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19화 (119/200)

119. We are the Champion(2)

2037시즌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애매하게 잘하는 팀이다.

왜 학교 다닐 때 그런 애들 있지 않나.

공부는 반에서 10등 안에 들고, 친구가 특출나게 많진 않아도 사이 나쁜 애들도 없고, 나이 들어 청첩장 오면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시간 되면 가서 5만 원 정도만 내고 오는 그런 친구.

팀 연봉 규모나 관중 동원 등, 빅마켓 팀과 스몰마켓 팀을 나누는 지표에서도 항상 중상위권을 차지하는 팀.

그러다 보니, 프랜차이즈 스타를 놓치거나 선수 보강에 소극적인 편은 아니라도, 다저스나 양키스처럼 좋은 선수한테는 일단 들이대지는 않는 편이고.

선발 로테이션 5명 중 3명을 서비스 타임 3년 미만의 투수로 채울 정도니, 강팀의 조건으로 꼽히는 막강한 투수진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런 브레이브스에게도 코어 선수들은 있는데, 바로 주전 외야수로 활약 중인 개노답 3형제.

[다들 잘하는 양반들인데 왜 개노답이야?]

‘우리 입장에선 개노답 맞지. 어제 저 인간들 때문에 날려먹은 찬스가 몇 갠데.’

[이 타구는! 타구는! 넘어갔습니다! 스코어 3대 1! 이번 포스트시즌 제리 헤이즈택의 첫 피홈런이자 추격의 솔로포를 만들어낸 좌익수 뤼카 스킬라치! 38세 시즌에 30홈런을 넘긴 노익장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우리 팀의 클레망과 마찬가지로, 올해를 끝으로 브레이브스와의 장기계약이 끝나는 거포 좌익수 뤼카 스킬라치.

[Koo의 벼락 같은 스윙! 우측 라인을 따라 빠르게 흐르는 타구! 2루 주자 헨리 데이비슨은 홈인! 1루 주자까지…… 아아아! 우익수 넬슨 데스파이네! 그대로 홈을 향해 대포알 송구! 아웃! 이닝 종료! 2루 베이스를 밟은 Koo의 저 허탈한 표정을 좀 보세요!]

전반기까지만 해도 우리 팀의 말릭과 비등비등한 신인왕 경쟁을 펼치다가, 강점인 빠른 발과 어깨를 살려 매드무비급 수비 명장면을 찍어내며 앞서나간 우익수 넬슨 데스파이네.

[쳤습니다! 페어볼 사인! 좌익수가 빠르게 타구를 쫓아가지만 이미 3루 주자 홈인! 1루 주자도 홈인! 스코어 5대 4! 9회 초 역전 적시타가 바로 이 선수! 앤드류 매닝에게서 나왔습니다!]

전형적인 5툴 플레이어로, 내셔널리그 올스타 팀 주장을 맡았는가 하면, 나보다 한발 앞서 30―30을 달성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선점한 중견수 앤드류 매닝까지.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에서 다저스가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놓쳤던 건, 바로 이 선수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발 투수 2명 소모하고도 1차전 패배…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의 투수 운용, 이대로 괜찮은가?]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조금 다른 분석으로 내놓기도 했지만.

물론 팩트는 맞지. 팀의 에이스 제리와 4선발 아드리안까지, 두 명을 마운드에 올리고도 졌으니까.

그러나 이런 운용에 대해 이미 내부적으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제리는 결과와 무관하게 5회까지만. 뒤이어 아드리안이 컨디션 점검 차원에서 3~4이닝을 소화할 거다.”

디비전시리즈를 3연승으로 끝내며, 정규 시즌 이후 등판이 없었던 아드리안의 실전 공백이 길어졌고.

지난 등판에서 8이닝을 책임진 제리의 컨디션 관리도 해줄 겸, 일단 아드리안을 롱릴리프로 투입한 뒤 3~4일 휴식 후 다시 선발로 세우려던 게 감독님의 계획이었다.

제리와 아드리안이 각각 5이닝과 3이닝을 1실점씩으로 막아낼 때까지만 해도 성공적인 계획이라 생각했는데.

마무리 투수 새뮤얼이 투아웃까지 잘 잡아놓고 3실점을 하며 경기가 뒤집힐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반대로 브레이브스는 내야 할 점수를 내고, 막아야 할 때 잘 막았다.

비록 정규시즌과 디비전시리즈 내내 그랬던 것처럼, 기회를 만들어내고 살린 건 주전 외야수 3인방뿐이었지만.

어쨌든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은 다저스 선수들의 집중력 부족.

“선수들의 플레이가 아쉬웠다면, 그건 우리의 전략에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그러나, 감독님은 패장 인터뷰에서 납작 엎드리며 기꺼이 욕받이를 자처했다.

아마 설렁설렁 뛰거나 안일한 플레이를 한 선수가 있었다면, 감독님은 가차 없이 그 선수를 언급했을 거다.

성격이 좋은 거지, 성질을 못 내는 건 아니니까.

실제로 에인절스와의 인터리그 원정에서 벤이 부상당한 후 선수들의 나사가 빠지자, 쓰레기통을 내던지며 호통을 치기도 했고.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기에 선수들을 탓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브레이브스만큼 아웃카운트 하나하나에 절박했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당당하게 대답하기만은 힘든 선수들이 있을 거고.

그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다들 모였나? 빠진 사람 없지?”

챔피언십시리즈 2차전, 낮에 치러지는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이른 오전에 집합한 선수들.

감독님을 중심으로 정렬한 선수들 사이에서 나 홀로 조용히 웃음참기 챌린지를 하기 바빴다.

[너 뭐냐? 분위기도 별로인데 콧구멍은 왜 실룩거려?]

솔직히 분위기상 참고 있긴 한데 웃기잖아.

다들 한 덩치 하는 사내놈들인데, 마치 주인한테 혼나기 전 강아지들마냥 주눅 들어 있는 게.

그게 감독님의 인터뷰를 보고 느낀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전날의 패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내 인터뷰는 다들 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걸 보고 나한테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사람이 있다면 거수하도록.”

눈치만 보던 루키 몇 명이 어깨를 움찔하자, 베테랑들이 재빨리 옆구리를 찌른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걸 확인한 감독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군.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했을 거니까.”

뜻밖의 폭탄 선언에, 올해 막 콜업되어 아직 감독님의 성향을 모르는 루키들이 눈치를 살핀다.

우리 감독님의 철학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거다.

너희는 야구만 해라. 욕은 코칭스태프가 먹는다.

선수들이 외부에서 들려오는 잡음 때문에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 역시 감독의 역할이라는 거지.

“타자가 투수들 보고 대신 공 못 던져줘서 미안해하거나, 투수가 홈런을 못 쳐서 미안해하는 거랑 똑같은 짓이다. 야구도 지능이 높아야 잘하는 스포츠인데, 그런 멍청이를 어떤 감독이 쓰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는 감독님.

다들 감독님의 의도를 눈치채고 하나둘 웃음을 되찾던 그때.

분위기가 심각해질 때마다 나서서 풀어주곤 하는 R.H.가 손을 들고 나섰다.

“감독님! 질문 있습니다!”

“해봐.”

“Koo처럼 마운드에서 공도 던질 수 있고 홈런도 칠 수 있는 선수는 미안해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저 양반은 양심이 없나.

어제 내가 혼자 팀 타점의 절반을 책임졌는데.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야속한 감독님은 R.H.를 나무라기는커녕 실실대며 나를 지목했다.

“좋아, 그럼 본인한테 한번 물어보자고. Koo. 있으면 대답 좀 해봐.”

“여기 있습니다.”

“어제 경기에서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던 우리 팀 간판타자 R.H.가 방금 한 말 들었지? 2루타만 두 개 때린 자네가 어제 패배에 대해 미안해해야 한다는 것 같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전날 성적을 거론하며 약이라도 올려보려고 했더니, 감독님께 선수를 뺏겼다.

하긴 아무리 농담이라도 고참을 대놓고 저격하는 건 그림이 좀 이상하겠지.

그냥 적당히 한마디 던지며 빠져나가기로 했다.

“오늘 받은 정신적 피해보상은 연봉조정에서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감독님이 입을 다문다.

감독님뿐 아니라, 다들 조용히 나만 쳐다보고 있다.

이 분위기 뭔데. 내가 무슨 이상한 말한 것도 아니고.

이윽고 감독님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Koo, 대체 얼마를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아니…….

웃자고 한 소리에 분위기가 싸해지니, 오히려 당황스럽다.

내가 설마 진짜로 연봉조정 때 돈 내놓으라고 드러눕기라도 할 줄 알았나.

[니가 평소 남들한테 가차 없이 굴어서 이미지가 그렇게 박혔나 보지.]

그래, 뭐.

솔직히 나한테 기대했던 한마디가 이런 게 아니리란 생각은 든다.

근데 내가 클럽하우스 리더도 아니고. 팀원들 사기 끌어올리는 걸 왜 나한테 기대하나.

게다가 돈이 뭐가 나빠. 동기부여에 이만한 게 어딨다고.

[그럼 너 이번 연봉조정에서 구단 사정 생각해줄 생각이었냐?]

‘미쳤어? 당연히 아니지. 드러눕는 건 데릭이 해야지 내가 할 일은 아니라는 뜻인데?’

[그래, 너 참 위대하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놈이랑…….]

내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너는 구단한테 드러눕는 게 아니라 에이전트한테 드러누웠잖아. 장기계약 제안 받아들이겠다고.

너처럼 살다가는 호구 된다는 걸 내가 바로 옆에서 직관했는데, 내가 안 이러고 배기겠냐.

* * *

7전 4선승제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1차전 승리팀이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확률은 약 70%에 달한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서는 1차전, 그것도 상대 에이스가 등판한 원정 경기에서 귀중한 승리를 챙겼으니. 콧대가 구름까지 솟아오를 법도 했다.

홈으로 돌아가 위닝 시리즈만 거둬도 3승을 선점할 수 있으니까.

“오늘도 목은 깨끗하게 씻고 왔겠지?!”

“고마워, 다저스!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랑 ROY, MVP는 우리가 챙겨 간다!”

“우리도 양심이 있으니까 사이 영은 양보할게!!”

그래서였을까.

특유의 중독성 있는 응원가와 함께 도끼 모양의 스폰지 토마호크 촙을 흔들어대면서, 다저스를 살살 긁는 소리를 쏟아내는 원정팬들이나.

“어제 했던 만큼만! 딱 그만큼만 열심히 하자! 그럼 오늘도 이길 수 있어!”

“타석에서나 수비에서나 무조건 침착하게! 알지?”

경기 전 훈련에서 서로를 향해 목청껏 소리치며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브레이브스 선수들이나.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희망적인 말만 쏟아내고 있었다.

팀 이름에 아주 딱 맞는 모습이야. 아주 용기 있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1회 초 공격으로 경기 시작됩니다.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아이작 란드리. 지난 디비전시리즈 2차전에서 7과 3분의 1이닝 무실점으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며 윈나우 트레이드의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는 중입니다.]

오늘 경기 선발 투수 아이작은, 경기 초반 심판의 존을 파악하기 위해 코너웍에 신경 써서 던지는 편.

그러다 보니 존이 지나치게 좁거나 판정이 오락가락하는 주심을 만나면 경기 초반 볼넷을 내주는 일도 많다.

“베이스 올 볼스!”

바로 지금처럼.

1루 베이스를 밟고 선 상대 리드오프가 원정 덕아웃을 향해 포효하자, 작지 않은 환호가 뒤따라온다.

포스트시즌 들어 제리와 함께 선발 원투펀치를 이루고 있는 아이작에게서 시작부터 출루를 얻어내서인지, 경기 시작 전보다 훨씬 쌩쌩하게 돌아가던 희망회로였기에.

“아웃!” “아웃!”

제법 힘이 실린 타구가 1루수 직선타로 둔갑해 아웃카운트 두 개가 올라가고.

“스트라이크 아웃!”

풀카운트까지 가는 치열한 싸움 끝에 애매한 코스로 들어온 포심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으며, 브레이브스가 자랑하는 외야의 개노답 삼형제의 선봉, 넬슨 데스파이네가 삼진으로 물러났을 때도.

원정팬들은 주심에게 야유를 보낼 뿐, 선수들을 향한 굳은 믿음은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놈의 희망회로 한번 힘차게 잘도 돌아가네.

첫 이닝을 세 타자로 가볍게 정리했으니 이제는 공격에서 되갚아 줄 차례.

배트를 챙겨 대기 타석으로 향하려는데, 동료들로부터 장난스런 비난이 쏟아진다.

“잘해봐라, 황금만능주의자!”

“우리 팀 재정도 생각해야 하니, 진루타 정도만 치고 돌아오길 바랄게!”

“전 재산 사회에 환원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라!”

뭐 하나 건수만 잡으면 죽어라 놀려대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이 솔직하지 못한 놈들 사이에서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잘하고 와, Koo. 나는 네 마음 이해해.”

바로 오늘의 선발 투수 아이작 란드리.

그러자 동료들이 꿍얼거리면서도 입을 다문다.

위대하신 선발 투수님께서 내 말이 맞는다는데 뭐 어쩔 건데.

[쟤도 너랑 상황이 비슷해서 그런가, 끼리끼리 잘 어울리네.]

‘포스트시즌에 잘 던지는 투수는 몸값이 확 뛰니까.’

FA를 앞둔 시즌에 트레이드됐음에도 별 불만을 보이지 않았던 건, 다저스가 포스트시즌 진출이 유력한 팀이어서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올해는 아니어도 내년에 FA를 앞둔 입장.

만약 다저스에서 나를 붙잡을 의지가 있다면, 이번 연봉조정에서 서운한 소리는 안 나오게 할 거다.

따아악―!

“세이프!”

정규시즌 동안 브레이브스의 3선발을 맡았던 오늘의 선발 투수 역시 팀의 긍정적인 분위기에 감화되기라도 한 듯, 리드오프 조지를 상대로 과감한 승부에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 못 던지던 위력적인 공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니, 타석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아는 조지에게 공략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 천만 원 벌어갈 시간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올해 스플릿 계약을 맺었지만, 시즌 내내 빅리그에 잔류하면서 500만 달러의 연봉을 고스란히 받았는데.

시즌 초반 대타나 백업 역할을 수행하느라 규정타석을 조금 넘기는 데 그쳤으니, 대충 500타석이라 치면.

타석 하나에 1만 달러 꼴이더라고.

[그런 계산법이 세상에 어딨냐? 니가 무슨 지명타자야?]

박도현이 황당해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물론 세금과 에이전트 수수료를 떼면 실수령액은 확 깎이는 거 나도 알지. 게다가 원래부터 수비 기여도가 높은 유격수 포지션이란 것도 고려해야 하고.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그만큼 이 타석 하나에 구단이 투자하는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거.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돈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도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이럴 줄 알았어!!! 네가 해낼 줄 알았다고!!!”

“여자친구가 UCLA 다닌다며?! 그럼 최소한 졸업할 때까지는 LA에 있어야겠네!!!”

“프런트가 너를 놓치는 등신 같은 짓을 하면 다신 야구 보러 안 올 거야!!!”

천천히 베이스를 도는 동안, 박수와 함께 리듬에 맞춰 쏟아지는 Koo 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전통적인 응원법 토마호크 촙이랑 리듬이 비슷하다고 인터넷에서 말이 좀 나오는 것 같던데, 원조 앞에서 보여주니까 느낌이 참 각별하다.

희망회로가 개박살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투수와 1초 정도 눈을 마주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덕아웃으로 향했다.

용기 좋지. 나도 좋아해.

하지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바로 물질적 보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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