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제왕의 품격(5)
[월드시리즈 1차전 총평, Koo로 시작해 Koo로 끝난 대역전극!]
[2타수 2안타 2홈런 2볼넷(자동고의사구 1)로 전설의 114(타율 1 출루율 1 장타율 4) 재현한 Koo. 과연 블루제이스는 내일 그를 거를 수 있을 것인가?]
[토론토 블루제이스 슐츠 감독, “확률상 Koo의 발언은 틀렸다. 그는 월드시리즈가 반환점을 돌아 다시 로저스 센터로 돌아왔을 때의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블루제이스 팬들, 슐츠 감독 향해 쓴소리! “그렇게 확률 좋아하는 양반이 투수 운용은 왜 그따위로 했냐?”]
[다저스 팬들, 오늘도 온라인에서 외치는 Koo비어천가! “FA 되기 전에 연장계약으로 묶어버려!”]
[가만히 있던 에인절스 팬들 ‘날벼락’… “우리는 왜?”]
[안타+홈런+백투백홈런=‘부활의 신호탄!’ 포스트시즌 내내 부진했던 다저스의 클린업 트리오, 희망이 보인다]
[‘17타수 연속 무안타’ 클레망 파로, 홈런 치고 인터뷰에서 눈물… “이게 끝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WS 2차전 선발투수 예고! 블루제이스는 ‘3선발’ 피터 잰킨스, 다저스는 ‘4선발’ 아드리안 빌라… 2033 데뷔 동기 좌완 선발끼리 맞대결 성사]
* * *
세상만사 모든 일이 그렇듯, 야구에서도 투자가 반드시 좋은 결과가 이어지지 않는다.
올해만 해도 수없이 많은 사례가 발견됐다.
‘타도 필리스’를 외치며 유망주들을 팔고 고액 FA를 영입했던 메츠가 NL 동부지구 4위에 머무른 것이나, 골드 글러브 유격수를 배출하겠다며 다저스한테서 카일 캠프를 3대 1 트레이드로 데려온 파드리스가 29연패로 연패기록을 경신한 것.
그리고 2037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필승조 여럿에 마무리 투수까지 소모한 블루제이스가 단 두 명의 투수만 올린 다저스에게 패배한 것도 마찬가지다.
“오브라이언 감독님, 내일 경기 선발투수가 누구인지 말씀해주시죠.”
챔피언십시리즈가 끝난 바로 그날부터, 코칭스태프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문제였다.
1차전 선발은 다니엘로 확정했지만,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에이스 제리를 3일 휴식 후 올릴 것인가? 아니면 원래 로테이션대로 아드리안을 올릴 것인가?
그리고, 1차전이 끝난 직후 오브라이언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2차전 선발투수는 아드리안 빌라입니다.”
1차전에서 패배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제리를 선택했을 거다.
단기전에서 1차전의 패배는 단순한 1패가 아니다. 월드시리즈 사상 3연패 후 4연승의 리버스 스윕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고, 2연패 후 우승마저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오늘 경기에서 이겼더라도, 필승조를 여럿 소모했다면 고민이 길어졌을 거다.
마리오, 앤서니, 조쉬 등 멀티 이닝을 소화해줄 수 있는 자원들을 아꼈으니, 만약 아드리안이 일찍 강판되더라도 언제든 역전을 노려볼 수 있다.
2차전 패배에 대한 위험부담을 안더라도, 에이스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등판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오브라이언 감독이 그린 그림이었다.
그렇게 선발투수를 예고한 뒤, 다음날 아침.
오브라이언 감독은 호텔 창가에 서서 자신의 그림이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것을 구경했다.
“Motherf…….”
비다.
그것도 금방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거센 폭우다.
물론 로저스 센터는 개폐형 돔구장이니 경기 진행에는 차질이 없을 거다.
문제는 가뜩이나 타자 친화 구장에 속하는 로저스 센터에서, 지붕까지 닫으면 그야말로 홈런 공장이 된다는 것.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멘탈이 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아드리안이 과연 블루제이스 타선을 견뎌낼 수 있을까.
오브라이언 감독의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비다.’
[비네.]
숙소에서 구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창밖으로 우비로 무장한 야구팬들이 꿋꿋이 구장으로 걸어가는 게 보인다.
[일찍도 가네. 춥겠다.]
‘보아하니 토론토 팬 같은데.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겠네.’
[그건 또 뭔 소리냐?]
‘우리가 홈런 뻥뻥 날려서 열불나게 만들어주면 옷도 금방 마를 거 아냐.’
[진짜 미친새낀가?]
솔직히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는데, 조금 켕기는 게 있긴 하다.
구장 지붕을 닫고 돔구장으로 변신한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면 타구가 더 잘 뻗는다는 것.
‘근데 그건 상대한테도 똑같잖아?’
물론 그쪽 홈이니까 우리보다야 익숙하긴 할 텐데, 메리트는 딱 그 정도.
투수 운용의 책임자인 감독님이나, 직접 공을 던지는 투수들한테는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겠지만.
우리야 방망이 돌리는 거랑 수비하는 거나 신경 쓰면 되는 거 아니겠어.
가뜩이나 인조잔디에 익숙하질 않아서 어제 경기 초반에 살짝 미끄러졌구만.
“안녕하십니까.”
원정팀 클럽하우스로 들어가 인사를 건네는데, 어째 전날 이겼는데도 분위기가 영 밝지 않다.
설마 다들 진짜로 비 온다고 저기압인 건가.
‘부침개 부쳐다가 막걸리라도 한 잔씩 돌려야 하나.’
[그거 좋네. 월드시리즈 사상 최초로 술 처먹고 경기 뛰었다고 뉴스도 타고.]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말이.
분위기가 왜 이 모양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라커에서 조용히 유니폼을 꺼내는 클레망 근처에서 몇몇 선수들이 서성이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저 양반 어제 울었었지.’
우승했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우승을 놓쳤다거나, 뭐 이런 상황에서 눈물 흘리는 건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데.
팀은 이겼는데 본인이 부진했던 게 떠올라서 울었다는 건…… 말하긴 좀 그런데, 쪽팔린 일이지.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베테랑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지금 다들 눈치 보고 있는 거라고?]
‘뭐 어지간하면 같은 베테랑이 놀리면서 풀어주고 그럴 텐데. 우리 팀 최고참이 클레망이잖아.’
[그럼 계속 이렇게 어색하게 있어야 하나?]
‘로버트 있잖아. 늦게 다니는 양반은 아니니까 금방 오겠지.’
물론 그때까지 기다리기 힘들다면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는 방법도 있지.
“젠장, 오늘 하루종일 이런 분위기에서 보내야 하는 거야? 제발 부탁이니까 차라리 나를 놀려줘.”
어느샌가 경기용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클레망.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동료들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한다.
“왜 그렇게들 쳐다봐? 난 떳떳해. 월드시리즈 우승 행사에서 눈물 보일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그때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미리 가불했을 뿐이야.”
월드시리즈.
그 말에 좀 어색하다고나 할까, 느슨해져 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돌변한다.
우승 반지를 얻느냐 못 얻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지금, 이런 데 신경 쓸 정신이 없는 게 정상이라는 걸 다들 새삼 깨닫기라도 했나.
“진짜죠? 뒤끝 없는 거죠?”
근데 그건 그거고.
띠동갑 베테랑을 놀려도 된다고? 그건 못 참지.
그러나 클레망은 나를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걸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깜빡했네. Koo 너는 제외야.”
“아니 왜요. 제가 뭘 어쨌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감당 못 하겠어. 넌 리미트만 풀어주면 감독님도 울릴 놈이잖아.”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그냥 갱년기에 좋은 음식을 소개해주려고 했을 뿐인데.
“그래, Koo! 클레망은 우리가 놀릴 거니까 끼어들지 마!”
“너한테는 야구밖에 없다며! 가서 홈런이나 치고 도루나 해!”
“비밀번호 114 다시 찍을 거라며! 인터뷰에서 그렇게 입을 털어놓고 삼진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이 인간들이 요새 내가 좀 치니까 홈런이 만만해 보이나.
그리고 114는…… 온라인에서도 반응이 좀 나뉘는 것 같기도 하더라.
너무 건방진 거 아니냐는 소리는 신경 안 쓰이지만. 괜히 언급했다가 실패라도 하면 팀 분위기에 영향 가는 거 아니냐는 소리는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도 홈런 빵빵 날리라고! 대신 삼진 하나쯤 당해줘!”
“넌 그 입 함부로 놀리는 버릇 좀 고쳐야 해!”
“맞아! 네가 대중의 비난에 흔들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면 좋겠어!”
“어, 그건 좀…….”
“랜디 저 새끼 또 선 넘네. 비참한 건 니 얼굴이지 새끼야.”
“뭐야?! 이런 분위기 아니었어?!”
조심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고 마는 우리 팀 분위기상,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애초에 욕 좀 먹고 조롱 좀 당한다고 흔들릴 멘탈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고.’
굳이 인터뷰에서 114를 언급한 건 정말로 그걸 해내겠다기보다는, 블루제이스가 나를 속 편하게 거르지 못하도록 밑밥을 깔아두려는 의도였지.
사실 내 뒤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의 타격감이 아직도 올라올 기미가 안 보였다면 좀 더 어그로를 끌었을 텐데.
그런 건 또 아니니까. 그냥 나한테 볼넷 주는 게 자존심 상할 정도로만 나름 수위를 조절한 거다.
“실패하면 욕 푸지게 얻어먹을 텐데 괜찮겠어?”
누가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하는가 싶어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로버트가 실실 웃고 있다.
나한테 감정 안 좋은 동네가 조금 있긴 하지.
샌프란시스코랑 샌디에이고는 당연하고. 애너하임, 그러니까 에인절스 쪽. 그리고 일부 한국 언론이랑…….
[감정 좋은 동네를 먼저 떠올리는 게 빠를 것 같은데.]
‘그런 건 우리한테는 있을 수가 없어.’
“괜찮아요. 다들 제가 욕먹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뭘.”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공했을 때의 메리트도 있어야 의욕이 나지 않겠어?”
방금 욕먹길 바란다는 거 부정 안 하고 넘어간 것 같은데.
“만약 오늘 경기까지 진짜로 114 유지하면 나한테 쌍욕 박아도 용서해줄게.”
그 말에, 모여 있던 선수들이 동시에 빵 터져버렸다.
“푸하하하하! 로버트. 너무 막 던지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진짜 욕먹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에이 설마. 아무리 Koo가 또라이라도 그렇지,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알 텐데!”
물론 나도 그저 웃었다.
괜히 확인 차원에서 다시 물어봤다가 기회가 날아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좀 전에 클레망한테 그랬던 것처럼.
[야, 너 설마…….]
로버트는 존경하는 선배고, 배울 점도 많고, 팀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해온 사람이지만.
합법적으로 쌍욕 박을 기회를 준다는데. 그걸 거절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해보자. 114. 그까이꺼.’
[개또라이새끼…….]
‘그치. 그래도 내가 원래 좀 그런 놈이잖아?’
[어디서 훈훈한 척이야 미친놈아. 내가 장단 맞춰줄 줄 알고?]
이게 안 통하네.
* * *
“익숙지 않은 환경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다.”
선수단 집합 시간에 감독님이 꺼낸 첫마디였다.
늦가을에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날과 다른 환경에서 뛰게 된 것이 걱정될 만도 하겠지.
솔직히 아직 경기 시작 전이라 플레이할 때 뭘 더 주의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벌써부터 체감이 확 되는 게 있긴 하다.
“이 XX놈들아!!! 오늘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거라 기대하지 마!!!”
“조셉 그 병X 오늘도 등판시켰다간 알아서 해! 감독 니 남은 머리털 다 뽑아버릴 테니까!!!”
“설마 X 같은 양키 놈들한테 이틀 연속 처발리는 건 아니겠지?! 내 큰맘 먹고 LA까진 보러 가줄 테니 거기서 우승 트로피 가져와!!!”
관중들의 고함이 좀 더 입체감 있게 들려온다는 것.
같은 지구에 양키스 놔두고 왜 우리한테서 양키를 찾나. 아무리 국가대항전이라고 해도 미국인 아닌 놈 서운하게.
“플레이 볼!”
다 잡은 경기를 투수 교체 한 번에 날려먹은 팀을 향한 홈팬들의 분노 때문인지, 어제보다 한층 살벌해진 분위기였지만.
솔직히 로버트 전성기 때 기강 잡던 거 생각하면 이 정도는 뭐…… 급식 때 새 학기 첫날 수준이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지 말라고 평소 루키들을 그렇게 잡았던 건가?]
‘응, 아니야. 그래도 긴장할 놈은 다 해.’
“아웃!”
그렇게 대기 타석에서 박도현이랑 떠드는 동안, 7구 만에 2루수 땅볼로 물러난 리드오프 조지.
출루 못 했어도 이 정도면 공 많이 본 거지.
“컨디션이 그렇게 뛰어나 보이진 않아. 타이밍 뺏겨서 헛치긴 했는데, 패스트볼 종류 노려봐도 괜찮겠다.”
상대 투수에 대한 희소식은 덤이었고.
오늘 블루제이스 선발은 피터 잰킨스.
좌완 쓰리쿼터에 패스트볼 최고 구속 97마일 남짓.
평균 이상의 구위와 평균보다 살짝 아쉬운 제구, 세 종류의 변화구를 장착한.
좋게 말하면 팔색조. 나쁘게 말하면 무색무취의 투수.
안 긁히는 날에도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으면서, 긁히는 날엔 또 엄청 짜증나는.
까다롭다면 까다로울 수 있는 유형이긴 한데.
“베이스 온 볼스!”
적어도 첫 타석에서 상대한 느낌으로는, 그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보였다.
전날 114 드립이 효과가 좀 있었는지 정상적인 승부에 들어왔고, 2―2로 몰린 카운트에서 연달아 커트하며 버틴 끝에 얻어낸 볼넷.
첫 타석부터 이런다? 타이밍 잡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거지.
‘공이 진짜 뻗는지 안 뻗는지 궁금하긴 했는데.’
내 궁금증은 다음 타자 켄이 곧바로 풀어줬다.
간을 보듯 비슷한 코스로 날아온 두 개의 공을 지켜보며 얻어낸 1―1의 카운트에서, 노림수를 가졌는지 3구째에 배트를 돌렸고.
따아아아아악―!
크게 과장되지 않은 동작이었는데도 좌중간을 향해 쭉쭉 뻗어가는 타구를 확인하며 죽어라 달린 끝에.
“세이프!”
[LAD 1 : 0 TOR]
포수가 공을 잡기도 전에 홈베이스를 쓸어내며 선취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따아아악―!
“세이프!”
1사 2루의 찬스에서, 전날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던 R.H.와 클레망은 득점권 주자를 불러들였고.
[LAD 2 : 0 TOR]
1회 초부터 27개의 공을 던지게 하며, 아드리안에게 일찌감치 득점 지원을 안겨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늘 경기가 어제보다 순탄할 거라 예상했다.
아무리 타자 친화 구장이라고 해도, 정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공이 뻗고 자시고 하는 걸 따질 필요가 없는데.
적어도 상대 투수에게서 타이밍을 읽어내는 게 전날보다는 수월했으니까.
분명 그랬는데.
따아아아아아악―!
1회 말 선두 타자의 풀스윙.
결과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는 타격음이었지만, 굳이굳이 뒤를 돌아본 아드리안.
덕분에 지금 표정이 어떤지 아주 잘 보이더라.
평소보다 공이 더 잘 뻗는 환경.
적어도 우리보다는 블루제이스가 그걸 더 잘 활용할 거란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