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28화 (128/200)

128. 제왕의 품격(4)

2사 만루. 투수는 올해 처음 빅리그로 콜업된 조셉 펠트리.

나는 저 투수를 볼 때면 루키 시절의 아드리안이 떠오른다.

아드리안이 쟤처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헛소리를 하거나, SNS에 이상한 저격글을 올렸다는 게 아니라.

평균 이상의 구속과 괜찮은 컨트롤을 동시에 가진 좌완 투수지만, 멘탈이라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조셉 펠트리라는 투수도 아드리안이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회 자체는 많이 받겠지만, 이유도 모른 채 꼬라박는 시기가 분명 올 거고.

트리플 A에 다녀오거나 불펜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복귀하는 등. 많은 변화를 겪고 그때마다 적응해야만 하겠지.

적어도 아드리안처럼 멘탈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계속.

“베이스 온 볼스!”

아마도 오늘까지는 괜찮은 시간을 보냈을 거다.

그러니까 블루제이스에서 2점이라는 적은 점수 차이에도 믿고 내보냈을 거고.

아무리 그전까지 던지던 투수가 주자 있는 상황에서 좌타자 상대로 연속 볼넷과 안타를 내주며 챔피언십시리즈 한 경기를 말아먹은 적이 있다고 해도, 오늘 같은 날 쌩 루키를 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베이스 온 볼스!”

블루제이스는 아마도 오늘 경기에서 조셉에게 아웃카운트 하나만 맡길 생각이었을 거다.

9번부터 2번까지 좌타자만 연달아 세 명.

근데 좌타자 상대로 유독 강했던 이 투수가, 공 여덟 개를 던져 스트라이크 존에 단 하나도 넣지 못할 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마운드 좀 다녀오지 그래? 한번 안아주고 와.”

“남의 팀 일에 참견하지 마라. 말 안 해도 가려고 했으니까.”

4회 초 공을 놓치면서 실점의 빌미가 됐던 게 신경 쓰이는지, 으르렁거리는데도 독기가 하나도 없는 포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배터 박스 옆에서 투수더러 보란 듯이 연습 스윙을 했다.

[기자들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 여기까지 나는 거 같지 않냐?]

이런 식으로 비꼬는 말도 할 줄 아네. 호구 주제에.

저놈이 스프링캠프에서 로버트 뒷담했던 게 박도현한테도 어지간히 열받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나 보다.

‘포수가 언론을 다룰 줄 알아. 어쩌구저쩌구 나불나불해서 다저스 스프링캠프 이후 두 선수의 맞대결이 처음으로 성사되었다, 딱 여기까지 써놓고 기다릴 타이밍이잖아.’

[자신은 있어? 되게 여유롭네.]

방심은 금물이라는 거 나도 누구보다 잘 알지.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타자 전향 전 마지막 경기까지, ‘하위 타선이니 긴장 좀 풀자’라는 찰나의 생각에 허용하고 만 홈런과 안타가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서로 익숙하지 않은 상대끼리의 맞대결이라면 투수가 타자보다 훨씬 유리하기도 하니까.

‘근데 내가 아무리 긴장한들 쟤보다 더할까?’

만약 조셉 펠트리가 SNS 계정을 일찌감치 없앴다거나 해서 애초에 논란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나한테 안타나 홈런을 맞고 역전을 허용하더라도 욕을 먹으면 먹었지, 조롱은 당하진 않았을 거다.

이런 말 하면 시범경기 때 ‘느그가 투수가’ 소리에 시달렸던 디백스 투수들은 억울할 수도 있는데, 뭐 그땐 타자 전향 초기였고.

지금 와서는 그런 식으로 눈물을 삼켰던 투수가 한둘이 아니니까.

‘만약 괜히 싸가지 없게 안 굴었으면 오히려 기회지. 어쨌든 나도 2사니까 마구 휘두를 수도 없고. 까다로운 존에만 잘 넣으면 카운트 잡고 시작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결국 다 자기 업보다?]

‘그치.’

때마침 포수가 돌아왔고, 타석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기 전까지 이닝은 끝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라는 동네가 원래 그렇다.

삶을 송두리째 바꿀 위기와 기회가 몇 번이고 찾아온다.

여러 번의 기회를 살린다고 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한 번의 위기를 못 넘기면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게 참 엿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이 상황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만든 건 너니까.

어디 한번 보여달라고.

쥐뿔도 없으면서 남 무시하고 다니던 예전이랑 얼마나 달라졌는지.

* * *

‘X발, X발, X발.’

조셉 펠트리는 그 단어 말고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심지어 좀 전에 마운드의 올라왔던 포수와의 대화에서도, 제발 집중하고 자기 말 좀 들으라고 포수가 애원하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났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바로 며칠 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등판했을 때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패스트볼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상하좌우, 어느 방향으로 던지든 크게 벗어나는 공.

포수는 차라리 가운데다 꽂으라는 듯 미트를 존 한가운데에 고정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그의 경험상, 아무리 제구가 안 될 때라도 가운데를 보고 던지는 공은 정말로 가운데로 들어갔으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저 타자는, 첫 타석에서 딱히 실투도 아닌 공을 홈런으로 연결해냈다.

‘저 X 같은 놈은 인터뷰에서 그때 일은 왜 꺼내 가지고……!’

라이브 배팅에서 홈런을 맞았던 건 방심해서 그랬을 뿐인도.

시범경기에서 기회도 주지 않고 마이너 캠프로 보내버리더니, 트레이드까지 시킨 다저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 불만을 아주 살짝 담아 구현기를 향한 저격 영상을 올렸다.

그냥 타격 연습만 하는 건데 뭐가 문제냐, 어차피 구현기도 다시 마운드로 돌아오지 않았냐, 뭐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도 만들어 놓았고.

혹시라도 그 영상 때문에 구현기가 멘탈에 타격이라도 입는다면 팀 입장에선 이득 아니겠느냐고 생각했는데.

“내가 전에도 경고했지?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난 이제 너 잘 모르겠다. 앞으로 네가 한 짓은 네가 감당해.”

투수조 조장이라는 꼰대는 그를 붙잡더니 이런 소리나 하는 게 아닌가.

그때는 별걸 다 참견한다고 넘겼는데.

설마 만루에서 구현기를 상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심지어 기대와는 달리 멘탈이 흔들리지도, 컨디션이 무너지지도 않은, 챔피언십시리즈 5할 타자의 모습 그대로.

‘그 꼰대가 갑자기 제구가 안 될 때 이렇게 하라고 알려줬던 것 같은데…….’

애초에 듣기 좋은 말만 기억하는 조셉의 머릿속에 투수조 조장의 충고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가운데. 낮은 코스. 포심.’

그 와중에 포수라는 인간은 이딴 사인이나 보내고 있고.

조셉이 고개를 젓자, 포수는 다시 똑같은 사인을 보낸다.

그렇게 다섯 번째 고개를 젓고 나니 더는 거부할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지금 이 사인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던졌다가는, 정말로 뒷감당을 못 하게 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았으니까.

“스트라이크!”

결과는 등판 후 9구 만에 얻어낸 첫 스트라이크.

포수가 미트를 가져간 위치보다는 좀 더 아래로 들어갔지만, 스트라이크는 스트라이크였다.

주심을 향해 의미 없는 어필을 하는 구현기를 보며, 말라비틀어진 조셉의 자신감에 한 포기 풀이 피어났지만.

“볼!”

바로 다음 공을 던지자마자 다시 뿌리가 뽑혔다.

분명 포수가 요구한 대로 똑같은 코스로 던졌고. 그의 눈에는 똑같은 공으로 보였는데.

주심의 개떡 같은 존에 짜증이 치밀었다.

포수나 코칭스태프가 올라와서 끊어 주지 않는 이상, 투수는 정해진 시간 안에 공을 던져야만 하는 포지션이었고.

어김없이 사인이 날아왔다.

‘공 좋다. 침착하게. 바깥쪽 슬라이더.’

니가 올라와서 던져보던가,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조셉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을 가다듬고, 억지로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갔다.

저 새끼가 챔피언십에서 5할을 쳤어도, 10할은 못 치지 않았나.

그냥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올 확률이랑 똑같은 거다.

“흐으으읍!”

치켜든 오른쪽 다리를 쭉 뻗으며, 하체에서부터 끌어올린 힘을 릴리즈 포인트까지 제대로 실어낸, 정석 그 자체의 동작.

그러나 정작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조셉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공에 역회전성 무브먼트를 추가해줄 손목의 움직임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제발! 제발! 제발!’

공이 타자를 향해 날아가는 찰나의 순간, 조셉은 무작정 기도했다.

모든 실투가 안타나 홈런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실투를 놓치고 나면 오히려 지난 공의 잔상이 남아 제대로 된 타격을 못 하는 경우도 많으니, 제발 이번 위기만 넘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그 순간.

따아아아아아아아악―!

결과가 짐작이 되는 묵직한 소리.

눈앞에서 허공을 날아다니는 배트.

다리에 힘이 풀린 조셉은 마운드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 * *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들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체인지업이나 커브 등 오프 스피드 피치로는 한계가 있으니, 안타를 맞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존을 좁게 보고 던져야 할 텐데.

신인이, 그것도 월드시리즈에서 그런다는 게 참 쉽지 않지.

아무튼, 초구는 심판의 이해할 수 없는 판정으로 스트라이크가 되긴 했지만. 그런 판정이 또 나올 거라 기대하면서 똑같은 코스로 던지는 뻘짓을 하는 걸 보니.

이놈이 바깥쪽 변화구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가져가겠구나 싶어 대비는 했는데.

이 정도로 치기 좋은 똥볼이 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이 타구는! 좌익수가 쫓아가 보지만 잡을 수 없는 곳으로 향합니다! See! You!! LAter!!! 좌측 외야석에 떨어지는 대형 그랜드슬램! 스코어 6대 4로 단숨에 역전!!! 월드시리즈 1차전 승리의 단꿈에 젖어 있던 로저스 센터를 현실로 되돌리는 묵직한 한 방입니다!!!]

바깥쪽 공을 밀어친 타구가 저 정도로 멀리 뻗을 줄도 몰랐고.

“Koo!!! Koo!!! Koo!!! Koo!!!”

“공격부터 주루까지 아주 혼자 다 하네!!!”

“조셉한테 가서 위로 좀 해줘, Koo!!! 저놈 말이 맞았다고!!!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할 순 없는 거 맞네!!!”

원정팬들의 조롱에 정신을 차리기라도 한 건지, 블루제이스 덕아웃은 늦게나마 이성적인 선택을 했다.

[결국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내려가는 조셉 펠트리. 블루제이스는 마무리 투수 래리 발렌타인을 투입합니다. 남은 공격 기회 동안 경기를 다시 뒤집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군요!]

단숨에 4점을 내주며 경기가 뒤집힌 건 타격이 꽤 클 테지만. 어쨌든 2점은 충분히 쫓아갈 수 있는 차이.

오늘 1번부터 9번까지 선발 야수 전원이 출루에 성공할 만큼 고르게 활약했던 타자들을 믿고 마무리를 투입한 블루제이스였지만.

[켄 워싱턴의 이 타구는! 1―2루간 깔끔한 코스의 안타! Koo의 그랜드슬램으로 깔끔히 비워진 루상에 다시 주자가 나갔습니다!]

[좌중간 담장으로 향하는 높은 타구!!! 좌익수가 뛰어올랐지만!!! 높이가 부족합니다!!! 다저스의 4번 타자 R.H. 데이!!! 챔피언십시리즈 포함 10타석 만의 첫 안타를 투런 홈런으로 장식합니다!!!]

[이번 타구는 중앙 담장을 향합니다! 쫓아갈 생각도 못 한 채 고개를 떨구는 외야수들! 클레망 파로의 백투백 홈런! 무려 3경기 내내 무안타로 휴식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한몸에 받았지만, 정규시즌 28개의 홈런을 기록한 타자한테 그딴 건 필요 없었나 봅니다!]

한순간에 쫓아가는 입장에서 지키는 입장으로 바뀐 만큼, 부담 없이 타석에 임할 수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한동안 계속 침묵했던 타격감이 드디어 다시 올라올 때가 됐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원래 모습을 회복한 클린업 트리오가 3점의 추가 점수를 만들어내며 8회 초 타순이 한 바퀴 돌았고.

[LAD 9 : 4 TOR]

이번 시즌 선발 경험도 꽤 있었던 모리츠가 9회까지 추가 실점 없이 막아주면서, 이번 월드시리즈 첫 승을 챙겨갔지만.

데일리 MVP는 팀 타선의 절반을 책임진 내 차지가 됐다.

“Koo, 오늘 당신은 자동고의사구 하나와, 고의사구와 다를 바 없는 볼넷을 얻어냈습니다. 제대로 승부에 들어갔던 두 번의 타석에선 모두 홈런을 허용했고요.”

“네, 그랬죠.”

“이제 블루제이스가 당신을 피할 확률이 더 늘었는데요,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할 생각인가요?”

LA에서 와준 기자의 적절한 어시스트.

미리 생각해둔 답변을 내뱉었다.

“그럼 고마워해야겠네요.”

“네? 당신은 연속 고의사구를 당해도 타격감에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당해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고, 내일 경기 전 타석에서 고의사구를 당하면 정말 오랜만에 114를 재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에인절 스타디움에 이은, 한 구장에서의 타율 1 출루율 1 장타율 4.

월드시리즈에서 평생 남을 기록 하나 세우게 도와준다는데 나야 땡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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