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30화 (130/200)

130. 제왕의 품격(6)

투수전과 타격전.

보는 사람으로서는 이것저것 다이나믹한 상황이 펼쳐지는 타격전이 훨씬 볼만할 테지만, 현장의 코칭스태프들이 선호하는 건 투수전이 아닐까 싶다.

투수전에서야 우리 팀 투수의 호투를 응원하면서, 점수를 못 내고 있는 타자 놈들을 달달 볶으면 그만이지만.

타격전에서는 교체 카드를 수없이 만지작거리며 적절한 선수를 적절한 타이밍에 집어넣기 위해 고민해야 하니까.

“아드리안은 5회까지…….”

“차라리 주자가 쌓이면 끊어주는 게…….”

“두 번째 투수는 여기서 등판 경험이 많은 앤서니로…….”

덕아웃에서 우리 팀 공격을 지켜보는 동안, 옆에서 코칭스태프들이 경기를 어떻게 끌고 갈지 의논하는 게 들려온다.

[코치들도 진짜 극한직업이야.]

‘오늘 같은 경기가 특히 머리 아픈 날이긴 해.’

4회 초 공격이 진행 중인 지금, 스코어는 4대 4 동점.

헨리의 타구가 중견수 글러브에 들어가면서, 오늘 경기 양 팀 통틀어 처음으로 득점 없는 이닝이 나왔다.

“자, 다들 일어나자!”

“쟤네가 실점을 안 했는데 우리가 하면 체면이 서겠어?”

타자들은 제 컨디션이 아닌 투수를 공략하는 데 재미를 붙였는지, 어제보다 묘하게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는데.

“오…… 그러게…….”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드리안은 뭔가 살짝 맛이 가 있는 듯했다.

3이닝 동안 61개의 공을 던지며 4실점.

평소라면 슬슬 교체를 생각해봐야 할 성적이겠지만, 아드리안은 여전히 마운드를 지켰다.

‘이런 날엔 이닝이라도 최대한 먹어줘야지, 뭐.’

상황이 이런데도 타자들이 딱히 걱정을 안 해주는 건, 상대 투수의 컨디션이 더 심각해서다.

당장 나도 3회 초 선두 타자로 나섰을 때 초구에 팔뚝을 얻어맞았고.

첫 타석도 아닌 두 번째 타석에서, 그것도 월드시리즈에서 보복구 따위를 던질 리가 없으니.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긴 무슨. 도루랑 득점까지 싹 다 챙겨놓곤.]

아무튼.

4회 말 블루제이스의 선두 타자는, 전날 1차전에서 멀티 히트를 날리며 준수하게 활약했던 유진 리빙스턴.

오늘 첫 타석에서도 1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올해의 다른 트레이드와는 달리 괜히 보냈다는 팬들의 볼멘소리가 쏟아지게 했던 선수.

쐐애애액!

아드리안은 유진과 몇 년간 함께 뛰었고, 등판했다가 경기를 말아먹은 날만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쾌활한 성격 덕분에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런 관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실수는, 자신이 상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오늘 경기 내내 장타와 홈런을 얻어맞았던 아드리안에게, 유진은 그나마 자신에게 익숙한 타자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따아아아아아악―!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바뀌기까지, 한 시즌이면 충분한 시간이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고.

“아드리안. 숨 제대로 쉬고 있는 거 맞지?”

결국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오면서, 오늘 경기 두 번째 내야수 모임이 열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들 그리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늘 상대 선발의 컨디션도 아드리안보다 별로면 별로였지 좋진 않았고. 설령 일찍 내리고 필승조를 투입하더라도 최소한 어제보다는 덜 위력적일 수밖에 없으니.

한 점 정도야 금방 따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내 수호천사가 없어. 덕아웃 어디서 떨어트렸나 봐.”

그 표정이 송두리째 바뀌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X 된 거 아냐?”

“그거 없으면 혹시 영향이 많이 갈 것 같아, 아드리안?”

“아니 엉덩이에서 그게 빠져나가는 걸 몰랐다고?”

그게 아니라 사진이지. 사진. 내가 수비하는 사진.

주어를 똑바로 좀 쓰자. 누가 들으면 식겁하겠네.

‘근데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내 호수비에 힘입어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그날부터, 나를 제멋대로 수호천사로 삼아버린 아드리안.

공교롭게도 그때부터 고질적인 복불복 피칭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고 하니까.

“아드리안.”

“아, Koo…….”

“제발 정신 좀 차려, 이 새끼야.”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라고 했을 뿐.

이해해주겠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럴 상황도 아니고.

“너 처음에 그놈의 수호천사 갖고 다니기 시작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은 하냐?”

“어, 음. 그러니까…….”

“최소 반년은 됐을걸? 그쯤 되면 그놈의 승리의 기운이라는 거 이미 팬티 뚫고 엉덩이까지 죄다 스며들었겠다.”

어차피 시간도 없겠다. 정신 차릴 틈을 안 주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나도 관련이 있는 문제라서인지 투수 코치도 말리는 기색은 없었고.

“그럼 그놈의 사진은 왜 뒷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는지는 기억해?”

“그건, 그러니까, 네가 유격수 자리에 없어서.”

“그래도 그건 기억하네. 맞아. 근데 지금 내 포지션이 어디지?”

“어……!”

“그 사진 내가 봐도 잘 나오긴 했는데, 니 뒤에서 아웃카운트 하나 잡아보겠다고 개처럼 구르는 건 그깟 종이쪼가리가 아니라 나야. 알겠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심판이 다시 경기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 오히려 가만 놔뒀으면 알아서 정신 차릴 애를 괜히 들쑤신 건지, 그건 나도 모른다.

‘이러고 내가 실책이라도 하면 진짜 개쪽인데.’

투수가 홈런을 맞으면 야수는 개입할 수 없지만, 어쨌든 타구가 그라운드에 떨어지기만 하면 책임이 생긴다.

이렇게까지 장담해 놓았으니 최소한 잡을 만한 타구를 놓치는 불상사가 벌어져선 안 되겠지.

그리고 ‘잡을 만한 타구’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평소에 비슷한 타구를 처리해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따아아악―!

묘하게 스핀을 먹은 타구가 까다로운 바운드를 일으키며 3―유간 코스로 날아온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것보다 더 어려운 타구도 처리해낸 적이 있다.

“아웃!”

“좋았어!!!”

심판의 콜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드리안이 글러브 박수를 갈기더니, 뒤돌아 내 쪽을 쳐다보며 포효한다.

‘진작 이렇게 할걸.’

그랬으면 내 사진이 시즌 내내 동료의 엉덩이에 깔려 있는 불상사는 면했을 거 아냐.

* * *

5회 초 다저스가 다시 한 점을 만회하며, 5대 5 동점을 만든 이후의 5회 말.

“아웃!” “아웃!”

덕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블루제이스 선수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선두 타자가 안타로 출루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더블 플레이가 나오며 순식간에 투아웃으로 몰렸다.

“돌겠네 진짜…….”

“저놈 진짜 하이스쿨 때부터 투수만 한 거 맞아? 내야수 경력 숨긴 거 아니냐고.”

좋은 수비를 해놓고도 딱히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구현기.

그 담담한 태도가 묘하게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올해 막 전향한 놈한테 저 정도 기본기가 말이 되는 거야? 심지어 3루랑 1루도 볼 줄 안다며.”

4회 말 선두 타자 유진 리빙스턴의 홈런 이후 투수가 와르르 무너질 거라 기대했는데.

뜬금없이 정신을 차렸는지 신들린 듯 땅볼을 유도했고. 그때마다 저놈이 빈틈없이 처리해내며 아웃카운트가 계속 올라갔다.

“어이, 유진.”

다저스와의 인터리그에서 구현기와 연속 타석 안타 기록을 동시에 이어 나갔던 사건 이후.

묘하게 달관한 듯 지내게 된 유진 리빙스턴이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너는 저놈이랑 같이 지내봤잖아. 쟤한테서 뭐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이상한 거라니?”

“뭐…… 지름길을 택했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

동료의 속 편한 말에, 유진은 표정을 찌푸렸다.

구현기는 개막 전부터 시즌을 치르는 동안 여러 번 무작위 도핑 테스트를 받았고, 그때마다 음성 판정을 받은 선수.

아무리 이제는 상대 팀 선수라지만, 아무런 근거도 정황도 없는 헛소리에 동조하긴 싫었다.

“저놈은 그냥 미친놈이야.”

구현기가 야수조 소집일에 처음 합류했을 때, 그를 진지하게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한 경기에서 무언가 잘못하면 다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고쳐 오기 시작하더니.

의식하지도 못한 새 점점 팀에서 자기 역할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유진 리빙스턴은 자신을 노력형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치게 압도적인 재능은, 자신이 노력으로 이뤄온 것들을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을 구현기를 보며 느꼈다.

“아웃!”

빗맞은 타구가 좌익수 뜬공으로 연결되며 이닝 종료.

다들 탄식을 쏟아내는 가운데, 유진은 묵묵히 글러브를 챙겨 덕아웃을 빠져나갔다.

‘저렇게 할 필요도 없어. 딱 내가 하던 대로만 하자.’

자신보다 무언가를 늦게 시작한 사람에게 앞질러지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버텨내기 힘든 일이지만.

저만한 재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그를 괴롭히던 잔걱정이 말끔하게 사라져버렸다.

이런 식으로, 구현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여러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놓고 있었다.

* * *

‘어그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거였어.’

[갑자기 뭔 쌉소리야?]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지금까지 네 번 타석에 나가 네 번 모두 볼넷 혹은 사구로 1루를 밟았다는 거다.

물론 블루제이스가 오늘 경기 내내 작정하고 나를 피한 건 아니라고 본다.

두 번째 타석에서 공에 맞았던 건 실투였고.

자동고의사구로 나갔던 네 번째 타석에서는 2사 주자 1, 3루 상황이었으니 오히려 주자를 채우는 게 합리적이었다.

근데 풀카운트까지 가는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냈던 나머지 두 타석에서는 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멀쩡하게 던지다가도, 투구 수가 늘어날수록 투지가 사라진다고 해야 하나.

쓰리 볼까지 지켜보고 나면 다음 공으로는 무조건 유인구가 들어오더라고. 그것도 딱히 예리하지도 않게.

다른 재능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는 알 길이 없지만.

‘제왕의 품격’이 투수에게 준다는 압박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아무리 투수가 승부를 피하고 싶어도 절대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언제든 나올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스코어 7대 7 동점.

마운드 위에는 전날 8회 초 2사에 등판해서 3실점을 했던 마무리 투수.

앞선 투수가 싸질러놓고 내려간 무사 1, 2루의 위기를 1사 만루로 바꿔놓긴 했지만.

나한테 볼넷을 줬다간 도망가는 점수도 함께 주는 셈이다.

게다가 내 뒤로는 전날 3연속 안타를 허용했던 클린업 트리오가 기다리고 있기까지 하니.

‘투수가 작정하고 도망치는 걸 막을 방법은, 도망쳤다간 X 되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뿐이었어.’

“볼!” “볼!”

초구와 2구가 연달아 존을 벗어나자, 홈팬들의 고성이 쏟아진다.

아직까지도 천장이 닫혀 있는 로저스 센터를 쩌렁쩌렁하게 울려대는 목소리.

이곳에서 월드시리즈 경기를 보기 위해 청년이 노인이 될 만큼의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텐데.

마무리란 놈이 이러고 있으니 열불이 안 나겠느냐고.

‘바깥쪽 변화구는 제외.’

안 먹히는 코스를 계속 고집했다간 순식간에 카운트가 몰린다는 것쯤은 투수가 더 잘 알 거다.

그렇다고 멘탈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제구가 까다로운 커터를 던질 것 같지도 않으니.

‘패스트볼 타이밍.’

노림수를 정하고 맞이한 3구.

눈앞 풍경이 슬로모션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강렬한 직감에 사로잡혔다.

‘몸으로 말해요’가 몸쪽 코스를 감지했다. 그것도 아주 정직하게 들어오는 놈으로.

아마 오늘 경기 내내 대놓고 몸쪽을 찌르는 공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으니, 내가 가만히 지켜볼 줄 알고 던진 모양인데.

따아아아아아아아악―!

남들이 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풀파워로 돌린 배트에 맞은 타구가 우측 담장을 훌쩍 넘기며, 이틀 연속 8회에 그랜드슬램을 터뜨렸고.

홈팬들이 절망에 찬 표정으로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베이스를 거의 다 돌아갈 때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투수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에는 저 양반이 좀 힘든 시간을 보내겠구만.’

우리 팀의 클린업 트리오와 새뮤얼이 그랬듯,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왔다가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다.

챔피언십시리즈 때와는 반대로 우리 쪽에 유리한 사이클로 접어들었을 뿐.

[LAD 11 : 7 TOR]

아무리 포스트시즌 들어 집중력이 올라온 타자들이라고 해도, 단숨에 확 벌어진 격차를 쫓아갈 힘은 없었다.

8회 초 그랜드슬램이 그대로 결승타가 되어 게임 종료.

“으아아아아아악!!!”

“이제 2승이야!!! 2승만 더 하면 우리가 우승이라고!!!”

2승이라는 전리품을 안고 LA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도 물론 기쁜 일이지만.

‘진짜로 달성해버렸네. 114.’

2경기 3타수 3안타 3홈런. 1.000/1.000/4.000의 아름다운 슬래시 라인.

만약 이곳에 돌아오지 않은 채 월드시리즈를 끝내면, 어지간해선 지워지지 않을 커다란 흔적 하나를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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