝난 2회 초.
그렇게 경기 초반부는, 이번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치열한 투수전으로 전개됐다.
* * *
3회까지는 똑같이 타자들을 찍어 누른 양 팀의 선발 투수.
오히려 허용한 출루의 수만 놓고 보면 다니엘이 조금 더 준수한 피칭을 이어갔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정작 먼저 균열이 일어난 것 역시 다니엘이었다.
따아아아아악―!
[이 타구는! 다저 스타디움 우측 외야석에 떨어졌습니다! 스코어 1대 0! 이번 시즌 36개의 아치를 그리며 카디널스 홈런 1위를 차지한 체사레 조이스의 선제 솔로포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4회 초, 불의의 솔로 홈런을 얻어맞으며 0의 균형이 깨진 것.
하이 패스트볼을 자주 써먹는 투수에게 홈런은 세금이라는 걸 다니엘 본인도 알고 나도 알고 지금 막 홈런 배트를 수거해가는 배트걸도 알 테지만.
막상 홈런을 맞고 나니 멘탈에 데미지를 입었는지, 조금씩 볼의 비율과 투구 수가 함께 늘어나기 시작했다.
따악!
“아웃!”
1루수 클레망이 까다로운 타구를 처리한 뒤 커버에 들어온 다니엘에게 토스하면서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끝냈지만.
“수고했어, 다니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감독님은 칼 같은 교체를 단행했다.
앞선 두 경기에서 고작 3명의 불펜을 투입, 그것도 각자 15구 내외만 던지며 투수를 아꼈기에 가능한 선택.
물론 그것도 그건데.
‘다니엘의 승리가 자꾸 날아가서 문제라면, 애초에 승리투수 요건을 안 만들어주면 되겠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일단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니 인성이 개박살났다는 증거 아닐까?]
아무튼.
마리오―조쉬―고든―새뮤얼의 필승조 4인방이 나머지 5이닝을 쪼개서 막아내는 동안 다저스가 추가로 내준 점수는 단 1점뿐.
그렇다면 카디널스는 어떤가?
“스트라이크 아웃!”
투수 전원 불펜 대기라는 초강수를 뒀지만, 3선발이 대오각성이라도 했는지 뜻밖의 좋은 페이스를 보여주면서.
경기 후반부까지 투수를 그대로 이어 쓰는 선택을 했다.
따아아악!
“세이프!”
기본적으로 원래부터 상당히 괜찮은 포심에, 그보다는 좀 덜 괜찮은 슬라이더. 앞선 둘과 비교하면 상당히 아쉬운 두 종류의 체인지업과 안 던지는 게 나은 커브까지.
던질 줄 아는 건 많은데 사실상 투 피치로 돌려막다 보니, 갈수록 점점 공략당하기는 했는데.
“공이 좀…… 묘하게 안 뻗지?”
“다저 스타디움이 투수 친화 구장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이번 시즌 42개의 홈런을 때린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저건 그냥 투수가 잘 던지고 있는 거야.”
“안 물어봤어, R.H.”
오늘 컨디션 자체가 미쳐 날뛰다 보니, 안타를 허용하더라도 금방 병살이나 삼진을 잡아내며 실점은 허용하지를 않는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지어 나는 그 산발적인 안타조차 때려내지 못한 채, 3타수 무안타로 꽁꽁 묶였고.
병살, 땅볼, 삼진 하나씩. 아주 골고루도 당했다.
“Kooooo!!! 너 이런 놈 아니잖아!!!”
“2승 했으니까 안 간절하다 이거냐?!”
오늘 다저스 타자들이 삽질할 때마다 쏟아지던 홈팬들의 분노를 나 역시 피해 갈 수 없었지만.
따아아악―!
[3―유간을 빠져나가는 안타…… 가 아닙니다! 유격수 Koo의 슈퍼 다이빙 캐치! 1루 주자는 귀루하지 못하면서 더블 플레이! 이닝 종료! 오늘 등판이 당연히 포스트시즌 데뷔전인 루키 조쉬 먼로, 감격에 가득 찬 표정으로 Koo를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말이야. 박도현이 막 풀타임 첫 시즌부터 40―40하고, 나도 타자 전향 첫 시즌에 30―30하고 그러니까 말이야, 응?
좀 호사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언제부터 유격수가 타격에서 존재감 드러내는 포지션이었냐 이 말이야.
[명전 가고 싶다며? 그럼 둘 다 잘해야지.]
‘어허. 수비만으로 HOF에 입성하신 오즈의 마법사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계시는구만.’
[그럼 너도 13년 연속 골글 타던가.]
아무튼.
수비에서는 빅사이즈 유격수만이 해낼 수 있는 ‘한끗 차이로 안타 막아내기’를 마음껏 펼치며 차곡차곡 까임방지권을 적립한 끝에.
[STL 2 : 0 LAD]
카디널스에게는 경기를 마무리해야 할 타이밍, 다저스로서는 최후의 승부처.
9회 말,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이 시작됐고.
[와, 이게 이렇게 되네.]
내 앞에는 두 명의 주자가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