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영광의 길(3)
가끔 제리를 보면 이중인격자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단 저놈은 기본적으로 성격 자체가 만만하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무슨 이상한 컨셉이라도 잡은 듯 온갖 여유로운 척 시크한 척은 혼자 다 하는데.
솔직히 기 센 걸로는 어디 가서 안 밀리는 메이저리거들한테 그딴 게 통할 리 없으니, 찐따라고 놀림이나 받다가 혼자 삐져서 자리를 피하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마운드에 올라가면 뭔가 사람이 훼까닥 하는 것 같다.
특히 실투 던져서 실점이라도 허용할 때면 가끔은 나도 움찔할 만큼 살벌한 표정으로 쌍욕을 내뱉는데.
그러다가도 삼진 잡거나 추가 진루 없이 내려올 때면 다시 그 X나 짜증나는 치명치명 제리로 돌아와 버린다.
‘내가 보기엔 쟤 허구한 날 다저스의 에이스 어쩌고 하는 게, 단순한 컨셉질이 아닌 것 같아.’
[그럼 뭔데?]
자기 나름의 이상적인 모습인 거지.
올해 들어 특히 결정구 커터의 위력이 늘어나면서, 마운드 위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그 모습에 가까워진 거지.
근데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본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남들 눈엔 그 격차가 되게 두드러지게 보이는 거지.
사실 남들한테만 이상하게 보이는 거면 상관없는데.
요새는 자기 자신도 좀 헷갈리기 시작했는지, 애가 점점 맛이 가고 있다.
어제였나 그저께였나, 동생이 출산하는 거 걱정은 안 되냐고 물었더니.
‘한 팀의 에이스는 팀의 운명 말고는 아무것도 걱정해선 안 되는 법이야.’
입으로는 이런 개소리를 뱉으면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핸드폰 검색 이력은 온통 임산부 관련 내용으로 가득했으니까.
[맘에 드는 여자 앞에서 주어랑 동사를 제대로 연결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고백만 똑바로 했으면 넘어왔을 거라고 착각하는 것도 그래서인가?]
‘그거는 전문용어가 따로 있어. 정신승리라고.’
아무튼 그러다 보니, 오늘 경기 시작 전 제리의 등신 같던 모습도 어쩌면 고도의 개수작이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했다.
‘한 여자를 향한 마음도 에이스의 책무를 위해서라면 미뤄둘 수 있는 위대한 나’, 뭐 이런 자기 자신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거지.
[어차피 지 딴에도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고백은 실패했어도 월드시리즈 승리투수는 됐으니 만족한다고 정신승리하려는 거 아니었어?]
‘너 오늘따라 제리한테 좀 가차 없다?’
저놈이 정말로 승리투수가 되어 고백하든 말든, 차이고 나서 클럽하우스를 배회하는 데친 숙주나물이 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제리는 마운드에서 에이스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주긴 했다.
5회까지 고작 안타 하나와 볼넷 하나만을 허용하며 완봉 페이스로 달려 나갔으니까.
[우측 담장으로 향하는 타구! 그러나 우익수 R.H.의 글러브에 타구가 들어가며 이닝 종료! 블루제이스가 주자 1, 3루의 귀중한 찬스를 놓쳤습니다!]
6회에 주자 두 명을 내보내며 페이스가 떨어질 조짐을 보였지만, 투구 수는 아직 90개.
감독님으로서는 조금 더 올려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수고했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6회 말 공격을 앞둔 시점에서 스코어 2대 0.
1차전과 2차전에서 필승조를 충분히 아낀 만큼,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고생했다.”
“아, Koo.”
6이닝 무실점 3피안타 1볼넷 8K라는 성적으로 3차전 등판을 마친 제리.
자리에 앉자마자 얼굴에 수건을 덮고 축 늘어지는 걸 보니, 감독님의 선택이 옳았던 모양이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냐? 초반에 힘 빡 주고 던지던데.”
그러자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쳐다보더니.
“한 여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고 싶었얽.”
이번에는 등짝 스매시를 참을 수 없었다.
* * *
월드시리즈 3차전은, 팬들의 응원과 선수들이 느끼는 중압감이 정규시즌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것만 빼면 의외로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상대 투수의 실투나 선구안을 발휘한 출루를 엮어 어떻게든 점수를 따낸 뒤, 투수가 이 점수 차를 지켜내기를 바란다는.
강력한 선발 카드를 냈을 때의 승리 패턴을 그대로 따라갔으니까.
“야!!! 뭔 놈의 유격수가 타구를 지켜보고만 있어!!! 아까 Koo는 잡기 어렵다는 거 알면서도 몸 던지더만!!!”
“포기하지 마!!! X발 포기하지 말라고!!!”
“제발! 우리 월드시리즈까지 잘해왔잖아!!”
블루제이스의 에이스 앤디 스완슨은, 국경을 넘어 LA까지 찾아와준 원정팬들의 절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본인 공을 던졌지만.
이미 지난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동안 50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면서 어깨며 팔뚝에 쌓인 피로가 상당했는지.
1차전에서 9점, 2차전에서 11점을 올리며 물오른 타격감을 증명한 다저스 타선을 실점 하나 없이 철저하게 틀어막지는 못했다.
[TOR 0 : 2 LAD]
6회 말은 어찌어찌 실점 없이 넘기면서 2대 0의 스코어는 유지했고.
[TOR 1 : 2 LAD]
4선발에서 불펜으로 강등 이후 좌완 필승조로 기용되던 마리오 로드리고의 실투 하나를 솔로 홈런으로 연결하면서, 토론토 팬들은 다시 역전을 향한 기대감을 드러냈지만.
따아아악―!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이 타구에! 2루 주자 Koo는 멈추지 않습니다! 부랴부랴 송구하는 우익수!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세이프! 아메리칸리그 선수라 그런지, Koo가 달릴 때 잠깐이라도 머뭇거렸다가는 그대로 한 베이스를 내줘야 한다는 걸 몰랐나 보군요!]
7회 초 투아웃 상황에서 투아웃까지 잘 잡아 놓고는, 나한테 볼넷을 내준 게 그대로 실점으로 이어졌다.
“잘했어!!! 오늘도 두 자릿수 득점 가야지!!!”
“점수 더 벌리자!!! R.H.!!!”
“Koo!!! 오늘 드디어 밥값을 하는구나!!!”
오늘 내가 1, 2차전 때처럼 홈런 뻥뻥 날리진 못했어도, 3타수 1안타 1볼넷에다 도루에 득점까지 했는데.
밥값 하기 참 빡세다. 도대체 얼마짜리 밥이길래.
[TOR 1 : 3 LAD]
추가 득점은 없었지만, 점수 차를 다시 2점으로 늘린 7회 말.
8회는 양 팀 모두 필승조를 올려 삼자범퇴로 막아냈고.
9회 말 없이 3차전을 마치기 위해, 마무리 투수 새뮤얼이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대로 무난하게 2점 차 승리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다.
“세이프!”
선두 타자가 때려낸 타구가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키며 내야 안타가 되었고.
심지어 변화구 타이밍을 읽었는지 도루까지 허용했다.
챔피언십시리즈 6차전에서 완벽한 투구를 선보였던 게 사실은 한여름 밤, 아니 늦가을 밤의 꿈이 아니었던 걸까 불안했는지, 관중석에서 짧게 웅성대는 소리가 났지만.
“아웃!”
뛰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듯, 묵묵히 타자에만 집중한 새뮤얼이 포수 팝 플라이로 첫 아웃카운트를 잡았고.
“아웃!”
내 정면으로 날아온 타구를 깔끔하게 포구하며, 2루 주자를 묶어둔 채 투 아웃을 만들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뿐.
덕아웃에서 지켜보는 동료들도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난간에 몰려들었고.
어쩌면 오늘의 마지막 아웃카운트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를 타자를 향해, 새뮤얼이 힘차게 초구를 뿌린 그 순간.
따아아악!
“으윽!!!”
타격음과 거의 동시에 고통 섞인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새뮤얼의 풍채 좋은 몸이 스르륵 무너지면서 흙바닥 위에 쓰러졌고.
그 와중에도 공이 눈에 들어왔는지, 1루를 향해 집어 던지기는 했지만.
“세이프!”
타자 주자가 살아나가는 걸 막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2점 차이에서의 1, 3루 상황.
그러나 지금 점수 따위에 눈길을 주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샘! 뭐야! 어디 맞았어!”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내야수들과 의료진이 그때까지도 주저앉아 있는 새뮤얼을 향해 달려갔고.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일어나던 새뮤얼은, 한 걸음 내딛자마자 표정을 찡그렸다.
정통으로 맞았는지 어땠는지는 못 봤지만, 빠른 타구가 디딤발 정강이를 때렸으니 고통이 심하겠지.
“아웃카운트 하나, 하나만 더…….”
“개소리하지 말게, 새뮤얼 브라운.”
곧장 달려온 감독님은 새뮤얼의 간절한 부탁을 냉정하게 끊어버렸다.
그래도 자기 다리로 설 정도라 이건가. 걱정보다 명령이 앞선다.
“조쉬와 앤서니가 몸을 풀 거야. 최대한 시간을 끌 거고. 죽을 것 같다고 엄살이나 부리시지.”
“망할. 빌어먹을.”
“욕해서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해도 좋아. 나한테는 말고. 저기 저 타자 놈한테 하는 게 무난하겠네.”
그러자 몇몇 선수들의 시선이 1루에 선 타자 주자에게 향한다.
정말 공교롭게도, 새뮤얼에게 강습 타구를 날린 타자는 올해 다저스에서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되어 떠난 유진 리빙스턴.
배팅 장갑을 벗을 정신도 없는지, 옆에서 1루 코치가 팔뚝을 찔러대는데도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왜 저러지. 마음 약해지게 해서 욕 안 먹으려 그러나.’
[저런다고 니가 욕을 참을 위인이냐?]
‘욕은 안 해.’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고 화도 나지만, 저놈한테 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게다가 타자가 몸에 맞는 공에 대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타석에 들어가듯.
투수도 강습 타구에 대한 리스크를 안고 마운드에 서는 거니까.
‘그나저나 다음 투수가 걱정인데.’
지금 불펜에서 급하게 몸을 풀고 있을 조쉬와 앤서니는, 당장 낼 수 있는 카드 중 가장 믿을 만한 선수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이닝 도중 구원 등판에서는 성적이 썩 신통치 못했던 데다가.
2차전에 이미 등판했는지라 오늘 올릴 계획도 없었을 테니, 처음부터 몸을 풀어야 할 텐데. 둘 다 제대로 몸을 안 풀면 공의 위력이 덜한 편이니까.
‘구위도 기본 이상은 되면서, 몸도 빨리 풀고, 갑자기 등판해도 멘탈 안 흔들리는 그런 투수 지금 불펜에 없나?’
[있었으면 벌써 필승조로 올렸겠지…….]
그렇게 박도현과 속으로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길래 돌아봤더니.
감독님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Koo. 자네 혹시 미친 소리를 듣고도 이성을 잘 유지하는 편인가?”
여기 있었다.
* * *
‘밀어내기 볼넷 두 번으로 1점 차 만루 만드는 것까지 감수할 수 있어. 어렵게 승부하면서 최대한 시간만 끌어줘.’
감독님이 남기신 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지. 무모하게 집어넣었다가 홈런이라도 맞으면 바로 역전이니까.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다섯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긴 했어도, 그때는 크게 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지금이랑은 느끼는 압박감 자체가 다를 테니.
“Koo!!! 오늘도 삼진으로 끝내자!!!”
“타자 한 명 잡고 세이브 올릴 찬스라고!!!”
물론 팬들은 그 이상을 기대했지만.
새뮤얼의 갑작스런 이탈로 기세가 꺾이는 걸 막으려는 건지, 오히려 더 목소리를 높이며 내가 경기를 끝내길 요구한다.
‘그나마 대타로 나온 놈이 홈런 타자는 아닌 게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어떻게든 기회를 이어 나가는 데 집중하려는 모양인지, 컨택 위주의 타자를 내보냈다.
내 패스트볼 구속과 구위가 많이 회복됐다고는 해도, 좌완투수 시절만큼은 아니니.
유인구 위주의 승부를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연습구를 던지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야. 박도현.’
[뭐냐, 갑자기.]
‘원래 이럴 때는 보통 대주자로 교체해주지 않냐?’
플레이 도중 남을 다치게 했는데, 심지어 그 상대가 친정팀의 친분 있는 선수.
어지간하면 제정신 붙잡고 있기 힘들 테니 얼른 바꾸는 게 상책이지만.
1루 주자는 여전히 유진 리빙스턴이었다.
[뭐 바꿀 만한 선수가 마땅치 않나 보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박도현의 한마디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시즌 시작 전까지만 해도 블루제이스 내야진이 거의 무주공산 수준이었다는 걸.
안 바꾸는 게 아니라 못 바꾸는 거다.
지금 어떻게 역전을 해도 9회 말에 2루수를 볼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였을까. 1루 코치가 딱 붙어서 뭐라고 계속 케어를 해주는 것 같더라.
‘그러면 이거 혹시…….’
포수한테 사인을 보내니, 잠깐 당황하면서도 내야수들을 향해 사인을 전달하고는.
얼마든지 던져보라는 듯 팡 소리가 나도록 미트를 때린다.
그 모습에, 대타로 들어온 타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쐐애애액!
마운드에 올라와서 던진 첫 공은, 타자가 아닌 1루수 클레망을 향해 날아갔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허겁지겁 베이스로 몸을 날리는 1루 주자 유진 리빙스턴.
그러나 내가 몸을 돌리자마자 1루로 돌아가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늦었다.
고작 두세 걸음 정도, 별로 멀지도 않은 리드였지만.
도루가 타이밍 싸움이듯, 견제사 역시 주자가 타이밍만 놓치게 만들면 1루와의 거리는 상관없으니까.
“아우우웃!”
힘차게 주먹을 휘두르는 1루심.
겉으로는 아슬아슬한 타이밍처럼 보였지만, 판정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뭐야?! 지금 경기 끝난 거야?!”
“야!!! 끝난 거 맞아!!! 쟤네 비디오 판독 기회도 없어!!!”
한 박자 늦게 날아온 팬들의 환호성과 이제야 뛰쳐나온 동료들에게 둘러싸일 때까지도, 1루 앞에서 객사한 유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유진.’
원래 야구라는 게 별 이상한 일이 다 벌어지는 스포츠 아니겠어.
타구에 맞아서 다치는 투수가 나오기도 하고. 0구 세이브가 나오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