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제왕의 품격(3)
월드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감독 인터뷰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안드레아 슐츠 감독은 어떤 각오로 임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야구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스포츠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찾아올 때 그에 맞는 대응책을 찾아내는 것이 코칭스태프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거야말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라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정중하게 표현하는 법이 아닐까.
물론 슐츠 감독이라고 해서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이런 맥 빠지는 대답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
당장 올 시즌이 개막하기 전까지만 해도 팀 내부적으로는 지구 3위 수성을 목표로 삼았을 정도니까.
팀에 불안 요소가 너무 많았다.
구멍 뚫린 내야진과 돈값 못하는 베테랑들, 성장에 시간이 더 필요한 신인들까지.
그런데 올 한 해 동안 이 모든 게 기적처럼 채워졌다.
베테랑들은 작년 오프시즌에 단체로 예토전생이라도 하고 왔는지 뜬금없이 부활했고, 그 모습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신인들도 연달아 뜬금없는 맹활약을 반복했으며, 전천후 백업쯤으로 생각하고 트레이드로 데려온 선수가 뜬금없이 터져서 주전 2루수 자리를 채워버린.
기적에 기적이 이어져 월드시리즈까지 와버린 기적의 팀.
“첫 타순까지는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이 LA 다저스로 확정된 그 순간부터, 월드시리즈 1차전 선발로 내정된 해럴드 스키너는 여러 차례 본인의 생각을 전달했다.
“알겠다. 대신 그날 컨디션이나 경기 흐름에 따라 우리가 개입할 수도 있다는 건 이해해줘.”
슐츠 감독은 그저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6년 계약의 마지막 해를 맞이한, 감독인 자신보다도 훨씬 팀에 오래 있었던 베테랑 선발 투수.
애초에 타자와 직접 부딪치면서 그날 타자의 컨디션을 파악하는 게 본인 스타일이니, 막을 명분도 없었다.
[LAD 1 : 0 TOR]
그 고집의 대가로 가장 경계했던 타자에게 선취점을 허용했지만.
타자 친화 구장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활약해온 베테랑 투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여전히 상위 타선이 이어졌지만, 릴리즈 포인트에 이르러서도 구종을 구분하기 힘든 투구 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아웃카운트 두 개를 연달아 잡아낸 것.
[[LAD 1 : 1 TOR]
넘어갈 뻔한 흐름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린 덕분일까.
1회 말 공격에서 블루제이스 타선은 곧바로 따라가는 점수를 만들어냈다.
2회 초 수비 역시, 오늘은 지명타자로 출전한 다저스의 5번 타자 클레망 파로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낸 것을 시작으로 삼자범퇴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LAD 1 : 2 TOR]
2회 말에는 하위타선에서 3연속 안타가 터져 나오며 오히려 한 점을 앞서 나가기까지 했다.
정규시즌 다저스의 3선발로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지난 시리즈에서는 최악의 성적을 낸 다니엘 슈미트이기에.
타자들에게 자신감 있게 스윙하라고 주문한 결과였다.
이쯤 되니 분위기가 조금씩 묘해지기 시작했다.
로저스 센터를 점령한 블루제이스 홈팬들, TV나 컴퓨터 앞에서 이 경기를 간절하게 지켜보던 캐나다 전역의 야구팬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팀의 우승을 바라는 슐츠 감독까지도.
모든 사람들이 진지하게 믿게 된 것이다.
이번 시즌 내내 이어져 온 기적이 월드시리즈에서까지도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타자 1루로!”
2대 1의 스코어에서 맞이한 4회 초.
블루제이스 덕아웃은 선두 타자 구현기를 자동 고의사구로 내보냈고, 투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 연속으로 홈런 맞을까 봐 쫄았냐?!”
“누가 새대가리 아니랄까 봐 야구 참 치킨스럽게 하네!!!”
국경을 건너온 원정팬들이 고래고래 악을 썼지만, 슐츠 감독은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번 이닝만 무사히 넘기면 완전히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
월드시리즈 우승에는 반드시 행운이 따라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슐츠 감독은 자신들에게 그 행운이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올해 내내 불타올랐던 다저스 클린업 트리오의 타격감이 포스트시즌 들어서 갑자기 죽어버린 것도 중요한 근거였다.
저들이 무사 주자 1루라는 좋은 기회를 병살로 끊어버리는 건 아닐까 초조해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초조함이 오늘 경기를 넘어, 시리즈 전체로 이어진다면.
토론토에 44년 만의 우승 트로피를 안겨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회로를 빠르게 돌리던 슐츠 감독이었지만.
촤아아악!
“세이프!”
초구와 함께 스타트를 끊어버린 구현기가 당연하다는 듯 2루 베이스를 훔쳐낸 순간.
로저스 센터에 내려앉은 침묵과 함께, 그의 머릿속 회로도 멈춰버렸다.
* * *
오늘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선발이 베테랑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역시 연륜은 숨길 수 없는 걸까.
적어도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만난 투수들을 통틀어, 해럴드 스키너는 가장 현명한 태도를 보여줬다.
‘견제구를 안 던졌지.’
안 그래도 ‘Run Devil Run’의 영향으로 도루 타이밍을 읽어내는 게 한결 수월해졌는데.
여기에 ‘미스터 옥토버’의 효과로 한층 예리해진 감각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초구에 변화구 나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뛴 거야?]
‘어느 정도는.’
타석에는 3번 타자 켄.
이번 포스트시즌 들어서 유독 부진한 클린업 트리오 중에서는 그나마 홈런도 때리는 등 가장 컨디션이 괜찮은 편.
아마도 블루제이스는 켄이 ‘내가 뭐라도 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유인구에 배트를 낼 거라 예상했겠지.
어쨌든 켄이 초구 헛스윙을 하긴 했으니 예상이 맞았고.
내가 초구에 냅다 뛰어버릴 거란 예상은 못 했을 뿐.
[투수 보고 알았냐? 변화구 던질 것 같든?]
포수가 잠시 마운드를 방문한 사이, 박도현이 말을 걸었다.
얘가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나름 39도루 주자로서 경험을 쌓은 지금은 짐작이 간다.
‘아니, 포수 보고 알았지.’
[포수가 왜?]
‘미트 위치 고정할 때 손목이 구분동작처럼 딱 움직이더라고.’
내 미트는 여기서 1센티도 안 움직일 거다, 여기로 날아오는 패스트볼을 무조건 잡아낼 거다,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그러니까 이건 무조건 뻥카다 싶었지.’
[제대로 봤네.]
지금의 예리한 감각은 ‘미스터 옥토버’의 발동 조건인 포스트시즌이어서 유지되는 것.
평소부터 이렇게 플레이의 근거를 다져 나가야 나중에 원상복구됐을 때 헤매질 않을 거다.
‘이제 어떡할까.’
마운드 방문을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포수.
목소리를 낮춰서 뭐라 그러는지는 안 들렸지만.
아마도 투수가 포수를 다독였다는 데 박도현 코딱지 정도는 걸 수 있다.
포수의 멘탈이 온전치 못하다는 걸 안 이상, 2루에서 소심하게 굴 필요는 없다.
물론 견제사를 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세이프!”
이 거리는 선 넘는 거 아니냐는 듯, 투수의 견제구가 날아왔지만.
선을 넘고 안 넘고는 결과로 말하는 거지.
견제사를 잡아내면 내가 과했던 거고. 못 잡으면 적절한 거리였던 거고.
“세이프!”
연달아 이어지는 견제에도 내가 리드를 좁히지 않자.
결국 투수는 나한테서 고개를 돌리고, 아직까지 0―1의 카운트에 머물러 있는 켄을 상대하기로 했다.
쐐애애액!
특별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루 주자들이 보통 다 하는 것처럼, 게처럼 슬금슬금 옆으로 걸었을 뿐.
그런데 이 모습이 포수한테는 언제든 3루를 훔칠 수 있다는 신호쯤으로 보였던 걸까.
“앗……!”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바운드되는 커브볼이, 포수 미트를 맞고 튕겨 나갔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블루제이스 포수의 포일.
이런 상황에선 39도루 주자 대신 치와와를 데려다 놔도 3루를 얻어낼 수 있다.
투수가 잠깐 글러브로 입을 가렸는데, 언뜻 듣기로는 방송에서 보여줄 수 없는 소리 같았다.
근데 뭐. 본인 책임도 있는 거지.
포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거 뻔히 보이는데 무슨 깡으로 바운드볼을 던졌대.
따아아아악!
카운트 1―1, 투수가 움직임이 큰 변화구를 던지기는 부담스러운 상황.
몸쪽 아래 존을 공략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투수의 생각보다는 조금 높게 날아갔고.
아무리 정규시즌보다 컨디션이 별로인 켄이라지만, 이 정도 공을 외야로 못 보낼 타자는 아니다.
[LAD 2 : 2 TOR]
* * *
3번 타자 켄의 희생플라이로 홈을 밟으며 동점을 만들었지만.
블루제이스는 곧바로 다시 도망가는 점수를 만들어냈다.
따아아아아악―!
[로저스 센터에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 올 시즌 트레이드되어 온 유진 리빙스턴의 솔로 홈런! 친정팀을 상대로 기어이 멀티 히트 경기를 만듭니다!]
투아웃까지 잘 막아놓은 다니엘이 유진에게 던진 실투 하나가 홈런으로 연결되며, 한 점을 추가로 허용했고.
따아아악―!
[좌중간으로 빠르게 굴러가는 타구! 좌익수 말릭 케이타가 재빨리 쫓아갔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2루 주자 홈인! 폴 이바노프의 1타점 적시타로 한 점 더 달아나는 블루제이스!]
선발 다니엘이 5이닝 3실점으로 역할을 마치고, 투수가 교체된 6회 말.
두 번째 투수로 올린 롱릴리버 모리츠 슈타인마어를 상대로 블루제이스 4번 타자가 적시타를 만들어내면서.
[LAD 2 : 4 TOR]
7회 말 수비가 끝날 때까지 다저스는 뒤쫓아가는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물론 다저스도 따라갈 찬스는 몇 번 있었지만, 클린업 트리오의 부진이 월드시리즈에서도 이어지며 점수를 만들지는 못했다.
나도 6회 초 1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맞이한 세 번째 타석에서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나갔지만 득점으로 이어지진 못했었고.
남은 정규 이닝 공격 기회는 단 두 번뿐.
그리고 다저스의 8회 초 공격은 하위 타순에 속하는 6번 타자부터 시작된다.
시리즈 직전 승부예측에서 다저스가 블루제이스보다 2배 이상 표를 얻었던 걸 생각하면, 저쪽 입장에서야 통쾌한 역전극이긴 한데.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는 거 아닌가?’
안타 하나, 볼넷 하나가 나올 때마다 기쁨의 포효를 내지르는 로저스 센터의 홈팬들 이야기는 아니다.
애초에 팬들은 이런 거 생각할 필요 없이 즐기는 게 일이니까. 40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온 월드시리즈이니 흥분하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
근데 선수들마저도 마치 오늘 경기를 잡아낸 것처럼 굴면 곤란하지.
옆에서 직접 마주치다 보면 그런 태도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주자로 나가서는 투수를 괴롭히겠다는 의지 없이 형식적으로 몇 걸음 떨어져 있거나, 수비할 때도 무조건 잡아낸다는 각오 없이 내줄 건 내준다는 식으로 임한다거나, 뭐 이런 것들.
“좋아! 잘했어! 이제 다시 차근차근 따라가 보자!”
“Koo 앞에 만루 만들어주자고! 그럼 좀 전처럼 거르지도 못할 거 아냐!”
반대로, 시리즈의 판도를 결정하는 1차전에서 경기 후반까지 지고 있는 다저스의 분위기는 딱히 침울해지지 않았다.
일단 선발 다니엘부터가 지난 경기와는 달리 딱히 제구의 난조를 겪었던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나오는 실투를 블루제이스 타자들이 잘 공략해내기도 했고, 애초에 포스트시즌에 타자 친화 구장에서 5이닝 3실점 정도면 밥값 정도는 해준 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겠지만, 오늘 경기에서 진다고 해도 투수 운용에서 불리해지는 것도 아니지.
다저스는 이닝 소화력이 뛰어난 모리츠가 2이닝을 막아줬고. 지명타자제니까 거리낌 없이 8회 말에도 올릴 수 있는 데 비해.
블루제이스는 오늘 경기를 무조건 가져오겠다는 듯, 잘 던지던 선발 해럴드 스키너가 연속 안타를 허용하자마자 바로 내리고 필승조 돌려막기를 시전했으니까.
[여기서 안타를 허용하는 콜린 스팍! 2사 주자 1루, 타석에는 오늘 경기 아직 안타가 없는 헨리 데이비슨. 그런데 지금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하는 것 같은데요. 투수 교체일까요?]
그러니까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좌타자 헨리를 상대하기 위해 원 포인트 릴리프 삼아 새파란 루키를 올릴 수밖에 없었던 거고.
블루제이스의 네 번째 투수는 다름아닌 조셉 펠트리.
사실 나쁜 선택은 아닌 게, 디비전시리즈와 챔피언십시리즈를 통틀어 4경기에 출전하면서 자책점이 고작 1점에 불과했고.
좌타자 상대로는 아예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으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등판시켰겠지만.
“베이스 온 볼스!”
인생은 원래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란다, 얘야.
빠르게 창백해지는 조셉 펠트리의 표정을 감상하며 대기 타석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