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We are the Champion(3)
[NLCS 2차전은 4대 2의 스코어로 다저스가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이날 경기의 MVP는 바로 이 선수, Hyun―Ki Koo. 3타수 2안타 1홈런 1볼넷 2타점 2득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선발 투수 케이시 빈을 상대한 첫 타석. 3구째 포심을 받아 때려 우월 홈런을 만들어내는 모습입니다. 타구 속도 110mi/h(약 170km/h).]
[아무리 정규시즌 내내 몸쪽 승부에 강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고작 공 하나에서 하나 반 정도 밀려 들어간 저런 공을 건드려서 홈런을 만들어냈을 줄은 투수도 몰랐을 겁니다.]
[선발 투수의 자신감을 완전히 꺾어놓는 한 방이었죠. 이 홈런 이후 브레이브스는 경기 내내 쫓겨 다녔습니다. 야수들의 집중력 있는 플레이가 아니었다면 대량 실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반대로 다저스는 선발 아이작 란드리가 7이닝을 실점 없이 막아주었습니다. 다만 두 명의 불펜이 1이닝을 1실점씩 하며 정리하긴 했지만, 경기 내용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건 다저스의 숙제가 될 겁니다.]
[특히 마무리 투수 새뮤얼 브라운이 1사 1, 2루의 위기 상황을 만든 게 뼈아팠죠. 유격수 Koo가 앤드류 매닝의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지워내며 더블 플레이로 경기를 끝내지 않았다면, 이 경기의 승패는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타석에서는 홈런을 포함한 멀티 히트, 수비에서는 안타마저 지워내는 호수비. 최근 파파라치에게 연인과의 사진이 찍히며 공개 연애를 선언하면서부터 오히려 공수 양면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Koo. 1대 1로 균형을 맞춘 챔피언십시리즈의 키 플레이어는 바로 이 선수일지도 모릅니다.]
* * *
챔피언십시리즈 스코어를 1대 1로 만들고, 애틀란타로 향하는 전용기 안.
나는 종노릇을 자청한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호강을 누리고 있었다.
4번 타자의 중책을 맡았음에도 3타수 무안타 1볼넷에 그친 R.H.나, 팀의 승리를 날려먹을 뻔했던 마무리 투수 새뮤얼 등등.
“비행기 안이 건조해서 그런가? 목이 마르네.”
“우리 주전 유격수님께서 목이 마르시단다! 냉큼 물을 대령하지 못할까!”
“여기 있습니다! 얼음까지 띄워서 가져왔습니다!”
돈미새니 뭐니 야유를 보내던 선수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걸 보니, 무척 기분이 좋다.
그럴 만도 하지.
선제 투런에 경기를 끝내는 호수비까지 해내면서, 브레이브스 쪽으로 흘러가던 흐름을 완전히 끊어냈으니까.
그러니까 은근히 선후배 관계에 빡빡한 메이저리그에서 이렇게 마음껏 활개 치고 다닐 수 있지.
“얼음 개수가 짝수라니, 상서롭지가 못하구나. 다시 가져오너라.”
“우리 홈런 타자님 강냉이랑 이 얼음 중 뭐가 더 단단한지 체험해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냥 드십시오!”
“넵.”
물론 깝치는 것도 선을 잘 타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조용히 입 다물고 베테랑들이 가져다준 얼음물을 홀짝이면서, 브레이브스를 분석한 리포트를 읽었다.
‘할 만은 한데,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이 안 들어.’
선수들이 정규시즌 내내 기록한 전반적인 스탯이나, 정규시즌 상대전적, 믿음직한 원투펀치의 유무 등등.
전문가들이 다저스의 우세를 점치게 했던 여러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지난 두 경기 모두 끝날 때까지 승패를 확신할 수 없는 접전이었다.
[별 뾰족한 수가 있나. 그냥 우리 베테랑들 컨디션이 나아지길 바라야지.]
챔피언십시리즈 들어 유독 부진한 R.H.나 새뮤얼도 그렇고. 클레망도 좀 심각하지. 투런포를 날린 디비전시리즈 1차전 이후 4경기에서 17타수 3안타니까.
선수들의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야 언제든 벌어지는 일이지.
다만 그게 포스트시즌이라서 문제일 뿐.
검증된 주전을 빼고 후보를 넣어보기에 적합한 무대는 아니니까 더더욱.
‘그래도 자기가 안 풀린다고 후배들한테 성질부리는 베테랑은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지금처럼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상황에서 내분까지 일어났으면 그야말로 답이 없지.
특히 괴팍한 양반들이 한둘이 아닌 투수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없는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건 로버트가 오랫동안 투수조 조장으로서 분위기를 휘어잡은 덕분이지만.
작년의 내가 빅리그에 아예 올라가지도 못한 채 재활만 하는 동안, 다른 사람이 선발 로테이션을 채웠던 것처럼.
누군가가 흔들릴 때는 내가 그걸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어야지.
그게 팀플레이의 기본이니까.
……말은 이렇게 했는데.
챔피언십시리즈 3차전에서, 정말로 그런 상황이 나오고 말았다.
* *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홈구장 트루이스트 파크는 파크 팩터 기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중립 구장이다.
투수 친화 구장이나 타자 친화 구장, 뭐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뜻.
여기에 오늘 다저스의 선발 투수 다니엘 슈미트 역시 승운은 극악이었지만, 성적 자체만 놓고 보자면 3선발로서 무난한 시즌을 보낸 선수.
원정이라는 디버프는 있어도 평소 하던 대로 5이닝 정도는 안정적으로 책임져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따아아아악―!
[가운데로 몰린 공을 때려낸 이 타구가! 트루이스트 파크의 넓디넓은 좌중간에 그대로 떨어집니다! 좌익수 말릭 케이타가 황급히 공을 쫓아가는 사이 1루 주자 홈인! 타자 주자는 2루에 멈춰 섭니다!]
상위 타선부터 하위 타선까지 골고루 안타를 허용하면서, 그중 절반 이상이 장타라는 최악의 피칭.
내야수들이 반갑지 않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외야수들만 익숙하지 않은 원정 경기장을 죽어라 뛰어다녔다.
내야의 총사령관이라고 쓰고 노예라고 읽는 유격수인 내 유니폼에 아직까지 뽀송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만 봐도 말 다 했지.
하이 패스트볼을 주 무기로 삼는 투수에게 장타는 세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다.
결국 투수 코치와 함께 내야수 전원이 마운드에 모였고.
“하이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들어.”
그 덤덤한 고백에, 다들 식은땀을 흘렸다.
[내가 투수를 안 해봐서 실감이 잘 안 나는데…… 혹시 지금 큰일 난 거야?]
이 와중에 눈치 없이 물어보는 박도현.
니가 그러고도 타자냐고 쏘아붙이려다, 내 입만 아프지 싶어 관뒀다.
이 미친놈은 살아생전 상하좌우 어느 코스로 오던 똑같이 잘 쳤으니까.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타자를 속이는 건데, 안 속게 됐다는 거야.’
지나치게 높게 들어가면 애초에 타자가 배트조차 안 내고.
낮게 들어가면 그냥 존 안에 몰린 패스트볼이나 마찬가지.
여기에 본인 결정구가 말을 안 듣는다는 극한 상황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물론 해결법은 있다.
일단 구사율을 줄이고, 카운트에 여유가 있을 때 틈틈이 던져가며 다시 영점을 잡는 것.
매 이닝 장타를 허용하고 점수를 내주긴 했지만, 3회까지는 그런 식으로 어찌어찌 감당은 했지만.
따아아아아악―!
[쳤습니다! 다시 장타 코스! 그러나 루카스 에머런이 빠르게 타구를 담아내며 타자 주자 1루로 귀루! 하마터면 오늘 경기만 4번째 2루타를 허용할 뻔했습니다!]
메이저리그 평균을 아득히 뛰어넘는 선구안을 자랑하는 브레이브스의 테이블세터진은 이른 카운트에서도 치기 좋게 몰린 하이 패스트볼을 놓치지 않았고.
따아아아아아악―!
[담장을 직격하는 타구! 펜스 플레이가 이뤄지는 동안 2루 주자 홈인! 1루 주자는 눈치를 보다 3루에서 스톱! 존 안을 파고드는 커브볼을 공략해낸 4번 타자 뤼카 스킬라치! 1타점 적시 2루타를 터뜨립니다!]
브레이브스의 코어 선수라고 볼 수 있는 외야수 3인방은 애초에 굳이 실투가 아니더라도 질 좋은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타자들이었다.
[아, 다니엘 슈미트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3과 3분의 2이닝 4실점. 두 명의 책임 주자를 남겨둔 채, 다저스의 두 번째 투수 마리오 로드리고에게 마운드를 넘깁니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는 2경기 등판해 2이닝 무실점을 기록 중이죠.]
점수 차가 제법 벌어진 뒤였지만, 손쓸 수 없이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필승조 마리오가 등판했다.
타석에는 5번 타자 앤드류 매닝.
30―30을 달성한 데다, 수비에서는 장타를 수도 없이 지워대는. 브레이브스 개노답 외야수 3형제의 최종보스.
물론 그런 앤드류 매닝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좌완 파워 피처의 몸쪽 패스트볼에는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어한다는 것.
만약 이번 아웃카운트 하나만 처리해준다면, 그다음부터는 다시 차근차근 쫓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담아 투구를 지켜봤지만―
따아아아아아아악―!
감독님은 잠시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리오가 이번 시즌 선발 로테이션에서 탈락한 이유는, 다름아닌 불안정한 제구 때문이었다는 걸.
단숨에 3점을 도망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다저스는 이번 포스트시즌 들어 처음으로, 패배를 염두에 둬야만 하는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 * *
“Koo. 자네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나로서도 정말로 쉽지 않지만, 오늘 마운드에 올라갈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7회 초 공격이 진행되는 도중, 감독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현재 스코어 10대 2.
상대 투수도 팀의 4선발인 만큼 매 이닝 출루를 허용하긴 했지만, 득점권 찬스 때마다 맥없이 물러나거나 호수비에 막히면서 손쓸 도리 없이 벌어진 점수.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8회 말 가비지 이닝 정도를 소화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Koo. 아무래도 지금이 자네가 올라갈 타이밍 같다.”
7회 말 수비가 한창 진행되던 도중.
투수 코치의 부름을 받아, 유격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옮겼다.
외야 쪽 불펜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로 뒤편에서 걸어오다 보니, 마운드를 비우는 투수와 잠시 인사를 나눌 여유가 생겼고.
“잘 부탁한다, Koo.”
7회 말 1사 만루의 위기를 만들어놓고 내려가는 투수는, 이번 포스트시즌 내내 불펜만 지키다 처음으로 등판했던 로버트 켈리.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로버트를 선발 로테이션에서 탈락시켰던 다저스 코칭스태프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는 지금 상황.
심지어 그 아웃카운트 하나마저도 투수를 상대로 잡아낸 삼진이었으니.
‘만루 상황에서 올라와 보는 게 처음이었던가?’
빅리그 콜업 첫해에는 불펜으로 잠깐 뛰었다가, 그 후에는 쭉 선발이었으니까.
내가 만루를 만들어서 다음 투수한테 넘겨준 적은 있어도, 만루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등판해본 기억은 없다.
‘해볼 거면 지금 해보는 게 낫지.’
이미 승부가 어느 정도 넘어가면서 실패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 지금.
양심이 있으면 한 방 맞아도 나한테 뭐라 하면 안 되지. 오늘 경기에서 내가 한 게 얼만데.
“타자 위치로!”
타석에는 오늘 4타수 2안타로 활약했던 브레이브스의 리드오프.
장타력은 좀 부족하지만, 선구안이 좋고 발이 빠른 우타자. 물론 지금은 만루니까 발은 크게 상관없지만.
투수 시절 나와 3년 가까이 호흡을 맞춰왔던 포수 헨리가 사인을 보내왔고.
바로 세트 포지션으로 투구에 들어갔다.
“볼!”
바깥쪽 살짝 높은 포심.
나름 먹음직스럽게 던졌다고는 생각했는데, 선구안이 좋은 타자답게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근데 뭐 큰 기대를 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선발 출신이라 긴장했는데 별거 아니네’, 뭐 이런 생각만 심어줬다면 충분하다.
“파울!”
바로 이렇게.
바깥쪽 슬라이더에 망설임 없이 손을 대는 걸 보면, 얼추 의도대로 된 것 같다.
나름 잘 긁혔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든 커트는 하는 걸 보면, 우리 팀 리드오프 조지처럼 타석에서의 대처 능력은 뛰어난 듯하지만.
“스트라이크!”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공을 다 잘 칠 수는 없는 법.
바깥쪽 공을 연달아 상대하며 타이밍을 익혔을 타자에게 몸쪽 꽉 차는 포심을 선물하니, 아예 손도 못 댄다.
심판한테 뭐라 궁시렁거리다 인상 팍 쓰는데, 안 봐도 비디오다. 헨리가 이빨로 속 좀 긁어놨겠네.
백날 항의해봐라. 오늘 종일 이 코스 잡아주는 걸 내가 계속 지켜봤는데.
아무튼 1―2. 투수의 카운트.
머리가 아주 복잡할 거야. 말 그대로 귀신에 홀린 듯 카운트가 몰렸겠지.
포심 봤고. 횡 방향 슬라이더 하나 봤고.
근데 나머진 아직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어떡하나.
서클체인지업이야 오른손으로 던지고 있는 지금은 효과가 별로니 패스한다 쳐도.
결정구인 커브는 아직 구경도 못 해봤을 텐데.
쐐애애액!
전력분석원이 월급루팡 짓을 하는 막장 팀이 아니라면, 이번 시리즈 동안 내가 투수로 등판할 가능성을 분명 고려했을 테고.
그렇다면 투 스트라이크 이후 커브 구사 비율이 높다는 것도 타자의 머릿속에 당연히 있겠지만.
후우우웅!
“스트라이크 아웃!”
결정구가 괜히 결정구겠냐고.
워낙 낙폭이 크다 보니 카운트 잡으려고 집어넣는 공도 타이밍 잡기를 힘들어하는데, 지금처럼 아예 훅 떨어트리면 손도 못 대는 거다.
뜨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며 물러나는 타자에게는 신경 끄고, 대기 타석에서 막 걸어오는 2번 타자에 집중했다.
앞선 1번 타자와 똑같은 우타자. 파워가 좀 더 세고 선구안은 조금 모자란 걸 빼면, 플레이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지만.
치명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다.
“스트라이크 아웃!”
종 방향 변화구, 그중에서도 커브에 약점을 보인다는 것.
대놓고 존 안에 집어넣는 커브에도 헛스윙을 한다?
별 수 있나. 떨공삼이지.
“Koo!!! Koo!!! Koo!!! Koo!!!”
“미쳤어!!! 1사 만루에서 연속 삼진이라니!!!”
패색이 짙어지자 많이들 빠져나가 썰렁해진 원정팬 응원석이 다시 떠들썩해지는 가운데.
덕아웃 앞쪽에서 도열해 맞아주는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감독님이 흡족한 미소와 함께 다가온다.
“고생 많았다, Koo. 정말 기대 이상이었어.”
“하하하. 감사합니다.”
“미리 데이터를 숙지해뒀던 건가? 상대가 약점을 보이는 곳으로 잘도 집어넣던데.”
“네, 그래야죠. 포스트시즌이잖아요.”
“그렇군. 그 노력을 8회 말에도 잘 살려주길 바란다.”
“네…… 에?”
말꼬리를 올리는 사이 급 바쁜 척하며 도망가버리는 감독님.
아무래도 우리 감독님은 오늘 경기에서 더 이상 투수를 소모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투수를 쓰기 싫다면, 내야수를 쓰면 될 것 아닌가?
완전 마리 앙투아네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