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We are the Champion(6)
넬슨 데스파이네는 자존심이 강한 선수다.
대학 졸업 후 1라운드 전체 10번으로 지명되어, 마이너리그 3년 차 가을에 처음 빅리그 무대를 밟았고.
바로 이듬해인 올해 풀타임 주전으로 도약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가면서 그런 성격이 더욱 확고해졌다.
한 예로, 올 시즌 초 타격 코치가 배트의 스윗 스팟에 공을 제대로 맞히기 위해 타격 폼을 약간 수정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한 적이 있었다.
‘이번 시즌은 수비력과 가능성 위주로 볼 테니 상관없지만, 앞으로의 성장을 위해 고려해보는 건 어떤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던 넬슨은 한마디로 대답을 끝냈다.
‘그렇군요.’
그러고는 원래의 타격 폼을 그대로 유지하며 첫 풀타임 시즌인 올해 25개의 홈런을 만들어냈다.
그만큼 고집도 세고, 선수로서의 자존심도 강한 넬슨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시선이었다.
물론 그보다 메이저리그에서 훨씬 오랫동안 활약해온 선수들과의 비교마저 불쾌해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경력의 선수들 사이에서는 무조건 앞서가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였을까.
전날 경기 8회 말, 유격수를 마운드에 올린 다저스에게 야구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한 수 가르쳐주라는 코치의 응원을 받으며 선두 타자로 나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뒤.
그날 밤 욕조에 몸을 담글 때까지의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나 삼진당한 거 맞나? 1년 넘게 빅리그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타자로 돌아오더니 다시 공을 던진 지 고작 3경기째인 놈한테?’
정말로?
저 투수, 아니 유격수한테?
인터넷에는 자신과 팀을 은근히 조롱하는 기사들과 대놓고 조롱하는 댓글들이 넘쳐났지만, 넬슨의 분노는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직 전날 실망스러운 플레이를 했던 자기 자신. 그리고 구현기를 정조준할 뿐.
‘저 새끼…….’
그라운드에서 훈련하던 도중, 덕아웃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구현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 그래도 부글부글 끓던 속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넬슨, 괜찮아? 무슨 문제라도 있어?”
옆에서 지켜보던 팀의 리더 앤드류 매닝이 등을 툭 치며 물었다.
사람은 좋은데 눈치가 없어서 짜증난다는 말을 자주 듣는 앤드류지만, 적어도 이 어린 후배의 심기가 영 좋지 않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아, Koo는 벌써 저기 나와 있네. 하여튼 되게 성실한 친구라니까. 그래서 더 까다로운가?”
전날 브레이브스를 괴롭혔던 선수가 눈에 들어와서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넬슨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까다롭다고요? 저노…… 저 선수가요?”
‘아차차.’
앤드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팀이 아닌 개인을 적으로 삼아 성장하는 넬슨의 버릇이 또 나온 모양이었다.
그로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고방식이었지만, 어쨌든 성과를 내고 있으니 참견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그런 놈들 많잖아. 어쩌다 한 번 미친 듯이 날뛰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거.”
“그렇…… 죠.”
“그러니까 어제 경기는 너무 신경 쓰지 마. 한 경기 한 경기 경험을 쌓다 보면 너도 진짜 좋은 선수가 될 거야. 내가 보증한다.”
그렇게 말하며 등을 떠미는데, 넬슨의 걸음이 우뚝 멈춘다.
슬픔과 분노가 섞인 듯한 복잡미묘한 표정의 넬슨을 보고, 앤드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럼 전 지금 좋은 선수가 아닌 건가요……?”
‘아차차…….’
앤드류는 자기 입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 또 지뢰를 밟았다.
그냥 수식어 다 빼고 네가 최고라고 해주면 될걸.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원래 여기가 1년 차보다 2년 차 때 힘들고, 2년 차보다 3년 차 때 힘들고 그래. 그걸 버티는 과정에서 네가 계속 성장할 거다, 그런 거지.”
“저도 지금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는데, 많이 부족한가요……?”
“어?! 아니지! 팀에 도움 엄청 많이 되지! 근데 뭐냐, 저기 Koo를 보면 빅리그에서 쌓은 경험 덕분에 타석에서나 수비에서나 움직임이 유연하잖아? 너도 경험만 더 쌓으면 충분히…….”
“Koo도 올해 타자 전향했으니까 저랑 똑같은 첫 시즌인데…….”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자존심은 엄청나게 강하면서도,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넬슨 데스파이네.
성격이 모질지를 못해서 ‘개소리 말고 경기 준비나 해라’라며 확 끊어내질 못하고 계속 눈치 없는 소리나 하는 앤드류 매닝.
평소와 똑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브레이브스 선수들은 혀를 찼다.
“저 인간들 또 저러고 있네.”
“대체 궁합이 잘 맞는 거야, 안 맞는 거야?”
“신이 참 공평해. 앤드류한테 눈치는 뺏어간 거 보니.”
* * *
가을 야구를 하면서 평소보다 긴장하지 않는 선수는 없다.
한 경기의 승패가 탈락을 좌우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선수들은 보통 세 부류로 나뉜다.
평소보다 잘하거나, 평소만큼만 하거나, 아니면 평소보다 못하거나.
“플레이 볼!”
오늘의 선발 투수이자, 정규시즌 동안 32경기 ERA 2.89로 브레이브스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워렌 스튜어트는 아주 명백하게 평소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스타일.
본인 말로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하는데.
애초에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디비전시리즈 돌파가 이번이 처음인 양반이 그런 소리 해봤자 믿음이 갈 리가.
“아웃!”
워렌 스튜어트의 피칭 스타일은 한마디로 제구가 괜찮은 파이어볼러.
포스트시즌 들어 제구가 흔들리면서 볼넷을 자주 내주곤 해도 여전히 패스트볼의 무게감은 상당했고.
타이밍은 맞췄지만, 힘 대 힘의 대결에서 밀린 리드오프 조지의 타구가 중견수 글러브에 들어갔다.
“오케이! 나이스!”
“원 아웃! 원 아웃!”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전날보다 오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상대 야수들.
저걸 보니 오늘 경기 전 분위기가 어땠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경기에서 지고 욕을 먹으면 화가 나지만, 경기에서 이기고도 조롱을 당하면 힘이 쭉 빠지는 법이니까.
‘서드 피치가 죄다 고만고만하니까 사실상 포심과 슬라이더 투 피치에, 제구는 흔들리고, 뒤를 받쳐줄 야수들도 분위기가 영 별로다?’
에이스라는 이름표를 떼고 지금 상태로만 평가한다면, 첫 타석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타순이 한 바퀴만 돌아도 충분히 해볼 만한 투수.
물론 지금 공략해낸다면 오늘 경기를 풀어내기가 한결 편해지겠지. 그게 딱히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홈플레이트 근처로 바짝 다가가서, 어디 몸쪽으로 던질 테면 던져보라는 식으로 도발을 시전했지만.
“볼!” “볼!”
바깥쪽 위아래로 빠져나가는 포심 두 개가 연달아 날아왔지만, 배트를 낼 의지조차 들지 않는 코스.
제구 불안 때문인지, 아니면 전날 경기에서 그랜드슬램으로 점수 차를 아슬아슬하게 좁힌 나를 경계하는 건지 헷갈렸는데.
일단 포수가 마운드를 방문하면서 생각을 정리해볼 여유가 생겼다.
‘볼넷 주면 오히려 좋아.’
이번 시즌 끝내 아홉수를 뚫어내진 못했지만, 39개의 도루는 메이저리그 전체를 놓고 봐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숫자.
멘탈이 온전치 못한 투수라면, 내가 등 뒤에서 깔짝거리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복사가 될 거다.
타이밍 맞는다 싶으면 못 뛸 것도 없고.
‘포심이냐, 슬라이더냐.’
커브나 체인지업은 열 개 던지면 대략 일곱 개쯤은 제구가 개판으로 되던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선택할 것 같진 않으니.
여전히 구위 자체는 살벌한 포심과 낙폭이 까다로운 슬라이더 중 하나.
포수가 돌아오는 타이밍에 맞춰, 하나의 노림수를 선택해 다시 타격 루틴을 가져갔고.
쐐애애액!
머릿속에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강렬한 직감이, 내 선택이 옳았음을 알려왔다.
코스가 제법 변화무쌍한데다, 횡적 변화보다 종적 변화가 두드러지는 특성을 믿고, 땅볼을 유도하기 위해 몸쪽으로 꺾이는 슬라이더를 택한 모양인데.
지난 1년간의 노력에 ‘미스터 옥토버’의 날카로운 감각이 더해져, 내 배트는 이미 가장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기 위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따아아아악―!
‘아오……!’
날아가는 타구의 방향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배트부터 던지고 죽어라 뛰었다.
잘 맞추긴 했어도 넘어가기엔 부족하다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런!!! 러어어언!!!”
1루와 3루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고함의 하모니.
2루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고개를 돌려 외야를 살피니, 빠르게 굴러가는 타구를 우익수가 황급히 쫓아가고 있었다.
순간 넬슨 데스파이네의 호수비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계속 가!!! 3루!!! 3루까지!!!”
뒤에서 들려오는 지시는 둘째치고, 어차피 속도를 줄일 타이밍은 지나갔다.
이를 악물고 땅을 더 세게 박차면서 2루 베이스를 지나쳐, 3루를 향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준비하는데.
‘이런 미친!’
예상했던 타이밍보다 살짝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날아온 송구.
3루수가 베이스를 밟고 서 있는지라 몸을 비틀어 피하기는 힘든 상황.
하지만 글러브가 다가오기 전, 내 손끝은 이미 베이스를 터치하고 있었다.
‘X 될 뻔했네.’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꼼짝없이 아웃 타이밍.
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으니 순수 주력의 승리였다.
잠깐 머뭇대던 3루심은 이윽고 결심한 듯 양팔을 펼쳤다.
“세이프!”
브레이브스 덕아웃이 챌린지를 요청하면서, 전광판에 방금 상황의 리플레이가 올라왔다.
외야 깊숙한 위치에서 타구를 주워 든 우익수 넬슨 데스파이네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3루를 향해 레이저 송구를 쐈고.
커다란 아치를 그린 송구가 노바운드로 3루수에게 도착한 것.
[쟤 루키 맞지?]
‘미친놈. 수비만 가지고 ROY 타겠네.’
크리스토퍼한테서 쟤가 자존심 세다는 말은 들었는데, 최소한 실속은 있는 놈이었다.
근데 어쩌나.
지금 이 미친 수비로 나를 비명횡사시켰으면 팀 사기도 한 방에 올라가고, 전날 당한 삼진도 갚아줬을 텐데. 그러질 못해서.
“세이프!”
판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홈팬들은 아쉬움의 탄성을 쏟아냈지만, 이내 좋은 플레이를 보여준 넬슨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나도 기꺼이 한몫 보태기로 했다.
‘참 잘했어요, 짝짝짝.’
헬멧을 벗어 우익수를 슬쩍 가리키며 경의를 표한 것.
뜻밖의 행동에 관중석이 잠시 술렁였지만, 최소한 야유를 보내는 팬은 없었다.
당연하지. 비록 상대 팀이지만 루키의 플레이를 칭찬하는 선배. 얼마나 훈훈한 모습이겠어.
지 혼자 나한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던 넬슨이 과연 그걸 원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정심을 잃고 지금 같은 정교한 수비를 못하게 되면 다저스 입장에서야 땡큐지.
따아아아아악!
물론 당장 멘탈에 더 큰 타격을 입은 건 투수였다.
힘이 아주 살짝 모자랐는지 3번 타자 켄의 타구가 워닝 트랙에서 잡히고 말았지만.
홈으로 파고들며 선취점을 만들어내기엔 차고 넘쳤다.
* * *
초반부터 3루타를 얻어맞은 게 컸는지, R.H.를 볼넷으로 내보내며 제구 불안을 노출했던 상대 투수였지만.
“아웃!”
에이스 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증명하듯, 다음 타자 클레망을 범타 처리하면서.
아쉽게도 추가 득점을 만들지는 못한 채 끝나 버린 다저스의 1회 초 공격.
오늘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3일 휴식 후 올라온 아드리안 빌라.
90마일 초중반대 패스트볼 두 종류와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구사하지만, 안 긁히는 날엔 뭘 던지든 안 통하는 랜덤박스형 투수다.
예전에는 제리와 마찬가지로 포스트시즌만 되면 영 힘을 못 쓰고 와르르 무너졌지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팬들이 매년 외워대는 ‘올해는 터진다’라는 주문이 드디어 이놈한테도 닿았는지.
테이블세터를 빠르게 잡아내며 3번 타자 넬슨 데스파이네를 상대하게 된 아드리안.
그런데 정작 타석으로 들어오는 넬슨의 시선은 투수가 아닌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눈빛이 좀…… 순해진 것 같지 않냐?]
한눈에 보기에도, 경기 시작 전 훈련 시간에 보여준 살벌한 눈빛이랑은 좀 다르다.
박도현은 좀 전의 칭찬이 약을 올리는 게 아니라 독기를 빼낸 게 아니냐고 했지만.
‘아냐. 그거랑은 좀 달라.’
이유는 모르겠는데, 뭔가 좀 억울함이 섞여 있다고 해야 하나.
어린 시절 박도현이랑 투닥대다가 어머니께 끌려간 뒤, 너 때문에 엄마한테 혼났다고 징징대는 박도현 얼굴이 딱 저랬던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볼!”
“파울!”
투수가 아니라 나를 먼저 볼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긴 했는데.
좀처럼 승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가 불리한 카운트에 몰린 넬슨.
그런데, 사실 이런 타이밍에선 타자보다 아드리안한테 더 신경이 쓰인다.
‘얘 이러다 또 헛짓거리하면 안 될 텐데.’
작년에 비하면 정말 많이 개선됐지만, 아드리안은 여전히 제구에서 물음표를 완전히 지우진 못한 선수.
초반에 좋은 페이스를 이어가다 보면 꼭 한 번씩 실투가 나오곤 하는데.
공격적인 피칭을 즐겨 하는 아드리안이기에 실투도 가운데로 정직하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따아아악―!
바로 지금처럼.
다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타자도 완벽하게 대처하지는 못했는지 발사각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거고.
“아웃!”
쓰러지듯 자세를 낮춘 끝에, 내 근처로 날아오는 타구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유격수 라인드라이브 아웃으로 이닝 종료.
안타를 확신한 듯 뛰어가던 넬슨은 1루 근처에서 멍한 표정으로 멈춰 서버렸다.
왜 저럴까. 야구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만약 앞선 타자들이 기회를 살려서 2루에 주자를 내보냈다면, 내 수비 위치도 달랐을 거고.
그럼 지금 이 타구도 안타가 됐을 거다.
경기를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팀끼리 하니 이런 변수도 생기는 법.
팀이 아니라 개인을 이기려 드는 습관 못 고치면 평생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