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영광의 길(4)
0구 세이브.
9회 2사에 주자 있는 상황에서 등판해, 경기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견제사로 잡아내야 하는 진귀한 기록.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조차 1989년 시카고 컵스의 미치 윌리엄스가 달성한 게 유일한 기록이었을 정도다.
‘투수 기록이라 보상 없는 게 아쉽네. 무보살 삼중살보다도 희귀한 기록인데.’
[양심 없냐?]
‘뭘 새삼스럽게.’
나더러 양심이 없다고 뭐라 그러는 건 박도현뿐만이 아니었다.
“Koo, 당신은 예전 동료에게 자기 손으로 부상을 입히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주자에게서 견제사를 얻어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스코어 3대 1로 빡빡한 승리를 얻어낸 뒤, 어김없이 찾아온 인터뷰 시간.
살벌한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한 블루제이스 기자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저는 유진이 새뮤얼을 다치게 만든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저도 유진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거고요.”
고의가 아닌 플레이로 남을 다치게 했을 때, 신경 쓰고 안 쓰고는 본인 자유지만.
신경 쓰는 게 손해라는 건 오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주자를 교체하지 않고 남겨둔 게 더 문제이지 않나요?”
“그건…… 팀 사정상 교체가 어려운 상황도…….”
“그렇다면 아예 1루에 붙어 있도록 지시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뛸 의사가 없었다면 말이죠.”
지금쯤 단장이나 감독에게 조인트를 까이고 있을지도 모를 블루제이스 1루 코치가 들으면 속이 뒤집히겠지만, 그게 팩트다.
설마 견제구를 던질 줄 몰랐다는 변명 따위가 통할 리 있나.
늘 하던 대로 몇 걸음 리드를 벌렸다가 팀의 역전 기회를 날린 유진의 속도 말이 아니겠지만, 그것도 결국 본인이 감당해야 할 몫.
그렇게 인터뷰에서 ‘당한 놈이 등신이다’라는 교훈을 널리 퍼뜨리고, 다시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더니.
월드시리즈에서 3연승을 거뒀는데도 마냥 기뻐하지는 못하는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곧이어 감독님이 나타나 새뮤얼의 상태를 전달했다.
“새뮤얼은 메디컬 룸에서 먼저 체크하고 병원으로 갔다더군. 더 자세히 검사해봐야겠지만 정강이뼈에 금이 간 모양이야.”
그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어차피 월드시리즈도 끝을 향해 다가가는 마당에 내년 복귀에는 영향이 없겠지만, 분위기가 처지는 건 막기 어렵다.
몇 경기 부진했다고 해서 마무리 투수의 존재감이 쉽게 사라지진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우리 팀에 임시 마무리가 한 명 생겼으니까.”
그리고 다저스의 오브라이언 감독님은, 팀의 악재로 분위기가 처졌을 때 함께 죽상이나 짓고 있는 지도자는 아니다.
“공을 던지지 않고도 세이브를 따낼 수 있는 마무리 투수가 있다면 믿겠나? Koo, 앞으로 나오도록.”
감독님의 의도를 눈치챈 몇몇 베테랑들이 과장되게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고.
나도 당당한 걸음으로 앞에 나가 섰다.
“오늘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랑 달라서 좀 당황스럽네요. 저한테는 밀어내기 볼넷으로 점수 줘도 괜찮으니 시간만 끌어달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Koo 자네 생각보다 신뢰 없는 사람이었군. 우리 둘만의 비밀을 발설하다니. 임시 마무리 임명은 없던 걸로 하겠어. 다시 들어가.”
그렇게 나에게서 마무리 투수 보직을 30초 만에 강탈해 간 감독님은, 선수들을 쭉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추가점을 만들 수 있는 여러 기회를 놓쳤지만, 나는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상대의 기회를 그보다 더 많이 빼앗았으니까. 안 그런가?”
“맞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기회를 더 악착같이 살려야 할 거다. 마무리 투수가 등판할 상황 자체가 나오지 않도록. 만약 내일 지면 5차전 선발로 Koo를 올리고 나는 병가를 내버릴 테니 알아서들 해. 알겠나?”
“알겠습니다!!!”
아니 왜 또 저를 걸고넘어지세요.
그래도 뭐.
이제는 월드시리즈 3승을 선점한 팀다운 분위기가 나고 있으니, 그거면 됐다.
* * *
좋은 일은 연달아 찾아온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안 좋은 일도 그렇고. 때로는 희한한 일도 마찬가지로 한번에 우르르 쏟아지곤 한다.
아무리 그래도, 마무리 투수가 타구에 맞아 팀에서 이탈하고, 뒤이어 등판해 견제구 하나로 세이브를 얻어낸 기묘한 경기를 치렀으니.
설마 여기서 무슨 일이 더 일어나기야 하겠느냐고,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제리, 네가 말한 대로 승리투수도 됐는데. 지금부터 고백하러 가는 거야?”
“저기, Koo. 네가 날 도대체 어떤 놈이라고 생각하는진 모르겠는데, 나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
인터뷰와 선수단 소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
한국 언론들과의 추가 인터뷰를 소화하느라 좀 늦어진 나, 경기 종료 후 회복실에서 시간을 보낸 제리.
이렇게 둘만 남아서 주차장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늘 내 여자친구 가족이랑 같이 클라라도 왔는데, 너 또 찐따처럼 말 더듬는 거 아니지?”
“무슨 소리야, Koo. 누가 들으면 내가 여자 앞에서 소심해지기라도 하는 줄…… 잠깐만. 전화 좀.”
멈춰 서서 전화를 받은 제리가 제자리에 우뚝 서더니.
핸드폰을 두 손으로 감싸 쥐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응, 응’이라고만 반복한다.
통화 내용은 안 들리지만, 지금 이놈이 이 정도로 당황할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Koo. 동생, 동생이 지금. 병원에.”
예정일이 월드시리즈가 끝난 뒤라 다행이라던, 출산을 앞둔 여동생의 소식.
“어어어, 어떡하지. 병원. 지금 나도 얼른.”
“오케이, 제리. 심호흡 좀 하고. 혹시 동생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어?”
“그, 그건 아니고. 나올 것 같다고. 이렇게 빨리.”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고, 예정일보다 빠르게 출산이 다가온 모양.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니, 지금 가면 4차전이 시작하기 전 아기랑 인사는 나누고 올 수 있겠지.
“Koo, 나 지금 바로 가봐야 할 컭.”
“미친놈아. 니가 지금 가긴 어딜 가.”
근데 지금은 아니지.
오늘 막 선발 등판했던 놈이 무슨 두 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간다는 거야.
“너 차는 있잖아. 클러비한테 지금 시간 괜찮은 사람 있는지 물어볼 테니까, 너는 일단 데릭한테 연락해.”
“어, 응. 근데 핸드폰. 핸드폰이 어딨지.”
[저 새끼 지금 손에 핸드폰 들고 핸드폰 찾는 거 맞지?]
에이스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 있는 제리 헤이즈택은 이런 인간이다.
지가 생각해야 할 건 팀의 승리뿐이라는 개소리나 할 때는 언제고, 막상 동생 출산이 다가오니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발만 동동대는 놈.
“아 씨,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오빠. 여기 있었네?”
제리를 쏘아붙이려던 그때, 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 시간이 되도록 주차장 쪽으로 안 오니까, 도아네 가족들과 이나현이 목소리를 쫓아 이쪽으로 온 것.
“오늘 경기 너무 잘 봤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제리 이 친구가…… 그럴 분위기는 아니네?”
“어, 안녕하세요. 저기, 제 동생이, 그.”
말을 똑바로 못 하는 제리를 대신해, 지금 이놈이 처한 상황을 10초 안에 요약해서 전달해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이나현이 갑자기 전화를 꺼냈다.
“네, 클라라입니다. 지금 제리 헤이즈택 고객님께 급한 일이 생겨서요. 네네…….”
그렇게 통화 상대에게 상황을 전달하던 이나현은, 무어라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에이전시에서 전달할 이야기가 있다며 핸드폰을 제리에게 넘겼다.
“네, 제리입니다. ……네? 어, 정말요?”
제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가다, 이번에는 나한테 핸드폰을 넘긴다.
폭탄 돌리기도 아니고 무슨 전화를 이렇게 돌려대.
[3차전 승리와 세이브 축하드립니다, Koo. 다름이 아니고 혹시 오늘 여자친구 가족분들과 추가로 일정 있으실까요?]
누군가 했더니, 에이전시의 매니지먼트 팀장이었다.
어찌나 다급한지 곧바로 본론부터 확 들이민다.
“방금 경기 끝났는데, 일정은 없죠. 집 가서 자야지.”
[그러시군요. 그럼 혹시 저희 에이전시 차량을 직접 운전하셔서 가족분들과 함께 귀가해주셔도 괜찮을까요?]
“어, 괜찮긴 한데요. 그럼 가이드분은…….”
[제리 선수랑 함께 가 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대형 에이전시가 아니라서 가능한 신속한 조치였다.
구단에 부탁하면 다음날 출근 일정까지 고려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근데 내일 일 있는 건 이 사람도 마찬가지일 텐데.
“가이드님. 내일 일정은 괜찮으시겠어요?”
“일단은 제가 병원으로 모시고, 에이전시에서 최대한 빨리 수배해서 다른 분이랑 교대해주신다고 하네요.”
어떻게 상황은 일단락된 모양인데.
제리 이놈은 주차장으로 무작정 달려가려 할 땐 언제고, 제자리에 선 채 우물쭈물거리기만 한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밤중에…….”
“제리 선수.”
이나현이 끼어들어서 제리의 쌉소리를 끊는다.
“저는 가이드 경력 3년 동안 교통사고를 낸 적도 없고, 캘리포니아 근교 지리는 어지간하면 다 꿰고 있습니다.”
“어,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죄송해서.”
“죄송하실 필요 전혀 없어요. 사전 예고 없는 추가 근무 수당에 야간 수당이 더해져서 오늘 제 일당은 두 배가 될 테니까요.”
“아……!”
“아무 걱정 말고 저만 믿으세요. 제가 꼭 조카 얼굴 보여드리겠습니다.”
[처음엔 믿음직했는데 그냥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었네.]
‘그리고 빨리 가든 늦게 가든 결국 도착만 하면 조카 얼굴은 볼 수 있는 거 아냐?’
남의 일이라 그런지, 나와 박도현은 이나현의 말을 냉정하게 들을 수 있었는데.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제리한테는 그렇지 않았는지.
“클라라……!”
얼씨구.
이 표정을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내가 무사 만루에서 무보살 삼중살 잡아냈을 때 얼굴이 딱 이랬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 발견한 사람도 저런 표정은 못 짓겠다.
* * *
“반가워. 다들 좋은 밤 보냈지?”
다음날 오후.
정규 출근 시간보다 살짝 늦게 나타난 제리 곁으로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뭐야, 왔네? 오늘은 쉬는 거 아니었어?”
“간밤에 동생이 아이 낳았다면서. 어차피 어제 등판했으니 그냥 옆에 있어 줄 것이지.”
“그런 거였어? 나는 어제 등판시켜놓고 오늘 불펜으로 또 올릴까 봐 출근 안 한 줄 알았는데.”
그러자 제리가 또 재수 없는 미소와 함께 머리를 쓸어 넘긴다.
“내가 팀의 에이스이자 정신적 지주인데, 중요한 경기에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어?”
어젯밤 전전긍긍하던 찐따 제리는 온데간데없고, 다시 에이스 제리로 돌아온 걸 보니 알겠다.
별 탈 없이 아이가 태어났다는 걸.
“뭐라는 거야.”
“탯줄과 함께 정신머리도 자르고 왔나.”
“지주? 지 주옺대로 사는 놈의 줄임말인가?”
쏟아지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치켜드는 제리.
여기 선수들이 지 에이스 타령이나 들어주려고 모인 줄 아나.
“집어치우고 사진이나 보여줘 봐.”
제리가 사진을 띄워 보여주자, 스마트폰 화면 하나에 덩치 큰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아이고, 눈도 못 뜬 거 봐라. 얘를 어쩌나.”
“아기가 우량아 같지는 않다. 운동선수 유전자는 안 이어졌나 보네.”
“여자애라고 했었나? 그럼 잘된 거지 뭐.”
그렇게 핸드폰에 고개를 들이미는 선수들 사이에서, 클레망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리 너 운전 못 했을 거 아냐. 여기까지 어떻게 갔어? 택시 타고 갔니?”
“에이전시 관계자가 데려다줬어요.”
“그래? 잘됐네.”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화면에 집중하려던 클레망이었지만.
이어지는 말 한마디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관계자랑 데이트 약속도 잡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선수들이 그랬다.
데이트라니.
마이너 시절부터 여자한테 차이기만 하면서 모태솔로로 살아온 제리인데.
어째 어제부터 희한한 일이 한번에 쏟아지더라니.
최후의 한 방을 남겨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