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35화 (135/200)

135. 영광의 길(5)

월드시리즈 4차전을 앞둔 날이자, 박도현의 가족들이 LA에 도착한 지 셋째 날.

경기가 시작되기 전, 박도아와 이나현은 간식을 사러 잠시 관중석을 비웠다.

“언니, 어젯밤 잘 들어가셨어요?”

“네. 에이전시에서 대체 인력을 보내주셔서요. 저도 병원에서 좀 기다리다 금방 돌아갔네요.”

말로는 괜찮다고 해도, 오밤중에 왕복 네 시간 거리를 운전하는 게 도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품 한 번 하지 않고 가이드 일에 집중하는 이나현을 향해, 박도아는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잠은 좀 주무셨어요? 피곤하진 않으세요?”

“나오기 전에 눈 좀 붙였어요. 그리고…… 좋은 일도 있었고.”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이나현.

아마 그 좋은 일이라는 게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3연승은 아닐 거다.

그건 이미 전날 관중석에서 눈물을 콸콸 쏟아내며 충분히 기뻐했으니.

“좋은 일이요? 언니 설마 벌써…….”

“아직 사귀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같이 시간 좀 보내보자, 이 정도지만요.”

적어도 박도아가 보기에 두 사람이 서로 관심이 있어 보이긴 했는데, 만난 지 고작 이틀 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어쩌다 그런 얘기가 나온 거예요?”

“음, 그거 말하려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쭉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시간 많잖아요.”

박도아는 이 살짝 이상한 두 사람의 관계가 어쩌다 진전됐는지에 온통 정신이 팔렸다.

품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간식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은 제가 병원으로 가는데, 룸미러로만 봐도 되게 불안해하고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긴장 풀라고, 아이 낳은 친척 언니 얘기도 하면서 최대한 달래줬죠.”

“네네.”

박도아의 부모님도 이나현이 대화하기 편하다고 칭찬이 자자했는데.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관심 가는 여자가 다정하게 위로해준다?

어떤 남자라도 확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해서, 함께 로비까지 가서 동생분 분만실 위치 들었는데. 그쪽으로는 가족들만 올라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나.”

“어차피 저도 퇴근해야 하고. 다른 매니저분 오실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제 손목을 딱 붙잡더니.”

“잡더니!”

“동생 힘들어하는 얼굴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너무 무섭다고 그러는 거 있죠?”

“네……?”

예상 밖의 전개에 박도아가 멍해진 사이, 이나현은 그 후의 상황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동생 얼굴 보기 힘들면 가족들이나 남편분이라도 격려해주고 와라, 뭐 이런 식으로 로비 구석진 곳에서 다시 좋게 좋게 타일러줬다나.

“근데 그러고도 우물쭈물한 거 보니까. 아, 이 사람 불안한 것도 맞긴 맞는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구나 싶더라고요.”

“그러면 혹시 언니가……?”

“네네. 그래서 제가 아이 건강하게 잘 낳으면 사진이랑 함께 꼭 소식 듣고 싶다고, 제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된다고 했거든요.”

“아, 네.”

“그랬더니 눈알이 막 또로록 또로록 굴러가다가, 자기가 문자로는 말을 잘 못 하니까 직접 만나서 전하고 싶다는 거예요! 진짜 너무 귀엽지 않아요?”

결국은 겁먹고 징징대는 거 받아만 주다 온 거 아닌가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잘됐네요, 언니.”

“그쵸?”

행복으로 가득한 이나현의 얼굴을 보니, 그런 말이 쏙 들어갔고.

더 이상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 * *

다저 스타디움의 단장 집무실.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가 3승 0패를 거두며 야구팬들이 LA 전역으로 격한 열기를 퍼뜨렸지만.

그 열기에서 살짝 비켜난 건 물론, 오히려 약간의 냉기까지 풍기면서,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요즘 한창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 내줘서 고맙네.”

월드시리즈 4차전을 앞둔 지금, 메이저리그 30개 팀의 단장 중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일 LA 다저스의 마이크 올리버 단장.

“그럼요. 시간 내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우리 에이전시의 기둥이자 다저스의 에이스, 제리의 조카가 태어나서 전 직원이 선물 고르기에 매달리고 있거든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월드시리즈가 끝나고 스토브리그가 열리는 순간 미친 듯이 바빠질, 애쉬튼 베이스볼 에이전시의 대표 에이전트 데릭 애쉬튼.

“아, 그럼. 우리 다저스 가족에게도 정말 큰 경사지. 공식 SNS에도 올려 대대적으로 축하했고. 물론 선물도 준비 중이야.”

“어젯밤에 급하게 다녀왔다가 오늘도 경기장에 나왔다고 들었는데, 꼭 저희 선수라 그러는 건 아니지만 참 팀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합니다.”

“나도 들었네. 구단 직원한테 말만 해줬다면 택시를 부르든 내 차를 빼 오든 해서 빠르고 안전하게 데려다줬을 텐데 말이지.”

“단장님께서도 선수를 무척 아끼시는군요. 오늘 이 자리가 서로에게 무척 유익한 자리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드네요.”

올리버 단장은 지금 자기 앞의 남자가 1년 전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구현기와 함께 나타나 내야수 전향을 통보했을 때의 그 겸손함은 온데간데없었으니까.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본격적인 오프 시즌 협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야.”

“장기계약에 대한 제 고객들의 최종 의사 말씀이시군요.”

내년, 즉 2038시즌이 끝나고 나면 제리 헤이즈택과 구현기가 FA 자격을 얻는다.

단장으로서는 어떻게든 그전에 연장계약으로 묶어두고 싶은 심정이지만.

올해 각각 에이스와 주전 유격수로서 팀의 중심에 섰던 두 선수 모두, 하필이면 이 지독한 인간을 에이전트로 뒀다니.

“일단 제리 선수의 의사는 변함없습니다. Koo의 계약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고 결정하겠다더군요. 그전까지는 계약 제안도 정중히 사양하겠다고요.”

올리버 단장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물론 제리 헤이즈택이 구현기에게 많이 의지하고, 함께 있어야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할 거라고도 생각하지만.

둘 중 그나마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고, 설득하기도 쉬울 것 같던 제리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Koo는 연장계약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지난번에 제시하신 10년 2억 5천만 달러는 단칼에 거절하더군요.”

5년 차 이후 옵트아웃에 15개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얹은.

내부적으로는 타자 전향 첫해를 맞이한 선수에겐 과하다는 의견마저 나왔던 계약이건만.

더 막막한 건 그사이 구현기가 투수로서의 활용 가치도 입증하고, 포스트시즌에서 미친 듯이 활약하며 몸값을 더 올렸다는 것.

처음에 데릭이 12년 4억 달러를 불렀을 때 도장을 찍어버릴 걸 그랬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물론 새로운 제안을 준비해 왔지. 설마 그걸 그대로 가져왔을까.”

“흥미롭군요. 어서 보여주시죠.”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잠재우며, 올리버 단장은 두 장의 계약서를 내밀었다.

“하나는 7년 2억 5천만 달러. 다른 하나는 10년 3억 2천만 달러짜리 계약서일세. 옵트아웃은 그대로고.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도 포함이야.”

메이저리그에서 10년, 한 팀에서 5년 이상 뛰면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을 주는 10―5 권리가 있기에.

옵트아웃을 행사해 본인 발로 나갈 게 아니라면, 사실상 다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대우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12년 4억 2650만 달러.”

데릭은 두 장의 계약서 모두 손도 대지 않은 채 툭 던지듯 내뱉었다.

다저스라는 공룡 구단을 이끌면서, 좋은 선수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게 됐고.

구현기 역시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선수라는 건 분명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금액이라니.

“이 기간과 금액, 어디서 들어본 적 있지 않으십니까?”

“마이크…… 트라웃.”

다저스와는 프리웨이 시리즈로 엮이는, LA 에인절스의 원클럽맨이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그리고 그만한 규모의 계약을 맺었음에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만은 가지지 못한 비운의 천재.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서 12년 4억 3천만 달러. 이것이 저희가 양보할 수 없는 최소 조건입니다.”

“아니, 참, 무슨…….”

“부당한 금액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3승을 선점하는 데 Koo의 활약이 적지 않았고,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 가능하며, 무엇보다 투수로서의 활용 가치도 있지 않습니까?”

데릭은 올리버 단장이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심지어 전부 사실에 근거한 말이었기에 대답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에이전트가 제시하는 선수의 몸값에 어떻게든 딴지를 거는 것이 단장의 임무였다.

“지금 내야수로 전향한 지 고작 첫 시즌을 보낸 선수를 트라웃과 비교하는 건가?”

“비교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Koo는 이미 빅리그 선발 투수로 3년을 보내는 동안 해마다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적어도 올해의 모습이 Koo의 커리어 하이는 아닐 거라 보는데요.”

“하지만 Park조차도 10년 3억 달러짜리 계약서를 받아내기 위해 3년이란 시간을 시험대 위에서 보냈어!”

“Park은 그 누구보다도 다저스를 사랑한 선수입니다. 저는 그런 선수의 뜻을 존중했죠. Koo도 그럴지는 제가 나중에 따로 물어보도록 하죠.”

만약 구현기가 내년에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며 무너지지 않고, 올해랑 비슷한 수준의 성적만 유지하더라도.

몇몇 구단주들은 FA를 선언하고 시장에 나온 구현기를 향해 기꺼이 12년 4억 3천만 달러짜리 계약서를 들이밀 것이다.

그리고 구현기를 놓치는 순간, 제리마저도 장기계약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올리버 단장은 자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냥 이걸로 이 자식 머리통을 후려버리고 사표를 낼까……?’

* * *

양대리그에서 한 해 동안 가장 뛰어난 공격력을 선보인 타자를 선정하는 행크 애런 상.

각 구단에서 한 명씩 후보를 뽑아 팬들의 투표로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나는 시즌 38홈런과 세 자릿수 타점을 기록한 4번 타자 R.H.에게 밀려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타격 지표만 보면 타율 말고는 눈에 띄게 앞서는 게 없는데 기대했다는 것부터가 양심이 좀…….]

‘싸물어.’

아무튼.

이 상의 특이한 점은, 월드시리즈 4차전이 시작되기 전 해당 구장에서 시상식을 연다는 것.

“안녕, 4차전 준비는 잘 돼가?”

그리고 올해 내셔널리그 행크 애런 상의 주인공은.

3할 타율과 40홈런을 동시에 기록한 브레이브스의 캡틴, 앤드류 매닝이었다.

사실 바로 직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다저스에 밀려 탈락했으니,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대인배답게 내셔널리그의 승리를 바란다며 응원하러 덕아웃 앞까지 찾아와줬다.

“제리! 축하해. 조카 태어났다며?”

다저스 공식 SNS가 제리에게 삼촌이 된 것을 축하한다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소소하게 화제가 된 덕분인지, 앤드류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

그러자 제리가 또 그놈의 재수 없는 미소와 함께 되묻는다.

“그것 말고도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는데, 맞춰 보시겠어요?”

한참 선배한테 고맙다는 말보다 저런 말이 먼저 나오는 거 보면, 내가 요즘 제리 기강을 너무 안 잡았나 싶다.

“저놈 이제 남한테까지 저러고 있네.”

“데이트 나가서 안 차일 거란 자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그 여자가 약속 파토내고 충격받아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뒤 혼자 어디 산에 틀어박혀 늙어간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이런. 미안해요, 앤드류. 당신도 알죠? 잘난 사람에겐 언제나 시기와 질투가 따라온다는 걸.”

그런 생각을 한 게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곧바로 여기저기서 모진 비난이 쏟아졌지만.

인생 처음으로 잡힌 여자와의 데이트 약속이 어지간히도 제리의 간땡이를 불려 놨는지, 도통 타격감이 없다.

그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앤드류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네잎클로버가 왜 행운의 상징이라고 불리는지 알아?”

지금 상황이랑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그 말에, 선수들이 다들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대답은 했다.

“희귀하고 자주 보기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치. 맞아. 그럼 너희는 길 가다 네잎클로버를 발견할 확률이랑 제리가 여자랑 데이트 약속을 잡을 확률, 둘 중 뭐가 더 높다고 생각해?”

그러자 이번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온다.

“당연히 제리죠.”

“네잎클로버 그거 요새 육종 개량으로 대량 생산도 한다더만.”

“비교 대상이 너무 널널한 거 아닌가요? 맥코비 만에 분홍 돌고래가 나타날 확률 정도는 돼야 비교해볼 만한데.”

쏟아지는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앤드류는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보기 드문 일은 행운을 가져온다잖아. 동료에게 귀중한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너희 팀에도 행운이 깃들지 않을까?”

“푸하하하하학!!!”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생각지도 못한 디스.

그 자리에 모인 동료들이 죄다 배를 잡고 쓰러지는 와중에, 다시 쭈구리 모드로 돌아간 제리가 허둥지둥 도망쳤다.

“프흐흐흐흑, 아 진짜. 앤드류가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진짜. 혹시 저놈한테 쌓인 거 있었어?”

“응? 뭐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의 앤드류.

그것마저도 능청스러운 연기로 받아들였는지 연이어 폭소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저 양반, 어쩌면 진짜 선의로 이랬을지도 몰라.’

제리가 지금까지 연애를 못 한 게 아니라, 눈이 엄청 높아서 일부러 안 한 거라고 착각한 거지.

데이트 약속이 ‘잡히는’ 게 아니라, 약속을 ‘잡는’ 확률이라고 했던 것도 그렇고.

그러니 별생각 없이 팀에 행운이 찾아올 거라느니 하면서 이야기 소재로 삼았던 게 아닐까.

‘근데 뭐…… 불쌍하단 생각은 안 들지?’

[딱히.]

다 자기 업보라고 생각하고, 팀 분위기 끌어올리는 토템 역할이나 하시지.

이번 시리즈에서 네놈이 등판할 일은 더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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