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영광의 길(2)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필요한 승수는 4승.
다저스는 원정지 토론토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그 절반을 챙겨 왔고.
양 팀의 에이스가 등판을 앞둔 가운데, 두 감독은 인터뷰에서 3차전에 임하는 각오를 발표했다.
“블루제이스는 아메리칸리그 15개 팀을 대표해서 나온 팀입니다. 다저스가 원정지에서 승리를 챙겨 갔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면 그만입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슐츠 감독은 고개를 한껏 치켜들며 당당하게 외쳤지만, 그게 진짜로 자신감이 넘쳐서 하는 말이라고 믿는 야구팬들은 거의 없었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프로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은 짧고 단순한 각오를 남겼지만, 마찬가지로 그걸 겸손의 표시라고 받아들이는 야구팬들은 없었다.
가혹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지금 블루제이스에게 닥친 현실은, 앞으로 단 한 경기라도 지는 순간 홈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뿐.
심지어 팀의 에이스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3경기에 출장하며 온전한 컨디션을 장담하기도 힘든 상태다.
“로페즈 코치님, 앞으로 월드시리즈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가리라 생각하십니까?”
3차전의 시구를 맡은 훌리안 로페즈는 홈팀 클럽하우스를 어슬렁거리다 마주친 기자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다.
박도현과 구현기를 연달아 터뜨리며 스타덤에 오른 그에게 어떻게든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다급히 던진 질문.
“기자 양반,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요?”
빈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훌리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 *
“기자라는 놈이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더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툴툴거리는 훌리안.
3차전을 앞두고 다들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나는 잠시 실내 불펜에서 훌리안과 시간을 보냈다.
시구 지도라고 쓰고 사제간의 만남이라고 읽는,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훌리안은 입을 쉬질 않았다.
“그거 저희 팀 칭찬해주는 거 맞죠?”
“상대가 맛이 가 있는데, 한 경기라도 지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지금 꼬라지로는 너네 대신 파드리스가 월드시리즈에 올라왔어도 못 이겼을걸?”
[이 영감님이 올해 파드리스 경기를 하나도 안 보셨나.]
‘그만큼 우리가 유리하다는 거지. 맥락 좀 읽어라.’
종반부 역전패. 불펜진의 붕괴.
팀의 조직력을 무너뜨리는 악재가 겹치면서 블루제이스는 기세가 확 죽어버렸다.
물론 그 악재를 유발한 게 나지만.
“하던 대로만 하면 욕은 안 먹겠다고 해줬더니, 쓰잘데기없이 입 털어서 욕받이를 자처하고 있네.”
로저스 센터에서 114를 기록하겠다는 인터뷰를 하고, 정말로 그걸 달성해버린 후.
아직도 캐나다 야구팬들한테서 살벌한 욕설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느니 뭐니 하면서 일부 올드팬들까지 말을 얹기도 했고.
“제가 태어난 나라에서는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상대 팬들의 ‘야구 X 같이 하네’는 최고의 찬사라고요.”
원래 욕하고 빈정거리는 것도 잘하는 놈들한테나 그러는 법이다.
게다가 남들이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댄들 이미 쌓은 승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시구 지도를 마치고, 경기 전 선수단 집합 장소로 가는 길.
아침부터 묘하게 업돼 있던 제리와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 Koo. 안색이 안 좋은데, 혹시 어젯밤 잠이라도 설친 거야?”
“아냐, 그냥 니 얼굴 보니까 짜증 나서 그래.”
“하하하, 그런 농담은 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농담 아닌데.
그래도 어제 속전속결로 1고백 1차임을 적립했다면, 지금쯤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어 있었을 테니 차라리 지금이 낫긴 하다.
[에이전시랑 연결도 돼 있고, 명함도 받았으니까 지난번보다 여유로운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덕아웃에서 마주친 다른 선수들, 그리고 감독님까지도 딱히 별문제 없어 보이는 제리를 보며 안도했고.
투수를 빼면 지난 경기와 차이가 없는 선발 라인업을 발표한 뒤, 감독님은 짧은 연설을 남겼다.
“야구에서 지는 걸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오늘 블루제이스 놈들 상대로 지는 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맞다.”
정규시즌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거나, 전력 자체가 뛰어난 팀이라면 포스트시즌에서 잠깐 삐끗해도 금방 다시 기세를 되찾을 수 있다.
다저스가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먼저 2승을 내줬는데도 연달아 3승을 챙기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던 것처럼.
하지만 블루제이스에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시간은 금세 흘러, 이윽고 경기 시작 전 행사 시간.
구장 아나운서가 오늘의 시구자를 소개했다.
[다저스의 타선을 든든하게 받쳐준 타자를 두 명이나 키워낸 타격 인스트럭터, 훌리안 로페즈! 이분이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을 내년 정규시즌에도 보고 싶으시다면 뜨거운 박수와 환호 부탁드립니다!]
“훌리안!!! 한 명만 더 키워서 보내줘요!!!”
“타격 코치 자리가 성에 안 찬다 그러면 감독으로 데려다 앉히면 되잖아!!!”
”그럼 월드시리즈 진출까지 시켜놓은 감독을 짜르자고?!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훌리안을 향한 템퍼링 아닌 템퍼링에 홈팬들도 기꺼이 환호를 보냈고.
시타로 나간 나는 홈런 더비 때처럼 제대로 타격해 볼까 아주 잠깐 생각만 해보다가, 얌전히 헛스윙하고 돌아갔다.
수술 후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닌지 공에 힘아리가 없었으니까.
“여기까지 왔으니 하란 대로 하란 소리는 좀 그렇지? 잘해야 한다.”
훌리안의 응원을 뒤로한 채, 원정팀 블루제이스의 선공으로 시작된 경기.
사실 나는 크게 긴장도 안 되고. 지난 두 경기에서만큼 활약하지 못하더라도 딱히 흔들릴 거란 생각도 안 든다.
문제는 제리 저놈이지.
승리투수가 된다고 해서 고백을 받아준다고 약속한 적도 없는데, 지 혼자 멋대로 의욕을 불태우다가 괜히 몸에 힘 들어가서 밸런스 흐트러지면 망하는 거니까.
“플레이 볼!”
게다가 블루제이스 역시 이대로 맥없이 시리즈를 내줄 수는 없다고 내부적으로 일치단결이라도 했는지.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겠다는 듯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배트를 휘두르는 리드오프를 보니.
혹시라도 초반에 선취점을 허용했다가는 예상과는 다른 전개로 흘러갈지도 모른다고 아주 살짝 걱정했지만.
쐐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제리가 초구를 던지자마자 그 걱정을 조용히 다시 접었다.
몸쪽 보더라인을 매섭게 파고드는 시속 97마일짜리 포심.
블루제이스 리드오프가 허망한 듯 하늘을 쳐다보며 짧게 한숨을 쉰다.
‘꺾였네.’
저 정도로 꽉 차게 들어오는 패스트볼은 어지간히 타격 기술이 뛰어나지 않으면 안타를 만들기가 어려운데.
어찌어찌 스위트 스팟에 잘 갖다 맞혔다 해도, 제리 정도의 구위를 가진 투수라면 안타를 얻어낼 확률은 한없이 떨어진다.
“스트라이크 아웃!”
게다가 삼진을 잡아낼 때마다 나오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특유의 세레머니까지.
블루제이스 타자들의 의지를 가루로 만들어버리기 딱 좋다.
[근데 쟤는 지가 진짜로 치명적인 줄 알고 저러는 거잖아.]
‘나중에 차이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니까 괜찮아.’
[개너무하네 진짜…….]
에이스끼리의 맞대결에서 확실하게 선빵을 날린 제리.
그렇게 월드시리즈 3차전의 초반부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 * *
“스트라이크 아웃!”
구현기의 삼진과 함께 이닝이 종료되자, 홈팬들은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득점권 주자를 홈으로 불러오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이틀 연속 터뜨린 그랜드슬램과 원정 경기 2승에 묻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하나의 기록이 막을 내렸으니까.
[Koo, 월드시리즈 연속 타석 출루 기록 10타석에서 종료! (역대 2위)]
월드시리즈 경기를 보러 머나먼 한국에서 날아온 박도현의 어머니는 그 문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딸. 저기 저 말은 무슨 뜻이야?”
“아, 저거는 오빠가 10타석 연속 출루하고 11번째 타석에서 아웃됐다는 말이야.”
“어머나, 그러고 보니 월드시리즈 들어 아직 아웃된 적이 없었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오늘 경기 시구자로 나왔던 훌리안 로페즈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가만히 놔뒀으면 아주 세계신기록까지 세웠겠구만. 하여튼 망할 투수 놈들 겁나게도 걸러대네.”
기존의 기록은 박도현이 생애 첫 월드시리즈에서 거의 고의사구에 가까운 볼넷만 죽어라 얻어대며 기록했던 11타석 연속 출루.
그러나 훌리안은 짜증을 내면 냈지 아쉬워하진 않았다.
괜히 쓰잘데기없는 기록 의식했다가 지금껏 잘 쌓아둔 타격감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오히려 걱정이었으니까.
“그래도 에이스라 그런가? 다른 투수들보다는 적극적으로 승부하는 것 같던데요.”
박도아의 말에 훌리안이 코웃음을 쳤다.
“그놈의 에이스 타령, 득 될 것 하나 없다. 그래봤자 저렇게 갈리기나 하지.”
이번 포스트시즌에만 벌써 여섯 번째 선발 등판하며, 올라올 때마다 최소 90구 이상을 소화하던 블루제이스의 에이스 앤디 스완슨.
팀 사정상 다소 무리한 스케줄로 등판한 탓인지, 장점인 빠른 구속이 조금 하락하면서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고 있다.
그나마 실점은 최소한으로 줄이며, 반환점을 돌아선 지금까지도 2실점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TOR 0 : 2 LAD]
타선이 제리 헤이즈택에게 꽁꽁 묶이면서 득점 지원은 전무한 상황.
“타자든 투수든 저렇게 자기가 다 해야 한다고 설쳐대면 오래 못 가는 법이다. 뭐 제리 저놈도 평소보다 오버하는 것 같긴 한데. 다저스에 쓸만한 투수가 많으니 적당히 쓰다 바꾸면 되겠지.”
제자 구현기 앞에서는 툴툴대기만 하더니, 관중석에서는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는 훌리안.
그 훈훈한 모습에 미소 짓던 박도아는, 문득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오늘따라 유독 조용하다는 걸 눈치챘다.
“언니, 혹시 무슨 문제 있으세요?”
“네? 뭐가요?”
“아니, 평소 경기 볼 때랑 다르게 좀 조심스러운 것 같아서…….”
물론 여기서 조용하다는 건, 다저스 선수들이 헛짓거리를 할 때마다 훌리건마냥 악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부모님과 훌리안이 함께라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전에 아버지랑 셋이서 보러 왔을 땐 또 거리낌 없이 소리를 질러댔으니.
“괜찮아요. 문제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나현의 시선은, 6회 초 마운드에 올라 연습구를 던지는 제리 헤이즈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박도아는 구현기가 제리에 대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좀 이상하고 찐따 같고 열받는 놈이긴 한데. 그나마 성격은 나쁘지 않아. 친구는 별로 없지만.’
자신은 몇 번 안 만나 봐서 속단하긴 이르지만, 구현기의 말로는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설마 이상한 사람들끼리 서로 끌리는, 뭐 그런 짚신도 짝이 있다는 시츄에이션인가.
가이드 일에 몰두하느라 학교를 자주 빠지면서 1학년인 자신과 같은 수업을 듣는, 이 친절하지만 살짝 이상한 언니한테 드디어 인연이 찾아온 건가 싶었던 박도아였지만.
따아아악―!
“세이프!”
제리가 6회 선두 타자에게 초구로 실투를 던져 안타를 허용하자마자, 곧바로 이나현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아니, 하…… 투수랑 포수 둘이 덕아웃에서 내내 박치기라도 하고 왔나? 왜 갑자기 뇌세포가 확 줄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초구부터 저딴 공은 안 던질 텐데?”
갑자기 터져 나오는 험한 말에 뜨악하게 쳐다보는 훌리안과, 갑자기 왜 영어로 중얼거리는지 궁금해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오빠…… 이 사람 살짝이 아니라 좀 많이 이상한 것 같은데 괜찮을까?’
박도아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남자친구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