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We are the Champion(7)
실점에 대한 압박 없이 경기를 치르는 투수는 없다.
다만 의도한 코스로 제대로 집어넣었는데도 정타를 허용하거나, 뜬금포를 얻어맞거나 해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실점이 나온다면 충격은 배가된다.
그 충격에서 얼마나 빨리 빠져나오는지가 좋은 투수와 그렇지 않은 투수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브레이브스의 선발 워렌 스튜어트는 괜찮은 투수다.
2회 초 선두 타자로 나온 루카스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했지만,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끝냈으니까.
같은 팀이라지만, 냉정히 말해서 아드리안은 실점 이후의 대처가 그리 뛰어나지만은 않은 투수.
심지어 예전 모습도 아닌, 노히트노런 달성 이후 대오각성한 지금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는 거다.
그러니 애초에 실점으로 이어질 만한 상황을 안 만드는 게 최선이지.
“스트라이크 아웃!”
대신 본인이 좋은 공을 던지든, 아니면 야수들의 호수비가 나오든 해서 일단 당장의 위기만 벗어나고 나면.
한동안은 또 흔들림 없이 좋은 기세를 이어 나가는 투수이기도 하다.
“오늘 공 좋다! 이대로만 가자!”
“공이 뻗지를 않네! 여기 오라클 파크였나?!”
파워를 갖춘 타자들이자 개노답 삼형제의 첫째와 둘째, 뤼카 스킬라치와 앤드류 매닝에게서 연달아 뜬공을 유도한 뒤.
6번 타자를 상대로는 삼진을 잡으며 삼자범퇴를 만들어낸 아드리안.
“아웃!”
숨 고를 틈도 없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간 워렌 스튜어트였지만.
아직 경기 초반이어서인지 힘은 여전했고, 조지는 비슷한 코스에 배트를 또 냈다가 똑같이 중견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첫 타석과 똑같이 1사 주자 없는 상황을 맞이하려나 싶었는데.
[헐, 미친. 여기서 거른다고?]
아직 초반인데다 2사도 아닌 1사인데, 전광판에 자동고의사구를 알리는 문구가 올라왔다.
좀 전에 3루타로 분위기를 완벽하게 빼앗긴 게 그렇게 신경 쓰였던 걸까.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
도루 타이밍을 머릿속에 때려박아 주는 ‘Run Devil Run’이 있긴 하지만, 그게 없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의 도루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더블 플레이를 유도하기 위한 슬라이더를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가져갈 테고.
애초에 투수부터가 온전한 컨디션이 아니기까지 하니.
촤아아악!
“세이프!”
그럼 진짜로 뛰는 거지 뭐.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확 꺾이는 예리한 슬라이더를 포구하기 위해 포수는 상체를 움직여야 했고.
그 상태에서 빠르고 정확한 송구를 보내는 건 애초에 무리였으니까.
환호를 보내오는 원정 덕아웃과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자마자, 곧바로 2루 베이스에서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세이프!”
그러자 연달아 날아오는 견제구.
우완이니까 2루 도루는 내줬다 쳐도, 3루는 어림도 없다 이거지.
유니폼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슬라이딩하는 이 느낌, 어딘가 낯설지 않다.
파드리스전이었나? 이렇게 2루에서 깔짝거리다가 보크 잡아내서 3루까지 공짜로 갔었는데.
“피처 보크!”
이런 식으로 추억을 되살려줄 줄이야.
내가 지적할 필요도 없이, 주심과 2루심이 동시에 투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심지어 그때랑 똑같은 인사이드 무브 보크.
타자한테 집중 못 하고 자꾸 꽁으로 아웃카운트를 먹으려고 하니까 저런 실수가 나오지.
“뭐야! 왜! 뭐가 문젠데!!”
덕아웃에서 뛰쳐나와 주심에게 달려가는 브레이브스 감독.
사실 진짜로 항의하려는 의도보다는 투수가 정신 차릴 시간을 벌어주려는 것 같다.
규정된 항의 시간을 초과하기 직전 귀신같이 뒤돌아서는 걸 보니.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1회 초랑 똑같이 1사 주자 3루. 타자도 똑같은 켄 워싱턴.
같은 상황이라도, 3루타 얻어맞은 거랑 볼넷에 도루, 보크를 엮어 3루까지 내보낸 것. 뭐가 더 투수한테 타격이 클까?
만약 나한테 물어본다면 무조건 지금이라고 대답할 텐데.
따아아아아아악―!
워렌 스튜어트도 내 말에 동의하나 보다.
태그업으로 뛰어가야 했던 1회와는 달리, 홈으로 들어오는 켄을 모시고 덕아웃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3회도 마치지 못한 시점에서 벌써 4실점.
오늘은 전날과 정반대로 브레이브스가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됐다.
* * *
‘아무래도 지금이 포스트시즌이 맞긴 한가 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보통 아드리안이 호수비로 기 한번 살려주고 나면 최소 5회까지는 씩씩하게 던지거든.
그런데 오늘은 3회 말까지 한 타순을 퍼펙트로 막아내며 불태우더니, 4회 말 선두 타자를 상대로 시원하게 솔로 홈런을 얻어맞았다.
페이스가 좋았던 만큼, 삐끗한 뒤 무너지는 속도도 빨랐던 걸까.
홈런 이후 연달아 단타 두 개를 얻어맞으며 무사 1, 3루의 위기를 맞이했다.
“나도 알아. 한 방 맞아도 괜찮다는 거.”
투수 코치와 내야수들이 마운드에 모이자마자 아드리안이 처음 꺼낸 말이었다.
근데 그건 우리가 할 말이지, 투수 본인이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드리안. 네 수호천사는 잘 있지?”
아드리안이 흔들릴 때마다 투수 코치가 꺼내는 마법의 주문.
그 정체가 뭔지 아는 내야수들은 다들 웃음을 참으려 콧구멍을 씰룩거린다.
즐거워 보이니 다행이다. 나는 죽고 싶은데.
“예. 오늘은 양면 인쇄로 빳빳하게 새로 뽑아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작거리자, 상기되어 있던 얼굴이 점점 차분해진다.
동료의 엉덩이 밑에 깔린 내 사진(양면)이 소중하게 어루만져지고 있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다니.
‘저거 찢어버리면 오늘 경기 조지겠지?’
[감당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솔직히 감당은 못 하겠으니,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화제를 돌렸다.
“타이밍 봐서 1루 쪽으로 빠르게 견제 좀 해봐. 1루 주자 지금 뛰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진짜? 걔가 도루를 한다고?”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가 있는 넬슨 데스파이네는 발이 꽤 빠른 타자다.
안 그랬으면 정상급 외야 수비를 여러 차례 선보이지도 못했겠지.
그런데 막상 정규시즌 동안 기록한 도루는 단 4개뿐.
이건 루키한테 많은 역할을 주는 걸 꺼리는 브레이브스 감독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뛰는 타이밍을 보면 기본적인 주루 센스가 뛰어난 편은 아니더라고.
“티타임은 잘 즐기고 있나? 슬슬 다시 경기로 돌아가야겠는데.”
“아, 예.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마운드 회동을 마치고 다시 각자 자리로 돌아간 투수 코치와 선수들.
슬쩍 1루 쪽을 보니, 좀 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진루를 욕심내는 듯 넬슨의 무게 중심이 2루 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눈썰미 좋은 사람이 투수한테 알려줬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그걸 할 줄 알면 루키가 아니지.’
원래 사람은 실패에서 배우는 법이다.
지금이 작은 실패조차 용납하기 힘든 단기전 상황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잠깐 뜸을 들이던 아드리안이 태세를 전환해 1루로 매섭게 공을 뿌리자, 허겁지겁 귀루하는 넬슨.
태그하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1루심이 곧바로 확신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아웃!”
“예?! 이게 아웃이라고요?!”
화들짝 놀라 덕아웃을 향해 챌린지 사인을 보내는 넬슨.
그러나 이미 1회 초에 카드를 하나 소모한 브레이브스는 그냥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질척대다가, 1루 코치에게 쿠사리라도 먹었는지 터덜터덜 돌아가는 넬슨.
[대충 아웃인지 어떤지 본인이 더 잘 알지 않나?]
‘그치. 그냥 인정하기가 싫은 거지.’
내가 앞선 두 번째 타석에서 도루로 기회를 만들어내는 걸 눈여겨보고 저랬던 건지는 모른다. 딱히 물어볼 생각도 없고.
다만 이 거리에서도 낙담한 게 한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최소한 오늘 경기에서 저 친구가 더 이상 존재감을 발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꼬마야. 원래 인생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산데…….]
* * *
[LAD 7 : 3 ATL]
[2대 2로 시리즈 균형을 맞추는 다저스! 챔피언을 가리는 무대는 LA로!]
[가을 야구에서 유독 난조를 보이던 ‘에이스’ 워렌 스튜어트, 4.1이닝 4실점 강판!]
[브레이브스의 특명, ‘Koo를 묶어라’ 대실패로 끝나다! 3타수 2안타 2볼넷(자동고의사구 1) 1타점 3득점으로 맹활약!]
[견제사 이후 몰라보게 부진했던 넬슨 데스파이네, 태업 논란에 정면으로 반박! “멘탈 관리에 실패했다.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다만 그런 비겁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넬슨 데스파이네의 호수비에도 3루 훔쳐낸 ‘39도루 준족’ Koo, “넬슨에게 너무 가혹한 시선이 가지 않았으면 한다. 그가 경험을 더 쌓으면 아주 무서운 적이 될 거라 생각한다.”]
브레이브스가 기를 쓰고 4차전을 가져오려고 했던 이유가 있다.
4차전을 내주고 시리즈 스코어 2대 2를 만들고 나면, 다저스는 브레이브스의 선발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감의 원투펀치를 출격시킬 수 있으니까.
애틀랜타의 자랑, 외야수 개노답 삼형제 역시 이 두 명을 공략하는 데는 실패했다.
제리가 등판한 경기에서 얻어냈던 1승도 마무리 새뮤얼을 상대로 극적 역전승을 거뒀던 거니까.
[LAD 4 : 2 ATL]
전날 경기에서 브레이브스의 워렌 스튜어트가 에이스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피칭을 보여준 데 비해.
제리는 110구라는 투구 수 제한 속에서 7.2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내고 나서 ‘이 정도는 해야 에이스라고 할 수 있지’라며 거들먹거렸는데.
그 말 기자들 앞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버렸다.
LA로 돌아와 치러지는 6차전.
다저스는 원래 로테이션대로 아이작 란드리를 마운드에 올렸고.
5차전에서 4타수 1안타에 그치며 컨디션 저하의 조짐을 보였던 넬슨 데스파이네가, 아이작의 구위를 이기지 못하고 득점권 찬스를 죄다 끊어먹어 준 덕분에 7이닝 무실점으로 완벽한 활약을 마치고 내려왔다.
나도 6차전에서의 성적만 보면 4타수 1안타로 썩 좋지는 못했지만.
[이 타구는!!! 다저 스타디움의 왼쪽 담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갑니다!!! 브레이브스의 자랑 외야수 3인방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See!!! You!!! LAter!!! 1대 0의 아슬아슬한 리드에서 단숨에 4점 차를 만드는 쓰리런이 브레이브스에게 남은 한 줌의 용기를 지워버렸습니다!!!]
그 1안타가 혼자 3타점을 쓸어 담는 쓰리런이었으니, 생색 좀 낸다고 해서 욕먹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투수를 물 쓰듯 쓰며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딱 하나의 실투가 모든 걸 빼앗아버렸다.
물론 8회 초 캡틴 앤드류 매닝이 투런포를 때리는 등, 끝까지 추격의 의지를 놓지 않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LA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 새뮤얼 브라운의 이번 포스트시즌 첫 세이브!!! 계속되는 블론세이브에도 자신을 마무리로 사용하겠다고 못박은 오브라이언 감독의 믿음에 제대로 부응했습니다!!!]
이번 포스트시즌 내내 부진했던 선수들 중 하나인 새뮤얼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포효했고.
각자 손에 음료수를 들고 덕아웃 앞에서 대기하던 동료들이 우르르 달려와 새뮤얼의 눈물을 음료 세례로 묻어버렸다.
“Koo 어디 갔어!!! 너 아니었으면 역전당할 뻔했다!!!”
“저 자식 외야로 도망가는데요?!”
“벤치 클리어링 피하려고 도망가는 놈은 봤어도 음료수 맞기 싫다고 도망가는 놈은 살아생전 처음 본다!!! 야!!! 빨리 와!!! 어차피 이따 샴페인 파티 때 다 젖을 거야!!!”
그라운드 위에서 벌어진 소동이 진정되고 나서, 챔피언십시리즈 우승 행사가 진행되었고.
“MVP!!! MVP!!! MVP!!!”
솔직히 내가 봐도 좋은 활약을 보인 건 맞지만, 100퍼센트 내가 탄다는 확신은 없었다.
아이작이 2경기 2승 15이닝 무실점이라는 미친 활약을 선보이면서, 시리즈의 절반을 견인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2037시즌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를 고를 때, 후보에서 이 선수를 떠올리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겁니다. 축하합니다. Hyun!!! Ki!!! Koo!!!”
단상에서 내 이름이 호명되는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을 가렸다.
[히든 업적 달성!]
[양대리그 중 하나의 챔피언을 차지하기 위해, 당신의 팀은 14개의 팀을 때려눕혀야 했습니다. 두 개의 왕좌 중 하나를 당당히 차지한 당신의 팀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선수로 인정받으셨군요!]
[재능 뽑기권 지급]
로버트를 비롯해, 올해를 마지막으로 팀을 떠날지도 모르는 선수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반지를 건네주기 위한 마지막 관문.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든든한 보상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