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We are the Champion(5)
[LAD 7 : 10 ATL]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2승 선착! 그러나 기세등등한 건 다저스 쪽?]
[챔피언십시리즈에서 깜짝 구원 등판한 ‘투수’ Koo, 1.2이닝 5K 완벽투! 이젠 ‘KKKKKoo’라고 불러야]
[브레이브스, 막판 뒷심 부족에 진땀 흘리다! 9회에만 ‘타자’ Koo의 그랜드슬램 포함 5실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감독, “경기 후반 로스터 운용에 대한 팬들의 성토를 가슴 깊이 새기고, 홈에서 월드시리즈 티켓을 얻어내겠다.”]
[LA 다저스 감독, 경기 소감 묻는 기자에 한마디로 답변! “LA에서 만납시다.”]
양 팀 감독의 인터뷰만 보면 누가 이기고 진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9회 초 내가 때려낸 그랜드슬램에 힘입어 2대 10에서 7대 10까지 쫓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패배.
그렇다고 해서 그 홈런 한 방이 고작 스탯 세탁용에 그친 건 아니다.
상대는 마무리 투수를 급히 준비시켜 올려야 했고, 충분히 어깨를 데우지 못했던 투수는 1점을 더 내주면서 반갑지 않은 홀드를 챙겼다.
그 위기 상황을 초래한 것이, 이번 시즌 후반기 들어 호수비를 남발하며 브레이브스 외야진의 한 축을 담당한 넬슨 데스파이네였기에 더 타격이 크겠고.
그리고 무엇보다, 브레이브스가 자랑하는 외야수 클린업 트리오 중 두 명이 나한테 삼진을 당했지.
내가 투수 출신이라는 건 어지간한 야구팬이라면 다 알지만, 어쨌든 로스터에는 내야수로 올라가 있으니.
[브레이브스 중심 타선, 마운드에 오른 내야수에게 꽁꽁 묶이다!]
뭐 이런 식으로 살살 긁는 기사를 써도 반박 못 하는 거다.
실제로도 그렇게 됐고.
심심할 때마다 자기 팀 기사 체크하는 선수들이 꽤 있는데, 브레이브스에 그런 놈들이 최대한 많았으면 좋겠네.
[너 진짜 그 놀부 심보 못 고치다가는 나중에 안 좋은 꼴 볼 거다.]
‘너 같은 놈도 멀쩡히 사회생활 했는데 나라고 문제 있겠냐.’
박도현이랑 투닥거리면서 도착한 이곳은 원정 숙소 근처 브런치 카페.
지금은 아침 루틴인 러닝을 마치고 경기장에 나가기 전 잠시 붕 뜬 시간.
원래대로라면 그날 컨디션에 따라 방에서 좀 더 쉬거나 일찍 출근하는 등 자유롭게 보내지만, 오늘은 만날 사람이 있다.
‘그나저나 그놈은 지가 불러 놓고 왜 답장도 안 하냐. 불러도 꼭 지 같은 곳으로 부르고 말이야.’
[저기 쟤 아냐? 저쪽 구석자리.]
박도현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접시 위에 팬케이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와구와구 먹고 있는, ‘나 운동선수요’ 하고 광고하는 듯한 거구의 남자.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뚱한 표정으로 손짓한다.
“먹고 싶으면 너도 따로 시켜.”
“너나 먹어라.”
지는 시즌 끝났다고 벨트 풀고 먹어대는 거 보소.
대충 차 한 잔 주문하고 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왜 불렀냐?”
사실은 왜 왔냐는 질문이 더 어울리지. 같은 동부지구라고 해도 필라델피아랑 애틀란타가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근데 뭐라고 대답할지 무서워서 그렇게는 못 물어보겠더라.
“그전에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않아?”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이 미친놈이 초면부터 나한테 집적거렸던 건 내 몸에 박도현의 영혼이 들어 있다는 루머를 진지하게 믿는 똥멍청이라서인데.
박도현의 동생과 내가 연인 사이라는 게 다 까발려진 이상, 그게 아니라는 걸 드디어 이놈도 알았겠지.
“뭐, 내 여자친구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야?”
이놈한테 쓸 시간이 아까우니 그냥 직구로 꽂아버렸다.
사실 오늘 굳이 이 자리에 나온 게, 이걸 계기로 이놈이 나한테 관심을 끊으면 메이저리그 생활이 한결 쾌적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지금까지 자기를 속였냐고 길길이 날뛰면 좀 귀찮아질 수도 있겠는데. 그럴 거면 이런 샤방샤방한 가게로 불렀겠냐고.
근데, 이놈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친놈이었다.
“뭔 소리야. 지금 그거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
“어……?”
“왜 내 SNS도 전화도 싹 다 차단했어? 그것 때문에 내가 앤드류한테 부탁까지 해가면서 연락한 거 아냐.”
안 그래도 어젯밤 앤드류한테 사정을 전해 듣고 나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친하다지만, 월드시리즈 티켓 걸고 싸우고 있는 상대 팀 선수 좀 연결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말이 되냐고.
“평소에도 그래. 늘 내가 먼저 연락하지. 그래도 참았는데 이젠 차단까지 해?”
“어, 그건 포스트시즌이니까 집중 좀 하려고.”
“미안하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지금 이런 행동들……?”
“됐어. 넌 항상 이런 식이야.”
속으로 조용히 박도현을 불렀다.
‘니 말이 맞았다. 오늘 제대로 안 좋은 꼴 당했네.’
왜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시커먼 사내놈한테 이딴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하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차단한 건 미안하고. 나 진짜 시간 별로 없으니까 그거 말고 할 말 없으면 다음에…….”
“파드리스전에서 투수로 등판하고 나서부터 Park의 여동생과의 목격담이 늘어나기 시작했지.”
더는 못 들어주겠어서 일어섰더니 갑자기 크리스토퍼의 태도가 바뀐다.
턱 치켜들고. 여유로운 미소를 띤. 자기가 엄청 똑똑한 줄 아는 사람 특유의 그 X 같은 태도.
슬프게도 이 거지 같은 모습이 나한테는 더 익숙하다.
“얼마 전에 네 애인이 누구인지 밝혀졌을 때는 나도 모르게 조금 평정을 잃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더군.”
“혹시 또 헛소리할 거면 결론만 말해주면 안 될까?”
“여전히 냉정하네. 뭐, 좋아. 아무튼 나는 새로운 가설을 세웠어.”
그러더니 포크로 내 심장 쪽을 가리키는 크리스토퍼.
이 못 배워먹은 새끼가 어디 사람한테 날붙이를 들이밀어.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의 몸 안에 두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
가설 좋아하네. 확 가설도로에 묻어버릴라.
저번엔 메이저리그에 강령술을 끌어들이더니, 이번엔 이중인격이냐?
[설마…… 내가 너의 환각이란 걸 저놈이 눈치챈 건가?]
‘제발 여기서 더 긁지 말고 팬케이크나 마저 처먹고 있어.’
살면서 박도현만큼 사람 짜증나게 만드는 놈은 다시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미국 땅이 넓긴 넓어.
“갑자기 제구를 되찾고 투수로 복귀한 것도, Park의 여동생과 연애를 시작한 것도, Koo가 네 안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면 다 설명이 되지.”
“뭐래 등신이.”
“그건 한국어인가? 어쨌든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Park이 아니게 되더라도 우리 사이에는 아무 문제 없을 거란 말을 하고 싶었어. 설령 Park이 너에게서 영영 떠나가더라도, 그게 그가 원하는 바라면 도와주고 싶고.”
그럼. 우리 사이에는 문제가 없지. 문제는 너니까.
[하나도 안 간단한데. 넌 이해 됐냐?]
‘아니. 근데 또 내내 헛다리 짚다가 목적 이루면 떠난다는 것만 맞추고 난리야. 짜증나게.’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강령술사에서 심리학자로 전직했다는 아주 유용한 정보도 얻었고, 차도 다 마셨으니.
슬슬 일어나려고 타이밍만 재고 있는데, 다시 쾌활해진 태도로 입을 여는 크리스토퍼.
“우리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작은 선물을 주고 싶은데. 물론 두 가지 조건이 있지만 말이야.”
“뭔데 또. 필리 치즈 스테이크라도 포장해 왔냐?”
“그건 아니고. 첫 번째 조건은 내 연락처 차단 전부 풀어주는 거.”
첫 번째 조건부터 벌써 들어주기 싫은데.
“두 번째 조건은, 네 증오스러운 팀원들에게 발설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거야.”
그런데, 두 번째 조건은 조금 솔깃하다.
다저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건, 그놈의 ‘선물’이란 게 팀에 도움이 될 만하다는 뜻이니.
“내가 브레이브스와 같은 지구 팀 소속이라는 건 알지?”
“알지 그럼.”
“그럼 팀의 코어 선수들에 대해서도 적어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효과 좋은 보약을 억지로 먹는 게 이런 느낌일까.
진짜 싫은데 어쨌든 나한테 확실한 도움이 되니까, 도저히 끊을 수가 없는.
“메뉴판 좀 다시 주시겠어요?”
결국 점원을 불렀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배라도 채워야지.
* * *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4차전.
트루이스트 파크의 원정팀 클럽하우스로 하나둘 나타나는 다저스 선수들의 얼굴은 다들 밝았다.
비록 전날 패배하며 시리즈 스코어 2대 1로 몰렸지만, 막판에 경기력을 폭발시키며 위닝 멘탈리티를 제대로 다진 덕분이겠지.
지금처럼 주전 선수들이 좋은 페이스를 되찾지 못할 때, 백업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증명했고.
“안녕, Koo! 도대체 크리스토퍼 그놈이랑은 또 어쩌다 만난 거야? 공개 연애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한눈을 팔아?”
물론 그딴 건 전혀 신경도 안 쓰고, 남 놀려먹을 생각만 가득한 놈도 있지만.
“안녕, 랜디. 나한테 한 번만 더 그딴 농담을 하면 오늘은 마운드에서 네 불알을 던져버리겠어.”
“어, 저기 그게.”
“오른쪽? 왼쪽? 선택권은 줄게.”
웃음기를 싹 뺀 내 반응에 재빠르게 내빼는 랜디.
루키 포수 브레이든이 스프링캠프 때 자기 동료를 갈구던 표현이 인상 깊어서 빌려봤다. 후배한테도 배울 건 배워야겠더라고.
[한 시간 정도밖에 안 있던 것 같은데. 결국 사진이 다 퍼졌네.]
‘당연한 거 아니냐?’
크리스토퍼와 헤어져 트루이스트 파크로 오는 동안, 둘이 브런치 카페에서 동석하는 모습은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프라이빗 룸에서 만났으면 모르겠는데. 그놈이랑 딱히 단둘이 있고 싶은 것도 아니라서.
이왕 사진도 찍혔으니, 브레이브스에 ‘저놈들이 왜 여기서 만나냐’ 뭐 이런 생각에 정신 팔리는 놈이라도 나왔음 좋겠네.
[결국 그놈이 말한 조건대로 다른 팀원들한테는 말 안 하기로 한 거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지.’
정보랍시고 알려줬던 게, 이미 널리 알려져서 딱히 가치가 없는 것들, 신빙성에 조금 의심이 가는 것들, 그 와중에 쓸만해 보이는 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거든.
자기가 겁나 똑똑한 줄 알지만 실제론 딱히 그렇지도 않은 크리스토퍼다웠다.
[그나마 쓸만해 보이는 거? 그게 뭔데?]
실내 훈련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향하는 길에 박도현이 물었다.
‘쓸만하다고는 해도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 확신은 없는데, 일단은…….’
덕아웃에 도착해, 먼저 그라운드에서 훈련하고 있는 홈팀 브레이브스 선수들을 살폈다.
3차전에서 이겼음에도 경기 내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어서인지 오히려 어제보다 경직된 모습.
“괜찮아, 괜찮아! 자기 페이스대로만 하자!”
그나마 팀의 캡틴이자 주전 중견수 앤드류 매닝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끌어올리려고 리액션 머신을 자청하고 있는데 쉽진 않아 보인다.
[난 진짜 살아 있었으면 캡틴은 못 됐을 것 같다.]
‘나한테 시켜주면 로버트 스타일로 조져놓을 순 있는데.’
그렇게 선수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쳐다보며, 선수별 데이터와 지난 경기들에서의 모습을 떠올려보고 있는데.
[어? 쟤 뭐냐?]
숏바운드 타구 처리 연습을 마치고 돌아서는 선수들이 이쪽을 쳐다봤는데.
다들 황급히 시선을 돌리거나 딴청 피우는 와중에 유독 한 사람이 계속 쳐다본다.
전날 나한테 삼진을 당했던, 브레이브스의 3번 타자이자 주전 우익수 넬슨 데스파이네.
‘지가 삽질해놓고 왜 나한테 화풀이야.’
속마음을 숨기면서 너그러운 미소로 화답해줬는데,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집요하게 쳐다본다.
이 느낌 뭔가 좀 익숙하다 싶어 머리를 굴려봤더니, 반갑지 않은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크리스토퍼.’
필리스와의 홈 3연전에서 처음 그놈과 마주쳤을 때,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시선을 떼지 않았었지.
그런 미친놈인 줄 진작 알았으면 상대 자체를 안 했을 텐데.
설마 넬슨 저놈도 같은 과인가 싶어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하려는데, 자세히 보니 좀 다르다.
조금 더 악의나 오기 같은 게 엿보인다고 해야 하나.
‘써먹을 수 있겠는데?’
[뭐가?]
‘크리스토퍼 그놈이 알려준 팁.’
넬슨 데스파이네의 약점.
자기가 라이벌로 찍은 선수만큼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승부욕을 불태우곤 하는데.
그게 지나치면 이성적이지 못한 플레이가 나온다는 것.
‘어린애 상대로 도발해서 페이스 무너뜨리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저렇게 먼저 나서서 적의를 드러내 주면 나야 땡큐 베리 감사지.
네가 먼저 걸어온 싸움이다. 악으로 깡으로 덤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